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은 미래 - 당신의 정자가 위협받고 있다
테오 콜본 / 사이언스북스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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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략)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중에서)

 

 

봄. 이 말은 향기로운 꽃향기가 진동하고, 생동감이 넘치던 시간을 잃은 지 오래다. ‘호숫가에 사초(死草)는 시들고, 새들도 노래하지 않는데.’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영국의 시인 키츠는 이상화보다 먼저 봄은 우리가 생각했던 희망의 계절이 아니었음을 예언했던 것일까? 그 이전부터 봄에는 지저귀던 새가 사라지고, 꽃과 풀은 시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이상화가 노래한 것처럼 ‘지금은 남의 땅’이라서 그렇지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걸어갈 수 있는 싱그러운 봄이었다. 지금은 빼앗긴 들도 아닌데 봄이 없다. 레이첼 카슨이 말한 침묵했던 봄의 흔적마저도 없다.

 

『도둑맞은 미래』는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속편이다. 우리가 지금 미래를 도둑맞고 있다는 엄청나고도 끔찍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는 출발지는 다름 아닌 실험실이었다. 인공 화학물질의 위험한 사실을 알기까지 플라스틱을 만드는 기업들의 집요한 은폐와 압력은 그 옛날 레이첼 카슨을 미치광이라고 비웃던 거대 화학회사들과 똑같다.

 

20세기 중후반 들어 세계 곳곳의 생태계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자연 현상들이 하나둘 보고되기 시작했다. 수컷의 생식기능 이상, 새끼들의 원인모를 죽음, 개체 수의 급작스런 감소, 행동 이상. 지역도 다양했다. 미국 영국 덴마크 지중해 일본 할 것 없이 공업화가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곳이면 예외 없이 생태계에 무언가 중대한 결함이 발생하고 있다는 불길한 징후가 드러났다. 『도둑맞은 미래』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플라스틱이 편리한 석유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살인 독극물임을 고발하고 있다.

 

이 불길한 징조의 조각들을 퍼즐처럼 맞춰보던 과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생태계의 반란’이 화학물질과 농약 등에 의해 빚어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 조각들이 지금 인류가 당면한 3대 환경문제 중 하나인 ‘환경호르몬’이라는 퍼즐 그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불과 수년 전의 일이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데 따른 보복이며 인간의 생태계 파괴에 대한 자연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자연의 섭리란 무엇인가. 45억 년이라는 지구의 기나긴 역사에서 지구의 모든 생물체가 생겨나고 살아남아서 계속 번식하며 생존을 이어간다는 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이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상호보완적이며 먹이사슬의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엄청나게 긴 세월 동안 사라져 버리고 다시 생겨난 많은 생명체가 있지만, 인간의 과욕으로 만들어진 인공 물질 때문에 오늘날과 같이 무서운 속도로 종의 절멸이 진행된 적은 없었다.

 

우리가 생활에 다소 편리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여러 가지 항생물질, 합성호르몬제 등은 그 역사가 100년이 안 된다. 이들의 화학적 구조는 생체 호르몬과 비슷하다. 몸속에서 진짜처럼 작용하면서 생식기능 이상, 면역기능 저하,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 성비균형의 파괴, 유방암 전립선암 등을 유발한다. 각종 캔, 컵라면 용기, 플라스틱 우유병과 장난감, 식품포장용 랩에서도 검출된다.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심각성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주의를 소홀히 하기 마련이다.

 

비유컨대, 인간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생체 구조와 기능을 설계하는 것이 유전자라면 호르몬은 그 유전자에 새겨진 악보를 소리로 재생하는 실질적인 연주자인 셈이다. 바로 그 호르몬이 물·공기·음식 따위를 통해 들어온 독성 화학물질에 의해 교란되는 바람에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오늘날 현대문명은 침략하고 착취할 다른 지역이나 대상조차 없어져 버렸다. 현대문명을 떠받들고 있는 자원도 모두 고갈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화학물질을 지상으로 바다로 쏟아낸 결과 인간은 심각한 환경호르몬 질병에 노출되었다. 이제는 물을 비롯한 모든 음식물조차 농약과 화학물질과 호르몬제와 항생제 등에 뒤범벅으로 오염되어 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다.

 

봄의 전령인 제비, 강바닥의 송사리가 살고,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우리네 바람이다. 이제는 그러한 일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서 더욱 안타깝다. 봄은 누군가에게 빼앗겨서 우리 곁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봄을 빼앗아 쫓아냈다.

 

환경호르몬의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 아마도 까맣게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한철이 지난 뒤에 사람들에게 환경호르몬을 아느냐고 물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은 몸에 좋지 않은 화학물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각종 환경호르몬 이상 증세와 듣도 보도 못한 신종 병에 걸려 멸종을 향해 ‘맹목비행’을 하고 있다. ‘지구’라는 비행기 안에는 환경호르몬의 위험성을 찾기 위해 창문을 힐끗대는 과학자들과 ‘오만’의 색안경을 쓴 우리가 느긋하게 앉아 있다.

 

환경호르몬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나 변화가 주는 고통은 느리지만 확실히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생존의 문제이다.

 

탈무드에는 ‘물고기를 주어라. 한 끼를 먹을 것이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 평생을 먹을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이제는 ‘물고기가 번성할 수 있는 봄을 만들어 주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와 네 자손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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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11-2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런 책이 있었군요.
환경호르몬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사실을 환경스페셜을 보고 알았어요.
그 전엔 그저 문제라는 것만 알았지, 그게 구체적으로 왜 문제인지는 몰랐거든요.
환경호르몬이 주로 남성 생식기능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어요.

