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막내동생이 "첫 출장"을 갔다. 홍콩으로.

첫 출장!
정말....."첫 사랑"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막내동생은 벌써 한 달 전부터 들떠 있었다.
별의 별 걱정을 다하고,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고,
아빠, 엄마 선물을 뭐할지 의논하고,
홍콩 일기예보를 거의 매일매일 보다시피 했다. 귀여운 것!

아침 비행기라 동생은 5시 조금 넘어 집을 나섰다.
아빠는 동생의 거대한 트렁크와 갖가지 짐들을
공항 리무진 정거장까지 들어다 주시고 들어오셨다.

오늘 아침에 보니
우리 아빠......많이 늙으셨다.
내 "첫 출장"이 오버랩되면서 아침부터 가슴이 짜~안했다.

시드니로 떠난 첫 출장 때,
난 동생 보다 10배는 더 호들갑을 떨었다.
일주일 출장 가면서 커다란 트렁크 2개를 들고 갔다.
동생은 전시회에 필요한 회사 샘플 때문에 짐이 많지만,
그 때 내 트렁크는 다.....옷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들에게 이민 가냐는 놀림을 엄~청 받았었다.ㅋㅋ)

첫 출장에 설레였던 건 나만이 아니었다.
어린애 같은 딸내미가 출장을, 그것도 해외출장을 간다는 사실이
아빠,엄마에겐 신기할 뿐이었다.

그 땐 인천공항이 아니라 김포공항이었는데,
아빠,엄마는 공항까지 나오셔서 손을 흔들며 배웅을 하셨다.
시드니 일주일 출장이 아니라,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는 태극전사의 부모님 같았다.

아빠,엄마의 표정에는 신기함, 대견함, 흐뭇함 및 걱정, 불안 등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진~짜 필요 없다고 하는데도,
회사에서 일당도 나오고, 카드도 있고, 현금도 충분하다고 하는데도,
아빠는 한사코 용돈을 주셨다.
(아.......언제 그렇게 또 용돈을 받아 볼까? 가 버린 날들이여, 다시 오라!)

그랬던 때가 있었다.
첫 출장에 잔뜩 설레여 잠을 설친 막내동생처럼
그랬던 때가 있었다. 내게도.

어느새~
장필순의 노래처럼 어느새~

신입사원은 과장이 되었고,
"서른 즈음에"를 들으며 눈물 흘리던 나는
넉살 좋게 윙크까지 하며 "골든 30대"를 외치게 되었고,
첫 출장에 설레여 잠 못 이루던 나는
비행기 타는 걸 지하철 타듯이 대수롭지 않게 느끼게 되었으며,
공항까지 나오셔서 태극전사 부모님처럼 하염없이 손을 흔들던 울 아빠,엄마는
현관에서 "언제 오냐?"는 한 마디로 그 애틋했던 배웅의 절차를 혁신적으로 개편하셨다.

그리고 어느새~
막내동생의 첫 출장에 잊고 있던 첫 출장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나의 대학 입학, 첫 출근, 첫 출장에
나 보다 더 설레여 하시던, 더 가슴 벅차 하시던
부모님을 생각하며 반성했다.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해주신,
그 모든 순간에 나 보다 더 기뻐해 주신 부모님께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지.

- 막내 동생의 첫 출장 날, 잊고 있던 나의 첫 출장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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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6-11-1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첫 해외 출장도 그랬어요. 전 신입사원이 아니라 대리가 되서 본사 출장가는 거였고, 신입사원 때부터 뻔질나게 해외를 드나들던 동생보다 해외출장은 늦게 간 거였지만, 부모님은 무척 대견해하셨고 공항까지 태워다주셨더랬죠.
그 시절이 좋았어요~ 에너지와 의욕이 넘쳤던 시절!

blowup 2006-11-1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 님의 다이어리를 보고 있으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의 리스트가 떠올라요.

