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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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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불평등, 그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이슈다. 이는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의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호화로운 혜택을 받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유세’ 논란 속에서도 1%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22쪽)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의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잘못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거짓 믿음은 '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소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바우만은 다시 자문한다. '길을 달리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까, 우리가 길을 바꾸기만 하면 현실이 바뀌고 우리에게 행위를 명하는 현실의 냉혹한 요구들이 바뀔 것인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예로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진짜 작가로 만드는 요소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말의 실패에 속죄를 하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썼다.

 

바우만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면서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거주권을 매정하게 거부당하지 않는 한 예언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며 여전히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다소 힘 빠진 결론을 맺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바우만이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추상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수사와 은유를 곁들여 ‘거짓믿음’의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데는 공감할 대목이 많다.

 

이제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을 거두고 정부 및 시민사회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사회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시장경제의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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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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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독한 죽음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자살자는 1만2174명이다. 하루 33명, 42분마다 1명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셈이다. 최근에는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도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어느 지역에 죽은 지 6개월이 지난 노인의 주검이 발견돼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언젠가는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단계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소재는 한편으로 사람들로부터 쉽게 왜곡되고 외면당한다. 그러나 그저 외면하고 덮어두기에 현대인들의 죽음은 너무나 다양하고 갑작스러우며 비참하기까지 하다. ‘인생은 원래 혼자다,’ 인간은 끊임없이 타인과의 관계 하에 존재한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현대사회에서 점점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사람들은 혼자 밥먹고, 혼자 놀고, 혼자 잠잔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혼자서 맞기도 한다. 스스로 원했든, 상황이 만들었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왜 우리 사회에서 늘고 있을까. 또 그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고립돼 가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7일 간의 여정

 

죽음 이후의 삶.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신 있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죽은 후의 세계를 얘기한다면 모를까. 혹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종교적 믿음을 배제한다면 미지의 사후 세계를 작가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건 자유다. 그 허구의 세계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지느냐는 진정성의 몫이다.

 

위화의 새 장편 『제7일』은 사고로 버려진 양페이를 혈혈단신 총각의 몸으로 키우는 아버지 양진뱌오와 그들을 돌봐주는 아버지 친구 부부의 이야기, 산아제한 정책으로 강제 유산돼 시신마저 묘연히 처리된 태아들을 그리고 있다. 중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흡인력 있게 그려진 이야기는 신문이나 TV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이름 모를 죽음의 한 장면들과 비슷하다. 양페이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나서 7일 동안 연옥에서 이승의 인연들을 만나 그 동안의 앙금도 풀고 사랑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양페이처럼 ‘죽었어도 매장되지 못한 이들’이 머무는 곳은 이승과 저승 사이 어느 자락에 따로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자살에서 살인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작가가 가장 무겁게 시선을 두는 죽음은 이른바 불행하게도 애도하는 사람 없이 고독하게 죽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생을 마감하고 시체마저 뒤늦게 발견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죽음. 현대 도시문명의 그늘과 아픔이 짙게 배어있는 죽음이다.

 

"묘지가 있는 사람은 안식을 얻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215쪽)

 

 

7일이라는 시간. 누군가에게 7일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은 기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애도 받지 못한 채 묘지 없이 떠도는 양페이에게는 너무나도 슬프고, 외로운 여정일 것이다.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느껴지는 여정을 눈으로 따라가 보면 읽는 내내 마음이 시리다.

 

“나와 아버지는 영원한 이별 뒤에 다시 만났다. 아빠, 나랑 같이 가요, 하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일을 사랑하는지, 이 대기실에서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 자주 뵈러 올게요.’” (299쪽)

 