한번 읽고 싶은데, 분위기가 어째 어려워 보이는 군요.
일단은 찜해둡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cyrus 2013-11-28 19:04   좋아요 0 | URL
환경호르몬의 심각성을 먼저 파악하고, 본격적으로 널리 알리게 된 최초의 책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문이나 내용에서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의 연장선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내용이 주로 전문적이라서 일반 독자가 읽기에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카슨의 책 다음으로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유도하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환경호르몬에 의한 사례가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지 14년이나 되었지만, 언젠가는 이 책도 <침묵의 봄>과 더불어서 환경 문제에 대한 고전으로 오랫동안 읽혀졌으면 좋겠습니다. ^^
 
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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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낙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등에는 혹이 아닌 물주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낙타의 모습이었다 이런 낙타를 남들은 기형 낙타라고 불렀고 어떤 이들은 외등 낙타라고도 했다 낙타는 지금껏 사막을 걸어와 놓고도 도시가 사막이 되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모래가 되어버린 눈물을 흘리며 눈을 껌벅였다 수십년간 사막의 모래를 밟으며 낙타로 살았지만 이곳 도시의 모래는 한사코 밟지 말라고 했다 낙타는 도시의 모래에 충혈됐는지 잠이 들어서도 제대로 눈을 감지 못했다 눈을 껌벅일 때마다 눈에서 쇠붙이 소리가 났다 낙타는 잠이 들어서도 쉬지 못했다 사막이 되어버린 도시에는 집도 오아시스도 없다고 했다 자던 낙타가 잠에서 깨더니 어느 교회의 첨탑에 비친 십자가를 보며 북극성이라고 외치며 따라갔다 낙타는 이 도시에서 아직도 신화를 찾고 다녔나 보다 모래 위에 걷던 낙타는 자꾸 걸을 때마다 모래 속으로 빠져들어 가더니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중략)

 

 

- 김 산 ‘낙타 한 마리’ 중에서 (『상처 있는 나무는 아름답다』수록)

 

 

 

 

 

 ♣ 버거운 짐을 진 저 낙타 보소

 

 

 

 

 

 

 

송필  「실크로드」 2012년

 

 

여기 천근만근 무거운 돌덩이를 진 낙타가 있다. 우악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바윗덩이는 낙타를 짓누를 법도 한데 의외로 낙타는 잘도 버틴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조각은 송필의 작품 「실크로드」이다.

 

작가는 커다란 짐을 이고 사막을 종단하는 낙타처럼 현대인도 무거운 돌덩이를 짊어지고, 삶을 어렵사리 영위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송필은 “때론 우리의 삶이 화려하고 빛나 보이지만, 진실이란 삶에 있어서 더없이 가혹하다”고 토로했다.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짐을 지고 번뇌하는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해 작가는 이 묵직한 조각을 만들었다.

 

사막 극한의 환경을 나름 적응하는 낙타도 지치면 죽기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낙타들 중에는 사막의 열악한 환경 탓인지 간혹 비정한 낙타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낙타들은 새끼를 낳고도 돌보지 않는다. 새끼가 굶주려 죽게 생겼는데도 젖은 물론이고 발로 차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 어미에게 버림받은 새끼 낙타는 결국 불쌍하게도 죽고 만다.

 

 

 

 

 

 

이재찬의 소설 『펀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초반에도 ‘낙타’가 등장한다. 내신 5등급인 고등학교 3학년생 ‘나’, 방인영은 사막 한가운데서 낙타 한 마리 타고 건너고 있다. 모래 먼지는 오늘따라 나의 눈앞을 가리고, 매섭기만 하다. ‘미래를 꿈꾸라고 하면서 미래를 닫아 버린, 멍청한 어른들’의 잔소리처럼 낙타와 나의 숨통을 막히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낙타가 지쳐 보인다. ‘멍청한 어른들’의 말에 지쳐버린 나의 슬픈 족속이여. 너는 이승환의 노랫말에 나오는 ‘붉은 낙타’와 같다. 퍼렇게 온통 다 멍이 든 억지스런 온갖 기대와 뒤틀려진 희망들을 품고 살았지만 혼돈과 질주로만 가득한 터질듯한 머릿속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넓은 사막에는 오직 낙타와 ‘나’만 있을 뿐이다. 아무런 목적 없이 모래벌판을 걷다가 언젠가는 작열하는 햇빛 속으로 사리지고 말겠지.

 

 

 

 ♣ ‘꽃다운’ 나이는 없다

 

올해도 수능시험이 끝나기 무섭게 두 젊음이 세상을 등졌다. 언제나 그러했듯, 각종 언론들은 ‘꽃다운’ 나이의 두 입시생이 입시경쟁의 살벌한 시스템 속에서 피해자가 되었노라고 떠들어댔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도 수능에 비관하여 투신으로 생을 마감해 버린 두 소녀에 대한 애도를 아끼지 않았다. 아! 우리의 아이들이 꽃다운 나이에 이렇게 죽어가도 되는 것일까, 안타까워하면서. 오늘 수능 시험 등급컷과 채점 점수가 공개됐다. 또 다른 경쟁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수능 등급에 크게 실망하는 수험생들의 곡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정말 그 아이들의 나이는 ‘꽃다운’ 나이인가? 초등학교, 아니 유아 시절부터 서서히 살인적인 교육열의 ‘매트릭스’에 갇혀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피 말라 가는 입시 경쟁으로 보내야 하는 그 아이들의 나이가 정말 꽃다운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입시전쟁이라는 잔인한 홍역을 치르고 그네들이 안착하게 되는 대학이라는 곳은 또 어떠한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 1년 정도 자유 아닌 자유를 만끽하고 나면 청춘이니 낭만이니 하는 말은 곧 사치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에 압도되어, 그 ‘꽃다운’ 나이라 일컬어지는 시절의 젊음들은 고시촌으로, 영어 학원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그뿐이랴. 소위 명문대라 일컬어지는 곳에 진입하지 못한 젊음들은 평생 천형처럼 붙어 다닐 ‘비명문대생’이라는 딱지 때문에 극심한 열패감에 허덕일 것이다. 그네들의 대부분은 일찌감치 자기 분수를 깨닫고 ‘낮은 데로 임할’ 것이며, 그런 삶의 길을 거부한 젊음들은 또다시 살벌한 입시전쟁터로 자신의 몸을 던질 것이다. 그중 몇몇은 뒤늦은 ‘승전보’를 알리며 명문대생이라는 훈장을 달고 움츠렸던 어깨를 펴겠지만, 나머지들은 또다시 패배의식만을 가득 안은 채 제자리로 돌아와야 할 것이고, 그렇게 다시 돌아온 캠퍼스에서도 그들은 그저 조용히 고개 숙이고 다니며 ‘돌아온 탕자’라는 자의식에 괴로워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황량한 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그들에게서, 어른들은 도대체 무슨 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이 나라의 아이들은 다만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건너서 허상으로만 존재하는 신기루를 향해야 하는 낙타의 운명을 강요받았을 뿐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날 운명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는데, 그런 그들을 향해 어른들은 무슨 낯으로 ‘꽃다운 나이’라 일컫는 것일까.