이리스 2006-11-14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나도 입사하고 한참 있다가 해외출장 갔는데. 미국 출장이었구 짐은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아. 올 때 많아졌을 뿐. 각종 자료와 참고서적들이 가득.. --;

kleinsusun 2006-11-1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riny님, 전 지금도 에너지와 의욕이 넘쳐요. 호홋~^^

namu님, 그렇게 말씀하시니...부끄부끄^^ 오늘 아침 출근길에 첫출장 갔던 날을 떠올리면서 부모님께...참 고맙고도 미안했어요. 새까맣게 잊고 있었답니다.

구두님, 정말? 자료와 참고서적들만? 구두랑 가방들은 없었구? ㅋㅋ

2006-11-15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잉크냄새 2006-11-15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대리때 첫 해외출장을 중국으로 다녀왔지요. 전 설레임도 두근거림도 없었고 내일 회사안가니까 마음 놓고 술 마셨다가 비행기 안에서 술냄새 폴폴 풍겼다죠.

2006-11-15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6-11-15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내동생의 출장을 기화로 부모님의 사랑을 생각하시는 모습, 아주 아름답습니다.

마태우스 2006-11-1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생분이 아무리 귀엽다 해도 수선님보다 귀여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로그인 2006-11-15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장보다는 여행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저는 매우 숙연해집니다. 후훗.

kleinsusun 2006-11-15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 비행기 못타면 어떻할까...는 걱정되지 않으셨어요? ㅋㅋ
역시...소심한 저랑 다르시군요, 용감한 잉크님!^^

마태님, 오....전 마태님의 칭찬을 먹고 살아요. 음하하하.

Jude님, 물론...저도 출장 보다 여행이 훨~씬 좋아요!^^
 

빼빼로 데이.
시내는 온통 100년 넘게 썩지도 않을 요란한 포장지에 울긋불긋한 리본을 묶은
빼빼로를 팔고, 사고, 선물한다고 북새통이었겠지.

"빼빼로 데이"의 상업성에 저항(?)하기 위해,
포장지 사용을 줄이자는 환경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난 하루 종일....집에 있었다.
자고 자고....또 잤다.

하루 종일 몸이 욱신거렸다.
이럴 때 일수록 운동을 더해야 하나?
언뜻 그럴 것 같았지만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서서히 몸이 단단해 지고 슬슬 근육이 생기는 걸 뿌듯해 하며
욕심을 부려 근육운동 기구들과 바벨,아령의 무게를 늘렸다.

화요일부터 몸이 아팠다.
온몸이 욱신거리는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기분 좋게 단단해져 가는 팔 근육을 만져 보며,
윤곽이 뚜렷해져 가는 쇄골을 만져 보며,
통증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까잇~거!

그러다 오늘 아침......뻗어 버렸다.

난 항상 뭔가에 미쳐 있다.
얼마나 갈지 모르지만 지금은 웨이트 트레이닝에,
일에, 남자에, 소설에, 주식에, 여행에, 외국어에, 차에, 명상에, 와인에, 음악에....

"웬 운동을 그렇게 무식하게 하니? 제발 좀 살살해라."
아침에 못 일어나서 끙끙거리는,
겨우겨우 침대에서 빠져 나오는 날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엄마가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뭔가에 미쳐 있는 내 모습을 지겨울 만큼 봐온 울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또 새로운 뭔가에 빠져 있는 딸내미의 모습에
정나미가 떨어질 만도 한데,
항상, 한결 같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제발 좀 살살해라."

난 참....집중을 잘한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을 때나 딴 생각을 할 땐
주위에서 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래서 툭하면 부모님이나 선생님께 혼났다.
"너 내가 부르는 거 못 들었어? 몇 번을 불렀는데?"

연애를 할 땐,
친구들 모임에도 나가지 않고
연락도 뜸하게 잠수해 버려
배 터질 만큼 욕을 먹곤 했다.
어떻게 시간을 분배해야 할지 몰랐다.
오직 관심이 한 곳에 있기에.

몇 년 전엔 "속도"에 미쳐서
중고 아반떼를 하나 사서 투박한 핸들을 모모 핸들로 바꾸고,
레이싱용 어깨 벨트를 하고 주말마다 미친 듯이 밟았다.

또 몇 년 전엔 "태국"에 미쳐서
어떻게 하면 태국에 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잘 팔지도 않는 태국어 회화 테이프를 사서 태국어를 배웠고,
일본계 태국회사랑 면접을 하러 방콕까지 날라 갔다.

