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평론가가 내 그림을 마구 난도질해 댈 때마다 절망에서 버티게 해 준 힘은 오직 세잔의 그림이었다. 세잔만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앙리 마티스)

 

외고집 세잔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거대했다. 그는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다가 죽는 소박한 꿈과 불후의 명작을 만들려는 거대한 포부를 동시에 이루려 했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한 비주류로 멸시받았지만, 세잔은 스스로 선택한 화가의 길을 수도자처럼 고행하듯 살았다.

 

 

 

 

 

 

 

 

 

 

 

 

 

 

 

 

세잔의 그림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죽마고우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졸라가 『작품』이라는 소설을 통해 누가 봐도 세잔이 모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끌로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는다. 끌로드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화가이다. 이 소설을 계기로 그들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친구의 잔인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 있는 거대한 산의 풍경에만 집착했다. 그곳은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다. 산은 세잔에겐 어머니 같은 대상이었다.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고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변함없는 산. 세잔의 상처를 제일 먼저 보듬어 준 곳도 이 산이다.

 

산의 기운이 상처투성이 세잔에게 와서 붓을 잡아 준다. 세잔은 성실한 농사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린 산의 풍경은 87점. 평온하고 웅장한 형태의 생동감 넘치는 산을 20년 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창조해낸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사물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은 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본질을 그림에 반영할 수 없었다. 그 사물을 감각적 부분들로 해체함으로써 이미 우리 머리에서 해석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생트 빅투아르 산」연작은 하늘이나 바위나 나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훗날 입체파(자연을 입방체로 묘사하는 화파, 대표적인 화가는 피카소)의 탄생을 예고한다.

 

평생을 걸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다 죽어간 세잔. 외고집은 예술을 위한 투지였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옳았음을 세상 앞에서 증명했다. 산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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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특징은 간단히 말해 꿈과 자연, 이상향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없는 것이다. 아득하고 무한하며 끝닿을 데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이런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비, 증기, 속도」는 좀 더 각별해 보인다. 일단 제목에 ‘증기’, ‘속도’가 있는 것부터 근대적이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화면을 아래와 위로 나눈다면, 아래는 땅을 보여주고 위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조그맣게 말이 끄는 마차가 보이고, 그 강물 위로 희미하게 조각배 한 척 지나간다. 기차는 몇 가지 색들이 교차하는 철길 위로 치닫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비와 기차는 붕 떠다니는 듯하다. 이 효과는 화면을 채우는 안개의 희뿌연 색채로 인해 더 실감 난다. 악조건의 기상에도 불구하고 질주 중인 기차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달려와 다시 어딘가로, 무한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기계의 힘, 그로 인한 가속도의 증가는 무한정 뻗어 갈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가 풍경을 압도하고, 기술(과학)이 자연(이상향)을 능가한다. 원래 무한성이나 신비는 자연의 속성이었지만, 이제 자연을 벗어나 기계 문명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기차는 산업화 이후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괴물을 암시하기도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고대 신화나 중세 등 이미 가버린 시대를 갈망했지만, 터너가 갈망한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지양된 곳이다.

 

터너는 문명에 의해 잊힌 이상향의 은유물을 그림에 숨겨 넣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토끼의 얼굴도 있다. 토끼는 순결함과 평화로움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그려지는데 우리 조상들은 달을 늘 이상향으로 그렸고, 그 이상향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다. 토끼가 어두운 밤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을 수 있는 것은 눈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 눈을 명시(明視)라고 한다.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그림에 숨은 토끼를 찾을 수 있다. 터너가 그린 토끼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이상향의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은 변함없이 자연과 이상향을 동경한다.

 

 

 

 

* 터너가 숨겨 놓은 토끼의 얼굴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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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숨긴 토끼의 얼굴은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에 있다.

단순한 착시에 의한 형상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미술 연구가들도 그림에 남아있는 토끼의 얼굴 형상에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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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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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68]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스밀라가 없는 그린란드의 겨울은 시원한 얼음 한 조각 없는 속 빈 냉장고와 같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처럼 녹색의 땅일뿐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덴마크 코펜하겐과 눈의 황무지인 그린란드를 우리에게 특별한 공간으로 각인시킨다. 눈이 내리는 코펜하겐과 얼어붙은 그린란드는 아주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고독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그녀, 스밀라가 손을 내밀면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 자락을 쓰다듬어 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고 생생하다. 우리는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간다.