 

『펀치』에 등장하는 고등학교 3학년 주인공 방인영의 모습을 보면 ‘꽃다운 나이’라는 멋진 표현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  방인영은 자본주의 계급 사회의 논리를 폐부 깊숙이 체득하고 있다. 5등급은 내신 성적과 모의고사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머리에서 외모까지 5등급은 영원히 따라다닐 꼬리표다. 그녀는 멍청한 어른들’의 한국 사회를 매우 직설적으로 공격하고 비꼰다. 그리고 예민한 감성은 쌓일수록 극단적인 감정으로 변하고, 무시무시한 펀치 한 방 날릴 준비를 한다.

 

교회에 헌신적이며 딸의 인생을 제 뜻대로 끌어가고자 다그치는 엄마,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위해 법조문을 연구하고 세 치 혀를 놀리는 아버지, 학생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여기는 학교 모두가 못마땅하다. 참다못해 들고일어난다. 조금 과격한 방식이다. 부모를 죽여서 자유와 독립을 얻기로 한 것이다. 방인영에게 ‘살인’은 단순히 부모에 대한 무시무시한 증오를 풀기 위한 감정의 배출이 아니다. ‘멍청한 어른들’이 만들고 강요하는 사회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잘못된 비상구다. 영원히 닫힐 줄 알았던 비상구를 열게 만든 열쇠가 바로 부모에게 향하는 흉기였다. 그녀는 이러한 사회가 낙인 찍어주는 무능력한 ‘탕자’가 되길 두려웠고, 원치 않았던 것이다.

 

 

 

 ♣ 죄 없는 자,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독일 극작가 발터 하젠클레퍼의 『아들』이라는 희곡에 보면 의사인 아버지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헌신한다. 저축해 놓은 돈조차 없으면서 비싼 과외수업을 시켰다. 하지만 웬걸.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거듭하며 아들은 빗나간다. 어느 날 아들은 심하게 대든다. “아버지가 바라는 권력과 재력을 다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강요하지 말라!”고. 그리곤 아버지 가슴에 권총을 겨눈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숨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살인'과 '가족'이라는 단어 사이의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 간 살인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가정은 사랑의 공동체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상처를 많이 주고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은 집단이다. 이러한 집단 환경에 길들일수록 마음의 상처는 사회에 나가서도 쉽게 치유할 수 없다. 고통을 그대로 안고 간다. 이것을 치유하지 못해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이나 피해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돈’, ‘성적’, 그리고 경쟁을 강요하는, 인간성 없는 황량한 사막 같은 사회에서 비정한 젊은 낙타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지겨운 것을 참으며 사는 사람을 낙타에 비유했다. 등짐을 가득 지고 메마른 사막을 지나는 낙타처럼 부담과 의무에 매여 사는 비주체적 인간을 일컫기 위해서다. 니체는 낙타를 경멸하면서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부모든 신이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명령에 따라 사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와 창발성에 따라 사자처럼 살라고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낙타로 키우면서 사자처럼 살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늠름하고 올바른 사자가 아닌 애정에 굶주린 난폭한 사자로 키우고 있다. 언젠가는 그 사자는 자신을 키운 부모를 향해 날카로운 엄니와 송곳을 내밀지도 모른다.

 

방인영은 자유로운 ‘붉은 낙타’가 되지 못했다. 냉소와 증오로 가득 찬 사자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죄에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연덕스럽게 평상시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노래에 듣기만 할 뿐이다. 그녀의 삶을 위로해줄 위안거리는 오직 에이미의 음악만이 유일하다.

 

그녀의 살인은 용납할 수 없는 범죄지만,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는 부모를 쓰러뜨리는 사자가 되었어도 그녀를 용서하거나, 따뜻한 손길을 건네줄 사람은 없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꽂은 채 그녀는 스스로 세상과 단절할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 소설을 심사한 박상원 소설가의 말처럼 ‘잘 썼다’라고 표현해서 독자의 감성 앞에 휘두르는 예리한 문장을 칭찬해줘야 할까? 아니면, 독기 서린 젊은 살인자에게 돌을 던져야 하는 걸까?

 

이재찬의 소설을 읽고 난 뒤에 어떻게든 생각하는 건 독자의 자유다. 그러나 방인영에게 돌을 던질 준비는 하지 말자. 뭐, 이 소설을 읽고 벌써 돌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잠시 손에 쥐고 있는 돌을 내려놓고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 다음에 성서 속 유명한 구절을 떠올려 보라. 죄 없는 자는 그녀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는 방인영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낙타를 사자로 키우게 만들도록 성공을 강요하고, 경쟁을 부추긴 ‘멍청한 어른들’이니까. 또 방인영의 살인 동기와 과정을 두 눈 똑똑히 지켜봤다. 그녀의 분노를 키우게 만든 일차적인 원인에다가 살인 방조죄 추가. 우리는 작가 특유의 속도감 있는 이야기 전개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그녀의 공범자가 되어 있다.

 

시간이 서서히 흘러가면 어른들은 망각이라는 편리한 장치 덕을 톡톡히 보며 또다시 이 살벌한 ‘계급투쟁’ 전선에서 자신의 자식만은 승자가 되기를 은근히 고대할 것이다. 이 땅의 어른들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이러한 절망적인 행태에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저 1년에 몇 번씩 악어의 눈물이나 흘릴 생각이라면, 이제 그 아이들에게 ‘꽃다운’이라는 수식어는 붙여주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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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27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에 한글공부 하다가 욱 해서 아이참! 이건 좀 알아야지! 소리를 버럭 질러서 딸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게 한 범인으로서 정말 이 글을 읽고 부끄럽기 그지 없네요.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에 겨우 한글을 뗐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 하나 없었는데- 사이러스님 글 읽고 반성 또 반성. 오늘은 즐겁게 한글공부를 해야겠습니다.

