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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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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한반도는 66년전 일본제국주의의 무조건 항복으로 인해 해방이라는 기쁨을 맞보게 되었다. 비록 당사자인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맞이하게 된 해방이지만 이미 몇년전부터 상해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내에도 자생적인 독립의 비밀결사가 형성되어 있었고 독립을 향한 염원은 그 어느때 보다 무르익은 상태였다. 이렇게 맞이 하게된 해방은 또 다른 외세(미국과 소련)의 간섭으로 분할통치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분단화가 고착되게 되었고 양극단의 이데올로기 대리장으로 한반도는 지금의 상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냉전시대가 지난지도 오랜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오리무중인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남북양쪽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역사정립을 하고 있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통치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서서히 피해당사자나 가해당사자쪽에서나 잊혀져 가는 형국이 되어 버렸고 새삼 아픈 과거지사를 굳이 들먹거릴 필요성이 있을까라는 생각도 가질만큼 양국간의 교류가 많이 진전되었다.  

그리고 G20의장국으로서 세계역사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지난날의 아픔을 기억의 저편으로 던져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일종의 기억의 망각은 시초부터 정리하지 못한 친일잔재에 대한 자기 합리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사로 인해 미래가 발목을 잡혀서는 안된다는 정치적인 논리등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재일학자인 서경석의 <언어의 감옥에서>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고 진행중인 일본사회의 식민지적 근성을 보여주는 단례가 되고 있다. 나치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선 유독 많은 관심과 출간물이 출간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자행했던 제노사이드에 대한 일절의 사죄가 없고 그나마 진보적 인사라는 하시즈메의 사유 역시 큰틀에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지금 일본의 현주소인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본 사회의 사유들이 언어의 재포장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저자는 여기서 우리의 다른 문제하나를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하게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가 가해자로 참전한 베트남전쟁에 대한 성찰이다.  지난 군부정권에서 한국전쟁참전에 대한 보답(물론 외화벌이라는 부차적 목적이 더 강했지만)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베트남 참전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민간인 집단학살에서부터 고엽제와 라이따이한이라는 환영받지 못하는 2세들의 배출 그리고 아직도 우리는 베트남참전에 대한 책임에서 한발 비켜가기만을 바라고 있다. 저자의 표현처럼 우리가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일본의 안아무인을 탓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베트남에 대한 집단적인 책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현재 대한국인들(전쟁에 참전여부와 시대적, 공간적 이격을 떠나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이 짊어져야만 하는 집단적 책임의식인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고뇌 역시 중차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논지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외부성으로 인한 왜곡보다는 내부적인 왜곡에 대한 새로운 고찰과 더불어 자기반성이라는 면일 것이다. 해방이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추진되었던 반민특위의 무산으로 인해 우리는 친일청산에 실패했고 친일분자들은 사회각층에 슬며시 잠입하였고 이제는 일종의 거대한 권력을 형성해 버렸다. 이러한 내부성의 실패로 인해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망측한 사유까지 버젓이 생산됨으로서 가해자보다 피해자쪽에서 더 빠르게 적응해나가고 있는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마저 들정도 우리사회는 어쩌다 한번씩 터지는 일본 극우단체나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독도영유권주장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이것 역시 시간만 지나면 수면밑으로 자연스럽게 잦아드는게 현실이 되어버렸다. 특히 일본전문가라는  박유하의 <화해를 위해서>에 대한 비판은 그야말로 우리자신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는것 같아 낯이 뜨거울 정도이다. 저자의 비판적인 의식은 그동안 너무나 안일하게 이 문제에 접근했던 우리에게 자기 성찰을 요구하기도 한다.      

