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평전 - 지울 수 없는 얼굴, 꿈을 남기고 간 대통령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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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02년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 상당히 의미있는 한 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우여곡절끝에 숙적 일본과 공동개최라는 형태로 열렸던 월드컵은 세간의 우려를 말끔히 잠재우면서 대한민국의 힘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사상 최초 4강진입이라는 엄청난 결과물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당시 국민들이 보여주었던 응원의 문화(붉은 악마라는 모토보다 붉은색에 대한 열정이 돋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전쟁세대가 사회상위층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상태에서 붉은색에 대한 트라우마는 쉬이 없어지지 않을텐데 월드컵을 계기로 상당부분 희석되었다는 차원에서 엄청난 일을 해낸거죠)는 하나의 표본으로 자리매김하는 역사적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정은 고스란히 대통령 선거에 반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세대들의 열정(물론 세대간의 갈등을 조장코져 하는 뜻은 아닙니다)이 한곳으로 집중되어 표출되었고 이러한 열정은 스포츠이든 정치이든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표한 사건이기도 했죠. 그 중심에는 노무현이라는 아이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故노무현 대통령의 3주기를 맞이하여 출간된 김삼웅 선생의 <노무현 평전> 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그가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들을 되새김하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써의 역정,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선택해야만 했던 갈등들이 그의 삶을 통해서 반영되어지고 연결되어지는 인생의 삶을 통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록 개인의 평전이기도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무방치 않을 만큼의 무게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인 선생의 전작을 접해본 독자들이라면 평전을 이렇게 맛깔나게 저술할 수 있을까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참을 수 없는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아 한 인물과 시대를 오버랩하면서 평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노무현 평전> 역시 많은 부분에서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이며 평전의 격을 높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대한민국 탄생이후 가장 정상적인 절차에 의해 가장 정상적인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유일무이한 경우라고 생각되어질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있어 정치라는 트라우마가 던져주었던 악몽같은 현실들을 희망이라는 메세지로 승화시킨 인물이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물론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원인는 그동안 억눌려 왔거든 표출 되어지기를 거부 당했던 대중시민들의 역량이 한데 모여서 만들어낸 변혁임에는 틀림없지만 그에 합당한 인물성이 있었기에 대중시민들은 그를 선택했던 것입니다. 비단 대중시민의 손에 선출되었지만 비정상적인 국가권력(보수정치권을 통칭하는 의미에서)에 의해 버림 받았던 그의 삶이 미완으로 남긴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미완이 대중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그만의 선택이지 않았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듭니다. 

 

지금 이시각에도 여야 정치권은 새로이 판짜여진 특설링에서 또 다시 진흙탕싸움에 여념 없습니다. 여는 여대로 야는 야대로 속된 표현으로 개판오분전이라는 도도 넘어셨고 대중시민들의 채념은 갈수록 더 깊어가고 있는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월드컵 4강이라는 신화를 통해 항상 꿈을 꿀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듯이 故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대중시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정치판을 다시 한번 꿈꿀 수 있는 것도 故노무현 대통령이라는 아이콘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을가 싶네요.