에너지가 한 번 폭발하고 나면....한동안 슬럼프를 겪는다. 조울증처럼.

"inventory building"이라는 말이 있다.
재고 축적, 재고가 쌓인다는 말이다.
"LCD TV panel inventory building" 이런 신문기사 제목처럼.
LCD TV 판매가 예상을 밑돌아 panel 재고가 쌓이고 있다....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판매가 부진해서 재고가 쌓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일정한 재고를 확보하지 못하면 판매를 하지 못한다.

세일 기간에 백화점에 가면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죄송합니다. 손님, 찾으시는 상품 재고가 없습니다."

왜 뜬금 없이 재고 얘기를 하느냐?
에너지도 재고와 비슷한 것 같아서.

열정적인 사람들은 에너지를 확~당겨 쓴다.
에너지가 소모되면 다시 에너지가 충전될 때 까지,
그러니까 최소 재고가 확보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 번씩 축 쳐져서, 빈둥빈둥하며
깜빡거리는 빨간 불이 느긋한 연두색으로 바뀌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긴 하지만,
한 번씩 슬럼프에 빠질 때면 정말....두렵다.
조바심이 나고 입이 바짝 탄다.
오늘처럼 편하게 푹~쉬면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하다.

어차피 늦게 출발 했으면
지하철에서 30초에 한 번씩 시계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건,
한 20분 푹~자면서 가건 늦는 건 똑 같은데,
안타깝게도 난 전자에 속한다.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시계를 본다.

하루 푹~쉬었더니 몸의 욱신거림이 뻐근함과 나른함으로 바뀌고 있다.
이렇게 몇주 남지 않은 06년의 끝에서 몇 번째 토요일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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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6-11-12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혹시 내 도플갱어? 으하하하핫... ㅋ

글샘 2006-11-12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그런 사람 많이 있습니다. 저도 동동 편입니다. ㅎㅎㅎ
쿨쿨 자려고 할 필요 있겠습니까? 동동 구르는 게 '나'인걸요.

마태우스 2006-11-12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에 미치는 사람, 정말 멋진 사람 아닌가요? 그게 뭐든지 관계없이요.

LAYLA 2006-11-12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국은 어떻게 끝났나요? 궁금해요!

바람돌이 2006-11-12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저는 그냥 느긋하게 푹자는 쪽... 그니까 뭔가에 잘 미치지도 못해요. 그냥 이것 저것 건드려보고 적당히 하다 마는 주의죠. 이거 타고난 성격이라 잘 안고쳐져요. 아마 님도 그렇겟죠. 근데 서로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편이 부러워보일때가 많죠.저도 아주 열정적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부럽거든요. 근데 사람이 사는 방식은 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어느쪽이나... 하긴 이것도 만사가 느긋한 제 생각이겠죠. ^^

마늘빵 2006-11-1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런 모습이 매력적인데.

2006-11-12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6-11-12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좋게 단단해지는 팔근육~~!
저도 얼마전 앉아서 팔운동이라도 하시죠, 팔뚝살이 늘어져요라는 말을 듣고 1kg짜리 아령을 구입했는데, 이게 참...
저도 예전엔 집중을 참 잘했는데, 점점 집중하기도 힘들고, 또 한번 집중하면 그걸 유지하는 기간이 짧아지는 거 같아요. 정말 나이가 들었나봐요ㅠ.ㅠ

kleinsusun 2006-11-12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야, 너도....그러니? 요즘엔 뭐에 미쳐있어? ^^

반달님, 반달님도 지하철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스타일이시군요,웬지 위안이..^^
전 한숨 푹~자는 느긋한 사람들이 부러워요. ㅋㅋ

마태님, 마태님도 미쳐 있잖아요. 테니스에, 술에, 집필활동에, 알라딘에. 미녀에...아닌가요? ㅋㅋ 항상 에너지 넘치는 멋진 마태님!^^

blowup 2006-11-1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바심은 내면서도 끝까지 못 가는 사람도 있다구요.(여기요.)
원래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시키고 충전시키는 게 좋다잖아요.
어정쩡하게 충전시키면, 제대로 충전이 안 된다네요.
비슷하겠죠.
쇄골이 드러나는, 기분 좋은 욱신욱신.