언어의 감옥이라는 제하처럼 저자는 언어속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욕망과 폭행을 통해서 지금까지 진행중인 일본지식사회의 단편을 고발하고 있다. 도쿄도지사을 비롯한 프리즘의 최우측에서부터 세칭 진보적이라는 인사들까지 일본내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집단적 책임의 회피성향을 여실히 보여 주면서 또다른 식민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러한 언어적 식민주의는 비단 일본내가 아니라 우리에게 오히려 더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박유하의 사유와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하는 이들의 사유등은 그야말로 우리자신들의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지난날 일본과 같은 가해자의 입장으로서 도덕적 책임과 집단적 책임을 느껴야할 베트남이라는 존재가 있다.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진심어린 사죄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변하지 않는다면 이 역시 일본이라는 존재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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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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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자타가 공인하는 이미 알려져 있는 지식인들이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지식인들로 인해 인류는 장족의 발전(굳이 발전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진행중이다. 루 데일러와 가 알페로비츠의 공저인 <독식비판>에서는 바로 이러한 지식의 총합이 현대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 풍요로움을 가져왔다고 까지 진단하고 있다. 어쩌면 지식이란 인간과 동물을 경계에 선을 긋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가져보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의문을 던져 보게 된다. 그럼 지식인과 지성인은 무슨 상관관계가 존재하는가? 흔희들 우리는 지성인이라는 표현도 자주 입에 올리지만 정작 어떤이를 지성인이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논란거리가 있으며 그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정확한 판단적 근거를 공론화하기란 그리 녹녹치 않다. 그렇더라도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점은 분명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들 삶의 이정표 역활을 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지성인들이다. 극히 개인적인 견해로 그 차이점은 단순하다고 보여지며 그것은 다름아닌 '실천'이라고 생각되어 진다. 지성인이라는 다른 표현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임을 우리는 버트런트 러셀 삶을 통해서 통찰할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만큼 다양한 지식의 총합을 이룩한 이도 드물정도로 방대하고 심도깊은 지식의 소유자임은 이미 검증된 상태이다. 상원의원으로 철학자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문학가 그는 한분야에서도 성취하기 힘든 지식의 향연을 다양한 분야에서 이 것이 바로 지식의 결정판이라고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지식인이라는 호칭보다는 지성인이라고 감히 단언하는 근거는 자신의 지적 철학을 상아탑속의 학문적 도량형의 구축에서 벗어나 과감히 실천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그를 다른 이들보다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통해서 버트런드 러셀의 평소의 사상의 총합을 보게된다. 정치, 심리, 종교, 성과 결혼, 윤리등 개인적인 분야에서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가 주창하는 사상의 진실을 접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거대한 지성의 목소리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의 장으로 다가온다. 러셀은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서조차 촌철살인의 풍자와 해학으로 전 인류에게 평화의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고 이러한 반전사상은 그의 삶을 종지부 찍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러셀은 반전사상 뿐 아니라 개인들의 윤리성 그리고 성과 결혼등의 분야에서도 정곡을 찌르는 사유의 향연을 보여준다.  

비록 극단의 평가도 받고 있지만 러셀의 삶은 진정한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단례일 것이다. 실천이 존재하지 않는 지식은 그저 단편적인 지식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앎은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지성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애의 표상이기도 하다.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이 한마디에 실천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러셀의 거의 모든것을 함축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연설문, 저작등에서 명문을 모아서 여섯가지 테마로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각 챕터 머리말에서 편집자의 해제를 결틀여 러셀의 사유를 좀더 명쾌하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배려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 러셀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누구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사상가 버트런드 러셀, 하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정도 이번 기획은 러셀의 사유를 총합하여 한곳에서 편안하게 음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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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악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사유의 악보 -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1
최정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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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한 음악적인 기초 지식이나 전문 소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에게 악보를 읽는 다는 것은 어찌보면 고역으로 다가 올 수 있다. 장조니 단조니 내림이니 올림이니 기타 등등 악보를 쳐다 보면서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여기에다 이러한 악보를 보면서 악기를 연주할 경우 느리게 빠르게 및 특정부분에 대한 강약의 조절등 보통 사람들이 흔히 귀로만 듣는 감미로운 음악속에는 이처럼 수많은 난재들이 산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적용된 악보에 따라 흘러 나오는 음률만큼은 듣는 이로 하여금 다양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바로 그것이 음악이라는 예술을 탄생시키는 악보의 비밀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유도 악보의 복잡성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명제나 사물을 인식하는 과정에서의 복잡다난한 사유의 흐름은 마치 악보속에 기보하듯이 우리의 뇌리를 자극한다. 그리고 이러한 고뇌의 산물을 음률이라는 감미로움을 표출되듯이 인간이라는 아이덴티티의 다양성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유의 집합일 것이다. 