 

전반적으로 故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의 면모를 보여줍니다(물론 다양한 형식으로 올바르게 전달되지 않은 부분들이 강하죠). 그래서 일반대중에게는 당혹스러울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쪽의 평가가 제대로 그의 면모를 제단하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중에서 가장 양극의 평가를 받는 인물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하죠. 하지만 역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다는 점에 우리는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숫자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득표수는 결국 그를 그리고 그의 정치관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숫자와 동일하기에 주목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재임시절 몇가지의 오류(대게의 평전이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지만 저자는 과실에 대한 냉혹한 평가와 진단을 내리고 있기에 더욱더 이번 평전의 가치가 돋보이게 하네요)가 있었다는 점 역시 평가부분에서 제외되어서는 안되겠지만 병자호란이후 득세한 노론세력의 후예들 시각에서 엄청나게 위험한 인물이 국가통수권자에 올랐다는 자체가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고 이러저러한 사유로 지금의 인물평을 확대재생산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 뿐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견해로 흘러버렸네요. 전체적으로 이번 평전은 노무현이라는 개인과 그가 살아왔던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상호보완하여 재정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정치인으로서 혹은 공인으로서의 노무현과 자연인으로서의 노무현 양측면을 동시에 살펴보면서 그동안 곡해되었고 억지창출되었던 메타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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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家의 사도세자 이맹희
이용우 지음 / 평민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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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할때 까지 삼성,현대,럭키,금성등의 국내 제벌에 대한 이미지는 만화가 박봉성 선생의 기업만화 영향인지 몰라도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고 물론 당시 부모세대나 알려진 정보에 의거한 속 좁은 판단으론 그랬던 것 같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 이들 제벌에 대한 진실을 하나 둘 씩 알아가면서 왠지 씁쓸한 뒷맛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들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매판자본의 대표적인 선구자였던 삼성에 대한 판단은 지금까지도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삼성가의 사도세자 이맹희>라는 책은 서평을 올리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운 책으로 다가오네요. 물론 책을 읽어가는 내내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는 근래들어 가장 불편한 책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서평이라는 자체가 개인의 느낌이나 편견 혹은 기본적인 성향에 따라 상당한 편차를 가지게 마련이라는 점을 우선 밝혀 둡니다. 괜히 곡해의 소지가 있을수도 있으니까요 어디까지나 개인적 판단과 책을 읽고 느낀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밝힙니다. 뭐 이렇게 말한다고 어마어마한 느낌을 피력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우선 저자는 삼성가의 적장자인 이맹희씨와 현 오너인 이건희씨 그리고 이들을 둘러싼 삼성가의 권력승계과정의 내막을 밝혀 피해자라면 피해자인 이맹희씨측의 진실과 세간의 오해를 풀어 가는 과정를 집중적으로 부각하여 집필하고 있습니다. 저자와 이맹희씨와의 개인적인 친분인지 아니면 그동안 이맹희씨가 받아왔던 세간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던지간에 그리고 이병철에서 이건희,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권력승계 과정을 마치 조선조 영조시대와 흡사하다고 생각했던지 사도세자 운운하면서 이맹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권력다툼에서 밀려난 이맹희는 사도세자로 한동안 그룹경영에 이바지했고 현재 삼성의 틀을 잡은 장자를 내친 냉험한 아버지 이병철은 영조등으로 묘사함으로서 이맹희씨에 대한 자연스러운 안타까움을 끌어내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도 뭐 다 좋고 그렇다고 생각합시다. 좀더 비약해서 사도세자를 안타까워하는 마음만큼이나 이맹희도 그렇다고 인정해 보더라도 삼성이 성장해오는 과정을 그리는 과정은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라는 생각을 지울수 없습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등 암울한 현대사에 터졌던 사건들을 마치 권력의 희생양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점은 어불성설로 밖에는 비쳐지지 않습니다. 마치 이는 정경유착의 피해자인양 비쳐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은 뒤부분에 이병철 즉 삼성가의 경영철학을 인의예지신중에서 信을 가장 중요시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정권에 협조했지만 혼자 독박을 쓸만큼이나 新 新 新 을 강조한 경영철학의 진수인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뭐 국보급문화재의 보유과정도 이와 흡사한 논리를 펼치고 있어 간송 같은 인물로 묘사하고 있고 이병철가를 시문과 성리학에 달통한 학자풍의 가문으로 묘사하는등 많은 점에서 한쪽면만을 바라보고 그렇게 끌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가관은 삼성가의 적서관계를 논하면서 한민족의 정신적인 틀인 단군을 서얼의 자손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재 환인의 서자 환웅에서 서자를 서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서자는 서얼이 아니라 장자가 아닌 아들이라는 점을 모르는것 같습니다. 