moonnight 2006-11-1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님의 그런 에너지가 부럽답니다. ^^ 요즘은 뭘해도 심드렁.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거 같아서요. -_-; 운동은 중간중간 하루씩 쉬어주는 게 근육만드는 데 도움된다고 하던데요. 너무 무리하지 마셔요. 주말에 푹 쉬시고 의욕충만한 한 주 여시길 바래요. ^^

2006-11-12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11-12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AYLA님, 태국 그 회사는.... 연봉 협상을 하다가 제가...꼬리를 내렸어요.ㅠㅠ
그 회사는 연봉을 "Baht"로 주겠다고 했는데, 그게 외국인인 제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안한거였거든요. 자세한 얘기는....기회가 있으면 LAYLA님께 살짝꿍 얘기할께요.^^

바람돌이님, 느긋한 님이....부러부러!^^
전 맨날 뭐가 그렇게 급한지 몰라요. 맨날 헉헉! 많은 지도편달을 부탁드려요!^^

아프님, 감사합니다.^^

kleinsusun 2006-11-1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여주신님, 마음을 톡톡 두드리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BRINY님, 1kg 아령은 약간 가벼운데....ㅋㅋ
팔 운동을 한번에 10분씩, 하루에 2~3번만 해줘도 팔에 훨씬 탄력이 생길 것 같아요.
전 요즘에 웨이트 트레이닝에 미쳐서...싫어하는 우유랑...단백질 보충제까지 먹고 있어요.ㅋㅋ 언제까지 할지는....몰라요. 또 어디로 토낄지!^^


kleinsusun 2006-11-12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namu님, 맞아요! 핸폰 밧데리는 완전히 방전된 다음에 충전하는 게 좋다면서요?
아...커다란 격려가 되는걸요!^^ 이번 겨울 열심히 운동해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여름을 기다리고 싶어요.헤헤~ 행복한 일요일 오후 보내세요!^^

달밤님, 아닌 것 같은데...~ 뭘해도 심드렁하면 일하기도 바쁜데, 부산 영화제, 일본 여행, 야간 강의....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달밤님이야 말로 제가 보기엔 "생산적인" 에너자이전데...^^ 진~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싶네요. 아...달밤님이랑 같이 마시면 좋겠당!^^

비로그인 2006-11-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 보이세요. 한가지에 미쳐있는 순간,그 순간이라도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건 얼마나 좋은가요.

kleinsusun 2006-11-13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Good morning!^^ Jude님 이미지 사진을 볼 때 마다 커피가 땡겨요.ㅋㅋ
네...요즘은 weight training에 미쳐 있어요.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요. Jude님은 요새 어떤 일에 빠져 있나요?^^
 

"돈만 있으면 한국처럼 살기 편한 나라가 없지."
엄마는 무슨 근거에서인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여권 두 권에 더 이상 도장 찍힐 자리가 없이
구두 뒤축이 닳도록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 다니면서
이 말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말은 이렇게 정정되어야 한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살기 불편한 나라가 없지."

그렇다. 돈만 있으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살기 불편한 나라가 없다.
돈만 있으면.
문제는 세상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돈을 욕망하는 사람은 넘쳐 난다는 것 뿐.

오늘 아침, 게이트가 세 개 밖에 없는 조그마한 HILVERSUM역에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아니라
이 세상 자본주의의 끝에 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추적추적, 칙칙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날이 추운 건지 마음이 허한건지 사람들은 벌써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고,
나는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무당이 칼 위를 걷듯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그 곳에는 "꽃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서울 곳곳에 널린 무수한 편의점처럼 수많은 자판기를 봐왔다.
커피부터 컵라면, 생리대, 콘돔까지 안 파는 게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 자동판매기"는 처음 봤다.
A,B는 10유로, C,D는 6.5유로.
A에서 D까지 네 칸으로 나뉘어진 자판기에는
번호를 단 꽃들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난 촌스럽게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꽃들을 구경했다.
마침 오늘 미팅이 있었던 거래선의 구매 담당자 Sjoerd가
지난주에 아빠가 되었다고 자랑했던 게 생각났다.
축하도 할 겸, 자판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꽃을 사기로 했다.