또 하나, 서울대 나온 전 애인이 제가 서울대 출신이 아니란 걸 알고 입을 삐죽거리며 공부 안 하고 날라리처럼 놀았구만- 하여 미친년처럼 게거품 물며 정신교육 좀 받아야겠노라고 지랄 떨었던 기억도. 근데 사이러스님 최근 알라딘에서 읽은 리뷰 중에 가히 으뜸인걸요. 서울 언제 오세요? 술 한잔 해요.

cyrus 2013-11-27 20:26   좋아요 0 | URL
한글은 가르치려고 하기보다는 자주 대화를 해보면 저절로 늘지 않을까요? 물론 가르칠 땐 확실히 가르쳐야죠. 제가 미혼이라서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 울엄니도 한글이든 무슨 공부든 무조건 혼내면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쳤던 기억이 나서.. 너무 심하게 다그치는 교육은 별로라고 생각해요. 아이에게는 상처받고, 엄마 입장에서는 홧병 생기고.. ㅎㅎㅎ 12월에 서울 갈 일이 생겼어요. 이번에 진짜 얼굴 봐요. 조만간 연락할께요 ^_^

수이 2013-11-27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화 안 내고 한글공부했어 ㅋㅋㅋ 스파르타식 나도 싫다 했는데 내 성향은 스파르타식인가봐 ㅠㅠ 12월에 봐! 이번엔 꼭 미리 연락하구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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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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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프로이트의 마지막 인터뷰

 

오래된 전통을 보존하는 도시에는 꼭 크고 작은 박물관이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대영박물관처럼 크고 유명한 박물관이 있는가 하면, 위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도 있다. 이런 작은 박물관들은 대개 그 위인이 생전에 거처하던 집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경우인데, 위인이 생전에 쓰던 가구는 물론이고 옷과 책들, 모자와 펜 한 자루까지 세심하게 보관해놓은 곳이 많다.

 

이와 같은 개인 박물관 중에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박물관이 있다. 그의 박물관은 학자와 문인이 많이 사는 런던 북부의 햄스테드에 숨듯이 자리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유대인인 프로이트는 만년에 오스트리아가 나치스에게 점령당하자,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런던은 서른 번이 넘는 구강암 수술로 병색이 완연한 노학자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프로이트는 생의 마지막 1년을 런던에서 지내다가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 메어스필드 가든 20번지가 지금의 프로이트 박물관이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가면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망명한 1938년 겨울, BBC 라디오는 이 집에서 프로이트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정신분석학을 처음 주장한 이래 나는 많은 이에게 비난과 모욕, 핍박을 받았다. 이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리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과 함께 지성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3대 혁명으로 꼽힌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이성의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인간이 무의식의 노예에 불과하단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프로이트의 생애와 학문 세계를 조망한 책은 수없이 많이 나왔다. 프로이트 연구자들이 인정했던, 가장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영국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총 3권, 1500페이지에 달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책에도 나오듯이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 생전 그의 제자이자 추종자로, 국제 정신 분석 학회를 조직한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프로이트 옆에서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고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제자이고 측근이기에 객관적으로 프로이트의 삶을 조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니스트 존스의 책보다 보다 실증적이며 균형적인 시각으로 프로이트를 접근한 책이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 인생>이다. 900페이지가 넘는 피터 게이의 책은 이미 2년 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피터 게이는 프로이트의 논문과 저서, 편지를 샅샅이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에게 정신 분석을 받았던 환자를 찾아가 인터뷰하는 등 발로 뛰며 이 평전을 썼다.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직접 정신 분석을 공부해 프로이트의 내면을 읽어내려 시도했다는 것. 이를 토대로 프로이트가 남긴 사소한 농담이나 실수에서도 행간을 읽어내는 방식으로 프로이트의 체취를 책 속에 담아냈다.

 

그러나 이 책마저도 프로이트를 설명하기에는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다. 그는 ‘반(反)철학사’라는 제목의 6권짜리 책을 통해 전통철학에 반기를 든 비주류 철학자이다. 특이하게도 그가 프로이트 숭배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셸 옹프레는 피터 게이 못지않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프로이트에 관한 모든 자료를 근거로 소개하면서 신랄하게 자신의 숭배자를 까발린다. 프로이트가 무의식과 욕망이 심리에 미치는 영향을 규명하며 인간 내면의 '불편한 진실'을 낱낱이 까발렸다면 환자의 정신을 분석하던 이 위대한 유대인 자신의 심리상태는 과연 어땠을까.

 

 

 

 ♣ 프로이트와 비밀의 열쇠

 

작품과 작가의 삶은 무관하거나 혹은 그래야 한다는 ‘몰개성’ 이론이 글쓰기 일반을 대변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것은 훌륭한 작가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었지만 작가의 삶의 편린들이 작품 해석에 불필요하게 개입하는 것을 방지하는 나름의 유용함도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의 정신분석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에 대한 소소한 것까지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전적 연구의 한 구절에서 자신의 삶과 정신분석의 역사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있다며 이렇게 고백했다.

 

 

 

 

 

살바도르 달리 「관료의 프로이트적 초상화」 1936년

 

불멸의 그리스와 현대의 차이에는 프로이트만이 존재한다. 불멸의 그리스 시대엔 신플라톤 학파의 순수한 인체가, 현대에는 정신분석학에 의해서만 열리게 되는 서랍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

 

 

 

“정신분석과의 관련성을 배제한다면 나의 개인적 경험들은 아무런 흥미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프로이트의 개인사를 자세히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을 이해하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아마도 프로이트는 자신의 손에 몰래 쥐고 있는 이 ‘열쇠’를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하기가 꺼리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이론은 철저한 자기분석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죽어서 자신의 이름만 남길 원했지만, 영원토록 숨기길 원했던 비밀의 ‘열쇠’는 무덤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그 열쇠는 지금 자신을 숭배했던 철학자 미셸 옹프레의 손에 쥐어졌다.

 

옹프레는 정신과 의사가 되어 프로이트를 상담용 소파에 편히 눕게 한다. 혹시 프로이트가 당황할까봐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시가 한 대를 슬쩍 내밀어본다. 드디어 그가 ‘자유연상’을 하기 시작하면 옹프레는 굳게 잠겨 있는 프로이트의 책상으로 다가간다. 그러면서 책상의 서랍에 숨겨진 물건 찾듯이 그 안에 보관된 ‘프로이트 엽서’에 적힌 지적 우상의 내면을 과감히 드러낸다.

