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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모처럼 리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내온 기억들이 이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대면하면서 마치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냥 책만 읽고 리뷰는 쓰지말자 당분간 그렇게 보내왔는데 결국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을 읽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 없게 하는 모티브를 사정없이 던져주네요.
우선 국내에(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89년 언저리 같은데요. 입영통지서를 받아놓고 이책 저책 기웃거리면서 제목이 특이해서 손에 쥐어봤던 그런 기억이 나네요) <상실의 시대>라는 제하로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던 작품입니다. 당시 일본문학에 대한 다소의 거부감 내지는 민족적 자긍심등 개뿔같은 안량한 심정으로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던 작품이었고 기차여행길에 한번 구매해서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당시 대학초년병시절 크게 가슴에 와닿지 않았던 작품이기도 했구요. 물론 성애등의 묘사 사뭇다른 일본의 대학생활에 상당히 고무된 기억도 납니다. 그런데 이십여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다시 대면하게된 <노르웨이의 숲>은 저 개인에게는 새로운 감흥을 던저주는 작품으로 재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뭐 스토리 자체는 상당히 뻔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는 점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음 마치 헤르만 헤세의<크눌프 삶의 부터 3가지 이야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 과 상당히 연관성 있는 뉘양스를 가지고 있는 냄새를 진하게 전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이 아마도 작품속의 나이대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감흥이 수십년이 지난 시점에서 접하게 되면 적확하게 작가가 표방하는 사유가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점에서도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그 어떠한 면에서도 이런 한발 뒤늦은 감흥이 일품인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져보게 합니다. 그리고 올 여름 서점가를 후끈 달구었던 제목도 기억하기 힘든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 라는 작품보다 훨씬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동안 국내에도 많은 매니아층을 가지고 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가장 뛰어난 작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론 <색체가 없는 ...> 작품은 너무나 흡사하게도 <노르웨이의 숲> 의 속편같다는 뉘양스를 강하게 느끼게 하더라구요.
내러티브의 전반을 흐르는 음색 내지는 감흥이라고 할까요. 딱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과 절묘하리만큼 어울린다는 점(사실 전 이번에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미련한 생각으로 정말 언제쯤 노르웨이의 숲 그러니까 막연히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는 울창한 산림과 그 빽빽한 나무사이로 들이치는 햇빛의 향연, 발밑에서 오락오락 피어오르는 낙옆의 내음 뭐 이런 선입관에 열심히 찾아봤지만 정말 마지막까지 그 어디에도 노르웨이 숲은 없었다는 점, 아마도 이런 미끼가 내러티브를 쫒아가는 독자들에게 나름의 밑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전 이 양반의 제목선정에 대해서만큼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처음 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마도 저와 같은 상상을 해봤으리라 믿어 집니다. 지금도 왠지 단 한번도 가보지도 못한 노르웨이 숲속을 거닐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거든요. 이런점에서 작품의 제목이 미치는 영향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하죠. 처음 국내에 출간될때 <상실의 시대> 라는 제목은 내러티브가 표방하고 있는 젊은날의 모습과 사랑하는 이들과 죽음으로써 이별해야만 하는 상실감등 뭐 이러한 전반적인 느낌이 고스란히 제목에 투영되어 있어 다소 무거운 느낌을 자아내게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상당히 철학적인 고차원적 파토스로 이끌어 갔다면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타이틀로 새롭게 만나는 이번 작품은 <상실의 시대>에 비해선 그러한 삶의 극단을 조명하는 분위기에서 살짝 탈피한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로 한편의 잔잔한 가을날의 동화를 체험하는 감흥의 오히려 강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번 작품의 경우 저와 비슷한 연령대의 독자층에게는 특히나 자신의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수 있게하는 매력을 지닌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좌파,우파의 이데올로기 충돌로 인한 상아탑의 현실과 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 구태어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나름의 길을 걸어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1980년대 후반 우리의 상아탑과 크게 다를바 없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와타나베처럼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온 젊은이들의 삶이 매우 흡사한 동질감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왠지 친근감마저 느끼게 합니다.) 시대적으로 혼란한 속에서 나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면면이 아~ 나도 그랬지라는 기억의 봉인을 걷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편안하면서도 어느 순간 호흡이 가빠지게 합니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상 내러티브자체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그런 예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또한 반전다운 반전하나 없는 밋밋한 스트럭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러티브의 구조가 오히려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코어가 아닌가 싶네요. 마치 삶의 조명하듯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분위기가 현실과 허구라는 갭을 최대한 좁혀주고 있어 독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감정이입들이 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리고 미도리등을 통해서 마치 독자들 자신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게 하는 착각 아닌 착각을 불러 일으키면서 픽션이라는 생각을 갖지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이라는 몇가지의 특수성이 산재하고 있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내뿜어 내는 분위기는 충분히 공감이 가네요.
전반적으로 여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선보인 작품들 중 단연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중성과 문학성(물론 보는 관점에서 상당한 편차가 잇겠지만요) 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고 독자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배경묘사등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독자들에게 오래토록 잔상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네요. 또 하나의 재미있는 팁은 이번 작품에는 곳곳에 들어 앉아있는 클래식, POP등 음악이 많이 정말 많이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소개되어 있는 음악을 과 해당 내러티브를 같이 연관시켜 보면 더 진한 느낌을 받을수 있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