민족의 첫 출발이 서얼의 태생이었다는 점 이거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뜩이나 노론계열의 식민사학자들과 한중록등에 의해서 사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와 인식이 팽배에 있는데 어디 사도세자에 비견할 생각을 가졌는지도 의문스럽구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몰라도 자칫 잘못하면 삼성의 이미지를 상당히 곡해할 수 있는 요인들이 너무나 많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인적으로 삼성에 대한 그 어떠한 악감정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굳이 이러한 책으로 인해 그동안 삼성이 쌓아왔던 인재육성 글로벌 경영등 긍정적인 이미지에 흠을 입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전반적으로 이번 책을 읽으면서 다시하번 느끼는 바이지만 재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아직도 미비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물론 장점과 국가경제에 이바지한 점을 전부다 무시할 수 는 없지만 이번 처럼 마치 시대와 권력에 희생양인 것 같은 표현은 정말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서평을 올리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책들로 인해 삼성을 포함한 대한민국 재벌들의 실상에 대해서 공론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에서 저자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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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 역사학자 이덕일, 공자와 논어를 논하다!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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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공자는 특히 동북아시아권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국가에서는 아주 유니크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2500여년전의 인물이 지금까지 현실생활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 경우는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특별한 존재 그 자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예수나 석가의 경우는 인격체라는 개념을 초월해 버려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의 반열에 올라 있지만 유독 공자는 인간의 지위를 영위하면서도 후대에 미치는 영향은 어마어마 할 정도로 파괴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자의 어록을 집대성한 논어는 성경이나 불경에 버금갈 정도의 필독서이자 인생의 지침서로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면 머리속에 지식꽤나 담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공자왈로 시작하는 짧은 문장은 인격의 척도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유교문화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공자와 논어는 삶의 방향타를 제시하면서 최소한 인간적인 도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로 인해 세계화 기준에서 한참을 벗어났다고 자책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공자와 공자왈(논어)는 바로 이러한 메이저리그 진입을 가로막는 암적인 존재 내지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그야말로 고전의 지위만을 계승해왔고 일반 대중들에게서 서서히 잊혀져 가는 아니 잊어야 하는 그건 존재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추구했던 절대가치인 메이저리그(자본주의 시스템)는 알고 보니 정말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사랑방 한켠에서 켜켜이 먼지만 쌓여갔던 공자와 공자왈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개발과 경영전략, 수양등에서 새롭게 공자와 논어를 재조명하면서 수 많은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왠만한 독자들 서가에 논어한권은 필독서로 자립잡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전에 일가견이 있거나 왠만한 인문서적을 독파한 독자라고 해도 논어는 그리 녹녹한 서책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를 독파한 독자도 드물뿐더러 비반 논어를 읽더라고 정말 고전적, 死적인 문구로만 뇌리에 남기 마련이고 이러한 일련의 행태들이 그 잘나신 일부 고전학자들의 서지학적이고 문헌학적인 접근 방식에 기인하지 않나라는 걱정거리 마져 던저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논어 강의는 예외적이라고 느껴 지지만 강단학계에서 고전을 해석하는 방향는 역시 그들만의 리그에 집중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논어는 일반 대중과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전문지식을 요하는 고전중에 고전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공자의 담론과 논어의 진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새로운 논어를 독자들에게 선보이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국문학자나 한문학자 내지는 인문학자가 바라보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정형화된 시각을 탈피하여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공자와 논어의 배경이 되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상과 이후 역사적으로 공자와 논어가 우리 역사 전반에 영향을 끼친 사례 내지는 접점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해준다는 면에서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무엇보다 정적이고 사적이었던 공자의 담론을 담아내고 있었던 논어를 도덕적, 가치관적인 판단이나 패러다임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시대적인 소명과 역사적 판단기준등에서 바라보게 되어 논어와 역사와의 관계에서 논어의 진정한 가치를 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저 서안속에 꽈리 틀고 자리잡은 도도한 가치관적인 논어보다 역사와 함께 숨쉬는 논어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 합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그동안 읽었던 공자와 논어관련 책들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인적인 성향이나 편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생각이 저만의 개인적인 느낌은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특히 역사학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공자의 담론과 그 담론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에게 미쳤던 영향들을 세세하게 부연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한결 흥미롭게 다가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독자들은 역사학자가 편낸 공자의 담론이니 전문학자들의 저술수준보다 못미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하게 될 것입니다만 단언컨대 그러한 기우는 가지실 필요는 없을거라 여겨집니다. 