 

 

 #1 첫 번째 서랍 :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책상 가장 큰 비중을 자지하는 서랍 하나를 열어 보면, ‘아버지’가 있다. 그의 생애에서 아버지가 차지한 자리는 결코 작지 않다. 프로이트가 인간 사회의 근원을 이룬다고 생각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성(性)적인 환각이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설에서 시작된다. 즉 아버지를 (어머니를 사이에 둔) 경쟁자로 증오하는 남자아이는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 것이라며 불안해하는데, 여성의 생식기를 관찰함으로써 거세의 실제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경쟁하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아버지를 자기와 동일시하고 내면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아버지 야콥 프로이트는 보헤미아에서 빈으로 이주한 상인이었다. 장사는 동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으나 아이가 많은 프로이트 일가는 늘 가난에 쪼들렸다. 어느 날 소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아버지가 젊을 때, 새 모자를 쓰고 거리를 걷다가 한 독일인에게 모욕을 당한 이야기였다. 독일인은 일부러 야콥의 모자를 떨어뜨리며 “이 유대인 놈아, 인도에서 내려가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소년 프로이트는 당연히 아버지가 맞서 싸웠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불평 없이 차도로 내려가서 진창에 떨어진 모자를 주웠을 뿐이었다. 당시 동유럽에서 유대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건 다반사였으나 프로이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은 아버지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이상형이었던 남자’로 생각하던 프로이트를 실망에 빠뜨렸고 후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그의 정신분석학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아버지와의 개인적 경험과 인상을 토대로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옹프레는 근친상간에 대한 욕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프로이트는 콤플렉스의 전시장과도 같았다. 핍박받는 소수 민족 출신에다가 변변치 못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니 질투와 그로 인한 죄의식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2 두 번째 서랍 : 자기검열

 

프로이트는 유명해지기도 전인 1885년 벌써 14년간의 모든 메모, 편지, 논문 발췌문, 작업 중 원고를 일차로 없애버렸고, 이후 같은 자료 파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심지어 한번은 젊었을 때 “동성애적 경향”을 이야기할 정도로 절친했다가 결국 절교하게 된 친구 빌헬름 플리스에게 보낸 편지를 플리스 사후 미망인에게서 돈을 주고라도 사들이려 했다. 물론 없애버리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전기 작가들을 골탕 먹이려고 그렇게 없앤다고 짓궂게 농담을 했다. 진심이 무엇인지야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을 잘 알지도 못할 것이 분명한 전기 작가에게 편집당할 재료가 된다는 것이 싫었을 수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의 편집권을 둘러싼 투쟁이 전공의 하나인 그가 자신의 삶의 편집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삶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남에게 노출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그래서 말하자면 자신의 삶에 대한 위생 처리를 해 버린 것이다. 생전의 프로이트의 태도를 익히 보아온 존스가 프로이트 사후에 아무리 용기를 내 전기를 써도, 스승에 대한 존경과 그가 내린 무언의 지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3 세 번째 서랍 : 오류, 조작

 

여전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제도권 학계에서 완전히 수용되지 못하거나 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다. 놀라울 만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검증 가능성은 여전한 시빗거리다. 정신분석의 유일한 도구가 언어이고, 대상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하는 언어의 한계로 인해 이런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지만 지나치게 직관에만 의존한 프로이트의 어처구니없는 추론 또한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대표적인 것이 프로이트가 분석한 도라의 사례다. 그에 따르면 도라는 자신의 아버지, 아버지를 간호하는 내연녀, 내연녀의 남편 K씨 모두와 동일시하며 동시에 증오한다. 프로이트는 도라와 K씨와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작용(자극) 반작용(흥분)이라는 생리, 물리학적 관점으로만 접근한다. 이처럼 기계적이고 경직된 해석과 가부장적인 권위로 환자의 주장을 묵살하는 독단,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을 성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방식은 그의 측근들조차 돌아서게 만든 주요 원인이었다. 그에게 진찰받고 난 1년 후에, 도라의 정신 상태는 더욱 피폐해졌으며 몸이 극도로 허약해지기 시작했다. 적어도 임상 치료에 관한 한 정신분석은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수많은 치료 실패와 재발 사례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프로이트의 환자들에 관한 사례들은 프로이트가 직접 조작하고, 환자를 가상으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유명한 환자 중 한 명인 ‘안나 O’가 정신분석으로 치료됐다는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늑대 인간 사례로 알려진 러시아 청년 세르게이 판케예프도 프로이트로 인해 치료된 것이 아니라 92세에 사망하기까지 70년간 10명의 정신분석가에게 치료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 네 번째 서랍 : 코카인과 담배

 

과거에 코카인이 만병통치약으로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다. 주범은 놀랍게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였다. 그는 아편 중독에 시달리던 동료 의사를 코카인으로 10일 동안 치료한 후 "완전히 해방시켰다"며 코카인을 중독 위험이 없는 기적의 약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코카인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 동료 의사는 나중에 코카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5년간 코카인을 규칙적으로 흡입하면서 “중독성 없이 지속적 행복감을 제공한다”는 예찬과 함께 주변에 권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애연가였다. 죽기 전까지 말 그대로 줄담배를 피웠다. 그로 말미암아 말년에 구강암으로 서른 번의 수술을 거듭하면서도 그는 담배를 결코 놓지 않았다. 치료제로 복용하던 코카인에는 중독되지 않았던 그가 오히려 담배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시가는 그에게 지적인 자극제였고, 프로이트는 그것 없이 정신분석학의 탄생은 불가능했다고 고백했다.

 

 

 

 ♣ “나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프로이트 박물관에 흘러나오는 프로이트의 육성에서 마지막 한 줄의 문장이 인상 깊다. “나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말은 프로이트의 평생을 압축한 것일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인생은 탄생부터 사망까지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조용해 보이는 이 남자는 무쇠보다 더 강한 의지로 모든 장애물에 맞섰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념을 가진 인간은 무한정 강하며 결코 죽지 않는다.” 실제로 그랬다. 유대인이라는 태생도, 교수의 길을 포기하게 만든 가난도, 정신분석학에 쏟아진 학계의 비난과 공격도, 빈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도, 심지어 죽음마저 그를 무릎 꿇릴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적을 만나면 더욱 강해지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강철 같은 의지를 지녔더라도 그 역시 한계가 있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무의식을 분석해 인간 심리의 저변을 해석해내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 프로이트도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그 자신이 콤플렉스, 신경증(히스테리, 공포불안), 도착증 환자였던 셈이다. 학문적 기여도에 비해 오랜 세월 학계의 변방에 남아있었던 그는 세상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해 주기를 바랐고 노벨상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다. 상담용 소파에 누운 프로이트의 이런 이야기를 그 자신이 직접 들었다면 어떤 진단을 내릴까? 분명한 점은 프로이트도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미셸 몽프레의 책은 매우 논쟁적이어서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에겐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사상가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될 수 있다는 기본적 인식을 전제한다면, 그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는 프로이트의 생전이나, 또는 그의 사후 줄기차게 따라다녔던 ‘비판’의 연속선에서 이해할 때 유익할 것이다. 물론 이 ‘비판’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후예들이 대답을 해야 하겠지만. 옹프레의 프로이트 평전이 나오더라도 그와 프로이트 추종자들 간의 투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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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11-2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쩐지 털보들의 나날이로군요.