 

스밀라는 특별하다. 그린란드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어린 시절을 그린란드에서 보내고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덴마크에서 성장한 이력. 그녀는 추위와 고독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나간다.

 

그녀는 경계의 삶과 운명을 산다. 때로는 거칠게 저항하며, 때로는 기꺼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몸속에는 야생 이누이트인과 서구 문명인의 피가 동시에 흐르고 있다. 그녀는 야생의 방식과 문명의 방식 모두를 알고 있다. 그 사이에서 스밀라는 자신만의 방식을 끝없이 찾아 헤맨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장편추리극은, 단지 소설의 형식일 뿐이다. “사람들은 죽는다. 어떻게 죽느냐 또는 왜 죽느냐를 궁금해 해서 무엇을 얻겠는가?” 스밀라는 ‘문명비판’이든 ‘인간의 존엄’이든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린란드로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가? 세부적인 것은 그렇지만, 큰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은 거짓으로 얽혀 있다. 그런데 세계는 진실도 담고 있다.

 

“수학의 기초가 뭔지 알아요?” 나는 물었다. “수학의 기초는 숫자예요. 누군가 내게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숫자라고 말할 거예요. 눈과 얼음과 숫자.” (157쪽)

 

 

스밀라는 좀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이다. 사랑보다 눈과 얼음을 더 높게 친다. 그녀의 말에 빌리자면, 이제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듯이 질병으로서의 사랑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가운 주인공에게도 사랑의 본능이 느껴진다.

 

스밀라는 자신이 아이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영웅이 아니다. 나는 아이에 대한 애정을 가졌을 뿐이다.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내 고집을 그 사람 처분에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아이에 대한 애정을 행동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의 가죽을 가져도 돼?” (70쪽)

 

이누이트들은 고래를 잡으면 가죽과 살을 발라낸 뒤, 먼 바다로 고래의 턱뼈를 돌려보내 영혼을 풀어준다고 한다. 고래는 죽지 않고 이듬해 살을 붙여 다시 돌아온다. 스밀라와 영혼의 교감을 나누었던 이누이트 소년, 이사야는 이런 조화론적인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박물관에서 본 물개와 들소가 사람에 의해 죽어 욕보이듯 전시된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착취 없이 공존하는 관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이누이트 소년의 원시적인 사랑의 물음. 문명세계 야만의 징표가 사랑의 징표로 전복되는 순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사랑뿐이다. 스밀라라면 그 이유를 이 우주에 나란 존재는 하나뿐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단 한 번만이라도 ‘삶의 역경’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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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0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과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이룬, 보기드문 완벽한 인간 스밀라.. 그때 물개가 다시 튀어올랐고, 어머니는 물개를 쏘았다....˝나는 남자만큼 강하지˝ 스밀라의 엄마도 멋지죠.

cyrus 2017-09-10 19:10   좋아요 0 | URL
네. 스밀라의 어머니가 사냥꾼이었죠. ^^

sprenown 2017-09-12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김연수작가의 스밀라에 대한 오글거리는 찬사가 없었다면 손대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고,지겨운 소설이더군요..문화차이뿐만 아니라 번역도 매끄럽지 못하고... 김연수작가가 옛기억을 살려 윤문이라도 할 것이지.ㅋㅋ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의 이 시를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백석의 밤에도 눈이 푹푹 날리고, 강원도의 밤에도 눈이 오지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밤에, 백석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자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만 눈으로 덮인 도시에 갇혔다.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 소리 대신 쓸어도 쌓이는 하얀 쓰레기 때문에 짜증나 미칠 것 같은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학창시절, 백석의 시는 그가 늘 동경하고, 때로는 모방한 러시아 시인들보다 무게가 없고 감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날 때 읽을수록 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에게 뭔가 애틋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백석의 밤에서 멀어지기 때문일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雪夜)」 -

 

 

 

예전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애처럼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아무리 큰 고통도 하얀 눈이 어루만져 줄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은 마음도 따뜻했다. 그래서 저런 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좀 야한 은유. 지금도 이 구절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이 밀려올 정도로 지루한 국어시간에 이 시의 문제(?) 구절만 소리 내서 읽으면 모든 남학생들을 웃게 만드는 웃음 폭탄이 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마도 김광균 시인은 이 구절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설야」는 화자가 왜 슬퍼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화자 즉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떤 여인이라는 점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이 시에서는 과거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애상만이 감돌뿐이다.