많이 않는 분량이지만 논어의 핵심적인 사안들은 거의 다 망라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고 무엇보다 이 한권으로 논어의 맥락을 잡는데 크게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당연히 저자의 책으로 논어를 마스터했다는 생각은 금물이지만 적어도 논어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시금석 역활은 한다고 보여집니다. 뭐 비역사학자인 서울대 모교수처럼 편협된 시각으로 역사를 판단하는 그런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네요. 고전과 역사를 동시에 아우를수 있는 좋은 기회로 독자분들께 다가가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공자와 공자왈은 송나라 이후 사상계에 급물살을 타면서 조선중기이후론 교조화로 치달으면서 진정한 공자와 논어에 대한 담론은 사라지고 정치권력과 신분제유지의 도구로 전락하였고, 조선멸망과 일제감정기를 거쳐 타율화된 근대화로 접어들면서 그야말로 애물단지로 치부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자와 논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시겠지만 이번 저자의 논어 해석에서 논어와 우리 역사를 흐르는 테제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실생활과 가치관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는 공자의 담론들은 어떻게 해석하면서 슬기롭게 상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작은 실마리를 던저주는 책이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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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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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후 지구촌은 민주주의 vs 공산주의(사회주의)라는 냉전의 시대로 돌입했다. 그리고 흔히들 우리는 민주주의 = 자본주의라는 등식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 기저에는 개인의 자유와 의사를 존중하는 시스템이라는 우월성과 더불어 경제적인 관점에서의 우월감이 내제되어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는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양분되어 세월이 흐르면서 수치로 들어나는 객관적인 만족감등에서 민주자본진영의 우세가 점쳐졌고 구소련체계의 붕괴로 말미암아 한판상을 거두면서 세계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대세를 거스릴 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졌다. 더구나 사회주의의 대부였던 소련의 해체과정은 그야말로 상실감과 더불어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고 여기에 거대 국가인 중국의 자본개방화 물결은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서브프라임사태로 야기된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유로존의 위기와 맞물리면서 신자유주의의 비판과 더불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일깨우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조이스 애플비의 <가차없는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자본주의 현 주소를 확인하게 하는 의미있는 저서로 다가온다.

 

흔히들 우리는 자본주의의 탄생을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인 산업혁명에서 그 시초를 찾는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과학기술 혁신과 더불어 아담 스미스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주창한 새로운 경제사조의 탄생이 자본주의의 모태임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가 산업혁명에 의해서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시스템이 아니라고 본다. 물론 이러한 산업혁명이 자본주의를 체계화 시켜나 갈 수 있는 정형화된 프레임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기본적인 모태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제대로 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대항해 시대와 신대륙의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대두 되면서 기초적인 자본주의의 개념들이 하나 둘 태어났고 이러한 기초적인 개념들의 시행착오(기존 문화관습적인 체제와 뒤섞이면서 충돌)를 거치면서 자본주의라는 대명제가 서서히 성립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주의라는 단어의 메타포에는 혁신, 혁명, 발전, 발명, 자유라는 하이스프리트라는 개념이 내제되어 있어 자본주의를 일대 변혁을 가져오고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산업군(단순 경제체제시스템)에 그 촛점을 마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본주의 진정한 시발점을 농업혁명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 돋보이는 담론이다. 농경은 산업혁명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생활형태였지만 16세기 이전까지 농업은 자급자족의 상태를 극히 벋어나지 못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인구의 대다수(거의 80%이상)가 농업활동에 매진했지만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기초적인 식량확보 마저도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고 여기에 통제불가능 요소인 기후의 변화는 그야말로 대재앙을 불러 왔다. 