cyrus 2013-11-26 22:56   좋아요 0 | URL
요즘 형님도 수염이 잘 나는가보죠? ㅎㅎㅎ

루쉰P 2013-11-2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여전히 독서에 날을 새우고 진보하는 청년으로 지내고 계시는 군요 ㅎ
너무 오랜만에 와서 인사 드리죠? ㅋ
프로이트도 저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에여.
저도 항상 저의 무의식에 관심이 많거든요.
공부한다고 책상에 영어 책을 피면 15분 뒤엔 전 정확하게 휴대폰을 들고 웹툰을 보고 있어요...
왜 일까...대체 내 무의식의 무엇 땜에 이럴까...
이런 생각을 곧잘 합니다 ㅋ
여전히 좋은 글이에요 ㅋ 왠지 나중에 교수님 하실 거 같은 포스 ㅋ

cyrus 2013-11-26 22:5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쉰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요즘 저도 프로이트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서
<꿈의 해석>도 조금씩 읽어보고 있는 중이에요. 심오하면서도 수긍가는 부분도 있지만,
융 심리학도 공부해볼만 합니다. 저도 이번 학기 졸업반인데 딴 짓하고 싶은 생각이 많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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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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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워라

더 이상 분노할 수 없다면

내 영혼 죽어 있는 것 아니냐

완장 찬 졸개들이 설쳐대는

더러운 시대에 저항도 못한 채

뭘 더 바랄게 있어 눈치를 보고

비굴한 웃음 흘리는 것 아니냐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이제 그만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차라리 파락호처럼 떠나버리자

아아 새들도 세상을 뜨는데

좀비들만 지상에 남아 있구나

 

- 정희성 「부끄러워라」-

 

 

 

 

 ♣ 정의 따윈 잊고, 눈 감으며 지내라고?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깔아라. / Don‘t look ’em in the eye 그들과 눈을 맞추지 마라. (…) Look down, look down 눈을 내리깔아라, 눈을 내리 깔아라. / You‘ll always be a slave 너는 언제나 노예일 뿐이니까.

 

영화 <레 미제라블>에서 많은 이들이 손꼽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가 거대한 함선을 이끄는 죄수들의 절규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첫 장면이다. 웅장한 멜로디에 비참함과 절망감이 사무치는 가사가 흘러나오는 이 장면을 볼 때면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 ‘부정’(不正)과 ‘부패’ 앞에서 ‘정의’를 푹 숙이고 눈을 감는 비겁한 공직자와 대중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법의 상징으로 오늘날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이 그리스 신화 속의 ‘정의의 여신’ 디케(Dike)다. 디케 조각상은 대개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는 칼이나 법전을 쥐고 있다. 저울은 형평성을, 칼은 엄정함을 나타낸다. 디케는 또 눈을 감거나 안대로 가리고 있는데, 이는 판결에서 주관성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서울 세종로의 옛 대한변호사협회 자리에는 지금도 한 손에 저울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집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하는 모습의 디케 상이 서 있다. 옛 사법연수원에도 눈을 지그시 감은 디케 상이 있었다. 지금 우리 대법원의 로고 또한 디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상징은 상징일 뿐, 실제 법집행 과정은 그다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들의 비리와 오류를 덮으려고 자신들이 써야 할 안대로 국민의 눈을 가리려고 한다. 한국의 디케는 눈을 가리지 않았다. 실체적 진실만을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이겠지만 시야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오게 마련이다.

 

 

 

 ♣ 범죄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무식한 지도층들

 

법(法)은 순리다. 법은 물 수(水) 변에 갈 거(去)로 이뤄진 글자다.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치를 담고 있어 모두 상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벗어나면 법을 어기는 것이 된다.

 

국정원 댓글 사건이 법적으로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물고 늘어지는 갈등만 이어지고 있다.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채 김학의 전 법무부차관이 무혐의를 받음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한 파렴치한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법에 따라 재판하는 판사들이 법, 곧 순리를 거스르겠다는 의미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검찰은 더하다. 검찰은 ‘정의롭다’는 말을 즐겨 쓴다. 정의는 바른 도리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름은 흑백이 아니다. 바를 정(正)은 하나(一)에 이름(止)을 말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누구나 같은 결론에 이름을 뜻한다. 정권을 비판하는 일에는 날선 칼을 들이대고 지난 정권의 인사들만 잡아들이는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있다. 검찰은 서민들의 범죄에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만 힘센 이들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국가 발전에 공헌한 점, 공직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점, 기업 운영으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점 등의 이유로 정치인과 경제인에 대해 솜방망이 구형을 했다. 법은 거미줄과 같아 힘이 없는 이들은 붙잡지만 힘센 자는 찢고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 현실이 그 짝이다. 법이 그물이 되어 힘센 자는 꽁꽁 묶고 작고 힘없는 이들은 성긴 구멍으로 빠져나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법은 그물보다는 거미줄에 가깝다. 또 검찰에는 ‘정의롭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국정원 댓글 사건 당시, "보수주의자로서, 고백하고 요구하고 경고합니다"라는 글을 올리고 강단에서 물러난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예전에 진행했던 시사 프로그램 제목대로 ‘정의’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 법을 집행하는 소수 지도층에게 날카로운 돌직구를 날린다.

