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거울 앞에 선 불행한 군주
광해군과 그의 시대로부터
격동하는 세계 속 기미와 자강의 지혜를 배우다


우여곡절 끝에 1033년 12월, 중초본을 완성했다. 광해군을 쫓아낸 지10년 만이었다. 중초본을 완성했으니 다시 정서하여 활자를 뽑고 인쇄를 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또다시 재정 문제가 불거졌다. 고민 끝에인쇄는 포기하고 두 벌의 정서본을 만들었다. 이어 정서한 두 벌을 강화도의 정족산과 무주의 적상산에 설치한 사고에 보관했다. 정서하는 데대본으로 썼던 중초본은 세초하지 않고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집어넣었다. 『광해군일기」만 유일하게 정서본과 중초본이 동시에 남아 있게 된 배경이다.
- P23

내정에선 때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였던 광해군이었지만, 외교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보인 태도는 의외로 냉철했다. 그리고과감하고 준비성이 있었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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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에서는, 농업사회는 현대에 존속될 이유가하나도 없었다. 나치의 관점에서는, 슬라브족 농민은 (게르만족 농민은따로 생각할지라도) 잉여인간들이었다. 독일 농민은 기름진 땅을 개척할 수 있었다. 그들 스스로의 땀에, 다른 이들의 피가 흐르는 가운데,
이는 물론 이데올로기적 관점이었지만, 다른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렇듯 일정한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고, 대변하는 점이 있었다.
- P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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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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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면서 심도 깊은 성찰의 계기를 던져주는 보기 드문저서입니다. 특히 작금의 코로나 팬데믹과 정치판 나아가 우리 한반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단초가 될 듯합니다.

  

        2차세계대전은 전 인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으로 그 후유증은 아직까지도 치유되지 못한 채로 세월의 흐름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그나마 대략적인 숫자에 의존하여 전쟁의 참혹성을 일깨우는 정도로만, 극히 교훈적인 이미지상을 남겨 두고 있기에 전후 세대의 경우 더욱 더 접근하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특히 홀로코스트로 대변되는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유대인 학살정도만 강하게 이미지화 되어 있는 실정이기도 하죠. 그래서 많은 왜곡과 진실의 은폐를 강요 당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는 <블러드랜드 ; 피에 젖은 땅> 을 통해서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정보와 왜곡된 역사 인식의 틀에서 살아왔는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이 바탕에는 방대한 참고문헌과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여 역사학자로서의 사명감에 의거 그날의 진실을 향해서 독자들을 이끌어 가고 있죠. 흔히들 블러드랜드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고 머릿속에 잘 인지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비유럽권 독자들의 경우라면 더욱더 낮선 용어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블러드랜드 는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러시아 연방의 서쪽 변방, 폴란드의 대부분, 발트 삼국, 벨라루스 그리고 우크라이나지역에 해당 된다고 보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으로 1933년부터 1945년사이에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점령했던 지역으로 여기에서 최소한 1400만명이라는 엄청난 대량학살(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포함한)이 발생했던 지역입니다.

 

       저자는 블러드랜드에서 유독 많은 민간인들의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런 학살이 방조되고 부추겨졌는지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사례를 찾아서 하나 하나 파헤쳐 가고 있습니다. 흔히들 2차세계대전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 소련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설상 알려지더라도 상당히 왜곡되고 은폐된 몇 가지의 사례밖에 없었지만, 이번 저서를 통해서 많은 진실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라는 악의가 서로 중첩된 블러드랜드는 인류가 그 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악의 종합세트를 방불케 하는 지옥 같은 장소였던 것입니다. 시발점은 1933년 스탈린의 소련에서 시작하여 나치의 독일에 의해서 그 정점을 가져오는 비극으로 결말지어지죠.