하지만 농업의 혁명(발달 혹은 개량)이 이루어 지면서 농경생활에 종사하는 인구가 감소하게 되고 이러한 잉여 노동이 다른 산업군으로 유입되면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탄생시키는 발판이 되었다고 보는 저자는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신대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노예문제를 비롯한 시장과 인간 본성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은 자본주의 역사가 세계사와 결코 무관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어느날 갑자기 급조되고 날조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제되어 있는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면을 저자는 인간 본성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자본주의를 경제체제적인 프리즘의 잣대만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일종의 문화체제라는 시각으로 바라봐야 제대로된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논거는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 명나라 시대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패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화의 원정대가 제 역활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과 이와 반대로 유럽의 몇몇 국가들의 착실한 해양 진출은 경제체제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문화체제의 차이에서 발생했다는 논거에 절로 수긍이 간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역사는 세계사의 흐름과 맞물리면서 곳곳에 내제되어 있는 요소들 총체의 합으로 탄생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역사는 정말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가차없이 질주해 왔다. 비록 몇번의 위기가 도래했지만 또 다른 변형을 거치면서 지금의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현재(예전에도 그랬지만) 이 시스템에 대한 많은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것 역시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혁명은 가차없고 매몰차기만 한 혁명만은 아니다는 점 더구나 아무 생각없는 무해한 혁명은 아니라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조들은 자본주의라는 수수께끼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대안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시스템 내부의 문제 제거 보다는 전사회적인 접근이 필요한 시점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된다. 결국 인간과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난긴 세월을 동거한 동반자로 어느 한쪽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라고 보면 양쪽이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자본주의의 개념과 탄생 그리고 자본주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동안 수 많은 자본주의 관련 서적들이 출간되었지만 산업혁명을 시발점으로 자본주의의 태동에 주안점을 두었고 일반 독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번 책은 자본주의 탄생의 근원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보여진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단순하게 경제체제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문화전반적인 체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저자의 사유가 많은 공감을 불러오리라 보여진다. 자본주의 역사를 16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사와 더불어 고찰하는 연대기적 방식이 자본이나 자본주의라는 딱딱한 개념을 한결 순화시켜 일반 독자들의 이해를 한층 높였다는 점에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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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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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나긴 지구 역사중 가장 획기적인 일대의 사건이라면 과연 무엇을 손에 꼽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서슴없이
인류의 탄생과 그 진화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인류는 지구상 존재했었고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종 중에서 가장 유니크한 존재(만야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을 숭배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류의 탄생과 진화는 예측불허하고 통제불가능한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임에 틀림없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발상자체가 극히 인류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특히 이러한 사유의 중심에는 문화 내지는 문명이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문명이라는 메타포는 인류와 그 외 존재를 구분는 잣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류라는 동종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척도로 자리매김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잣대의 표상인 속칭 문명인(문화인)과 미개인(야만인)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는 인류가 첫발을 내리고 어느정도 진일보한 시점부터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 유전자와 같은 역활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의 프리즘은 다름 아닌 인종적 차이라는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거들은 중세유럽이 신세계를 짓밣고 아프리카대륙을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 발호의 근거를 제공했다. 지금이야 이러한 인종적 유전적인 프리즘이 설 곳이 없지만 아직도 그 옛날의 향수를 그리워 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터무니 없는 망언까지는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 현재 객관적인 면(?)에서 삶의 질이나 경제적 풍요로움이 떨어지는 소위 제3세계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을까? 정말 그네들이 말하는 인종적인 차이로 인해 부의 획득과 그 영예를 누를수 없는 유전학적으로 인종적인 열등인자를 타고 난 것일까? 라는 생각과 더불어 저들은 왜 어떻게 지금의 부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어디에서 이러한 차이가 생기고 점차로 더 크게 벌어지게 된 것일까? 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물론 이러한 의문점에 대한 그동안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나름의 원인을 분석하고 결과를 제시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왠지 석연치 못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각종 개연성과 연관되어 회자될 뿐이었다.