어지럽게 돌아가는 자판기를 쳐다 보다 빨간 장미 한 다발을 선택했다.
번호는 A21.
오른손 검지로 A21을 꾹꾹 눌렀다.
LCD창에 Euro10을 넣으라는 문장이 오락실의
"insert coin to continue" 처럼 툭 튀어 나왔다.

시키는 대로 10유로 한 장을 넣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것처럼 비~잉 소리가 나더니
캔 자판기에 콜라가 툭 떨어지듯이 장미꽃 한 다발이 떨어졌다.
냉장 보관한 싱싱한 장미꽃 다발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난 수고스럽게 장미 다발을 흔들어 물기를 털었다.

싱싱하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한 장미 다발을 들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꽃도 자판기로 사다니... 정말 신기한 세상이구나!
동시에 번호표를 달고 홍등가 쇼윈도에 앉아 있는 여자들이 떠올라 어지러웠다.
뭐든 번호로 선택하는 세상!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이라지만 정말 그런가....
유치한 회의가 불쑥 튀어 올랐다.

"회장님을 존경해요."라고 당당하게 인터뷰를 하고
늙다리 재벌회장이랑 결혼하는 여자 연예인들의 뇌를 뜯어 본다면,
CF 하나 찍어도 몇 억씩 벌면서 애 딸린 이혼남 재벌 2세랑 결혼하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연자 연예인들의 뇌를 해부해 본다면,
쓰레기 버리듯 자신의 일을 사전 통보 없이 때려 치고 결혼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아름답고도 명석한 두뇌를 분석해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자판기에서 산 꽃을 선물하고
피자헛에서 시킨 피자를 사이 좋게 나눠 먹고
들어오는 길에 자판기에서 뽑은 콘돔을 착용하고 사랑을 나눌 연인들이 떠올랐다.

아....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가?
자판기의 꽃들이 빙빙 돌아가듯
내가 서 있는 세상도 빙빙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허접한 감상을 써 내려가며
맥주를 두 잔 마셨더니 머리도 빙빙 돈다. 맴맴.

난 어디에 있는 걸까?
When will I accept where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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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RINY 2006-09-20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20대였을 때, 엄마가 '너는 세상 어디에 떨어트려놔도 잘 살거야'라고 몇번이고 말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생각했죠. 응, 그런데 현금으로 가득한 지갑과 신용카드도 같이 떨어트려줘야하는데.

이리스 2006-09-20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을 자판기로 팔다니 -.- 낭만이 없네 낭만이. 돈만 있으면 남극에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거야? 그런거야? ㅎㅎㅎ
언니,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구 일단 현재를 즐기셈!!

마늘빵 2006-09-20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낭만이 없네. 이런건 이렇게 하면 안돼요. -_-

로드무비 2006-09-20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페이퍼로 보여주셨던 그림이 생각납니다.
저 영문 문구가 적혀 있던.......
지금 수선님이 있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라고
곧 말씀하실 거예요.^^

코마개 2006-09-20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이예요. 좋은 곳에 가 계시는군요. 부러워라
저도 그 아나운서, 다른건 관심없는데 어떻게 직장인이 저렇게 '나 그만둬'그러면서 그만둘 수 있는지 놀라웠어요. 그래서 다른 선량한 여자들을 욕먹이는 거라구요. '여자들은 결혼하면 다 그만이야'그럼서...

끼사스 2006-09-2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신 곳에서 조금 더 외곽으로 나가면 드디어(!)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펼쳐지는 것 아닐까요? ^^

2006-09-23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10-09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꽃자동판매기라니. ^^; 정말 신기하네요. 힘내세요. 술이나 한 잔 해요. 우리 ^^
 

새벽 5시 30분, 아직 어둑어둑하다.
호텔방이 반지하라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

Joost van den Vondel 이라는 17세기 네덜란드 작가가 살았던
옛저택을 개조한 3층 짜리 작은 호텔이다.
반지하에 있는 이렇게 작은 방이면 싸지 않을까...생각되지만
하루에 170유로(20만원이 넘는다!)나 한다.