 

우리나라 지도층들은 너무 무식해요. 그 사회의 시스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지와 신뢰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배 체제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당장 눈앞의 불이익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죠. 장자연 사건, 김승연 회장 사건, 전경환 사건, 제가 지적하는 문제들이 그런 사건이거든요.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고, 오로지 모르고 있는 것은 수사하는 경찰, 검찰, 범원뿐인 것 같아요. (중략) 조금만 똑똑했더라면 바로 그 앞에서 자신의 병든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자신들의 한 부류이자 동료일 수도 있는 해당되는 범법 행위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거죠. (중략) 그렇게 우리 제도와 시스템을 믿어달라는 것이 보수의 모습인 건데요. 우리나라는 그게 아니고, 거꾸로예요. (15~16쪽)

 

결국 범죄에 대한 국가의 인식 부재는 우리 사회 전체에 통용되어야 할 ‘정의’과 ‘도덕’의 의미가 무색해지게 만들며 우리의 상식에 벗어난 거대 국가 범죄를 끊임없이 잉태한다는 것이다.

 

 

 

 ♣ 범죄자, 괴물이 아닌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낸 병

 

전문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한국적 범죄의 특성과 연쇄살인의 사회적 배경부터 시작해 불법 도박과 스포츠 승부 조작, 공소시효, 오원춘 사건, 국가 범죄에 가담한 경찰 등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소재를 제시한다. 현직 경찰관으로도 일했던 국내 최초의 프로파일러이자, 연쇄살인 등 다양한 범죄를 분석해온 표창원 전 교수를 통해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다음 돌직구 질문의 표적지는 독자에게 향한다. 이웃집에서 벌어진 단순 강도에서부터 거대한 국가기관의 부정까지, 범죄를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사회에서 혹시 당신도 공범이 아니냐고. 

 

그는 범죄자가 늘 우리 주변에 있다고 말한다. 나와 상관없는 '괴물'이 아니라는 의미다. 표 전 교수는 프로파일러로 활동했을 때 연쇄살인범, 영아살해범 등 다양한 범죄자를 만났다. 그들은 대부분 기가 꺾인 상태였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애정을 못 받아본 사람들이라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마음을 열었다. 

 

표 전 교수는 연쇄살인의 사회적 징후가 뚜렷하면 지진ㆍ태풍 대비에 맞먹는 사회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연쇄살인은 태풍 한번 부는 것 이상의 사망자가 나온다. 2000년대 들어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다. 별도의 괴물이라기보다 사회병리 현상이 돌출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빈부격차, 낮은 취업률, 학교 폭력 등이 그 징후다. 태풍에 대비하는 것처럼 대응할 필요가 있다. 성장보다는 복지와 분배에 집중하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이상 성격자를 찾아 치료하는 등의 예방책이 있다.

 

 

 

 ♣ 범죄 앞에서 부인하는 대중의 침묵

 

‘과연 당신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습니까?’ 표 전 교수가 독자들에게 향하는 묵직한 돌직구 같은 질문에 용기 있게 받아 칠 수 있는 독자가 있을까?

 

한 여론조사에서 ‘대한민국 사회가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73.8%가 ‘공정하지 않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청소년 대상 조사에서는 44%가 ‘10억원을 준다면 징역 1년 정도 살짓을 저지를 수 있다’라고도 응답했다. 모두가 퍽퍽하고 삭막한 불신과 의심, 경계, 피해 의식의 악순환 속에 빠져 있는 듯하다. 이런 사회적 불합리와 부조리들이 사람들에게 잠재된 분노를 만들고 다시 이것이 왜곡된 방향으로 무서운 범죄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가령 당신은 직장에서 당신의 인사고과 책임자가 한 직원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하는 걸 언뜻 들었다. 또는 마을에서 나치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총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치자.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이렇다. ‘눈감아 버린다/못본 체한다/보고 싶은 것만 본다/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모르는 게 약이다/그건 나와 무관해/침묵의 음모/괜한 평지풍파 일으키지 마라/전체 사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어/차라리 몰랐다면/외면해 버렸지/심지어 자신도 인정하지 않았어.’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스탠리 코언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경험의 밑바탕에는 '부인'(不認)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부인을 심리적 방어기제로 개념화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편한 사실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아도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가리킨다. 인권을 침해한 가해자뿐만 아니라 이를 보거나 인지한 관찰자, 심지어는 피해자조차도 때로는 사실 정보를 어떤 식으로든 부정하거나 제쳐두거나 재해석하게 된다.

 

인권을 해치는 범죄와 이에 따른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재생산하는 데에는 가해자와 관찰자(방관자)의 완고한 ‘부인’에 가까운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가해 권력의 인권침해 부인은 이를 방관하는 일반대중의 태도와 무관할 수 없으며, 일반대중의 부인은 가해 권력의 행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눈감는 상태, 곧 ‘부인’과 ‘침묵’은 또 다른 국가 범죄에 냉소하고, 제2의 신창원, 오원춘을 등장하게 만든다.

 

 

 

 ♣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를 위한 표 전 교수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정의를 제대로 세우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단다. 이건 초등학생 때도 배웠는데도 이상하게 우리는 실전에서는 써먹지를 못한다. 오히려 나쁜 짓은 자기에게 이로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따라 하려고 한다.

 

표 전 교수는 또 보수와 진보의 좌우 갈등도 폭력을 키우는 요인으로 본다. 극단적인 대립이 폭력을 낳는다는 의견이다. 진보와 보수가 조금씩 자기 견해를 양보하고 범죄에 대한 균형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해소된다면 국가 공권력· 강자 등의 도덕 윤리 회복이 원활해진다. 권력과 정부가 솔선수범하고 엄정한 법규를 세워야 폭력에 대한 근본적 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나오는 부정과 불의에 우리는 둔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덮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믿고 싶어 하며,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외치는 나라다. 불의에 침묵하고 부인하는 국가의 전형이다. 영국의 보수주의 대표 정치이론가이자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선한 자의 침묵은 악의 승리를 도와준다. 침묵은 곧 동조고 방관이며 우리 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조그마한 관심과 배려에 대해 침묵과 외면으로 두 눈을 내리 깔고, 한 발 물러 서있을 때가 많다. 사람은 되지 못해도 부정과 불의에 둔감한 좀비가 될지 말자. 우리 사회에 대해 주변에 대해 관심과 행동보다 침묵과 방관으로 악의 승리를 도와주고 있는 공범 역할을 하고 있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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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므 파탈 - 치명적 여인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이명옥 지음 / 시공아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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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에게 가장 약한 존재는 남자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만 보면 사랑하고 싶은 본능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싶어 하고 때문에 미모의 여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자의 유혹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여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과 맞설 수 없었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세상을 쥐고 흔드는 남자를 유혹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녀들에게 미모는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미모의 여자들은 남자의 소유욕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유독 아름다운 여자가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여자들을 팜므 파탈(Femmes fatales)이라고 한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레이디 릴리트」 1868년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의 1868년 작 「레이디 릴리트」는 19세기말 유럽 문화를 지배했던 팜므 파탈의 원조 격 그림으로 꼽힌다. 릴리트는 태초에 이브가 생겨나기 전에 아담의 여자다. 릴리트는 이브처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지지 않고 흙으로 빚어졌다. 그녀는 정숙한 아내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음탕한 릴리트의 유혹을 걱정한 하나님은 아담을 보호하고자 그녀에게 벌을 내려 낙원에서 추방해버린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브를 선사한다. 유대신화 속 최초의 여성인 릴리트가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 모습의 이 그림은 오늘의 영화 및 광고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팜므 파탈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다.