<사유의 악보>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난해한 책이다. (나같이 기초적인 철학이나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서평가에게는 더욱더 가독성에 장애을 주고 좌절감을 맛보게 한다.) 좋은말로 표현하자면 인문학의 해체과정속에서 한번쯤 집고 넘어갈 수 있는 모든 것의 사유성을 도서관의 배열방식이라는 특유의 상징성을 배제하여 마치 무의미한 언어들의 나열이라는 느낌마저 줄 정도로 무원칙성을 가장한 사유의 노마디즘의 향연을 보여주듯이 자유분방한 필체와 그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총 출동을 보는듯 하다. 이와 상반된 느낌으론 정말 이 책은 난해하고 어렵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문학에서 철학, 정치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일정한 기초적인(이런 표현조차도 의문시 되지만)지식의 밑 바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검정색은 활자이고 바탕은 종이라는 식의 자괴감과 고통을 독자들로 하여금 강요하게 한다. 그야말로 아포리아의 끝없는 향연을 맞보게 된다. 물론 저자는 이러한 문제의 끝없는 제시와 반향을 통해서 마치 릴레이 경주를 하듯이 사유의 끈을 여러가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을 통해서 종착점에 이르는 담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읽어나가는 독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개미무덤이라는 또 하나의 아포리아로 인해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전체적인 구성이 마치 대형 교향곡의 진행을 따르듯이 주제별로 별도의 악장이라는 컨셉을 두어 매 악장을 별도의 확정된 담론으로 제시하여 종국에 모든 악장속에 담겨져 있는 담론들에 대한 방대한 사유의 정리를 유추하고 있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상 책을 읽다보면 그 경계선이 모호해진다. 그나마 중간 중간의 변주라는 형식의 챕터의 담론들이 위안을 던져주고 있다. 사실 이 리뷰를 적으면서도 머리속이 정리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오랫만에 고통을 감내하고 읽었던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 다른 이면엔 개인적으로 무지의 거대한 강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나온 느낌이다. 일반 독자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을 상대로 하기엔 왠지 너무나 어렵고 정리하기 힘든 악보를 보는듯한 잔상이 강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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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11-05-0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말씀해주신 표현, 곧 "인문학의 해체 과정 속에서 한 번쯤 짚고 넘어갈 수 있는 모든 것의 사유성을 (...) 보여주듯이 자유분방한 필체와 그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의 총출동을 보는 듯"이라는 표현에서 저는 제 책에 대한 소중한 요약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난해함'이 단순한 장벽이 되지 않고 다른 종류의 소통이 지닌 입구와 출구가 되기 위해, 저 역시 계속 함께 이야기 나누고 또한 홀로 글을 쓰겠습니다. 소중한 관심과 예리한 비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스또예프스키 평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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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는 똘스또이와 더불어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세계문학계의 거장으로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단 독자들뿐 아니라 일견 문학에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이들에게 그의 이름은 깊이 있게 각인되어 있다. 사실 소설작품에 문외한이지만 학창시절 의무감으로 부여받은 과제완성을 위해 '죄와 벌'의 압축본을 읽고 독후감을 작성했던 기억뿐 솔직히 그의 작품을 단 한편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래 저래 들어왔던 풍월로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에 대한 영향력은 그야말로 엄청나다는것쯤은 인지하고 있다. 왠만큼 문학에 대한 소견이 있는 이들에게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알지 못하고는 명함한장 내밀지 못할 정도로 이미 그는 문학이라는 명사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대문호의 삶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드물고 또한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들도 전공인들을 제외하고는 드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의 문학작품을 단 한번도 제대로 접해보지 못한 시점에서 그의 평전을 먼저 접하게 된 점을 행운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이번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남다른 의미를 제공해 준다. 먼저 저자가 E.H 카라는 점에서 눈에 들어오게 된다. 카가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기한 유명한 역사학자로 역사학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래서 이번 평전은 왠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즉 실증적인 측면에서 기술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먼저 증폭된다. 또한 소설작품은 작가의 사유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작가가 살았던 시대상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기에 도스또예프스끼의 평전은 작품의 탄생 배경을 왠만큼 인지하게 해줄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인해 작품을 읽지 않더라도 먼저 그의 평전을 통해서 그의 삶과 사유를 통찰할 수 있다면 향후 그의 작품을 소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색다른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다가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과 의외성이라는 느낌과 한 인간에 대한 애틋함이라는 감정의 교차이다.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대중에게 그의 이름만으로도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의 삶은 충격적이고 의외성을 가지게되는 지도 모른다. 물론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인해 다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의 삶을 관통했고 그를 둘러싼 일련의 삶을 받아들이기엔 충격적이다. 복잡한 여자관계, 개념없는 경제관, 도박벽, 타인과 화합되지 못하는 성격등은 한 개인을 놓고 평가한다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떠올리게 할 만큼 씁쓸함을 지울수 없게 한다. 한편으로 간질과 폐병을 앓아가면서 형의 남겨진 가족들과 장성한 전처의 아들까지 부양해가는 모습에서 인간으로서 미련하리만큼의 애틋함을 자아내게 한다. 이러면에서 보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은 이성보다는 감성이 그의 삶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이러한 복잡다나한 삶과 인물들을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했기에 많은 시간이 흐른 후대에도 사랑받는 작품으로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였듯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들에서 순수한 문학적인 측면보다 정치사회적 문제를 거론하기엔 다소 억측적인 측면이 있다. 