암스테르담 시내 한 복판인데다,
(반고흐 뮤지엄이 500m 이내에 있다)
세계적인 무역도시인 암스테르담의 호텔비는 살인적으로 비싸다.

어제 헬싱키에서 저녁 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날아 왔다.
매일매일 비행기를 타는 건 굉장히 몸을 축나게 하는 일이다.
유럽 출장 마지막날 한국 가는 대한항공에서 몇번이나 "쌍코피"를 쏟았었다.

그래서 그 좋아하는 술도 자제하면서 조심한다. 아프지 않으려고.
커다란 트렁크랑 노트북을 들고 혼자 떠돌이처럼 돌아 다니면서
아프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다.
객지에서 아픈거처럼 서러운 일은 없다.

어제 호텔에 도착했을 때
내 거대한 트렁크를 반지하 방까지 들어다 준
깡마르고 키 작은, 까무잡잡한 동남아계의 벨보이가 물었다.

"Are you from south Korea?"

그렇다고 대답하며 너는 어디서 왔냐고 묻자 "미얀마"라고 했다.
그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My brother is working in Busan."

아...... 갑자기 가슴이 콕콕 찔렸다.
머나먼 미얀마의 가난한 형제들은
한명은 암스테르담 한 복판에서 짐을 나르고 있고,
한명은 부산의 영세한 방직공장 같은 데서 일하고 있을 것이다.
월급이나 제대로 받을까? 아프면 병원이나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자기 형이 한국에 있다며 반가워하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순진하게 웃는 깡마른 남자를 쳐다 보면서
괜시리 미안했다. 내가 그의 형을 착취하기라도 한것처럼.

지갑에서 5유로를 꺼내 팁으로 줬다.
5유로, 그러니까 6천원을 팁으로 주는 건 과도하다.
"부산"이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 주사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것 처럼 불편해서
허겁지겁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하면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아서.
그러니까 나 편하자고.

좁아 터진 반지하 호텔방에 짐을 풀고,
인터넷 접속이 안돼 서비스 제공자인 swisscom 테크닉션이랑 두번이나 통화를 하고 나니,
긴장이 확~ 풀리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ondel의 서재에서 글을 쓰면 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호텔 바에 노트북을 들고가 소설 비스무리한걸 한장 썼다. 하하.

8시가 되면 씩씩하게 나가 기차를 타고
HILVERSUM이라는 근교 도시에 가야 한다.
거래선의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좋은 결과가 있기를, 아자!

미팅을 빨리 끝낼 수 있으면
오후에는 반고흐 뮤지엄에 가볼 생각이다.
내 홈페이지 대문 그림을 그려주신 사랑하는 빈센트 오빠.

이렇게 또, 암스테르담의 아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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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9-1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니임, 몸 조심하세요 비행기 타는 거 정말 힘들잖아요. 글구 님이 쓰신 소설, 기대되옵니다. 담에 뵈면 내용 이야기해주시어요!!

2006-09-19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6-09-19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수선님.
돌아오시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보여주셔도 좋구요. 헤헷 :)
건강 잘 챙기셔서 무사히 일 마치시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돌아오세요!

이리스 2006-09-19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빈센트 오빠, 잘 만나구 와아~~ *^^*

2006-09-19 14: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9-1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많으십니다. 맘씨도 고운 수선님. 언제나 씩씩하려 노력하시는 모습이 넘 아름다워욧! >.< 반고흐 뮤지엄. 수년전에 갔었어요. 암스텔담 떠나는 날. 수선님 글 읽고 있자니 은근히 그리워집니다. ^^; 잘 있나 대신 확인해 주시어요. 건강하시구요! ^^
 

여기는 헬싱키.
Holiday Inn Helsinki City West 8층의
알록달록한 커튼과 메탈 스텐드가 놓여 있는 아담한 책상이 있는 cozy한 방.

인천에서 Frankfurt까지 10시간,
Frankfurt 공항에서 2시간의 기다림,
다시 Frankfurt에서 Helsinki까지 2.5시간의 비행.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 50분.

