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레터 - [초특가판]
이와이 슈운지 감독, 토요카와 에츠시 외 출연 / (주)다우리 엔터테인먼트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누군가 인생영화를 물어오면 언제나 ‘러브레터’라고 대답했었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 역시 단연코 이와이 슌지였다. 이 목록은 꽤 오랫동안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20대 내내 영화를 거의 안봤다. 이제서야 영화가 재밌다. 극장에서 혼영 때리는 맛도 알아버렸다.
어쨌든 러브레터의 재개봉 소식을 듣고, 친구에게 내 인생 영화좀 함께 봐달라고 요청했다. 해상도 낮은 모니터로 울면서 보던 이 영화를 극장에서 꼭 보고 싶었다.

일요일 오전의 한산한 지하철을 타면서, 여러번 다시 보았던 러브레터를 마지막으로 본지가 어느덧 10년도 넘게 흘렀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친구에게 말했다. “어떡해. 나 겁나. 다시 봤는데, 싫어하게 될까봐.” 페미니즘 이후에 떠나보낸 작가와 작품들이 그 얼마였던가. 물론 그 페미니즘 덕에 촘촘하고 세밀하게 사랑하게 된 것들도 많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픔을 동반하는 법. 그토록 좋아했던 이 영화가 나를 아프게 한다면 좋아했던 만큼 아플 것 같아서 겁이 났다.

*

군데 군데 답답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영화가 싫어지지는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하얀 눈, 겨울, 편지, 도서관, 나카야마 미호의 헤어스타일과 잔잔바리 음악들. 으아아~ 역시 내가 좋아하는 것들 총집합. 스크린으로 보니까 확실히 또 좋은 거다.

그렇지만 사춘기 시절에 몸살나게 좋아했던 그 감성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가만, 떠올려보자. 이 영화가 그렇게 좋았다고? 왜지?
집에 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했다. 뭐였더라. 뭐였더라. 뭔가 지나간 코드가 있었는 데..... .

기억났다.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또 보았던 이유.
마지막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전해지지 않은 고백들)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지는 아마 부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

전하지 못했던 진심, 삼켰던 말과, 차마 할수 없었던 이야기와, 해소되지 않아 목에 칼칼하게 남은 어떤 마음들.

이츠키가 느낀 가슴 아픔이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잊혀진 첫사랑이 보낸 늦게 도착한 고백에 대답을 못하게 되어 애석하다는 건지, 아니면 그의 애인이었던 히로코에게 미안함으로 가슴 아프다는 건지.
다만, 그 무렵 내가 그 대사에 투사했던 감정은 ‘말하지 못한 마음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던 듯 하다.

언제나 고백은 어려웠다.
사실, 고백이 어렵다기 보다는 내 마음이 어려웠다.

어떤 책을, 영화를, 음악을, 연예인을 좋아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쉽게 말할 수 있고 정말 실컷 이야기할 수 있었지만 일상에 존재하는 누군가를, 조심스럽게 품어왔던 꿈을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것이 나는 어려웠던 것 같다.

사춘기 때의 난 사람과 꿈에 대해서 만큼은, 그것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려면,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고 결단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그게 무서웠다. 꺼내어 말했는 데 지키지 못할까봐.

그래서 결국,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마음을 전하거나,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주장해보지 못한 채 십대를 보냈다.

*

좋아하는 것을 잘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참는 마음.
혹은 좋아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서 참는 마음.
그래도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거라서, 조용히 그 마음들을 간직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영화 <동주>를 정말 좋아하는 데, 영화 속 동주 역시 좋아하는 ‘시’를 실컷 좋아한다고 표현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딘가 부끄러워서, 무언가 결단해야 할 것 같아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에게 정말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은 ‘쉽게 말하면 안되고, 참아야하는 것이고, 간직해야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쉽게 진심을 전하는, 실컷 해버리는, 신나게 푹 빠져버리는, 열정에 몸을 담그는 사람들(의 용기를?)을 동경했다.

*

가슴 아파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결국은 표현하지 못해서 앓았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츠키의 편지야 영화보는 내가 읽지만, (또다른 이츠키의 러브레터는 그가 죽고 나서도 2년 후에 도착한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슬프네...) 그 때 내가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은 그대로 묻혀버렸구나. 그래도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 적어도 나는 아니까.

*

안녕. 소심했던, 무지 진지했던...
나의 십대. 사춘기.
그리고 영화, 러브레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19-12-29 2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나요!! 나는 잘 지내요!!! 중학생 때 봤다는 기억만 남고 다른 내용은 기억이 안 나요. 사랑 영화 소설 보며 콩닥대던 게 먼 옛날이구나...