저자의 통찰대로 그는 앙가주망과는 무관한 사유의 보유자였고 또한 그럴 심성도 없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그동안 무지개 빛의 환상을 만들어냈고 받아 들이기 강요 되었던 그의 왜곡된 진실을 걷어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저자가 강조했듯이 문학가로서의 심성과 현실참여자로서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후대에 후학들이 만들어 놓은 증폭된 허상은 어쩌면 도스또예프스끼의 진실한 삶과 그의 작품에 대한 비수가 될 수 있기도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으로서의 막장인생을 살았던 그의 삶을 전부다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오히려 그의 삶은 애틋하고 훈훈하게 다가온다. 팁으로 그의 대표작인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읽어보질 못한 독자와 그리고 이미 독파한 독자들에게 저자는 별도의 장을 빌려 작품의 탄생배경과 작중인물들의 심리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비교한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문학의 거장이자 대문호이지만 고뇌와 고락의 삶을 살아간 우리와 별 다르지 않는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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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3-27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그저 도박에 미친 인간으로 바라봤는데 평전을 읽고나니 도박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상세하게 알고나니 그에 대해서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기도 했구요,, ^^

서향 2011-03-28 15:0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이런 삶속에서 인간적인 고뇌가 거작으로 탄생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100년 전 대한제국 100년 후 대한민국
문화체육관광부 공감코리아 기획팀 지음 / 마리북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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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정상회의 개최는 동북아시아 반도 한쪽 구석에 자립잡고 있는 대한민국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20세기초 제국주의의 비뚤어진 희생양으로 주권을 상실하고 거기에다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을 겪으면서 냉전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던 한반도에서 CECD회원국, G20개최국이라는 후광은 어쩌면 더 빛을 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흔히들 선진국이라고 일컫는 선진산업개발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왠지 어딘가 석연치 않는 약간은 무엇인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100년 전 대한제국 100년 후 대한민국>는 G20 정상회의를 성공리에 개최하기 위해 사회각계각층에 몸담고 있는 세칭 22인의 전문가들의 생각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는 해법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포럼형식의 대담을 한데 모은 것이다. 정치,사회,경제,문화등 거의 모든분야를 다루면서 향후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특히 각계각층의 리더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고 물론 이들의 생각을 100%로 공감할 수 없을 지라도 필자들이 희망하는 사고의 기저는 분명 우리에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변혁의 대상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인 외형만으로는 이미 선진산업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경제에 한틀을 잡고 있다. 또한 각종 굵직한 세계 스포츠 대회에서 이제는 태극기가 휘날리는게 국민들의 눈에 그다지 경외적이거나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만큼 일상보편화 되어 있는 것도 현실이 되어버렸다. 리얼타임으로 전개되고 있는 세계화에 발마추어 각종 FTA에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우리는 이미 선진국 반열에 진입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규모의 외형이 우리보다 큰 중국같은 나라를 두고 우리는 선진국이라 지칭하지 않듯이 세계는 우리 대한민국을 그저 그런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는 현실에 그저 작아지기만 할 뿐이다. 

그 이유는 굳이 이 책의 필자들이 주장하는 이유를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단지 그동안 경제발전지상주의에 모든 것을 올인해왔던 국가 전체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제는 정말 필요한 시점이고 더 지체할 경우 100여년전 대한제국으로의 회귀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회 구성원 전체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눈을 씻어보더라도 국민의 대표들이 정책을 논하는 성스러운 국회에서 막장승부를 펼치고, 사교육비가 20조원을 넘기며 전 국토가 부동산 투기의 장이 되는 선진국은 없다. 그리고 이런 나라는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우리가 선진국 못지 않게 장점을 가지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선진산업개발국은 하드웨어와 소포트웨어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문화를 가진 국가들이고 세계 모든 국가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그런 나라임을 생각할때 아직도 선진국은 우리에겐 그림속의 떡과도 같은 신기루일 뿐이다. 그나마 이러한 논의들이 구체화되고 보편화될 수 있는 성숙된 장이 마련될 수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희망을 갖여야 하고 단순하게 희망으로 남을 것이 아니라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창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선진국이다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결과론적인 사고틀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자체가 이미 지난 시절의 대한민국이 아님을 인지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지금 현실의 대한민국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필자들의 의견에 동감한다. 그리고 필자들을 선두로 이러한 논의가 성숙되고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기회가 분명 G20회의를 통해서 작은 단초가 되어 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가길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하다. 단지 아쉬운 점은 책의 머리말에 유인촌문화부장관, 인권의 담론을 지적한 장에 나경원의원이 필자도 선정되었다는 점이 다소 눈에 거슬린다. 물론 정치적인 프리즘의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왠지 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점을 제외하곤 전반적인 논거들을 심사숙고해 볼 만한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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