 

이젠 저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슬픔이 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싸늘한 추회가 왜 시인을 애타게 했는지 알 것 같다. 먼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 늘 시인의 귀에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 벗는 그 여자 없었다. 아련하지만 이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누군가는 눈 소식이 썩 반갑지 않을 것이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백석의 밤이 아니라 눈보라가 내리치는 백색의 계엄령일 것이다. 눈은 눈이 올 때면 심장이 콱 옥죄이는 것은 모두 그때 그 기억 탓이다. '대설주의보'가 문득 몸서리 쳐지도록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온 게 아니라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낮게 읊조린 곡조와 함께 돌출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그러니까, 저 오래되고 유구한 기억 속에는 '백색의 계엄령'에 대한 공포가 깊게 새겨져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대설주의보가 걱정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짧게 흩날리는 눈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를 하라고 했던 구절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중에서 -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그러니까 아픔과 아픔이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해도 무관심한 사회적 풍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저 ‘백색의 계엄령’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도 필요한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엄혹한 한기는 마치 진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어쩌면 삶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황홀경에 매혹되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과 같은 자본은 한 개인의 무릎을 닳게 만들 터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고립되는 삶.

 

그러므로 '대설주의보'가 기후에 따른 경고발령이거나 1980년대 군부독재가 발령한 국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계엄령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발밑에, 바로 옆에 있는 존재나 자연과 손을 맞잡지 않는 데에 대한 처절한 내적 울림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형도가 지적했듯, ‘가누기 힘들어 제 목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우는 시절이니 말이다. 모두, 살아남으시라. 암울한 백색의 계엄령이 아닌 마음을 밝게 만드는 백석의 밤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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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1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에도 눈이 내려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쌓인 눈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는 울산, 눈이 오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울산이기에 아아아.. 잠이 오질 않네요.

cyrus 2014-02-10 23:2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포핀스님. 잘 지내시죠? ^^ 올해는 대구가 눈구름이 피하는 곳인가봐요. 부산에도 눈이 왔다던데.. 이 곳은 조금 눈이 내리긴했는데 눈이라기보다는 금방 녹아서 비처럼 내렸어요. 그래도 눈 엄청 쌓여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질거에요. 눈길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도 있고요...
 

 

 

 Scene #1   불운했지만, 유쾌했던 르네상스인

 

 

 

 

 

 

 

 

 

 

 

 

 

 

 

 

정치판을 둘러싼 음모와 야욕, 배신 따위를 말할 때 우리는 곧잘 마키아벨리를 들먹이곤 한다. 마치 ‘권모술수의 화신’ 이라도 되는 양 그는 주로 이렇게 비쳐져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 일개 서기관에 불과했던 그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남긴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보는 것이 곧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평생을 보냈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기는 르네상스를 둘러싼 전후시기였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때였기에 그에 맞는 정치사상이 태어날 수 있었다. 도시국가 중심의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넘보는 프랑스, 에스파냐와 같은 외부세력간의 힘겨루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갈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등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만약에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군주론』과 같은 작품은 아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너무나 즐겁게 수행했다. 『군주론』은 복직을 위해 피렌체의 명문가였던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키아벨리는 일개 서기관 보다는 정치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엉뚱했고 불운했지만 늘 유쾌한 남자였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서기관 이라는 자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였다. 자리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매우 많아서 모든 정보는 자연히 그에게로 집중되는 자리였다.