공쟝쟝 2019-12-29 21:28   좋아요 1 | URL
콩닥콩닥이라니... 흑흑.... 이 영화는 사랑영화가 아니라 이별 영화지만... 콩닥콩닥은 저도 아주 먼옛날.... 천년전 같아요

레삭매냐 2019-12-29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봤는데... 보는 내내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뭐 그래도 정말 좋았다는 그 느낌.

가끔 설산을 바라 보며 오겡기데쓰까
라고 외쳐 보고 싶어지는 느낌이랄까요.

어려서 제 인생영화라고 생각했던
<시네마 천국>의 오리지널을 보면서
느낀 회의감이 손에 잡히는 듯 합니다.

공쟝쟝 2019-12-30 17:33   좋아요 0 | URL
시네마천국을 인생영화로 꼽으시는 분이 많군요ㅎㅎ 오랜 영화에서 느껴지는 향수가 있는 것 같아요! 레삭님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 고맙습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다락방 2019-12-30 0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쟝님, [윤희에게] 봤어요? 러브레터 보고 부치지 못한 편지 얘기하니까 똭 윤희에게 생각나네요. 그 영화 꼭 봐요, 꼭!! 저 믿고 꼭 봐요. 알았지요?

공쟝쟝 2019-12-30 17:34   좋아요 0 | URL
벌새, 우리집, 매기에 이어 4대 올해의 한국영화라고 명성이 자자 하더군요. 올해안에는 어렵겠지만 볼꺼예요! 쿄쿄쿄🏃🏽‍♀️🏃🏽‍♀️
 

어제는 사온 책을 펴서 겨우 두 페이지를 읽고 잠들었다. 정말 엄청나게 피로한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실은 책을 편 것 자체도 억지였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겨우 두페이지 만에 저런 문장이 나왔다. 단단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본질적으로 결코” 망가뜨릴 수는 없는 사람이라니. 쏟아지는 졸음을 거역하지 않으며, 스탠드를 껐다. 이 정도면 오늘 읽을 치를 다 읽었으므로.


본질적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는 사람, 망가뜨릴 수는 없는, 결코, 본질적으로. 읊조리면서 잤다.




무너지는 나, 훼손되는 나, 스스로를 속이는 나, 자꾸 나를 망치는 선택을 하는 나, 토끼의 꾀에 넘어가 뜨거운 돌을 떡이라 생각하고 삼켜 위장이 데어 죽었다는 전래동화 속의 멍청이 호랑이 같았던 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덥썩 입에 넣고, 입에 넣었다는 책임감으로 그저 꿀꺽꿀꺽 삼켰던 수많은 시행착오들. 왜 이 문장을 더듬으며, 그 동화가 생각났던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속이 데어있는 모양이다. 죽지는 않고 살기는 살아있는 요즘은 식은 떡도 호호 불어서 먹지는 못하고 눌러만 보는 그런 상태다.

*

한 인간에 대한 찬사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코”,“본질적으로”,“망가뜨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찬사는 탐난다. 앞에 붙은 조건까지 더해지니 더 그렇다. “단단하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이라니. 그렇다면, 이거 꽤 노려볼만 하잖아. 난 확실히 단단한 편은 아니니까.

*

더는 무언가가 삼켜지지 않았을 때, 왜 먹지를 못하니, 스스로 질책했었다. 그래도 몸이 거부했다. 모르겠다, 먹기 싫음 먹지마, 질책을 그만 두고 시간이 흐르자 내 속이 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들이 맛있다 하기에 무슨 맛인지 느낄 생각도 못하고 일단 삼켰던 그 소화되지 않던 것들이 뜨겁게 익힌 돌 같은 거였나봐. 이 역시 실체는 확인하지 못한 합리적 의심 같은 것이지만. 어쨌든 앞으로 꽤 오랫동안(혹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만 먹어야 할 것 같다.

*

그래서.

본질적으로는/망가뜨릴 수 없다
는 말이 그렇게 눈에 새겨졌나보다.
있었는 지도 모르는 생존본능(?) 비스무리 한 것 덕분에, 미련하게 꾸역꾸역 아주 다 먹어 버리지는 않아서. 호랑이처럼 죽지는 않았잖아. 물론,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잖아.