 

세계적인 석학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는 바로 인류 문명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시각에서 풀어낸 명작이라고 단언해도 크게 무리 없을 만큼의 방대한 인류의 역사와 문명의 발달사를 다루고 있는 저서이다. 저자는 무엇보다 탁상공론이나 이론으로 무장된 여타의 학자들의 사유보다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추하고 고고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등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고증한 사례와 증거를 통해 어떤 민족들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아메리카대륙과 오세아니아대륙의 원주민들은 유라이시아인들에게 도태되고 말았는지 왜 각 대륙들마다 문명의 발달 속도에 차이가 발생했는지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했다는 측면에서 상당히 방대한 분량이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한시라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 그동안 왜곡된 인종족,유전학적,민족적 차이를 다룬 이론에 대해 지리학, 식물학, 동물학, 고고학, 역사학에 의거한 완벽한 방어 이론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다양성은 인종,민족의 지력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이 결과물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무기와 병원균 및 기술을 대표되는 항목들이 대륙별로 문명의 차이를 가져왔음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요소들이 문명의 발전 과정을 좌지우지하게 된 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우리는 심도깊게 생각해보질 못했다. 단지 이러한 도구과 기술을 먼저 습득하고 자기화했던 인종이나 민족들이 그러하지 못했던 민족을 지배해왔던 것이고 지금 그러한 격차를 만들었다는 정도로만 인지하고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왜 그러한 도구와 기술들이 유독 유라시아대륙을 중심으로 존재했는가에 대해선 속시원한 해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식량생산 즉 농경과 수렵채집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농경정주생활을 먼저 시작했다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결과가 초래된 것이 아니라 각 대륙 저마다 가지고 있었던 지리환경적인 차이가 결국 총,균,쇠라는 구체적인 요인으로 들어났을 뿐이다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지리환경적인 요인 인류 문명의 발달과 차이를 좌지우지 하는 그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기 농경생활을 가능케 했던 식물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라는 문제도 유라시아대륙이 나머지 대륙보다 생물의 다양성이 풍부했을 뿐이고 풍부한 다양성속에서 작물화 가축화될 확률이 높았고 이러한 발판으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발명이나 혁신의 압력이 높아졌고 자연스레 경쟁에 의한 기술이 발달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다양한 방면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총,균,쇠>는 전반적으로 인류의 문명사를 한눈에 리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왜 저마다(대륙별, 인종별, 민족별) 문명의 발달과 쇠퇴 그리고 차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었던 그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서 조목조목 정리하여 서술함으로써 인류문명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잇는 장을 마련해주는 보기 드믄 역작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무엇보다 농경사회가 시작되었던 시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각 대륙별로 문명의 흐름을 야기한 원인들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은 독자들로 하여금 절로 수긍케 하는 부분들의 연속이다. 특히 문자발명과 관련되어 <한글>에 대한 서술부분에서 저자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와 이해도가 새삼 높다는 부분은 이후의 증보판에 서술된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라는 논문에서 여실없이 보여주고 있어 국내 독자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도 한다. 물로 한국인이나 일본인 입장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은 영원히 맞주보며 걸어가는 철길의 평행선같은 역활을 부여하지만 저자의 시각과 학문적인 입장의 견지는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많은 서운함을 안겨주는 결과라는 입장에서 저자의 객관적인 시각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한사군이 한반도내에 성립되었다라는 부문은 아무래도 저자의 인식부족보다는 국내 강단 사학자들의 반성없는 결실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현대의 이러한 차이들은 각 대륙별로 지리환경적인 차이가 존재했고 각 대륙속에 속한 초기 인류부터 이러한 환경적 차이를 최대한 활용한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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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니여왕 2018-06-2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