 

        그럼 왜 이 지역에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는가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문이 떠오릅니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처럼 전체주의의 발호되는 시점에서 극우와 극좌가 공교롭게도 서로 중첩된 지역이라 그 폐해가 클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 정설 같은 힘을 지니고 있는 해설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 악의 평범함이라는 개념과 세월의 힘이 축적되어 마치 그러해야만 한다는 아상블라주의 개념등이 덮혀 져서 우리에게 정치이데올로기적인 개념으로 모든 것을 치환하게 만들어 버렸던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또한 일당독재와 집단주의라는 시스템이 집단이라는 차원에서 자행한 폭력은 이런 일, 별거 아니다, 하고 생각하려 했다. 이런 정도는 언제나 다들 하는 거야 하고. 믿고 싶기에 믿었을 뿐이다.’ 이라는 식의 시스템을 만들어 냈고 그 시스템이 재앙으로 변질되면서 그들 개개인은 시스템으로 융화되어 벌어진 비극이다 라는 것이 그 동안의 학계의 정설이자 우리들이 받아 들이는 극히 타당한 말처럼 보여지는게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나이더는 이러한 기존의 논거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데올로기기가 그렇듯 일정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기저에서 작동했다는 것이죠. 히틀러나 스탈린 입장에서 인접지역을 식민화는 정책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전제들이 서로 상호보완 작용을 제대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기에, 이를 근거로 자행된 학살정책이 가능했다는 것이죠. 상당히 수긍 가는 논거로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를 통해서 그 면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희생자 중심에 포커스가 맞춰졌다면(뭐 다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죠) 저자는 새로운 역발상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즉 가해자들의 심리상태를 엿보게 하죠. 히틀러의 나치와 스탈린의 소련을 비인간이라고 치부하거나 역사적 이해를 넘어선다고 보는 그 동안의 시각자체가 어쩌면 그들이 놓은 덫에 걸리는 것이라는 논거인데요.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 헌신과 믿음이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는 점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등 비록 잘못되었지만 나름 도덕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등을 논거의 수면위로 올려 놓습니다. 약간은 상당히 곤혹스러운 논거일 수 있는데요. 이러한 논거가 오히려 희생자들의 면면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역설에서 시작했다고 보여 집니다. 즉 그 동안 희생자들을 우리는 숫자로만 인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입니다. 언제 어디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되었는가에 함몰 되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희생자들 개인은 수면 깊이 가라앉고, 그 숫자들만 수면위에서 둥둥 떠내려가는 오류를 범하면서 덩달아 가해자들까지 강 건너 뭍으로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21세기의 러시아 지도자들, 2차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소련인 숫자를 마치 나치에 의해 희생된 숫자로 둔갑시키고 있고, 죽음에 대한 책임의 분산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등도 이에 동참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심지어 전후 모범적인 길을 걷고 있는 독일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 만큼 블러드랜드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죠. 희생자에 대해서 제대로 된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하고요.

 

       스나이더는 죽은 사람들은 기억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한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기억할 힘이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판단한다. 즉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들의 죽음의 이유를 정하는 것이다.” 라는 표현으로 이제는 그들 희생자들의 개별적인 개인의 면면을 다시 새겨 봐야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의 뇌리속에 박혀 있는 집단숫자라는 개념을 걷어내고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경우 지난 세기의 블러드랜드는 항상 발병할 수 있는 전염병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일일까라는 의구심, 악의 평범성과 집단의 광기에 매몰된 가해자들의 행동, 그저 그 시대에 그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했던 희생자들 <피에 젖은 땅>은 읽어 가는 내내 온 몸에 소름끼치는 일종의 죄책감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이 더 충격적이고 저자의 사유가 어디로 향하는지 페이지를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마음은 한없이 무게감에 심연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블러드랜드를 잊지 말아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고,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행위이며 개별적인 개인을 말살하는 일인 것이다. 숫자가 커질수록 우리는 추상적이라는 개념의 오류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생된 자들의 삶은 하나하나 기억될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죽은자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산자들의 몫인 것이다.” 라는 말로 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억과 진실은 살아온 경험 때문에 오염 된다.” 라는 말처럼... 어찌 보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 한마디가 아닌가 싶네요.