*

그러니까. 나는 ‘본질적’으로는 망가지지 않은 사람. 이라는 쪽에 슬쩍 발을 담궈볼 수도 있는 거 아냐? 탐내보자. 탐내겠다. 탐을 내기 위해 마저 읽는다. 오늘도 피곤하지만, 탐나니까. 자, 시모어 선생님 가르쳐 주십시오. 그 비결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은 대체로 퍽퍽한 건빵 같은 일상이 이어지지만, 그 속엔 또한 별사탕 같은 순간들이 숨어 있다. 그러니 실망 말고 손가락을 잘 더듬어서 별사탕을 찾아낼 것. 비록 건빵 건빵 건빵 건빵 다음에 목 메일 때쯤 별사탕이더라도, 그렇게 맛본 행복을 잘 기억해둘 것. 그게 행복의 ㅎ 정도는 알게 된 사람이 ㅎ을 늘려가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안녕하세요, 요즘 급격히 발생(?)중인 맥켄지 데이비스에 치인 흔한 한녀입니다. 내 마음에도 정렬이라는 불꽃🔥이 남아있다는 걸 알게해준 그레이스 내가 사랑한다 ㅋㅋㅋ 삼일만에 두번 영화관 간거 생애 최초고, 안하던 트위터까지 만들어가며 님 태그 검색중이고...... 눈만뜨면 맥켄지... 삼일째 앓았는데 오늘 아침에도 맥켄지.. 하고 일어났어. 월요일은 차분하게 시작하고 싶었는 데 어제 저녁영화로 봐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도 심장이 날뛰어...

왤케 좋은지 모르겠는 데, 그 흔한 그남들의 서사로 가득찬 이제까지의 세계가 너무 지겨웠다는 건 알겠음!! 전 세계는 어서 졸라 쎈 여캐를 계속 만들어라!! 많이 만들어라!! 더 다양하게 더 치밀하게 더 신박하게 만들어라!! 내 인생의 젊은 시절 롤모델(?)이 오직 신사임당 하나였다는 게 너무 억울하다! 그외의 여자들은 다 박복하다고 협박했지?? 진짜 나빴다.. 자라나는 소녀들에겐 미래에서 보내준 슈퍼솔저님이 계시다! 여러분 그레이스 본받아 열심히 근육운동 합시다! 이미 저는 글렀지만 좋은 거 오래봐야하니 노안 오기 전에 눈 운동(?)을 시작하겠슴.

그리고 우쒸 나 액션영화 안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나 여자 나오고 여자가 다 때려뿌수는 액션영화 너무 좋아, 열라좋아!!!🤣🤣 생각해보니까 내가 얼마나 폭력적인 사람인데 액션을 안좋아했겠어. 내가 때리는 기분이 아니라서 노잼이었던 거야!!

내 마른 장작 같은 마음의 불씨가 되신 #터미네이터다크페이트 감사합니다🙏 
맥켄지데이비스 사랑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 영화를 보세요.
 왜냐면 흥행해야 2, 3, 4 나오는 데, 지금노 흥행이래ㅠㅠ...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락방 2019-11-18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맥켄지 월드... 웰컴 투 맥켄지 월드.. 우리 이제 천천히 그녀의 필모를 깹시다. 내사랑 ♡

공쟝쟝 2019-11-18 19:5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ㅋㅋㅋ 아 행복해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19-11-18 09: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하트뿅뿅 상태는 아니지만요, 맥켄지 눈부시게 아름답네요. 정말 멋져요!!

공쟝쟝 2019-11-18 19:53   좋아요 0 | URL
다크페이트의 서사와 맥켄지의 비주얼 액션이 느무 조았어요 ❤️

블랙겟타 2019-11-18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도 멕켄지에 대한 정성글이면 한번이라도 봐야겠네요 ㅋㅋㅋ

공쟝쟝 2019-11-18 19:53   좋아요 1 | URL
두번봐도대여!!!

블랙겟타 2019-11-18 21:48   좋아요 0 | URL
곧 가게씀니다 ㅋㅋㅋ

whatyoudo 2019-11-18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부터 상영관이 별로 없어서 아쉽더라고요.. 보고 나와서 바로 다음 회차 예매했어요 맥켄지 너무 멋져요..!

공쟝쟝 2019-11-18 20:31   좋아요 0 | URL
맞아요 ㅠㅠㅠ 흑흑.. 제가 살다살다 헐리웃영화 상영관 걱정을 할줄이야...또르륵...2회차! 알고봐도 재밌더라구여!! 즐감하소서!!
 




영화를 잘 안(못)보는 데, 영화에 대해 쓴 책을 읽는 건 좋아한다ㅋㅋㅋ 왜 일까.. 그것도 이상한 일인데, 영화평론가가 쓴 문학에 관한 글에 밑줄 긋고 노트에 적기까지 하고 있었다... (는 것을 자각하고 뜨아!해 하는 중) 뭐지? 이 흉측한 모순은? 모순에 모순이 더해져 모모순이라 불러야 하는거...?😱

*

그래도 이 문장 참 좋아요.. “당신들이 세상과 싸우면서 망가지는 과정을 통해 얻어낸 아픔을 통해서 우리는 행복해지고 싶다”

*

정성일 평론가님 글 참 잘쓰시네... 정희진 대모님이 칭찬하실만 하구료..ㅋㅋ
여차저차 보람과 게으름찬 일요일이 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