몸이 축 늘어지게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1시쯤 잠들었을까? 뒤척뒤척하며.

그런데....4시 30분에 핸드폰이 울렸다.
(세상 어디서나 터지는 011 로밍. 결코 편리한 것만은 아니다!)
잠이 덜깬 허스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성과장님! 깨워서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듣고 보니 정말 급한 일이었다.
눈을 부비고 일어나 노트북을 켜고 일을 했다.

6시 30분.
급한 일은 해결했지만 다시 침대에 들어가면 일어날 자신이 없어
이른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조용하게 커피나 한잔 마시려 했는데,
뜻밖에 가슴에 똑같은 뺏지를 단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바글거렸다.
세상 어디에나 중국,일본,한국 관광객들이 넘쳐 난다.
가슴엔 뺏지, 허리엔 전대, 어깨엔 무비 카메라를 맨 채로!

커피 한잔, 꿀을 바른 토스트 한 쪽,
간단한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할 겸 호텔 앞을 한 바퀴 돌았다.

아.......너무 추웠다.
아무리 일교차가 크다지만... 북유럽은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다시 호텔방.
미팅 시간까지 2시간 30분 남았다.
다시 잠들면 일어날 자신이 없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상하게 피곤하면 끈적끈적한 노래가 듣고 싶다.
남들은 피곤하거나 우울하면 쿵쾅쿵쾅 흥겨운 노래를 들어야 힘이 난다는데,
난 착~가라 앉는, 슬프다 못해 서러운 발라드를 들어야 서서히 몸이 복구된다.

그래서 지금...바이브 3집을 듣고 있다.
자일리톨과 노키아의 나라 핀란드에서 바이브의 가슴 짠~한 노래와 함께 아침을!
(어찌...무척 어울리지 않는다.)

출장 첫날, 헬싱키의 약간은 쓸쓸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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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6-09-18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많이 멀리 가셨군요. 이럴때 수선님이 마구 부럽다고나 할까요 ^^

글샘 2006-09-1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싱키면 핀란드던가요? 그쪽은 어디가 어딘지...
중국인... 좀 무섭네요. 세계를 덮은 중국인의 무리들...

이리스 2006-09-18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괜찮아. 난 시칠리에서 엠씨더 맥스의 노래를 들으며 오후를 보냈는데 뭐.
건강 조심~ 일도 잘 마무리 하고 즐거운 출장되길!
다녀오면 꼭 보자! *^^*

비연 2006-09-18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헬싱키. 넘 부러버요~ 꼭 가보고 싶은 곳인데...출장이신가요?

비로그인 2006-09-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차 적응하는 것만 해도 힘드실텐데, 날씨도 으슬으슬, 많이 춥겠군요. 아마도 해가 일찍 뜨고 일찍 지는 걸로 알고 있어요. 오후 세 시쯤 되면 어둑어둑해지지 않던가요..모쪼록 일 잘 끝내시고, 건강하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잉크냄새 2006-09-18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출장을 가셔도 멋진 곳으로 가시네요. 헬싱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헬싱키 올림픽 로고입니다. 아마도 원반을 던지는 남자선수의 모습이었죠.

hnine 2006-09-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소설의 첫장을 읽고 있는 기분이어요...

2006-09-18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06-09-18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출장첫날부터 힘드시네요. 헬싱키. 작년에 갔을 때 (앗. 그러고보니 꼭 이맘때였군요. +_+;) 깨끗하고 조용한 도시라는 느낌이었어요. 담에 다시 한 번 가서 푹 쉬다 오고 싶다. 생각했었지요. 식사 꼭꼭 챙겨드시고, 일 잘 보셔요. 유럽의 하루하루 전해주시길 기다립니당. ^^

2006-09-18 1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친아이 2006-09-1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기는 헬싱키. 여기는 방구석. 일하러 가신 거지만, 말만 들어도 이 부러운 감정은 어쩌죠? ^^ 일 잘하시고 건강히 컴백해주세요.

BRINY 2006-09-18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멀리까지 가셨네요. 컨디션 조절 잘 하시고 좋은 결과 얻어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