양페이에게 죽음은 곧 살아야 할 모든 의미의 상실을 뜻한다. 자신의 아버지 양진바오와 한평생 사랑했던 리칭은 그에게 살아야 할 가치이자 의미의 전부였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양진바오와 리칭 두 사람은 양페이보다 먼저 끔찍하고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생명의 에너지가 소진된 인물들이다. 망령이 되어서야 양페이는 짧게나마 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나는 지킬 약속들이 있고,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고 노래한다. 망각에 저당 잡힌 채 살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삶의 부조리함은 죽음과 상실의 현존이라는 피할 수 없는 조건에서 생겨난다. 사람은 태어나는 시각부터 죽음을 향해 나가는 존재다.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죽어간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존재를 박탈하기 전에 우리에겐 지킬 약속들과 가야 할 길들이 있고, 그것이 공허와 무로 기우는 우리를 바로 세운다. 살아 있는 시간들은 죽음의 집행에서 유예된 시간들이다. 어쨌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일으키는 공포감은 삶을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이 가난하고 누추하게 만든 삶을 풍요한 것으로 바꾸는 마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절대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야말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들, 그리고 가야 할 길의 전부다.

 

사랑이 너무 깊어 죽음의 세계에서도 ‘애도’라는 감정의 끈을 이으려고 하는 양페이와 그 밖의 망령들, 즉 ‘스스로 애도하는 자들’의 사연은 슬프면서도 감동 그 자체다. 감동 속에서 마음의 찌꺼기들, 불필요한 오해와 공허감을 지워버린다. 극심한 소외감과 단절감으로 조금씩 죽음에 다가서는 사람들과 이들을 구제하고 세상에 희망을 심으려는 망령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과 연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협잡과 꼼수가 난무하는 현세와 서로를 죽인 원수임에도 매일 토닥토닥 싸우며 아옹다옹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연옥을 함께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하지만 망령들보다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잊은 채 살고 있다.

 

그런 안타까움에서일까. 7일 간의 쓸쓸한 여정을 마무리하면서 양페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이승에 사는 독자를 향해 넌지시 던지고 있다. ‘저곳에는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어.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어... 저기 사람들은 전부 죽었고 평등해.’ (314쪽) 어두컴컴하고 서늘한 죽음의 세계에 사는 그들은 불쌍하고 우울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는 정화 작용이 일어난다.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영국의 문필가 존 러스킨의 말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사랑이 없는 한 삶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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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0
노르베르트 볼프 지음, 이영주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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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경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에 스스로를 맡기고, 구름과 바위와 합일되어야 한다.

자연과의 교감은 고독 속에서 이루어진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 고독하면서도 우아한 인물, 프리드리히

 

한 사내가 절벽 위에 올라 안개 자욱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시선이 떨어지는 화면 중간에는 물 위로 삐쭉삐쭉 솟아오른 바위들이 도열해 있고 바위 위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 웅크린 듯한 모양새가 마치 인간 군상을 연상시킨다. 그 너머로는 멀찍이 거대한 산봉우리가 물안개 뒤로 희미하게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는데 마치 신성이 깃든 듯 신비로운 모습이다.

 

사내는 관조자로서의 침착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자연은 온통 격정으로 충만하다. 산과 바위는 마치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그 주변을 둘러싼 수파와 물안개는 좌우로 요동치며 화면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절벽 위에 두 다리로 단단히 무게중심을 잡은 사내의 머리카락도 거센 바람에 휘날리며 이런 격렬한 움직임에 호응하고 있다.

 

자욱하게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초겨울의 이른 아침. 사내는 왜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몸을 지탱한 채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발걸음은 대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보는 이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이 작품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의'안개 속의 방랑자'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시각적 기념비다.

 

독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낭만주의는 지나치게 합리성에 얽매인 계몽주의와 고전적 규범을 맹신한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이 계기가 되어 일어난 운동으로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괴테와 실러가 중심이 된 '질풍노도'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전통과 규범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감성과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진솔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시대정신은 자연스레 화가들로 하여금 내적인 성찰과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몇몇 진지한 화가들은 삶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사색과 종교적 명상으로 나아갔다. 특히 프리드리히는 종교적 명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화에 정신적인 깊이를 쌓아갔다. 당시 독일 화가들이 이탈리아로 달려가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적 규율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때 그는 모국인 독일의 풍경을 진지하게 탐색, 안개와 구름이 자욱한 북구 특유의 자연을 신비롭게 묘사했다.