 

 

 

 

 

콜리어  「릴리트」  1892년 

 

 

존 콜리어의 ‘릴리트’는 낭만파 시인 키츠의 《라미아》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키츠는 그의 시에서 릴리트를 황금빛과 초록빛 그리고 청색의 무늬가 있는 뱀으로 비유했는데 콜리어는 릴리트의 악녀 이미지를 뱀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 있는 벌거벗은 릴리트는 뱀에게 몸이 감긴 채 황홀경에 빠져 있다.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여자와 뱀을 함께 그려 넣었다. 그는 릴리트의 유혹을 갈망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남자의 이중성을 표현했다. 뱀은 인간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동물이지만 뱀과 여자를 연결시켜 성적인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 1614~1620년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인 유디트는 음탕한 릴리트와는 전혀 다른 여인이다. 잔인하고 야만적인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는 이스라엘의 도시 베툴리아를 침략한다. 마을이 홀로페르네스 군대에 철저히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미망인 유디트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기로 한다. 유디트의 미모와 달콤한 말에 속아 홀로페르네스는 그녀를 연회에 초대한다. 홀로페르네스에게 술을 먹여 유혹한 유디트는 그가 잠들자 칼을 꺼내 그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스라엘은 그녀의 행동에 용기를 얻어 앗시리아 군대를 물리친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 1901년

 

 

나라를 구한 여인 유디트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화가들이 즐겨 찾는 주제였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는 유디트를 성적 대상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작품 「유디트 1」에서 유디트를 남자의 목숨을 빼앗은 요부로 표현했다. 이 작품 속의 유디트는 왼쪽 가슴을 노출한 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다. 넓은 금빛 목걸이를 하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은 굳어 있지만 몸은 여성으로서 매력을 뽐내고 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의 제목을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라고 표시했지만 그가 표현한 유디트는 사실 살로메에 가깝다. 목이 베인 세례 요한의 입술에 키스를 하는 살로메의 모습과 섹스를 무기로 적의 머리를 베어버린 유디트의 모습이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살로메 -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파멸의 여자

 

 

 

 

 

오브리 비어즐리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삽화 」 1894년

 

 

 

《구약성서》에서 유디트가 나라를 위해 남자를 유혹했다면 살로메는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헤롯왕의 의붓딸 살로메는 그가 베푸는 만찬에서 매혹적인 춤을 춘다. 그 춤에 반한 헤롯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한다. 성서에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은 어머니 헤로디아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 《살로메》에서는 주인공 살로메가 세례 요한을 사랑하지만 세례 요한은 그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 복수심에 불탄 살로메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헤롯왕을 유혹하고 그 대가로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다.

 

 

 

 

 

귀스타브 모로 「환영」 1875년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을 받아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로메를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 귀스타브 모로(1826~1898)의 「환영」이다.

 

이 그림에서 살로메는 가슴을 노출한 대담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면서 화면 중앙에 있는 세례 요한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세례 요한은 피를 흘리며 살로메를 바라보고 있다. 세례 요한의 얼굴 주변에는 금빛 후광이 둘러져 있다. 화면 왼쪽 살로메의 매력에 빠져 있는 헤롯왕은 의자에 앉아 있다. 이 작품에서 살로메는 비극적 사랑에 빠진 냉혹한 여인의 모습보다는 이국적인 배경 위에 농염한 아름다움과 유혹적인 춤으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사실 팜므 파탈은 사회적으로는 여성을 옥죄던 관습과 도덕에서 벗어나 권리와 욕망을 요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남성중심사회의 반발이자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그저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수동적 존재였던 여성이 그러나 실제로 거부할 수 없는 마력으로 남성을 주도해 치명적 불행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남성의 공포가, 세기말 유럽사회를 달구었던 팜므 파탈 논의에 담겨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여성들의 목소리가 수면에 올라오면서 특히 지식인과 예술가 사이에서 여성 혐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성우월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여성을 혐오하는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철학을 근거로, 여성의 열등성과 그들이 남성에게 미치는 치명적 영향력에 대한 이론이 난무했다.

 

특히 사진과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출현해 팜므 파탈 이미지는 문학과 미술보다 더 큰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한다. 이에 따라 팜므 파탈은 자연스럽게 그림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간다.

 

마릴린 먼로는 할리우드 팜므 파탈의 전설적인 존재다. 먼로는 "나를 숭배하던 남자들은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도 모두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내게 키스하고, 품에 안고 싶어 안달하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먼로는 남성들의 우상이었고, 섹스의 화신이었다. 먼로는 에로틱한 요부, 백치미의 표본으로 각인돼 있다. 많은 영화에서 섹시하지만 머리는 텅 빈 금발미녀로 출연했기 때문이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악이 공존한다. 우선 남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외모, 성적 매력을 갖고 있다. 또 내면에 뜨거운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욕망은 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현모양처, 청순미인과는 정반대로 '나쁜 여자'들이다.

 

이렇게 팜므 파탈이 출현했던 시기와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대의 대중들이 19세기 말에 창조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팜므 파탈은 성적 금기를 깨는데 따르는 희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은 금지된 성에 탐닉할 때 죽음보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굳이 바타유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성욕은 억압할수록 커지며 두려움은 욕망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역사와 예술에서 입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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