"살았어, 이젠 살았어!" 고픈 배를 움켜잡고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황량한 들판을 비틀비틀 헤매고 다니던 소년은 이렇게 외쳤다. 소년의 눈에 들어온 먹을거리. 그러나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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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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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俱戴天之讐(불구대천지수)" 라는 말을 우리에게는 상당히 익숙한 고사성어중에 하나입니다. 부모의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뜻인데요. 아마도 이 고사성어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한-일관계가 아닐까 싶네요. 너무 비약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 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뉘양스이지 않을까 싶네요. 그 만큼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들어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역시 양국간의 해결해야할 사안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지 않을까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사람으로, 일본에서 출생해서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를 보게 되면 왠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얼굴이 붉혀지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비단 저 개인뿐 아니라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느낌이지 않을까 싶네요. 호사카 유지는 우리가 모르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던 우리의 근대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그간 일본과 국내 친일세력에 의해 왜곡되었던 사안들에 대해서 철두철미한 연구와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쾌도난마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어 준 학자입니다.

 

   이번에 출간된 신친일파20197월 미래사에서 출간된 「반일 종족주의」가 주장하는 논거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다시피 반일 종족주의는 이영훈과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연구위원들로 구성된 뉴라이트의 역사의식을 대변하는 자들의 작품인데요. 대표주자격인 이영훈은 식민지근대화론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자칭 경제학자이고, 이우연과 주익종은 뉴라이트계열의 학자로 역시 그 동안 쉼 없이 일본의 극우세력의 논거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이에 대해서 호사카 유지는 자신이 그 동안 발표한 논문과 저작들을 통해서 그들이 주장하는 논거가 얼마나 왜곡되고 허상인지를 한방에 증명해 보입니다. ‘강제징용위반부그리고 독도에 대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향후 이들과의 논쟁에 대한 포문을 열고 있습니다. 뭐 그 세부적인 사안을 여기서 논거할 필요성은 없다고 보여지는데요. 왜냐하면 하도 터무니없는 사안들을 주장하는 자들이기에 굳이 서평에 담을 필요성이 없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들이 노리는 점이 바로 관심을 촉발하고자 하는 부분에 있기에 이에 대한 반응 역시 크게 필요하지 않다고 보여지지만, 호사카 유지는 학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넘어갈 수 없다는 신념에서 바로잡기에 나섰다고 판단됩니다.

 