 

 

 

 ♣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고독한 파수꾼

 

프리드리히는 자연에 깃든 정신성을 다름 아닌 신이라고 보고 풍경화를 신을 향한 구도와 명상의 매개체로 보았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들은 ‘안개 위의 방랑자’처럼 자연의 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고독하고 나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그 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관람자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점은 등장인물을 뒷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감상자가 그림 속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우주 자연을 관조하도록 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월출」  1821년경

 

 

프리드리히는 "화가는 눈앞에 보이는 외형만 그려서는 안 되며,자기 내면에 보이는 것도 그려내야 한다"고 말하고 심지어 "화가가 자기 내면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것도 그리지 말아야 한다"고 극언할 정도였다. 그의 이와 같은 태도는 낭만주의라는 시대정신과 어우러져 그를 확고부동한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프로이센 왕의 후원을 받고 드레스덴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는 등 그의 성공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대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르는 법이 없다. 화가의 만년에 이르러 낭만주의자들은 점점 현실감각이 없는 기인으로 손가락질 받게 되고 후원자들의 손길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세상을 뜨는 날까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낭만의 성채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남는다. 자신이 평생 걷게 될 고독한 여정을 예상하고 있는 ‘안개 속의 방랑자’처럼 말이다.

 

 

 

 ♣ 바다 저편 무한성을 보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사」  1818~1820년

 

 

산이나 바다에서 우리는 제약되지 않은 느낌은 모든 것이 트여오는 듯한 체험을 한다. 심신이 트이는 것, 그것은 다른 말로 무한성의 체험이다. 내가 사는 공간이 내게 속하면서도 나를 넘어 저 먼 곳까지 이른다는 느낌은 광활함의 감각이다. 낭만주의는 가장 간단히 말해 이 무한성의 경험이고 그 그리움이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하늘(공기)과 바다(물)와 땅(모래)을 본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요소다. 지구가 생명의 요람이 된 것은 물과 대기 덕분이다. 땅이 인간의 토대라면 바다는 그가 유래한 곳이다. 인간은 하늘의 대기를 매순간 들이켜고 내쉰다. 그림 속 인물은 한 점처럼 서 있다. 그는 이쪽-관찰자가 아닌 저쪽을 향해 있다. 낭만주의 회화의 인물에는 이처럼 등을 돌린 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관찰자는 인물과 같은 시점을 갖게 된다. 그래서 우리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외부의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 속 수도사는 땅의 끝에 서 있다. 이 모래언덕 위에는 아무 것도 없다. 대기와 땅과 바다뿐. 이 광대한 우주에서 인간은 하나의 얼룩처럼 자리한다. 그래서 외롭다. 황량함과 고독은 자연의 전체, 즉 우주 앞에 선 인간의 필연적 조건이다. 이것은 화면의 5분의 4를 채운 하늘에서 잘 암시된다. 물과 땅과 대기는 그가 오기 전처럼 그가 떠나간 후에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근원적이다.

 

근원적인 것은 이렇듯 단조롭고 무한하다. 그러면서 순환한다. 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이 구름이 농축되어 비로 된다. 그 사이에 어떤 것은 굳어져 물질이 되고, 이 물질은 바람에 날려 모래가 되며, 모래는 먼지로 떠돌다가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것은 자신을 쉼 없이 비워내는 탈세속화의 과정이다. 인간의 생애는, 그 육체는 먼지와 바람과 물 그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뭉쳐있는 고체가 모래언덕이라면, 모여 있는 이 물질도 바람으로 물로 언젠가 소진될 것이다. 쉼 없이 출렁이는 바다 물결이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자연의 근본요소는 인간의 성취를 무시한다.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뤼겐의 백악 절벽」  1818년

 

 

자연의 무한한 모습은 우리의 정서를 압도한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된 정서적 효과, 절망과 활력을 동시에 일으킨다. 절망은 자연의 파괴적 힘에서 온다. 가늠할 길 없는 자연 앞에서 우리는 자기 몸이 보잘것없으며 그 삶도 하찮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이 무기력은, 무시간적 우주에서 우리가 그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는 사실로 하여, 활력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한 풍경 모사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욕구의 표현이길, 그래서 이지러진 시대의 영혼을 정화하길 바랐다.