 

그는 용병제가 판을 치던 당시에 국민개병제를 주창했다.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채 돈만 써서는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이상주의자로 비쳐졌던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엔 당연시 여기는 현실이 되어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의 위세가 아직 등등해서 정치를 윤리와 동일시하던 때였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정치현실을 꿰뚫어 본 정치사상을 내놓았으니 당시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권모술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해놓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바친 『군주론』을 메디치가에서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반 메디치가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의 복직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남긴 책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권모술수의 달인쯤으로나 생각하게 만들어놨으니 그는 불행한 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Scene #2   현실주의적 단호함을 택한 마키아벨리

 

그를 향한 세상의 낙인은 죽은 뒤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주론』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오늘날 상식이 된 ‘사악한 마키아벨리’라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시기에 교황과 교회가 자신들과 대립했던 군주들이 저지른 잔악 행위들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는 1495년 피렌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제정치를 하던 메디치가가 추방당하고 공화국이 복구되면서 자유를 보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기에 반란 지도자는 상당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공화정을 위한 강력한 단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반란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는 인내와 선량함만 있으면 적절한 보상을 통해 유혈 사태 없이 사악한 파벌들을 근절하고, 왕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잔당들의 야망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의 우려대로, 이러한 소데리니의 순진한 예상과 달리 1512년 피렌체가 카를5세 군대에 정복된 뒤 살아남은 왕정의 잔당들은 소데리니를 제거하고 다시 전제정을 복원하고 만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도시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양심에 굴복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잔혹한 조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점만이 부각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이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그가 사태에 관한 뛰어난 현실주의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뛰어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하는 체사레 보르자는 피렌체 국경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위협적인 군사적 강자였다.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추기경이 되었으나, 성직자 신분을 버리고 칼을 잡아 속세의 군주가 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1502년 12월 로마냐 통치를 담당하던 보르자의 부하 레미로 데 오르코의 강압적인 통치에 로마냐 시민들이 분노를 폭발시키자 보르자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오르코의 잔인한 폭정 때문에 눈 덩이처럼 불어난 시민들의 증오심은 로마냐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르자는 놀라운 기민함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는 즉시 오크로를 소환했고, 나흘 후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시체는 모든 시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그곳에 계속 방치되었다.

 

이 사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오로지 공과에 따라 부하들을 완벽하게 통제했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재빠르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키아벨리는 음모적이고 신속한 살해 명령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로마냐의 무질서를 효율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Scene #3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냐 아니면 전제군주를 옹호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에 도전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와 루소, 디드로였다.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는 『로마사 논고』이다. 이 책에서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군주론』만 읽은 독자라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군주론』만 읽는다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로마가 성공을 거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면, 피렌체 역시 그런 성공을 또다시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이룩한 업적의 비결을 단 한 줄로 요약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도시국가들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결코 지배와 부를 증진시킬 수 없었다.”

 

우선 고대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정에서 해방된 뒤 100년이 지나는 동안 눈부시게 번영했다. 로마도 왕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얼마나 위대해졌는가?

 

마키아벨리가 자유를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정치적인 예속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는 독재자로부터의 예속으로부터, 국외적으로는 제국의 힘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뜻했다. 이것은 피렌체가 위대해지려면 국내에서 독재를 없애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같은 강대국들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그랬듯이 대중 지배의 지속이 군주제 형태의 정부와 얼마든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체제를 더 선호했다.

 

 

 

 Scene #4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가 “정치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무도덕, 즉 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며 윤리적인 행위나 선악이 가치 기준일 수 없으며, 국가를 존속시키는 수단이라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 때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행하는 모든 잔혹한 조치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정치 행위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그 행위의 효율성과 유용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보았을 때 정당화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목적은 공화정의 건설 및 존속이나 시민 자유의 수호와 같은 가치들이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옹호했던 군주의 테러 조치는 그러한 조치가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원칙적으로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자비심을 베풀어 혼란을 초래하고 약탈과 유혈 사태를 빚게 하기보다는 잔인함을 보여 주어 무질서를 진압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자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살아있다면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폭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주론’의 구절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마키아벨리가 외교관으로서 목격했던 당대 군주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를 둘러싸고 벌였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 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전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통치자들이 내세우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테러적 방법을 ‘미덕’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는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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