   그렇지만 왜 이런 자들이 이런 터무니없는 논거들을 주장하는지에 대한 성찰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아마도 우리의 삐뚤어진 정치적 여건과 맞물려 있다는 점 그리고 이 틈을 간사하게 파고들었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세칭 보수라는 정치적인 탈을 쓰고 마치 자신이 보수인양 주장하는 형국인데요. 이 점은 심히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들이 보수라는 개념을 너무나 몰라도 아니 모르는게 아니겠죠. 보수이고 싶어 하는 거죠. 정작 건강한 보수입장에서는 몹시 불쾌하겠지만요. 모름지기 보수라면 국가의 국익과 자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인데요. 이들은 보수의 기본개념과 정반대의 입장에 선 자들이고 단지 신친일세력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 아베정권과 그들과 맞물려 있는 극우세력의 역사의식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하지 않습니다. 왜 그들은 그들 나름의 국익을 표방하고 있고 그렇기에 침탈전쟁에 대한 역사적 왜곡을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부분에 대해서는 우리측의 반박과 투쟁은 어찌보면 당연한 문제이고 바로잡아야할 순리이기도 한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참 묘한 형국이 이러한 불순세력들이 대한민국내에 존재한다는 거죠. 일본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논거와 거의 흡사한 이론을 가져다가 마치 사실인양 설파하는 이들이 일본내가 아닌 대한민국내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는 거죠. 그것도 세칭 보수라는 탈을 전면에 내세워 물타기하면서 말이죠. 물론 일본내에서도 극우세력의 역사 왜곡이 잘못되었다는 정상적인 목소리도 분명 존재하죠. 뭐 이런 측면에서 보게 되면 국내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행동도 이해를 해야 하는게 맞겠지만, 문제는 이러한 친일세력이 마치 보수라는 극히 존엄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무임승차하는 행태가 지극히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직도 국내에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논쟁거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정치적 도그마에 휩쓸려 정확한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이영훈을 비롯한 신친일세력의 주장이 청소년들에게 혹은 보수라는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패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일과 보수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결코 친일이 보수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보수를 가치관으로 공유하는 자들에게 친일은 어디까지나 국익을 해하는 친일 종족주의자들 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번 저서는 정상적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보수나 진보를 떠나서)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유발하는 내용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어찌보면 왜 이렇게 까지 조목조목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 가야면서 까지 질타를 해야 할까 하시는 분들도 상당수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을 신친일세력들이 파고드는 부분이기도 하죠. 우리 역사에 부끄러운 부분은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정확하게 어떻게 벌여졌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지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지나간 역사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언제가 다시 반복될 수 있는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조들은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이고 역사공부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던 것입니다. 최근 우리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는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반일 종족주의를 부르짖는 이들은 아마도 선조가 친일파였거나 아니면 한국인을 가장한 극우일본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 만큼 우리 자신이 친일청산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틀을 정리하지 못하였기에 발생한 문제들이죠. 이번을 계기로 일본 극우세력에 놀아나는 신친일파세력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과 더불어 우리 역사 바로 잡기에 나서야할 때인 것 같습니다. 친일세력 청산이라는 문제에는 정치적인 프리즘은 불필요 합니다. 그나마 요즘 청년세대의 적극적인 역사인식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며 기성세대로서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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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 위의 역사 - 역사학자, 조선을 읽고 대한민국을 말하다
이덕일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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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들 역사는 흘러간 옛날옛적 이야기라고 하죠. 즉 과거의 일이라는 거죠. 그러다보니 굳이 과거의 담론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이해보다는 바쁜 현재와 더불어 불확실한 미래를 설계하고 생각하고 고민하는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뭐 단순하게 보면 이말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짝만 비틀어 생각해보면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굳이 과거의 현재의 거울이다는 표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역사를 되돌이켜 보게 되면 그야말로 현재와 같은 중복성을 쉽게 찾게 되니까요. 역사를 반면교사로 현재를 제단하고 미래를 설계해라라는 문구가 격언적인 울림이 더 이상은 아니다는 것은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게이트를 보면서 다시금 느끼게 하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비록 지난간 과거속의 사건들과 담론들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게 합니다.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 는 역사평설로 바로 조선사와 근대사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더불어 실정을 되새겨 보고 이를 근간으로 작금의 대한민국 현주소를 제대로 파악하게 하면서 향후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안을 어렴풋 하게나마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 칼럼 같은 느낌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특히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파탄이 난 대한민국의 정치를 바라보고 있자면 굳이 멀리 갈 필요성도 없이 우리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조금이나마 이번 사태의 원인과 재발방지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저서는 더 실감나게 독자들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군주제에 붕당정치로 인해 조선시대 특히 선조이후의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들이 팽배해 있는데요. 이러한 역사적 시각 역시 많이 뒤틀려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지금의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시스템과 비교해서 보면 별반 차이점이 없어 보이기 때문인데요. 물론 민주공화제보다 군주제가 더 낫다는 표현은 결코 하니죠. 다만 조선사에서 우리가 깨닫고 취해야 할 좋은 시스템들이 수두룩 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시대를 현시점과 비교해 보면서 더 나은 방향의 어젠다를 발견했으면 합니다.


          지금의 권력구조인 대통령중심제의 폐단처럼 조선시대에서도 의정부 서사제와 육조 직계제를 둘러싸고 군주와 신하들의 권력쟁탈 줄다리기 싸움과 그로 인한 폐해와 장점등을 엿 볼 수 있는데요. 우리는 조선시대의 정치구조를 지금의 정치구조와 비교할 수 없다고만 단정하지 말아야할 정도로 권력의 중심과 그를 둘러싼 이권투쟁은 거의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지금의 권력체제보다 비록 군주제였던 조선시대의 권력체제가 더 이상적일 수 도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비록 왕를 중심으로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지만(지금도 대통령에게 거의 모든 전권이 부여되어 있죠)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등을 비롯한 언론기관의 견제와 이조 좌랑등이 가지고 있던 인사권등의 제도를 보게 된다면 지금의 제왕적인 대통령 제도하의 구조보다 더 효율적이면서 권력의 견제 역활을 할 수 있었던 구조였음을 알게 됩니다. 비단 이런 예를 들지 않더라도 조선시대를 상고해 보면 어떻게 권력의 힘을 분산시키고 집중시키느냐에 따라 그 명암이 극렬하게 나뉜다는 점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요. 현재 성군의 반열에 오른 군주들의 면면을 보게되면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것은 다름아닌 권력의 최점과 그 권력을 받치는 중간계급의 끊임없는 소통이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소통의 바탕에는 백성의 민의라는 대전제가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물론 지금처럼 100%의 민의 반영은 아니였지만 세종조의 세금징수와 관련된 일련의 여론조사 방법등을 유추해 볼때 지방관을 통한 민의의 반영이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민의의 소통과 군주와 신하간의 소통 이렇게 삼박자를 잘 수행했던 군주들은 대부분 치세기간이 평온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제왕적 대통령제도의 개헌이라는 화두가 대두되었지만 결국 대통령중심제이던 내각책임제이던 이러한 정치제도의 변화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과 시민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앞선 시대의 역사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가지를 더 살펴보자면,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세월호 7시간' 과 긴박한 국가 초유의 재난사태에서 최고 권력자의 행동반경을 참모들 (조선시대로 비유하자면 승지들인데요) 이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 과연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불성설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데요. 조선시대는 군주라는 개념자체가 사관과 왕를 보필하는 승정원의 승지들에게 의해서 일거수일투족이 남김없이 기록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지금의 권력시스템 보다 뛰어났다고 판단됩니다. 최고 권력자에게는 사인의 개념보다 공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어 있었고, 때문에 조선시대의 군주는 최고의 권력을 쥐고 있지만 그 반대급부로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죠. 그런데 현대의 최고 권력은 그저 권리만 있을뿐 의무는 없는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한번 제도와 시스템에 대한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보여집니다.


          대부분의 권력구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경직화되고 정체되기 마련입니다. 조선시대 경연이라는 제도는 이러한 최고권력자의 경직화와 정체감을 유연한 방향으로 물꼬를 틀 수 있게 했던 제도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고사에 군주는 물에 떠있는 배와 같다고 했고, 태종은 권력을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라고 비유했던 말을 다시금 환기 해봐야할 때이죠. 그 만큼 권력은 한시라도 방심하게 되면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린다는 뜻입니다. 계속되는 대통령들의 임기말년의 암울한 모습속에서 매번 되풀이 되는 국민들의 한숨 속에서 정작 우리의 정치권은 아주 단순한 국민과의 소통에 무관심 해왔던 것이 사실이죠.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 시스템이 좋던 나쁘던 장구한 흐름속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물리적 시간개념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중요한 것은 과거사를 반면교사로 부정적인 역사는 되풀이 하지 않는게 해답일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조선시대를 현시점과 비교해 보면서 더 나은 방향의 어젠다를 발견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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