 

 

 

 ♣ 고독과 명상이 필요한 시간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  「떠오르는 태양 앞의 여인 (지는 태양 앞의 여인)」  1818~1820년경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무엇보다 무한성의 경험이다. 이 무한성은 진실하고 영원하며 신적이다. 그러므로 좋은 풍경화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명상이면서 꿈꾸기이며, 기도이고, 비전이다. 참된 자연의 체험은 성스럽고도 장엄한 종교의식과 같다. 그래서 믿음은 회의와 만나고, 우울은 희망과 짝한다. 세계의 전체를 어루만지게 된다고나 할까. 삶의 이곳은 그 둘레와 너머까지 가늠할 때 온전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여분을 허용하고 그 나머지를 돌볼 때 본래성에 다가선다.

 

그의 풍경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홀로 있어야 한다. 그림 속 방랑자나 수도사처럼 혼자 서서 느끼고 생각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정신의 내면적 눈은 이때 생긴다. 생명은 지워지고 있는 하나의 점이면서 무한의 우주로 이어진 고리다. 이 무한성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아왔던 세계가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이 일부의 세계 너머에 알 수 없는 무엇이, 또 다른 광활함이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면서 여기 이곳이 저편과 어떻게 얽혀 있는지, 부분은 어떻게 전체로 이어지는지 깨닫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의 삶에서 이런 생각은 하기 어렵다.

 

고독한 낭만주의자가 바라보는 풍경은 숭고함을 불러일으킨다. 덧없이 스러지며 순환하는 영원하고 무한한 자연 현상을 고독하게 바라보는 작지만 커다란 인간 존재를 보여준다. 그것에서 ‘나’란 주체, 개체는 무의미해 보인다. 영원과 무한 속에서 유한한 인간 존재는 그만큼 슬프고 남루하다. 그러나 우리는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보면서 저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서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을 통해 새로운 삶을 꿈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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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도 언젠가는 늙은이가 될 게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에 수록된 ‘황혼의 반란’이라는 단편이 있다. 한 사회학자가 TV저녁 뉴스에 나와서 사회보장 재정적자의 대부분은 노인들 때문임을 증명해 보인다. 그러자 노인 배척운동에 정치인들이 가세해 의사들이 공익은 뒷전이고 고객을 잃지 않기 위해 노인의 생명을 마구잡이로 연장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사태가 갈수록 나빠지자 정부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인공심장의 생산을 중단시켰다.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노인을 불사의 로봇을 만들 수 없다’며 ‘생명에는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존중되어야한다고 선언’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회학자의 주장은 젊은 사람들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을 배척하는 무시무시한 집단 심리로 형성하게 된다. 노인들은 노인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안락사의 운명을 맞는다. 그러자 할아버지 주인공 프레드는 노인수용소에 잡혀가기 직전 탈출해 반란을 주도한다. 체포된 프레드는 젊은 대원에게 이름 모를 주사를 맞으면서 마지막 말을 던진다. “너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게다!”라고. 소설 같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노인’은 우리가 기억하는 ‘웃어른으로 존경받던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지난날 노인은 권위의 상징이며, 경험 지식의 제공자로써 필수적인 조언자였다. 경제적으로도 노인은 많지 않아, 우리에게 할당된 부양 몫은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시대, 나이는 더 이상 내세울만한 것이 아니며, 경험 지식은 인터넷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인이 많아진 탓에, ‘그들의 부양이 국가적 부담’이 되어간다는데 문제가 있다. 책에서 언급한대로 “65세는 괜찮아요, 70세요? 손해의 시작이죠”처럼...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그들 속에 포함될 것’이라는 사실.

 

 

 

 

 ♣ 그늘의 경계선

 

베르베르의 소설에 나오는 노인을 배척하는 집단 심리의 행위는 단순히 픽션만은 아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원시사회에서는 노인들을 잔학하게 대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머리가 백발이 되면 죽였다. 남태평양제도의 어떤 부족은 노인이 되면 야자나무 위로 올려 보낸 뒤 밑에서 흔들어 떨어지지 않으면 더 살도록 하고 떨어지면 처형했다. 육체적인 힘이 세대사이의 관계를 규정했다. 그러나 문명이 조금 발전하면 노인들은 죽음을 당하지 않아도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몽테뉴의 『수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섬뜩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아들이 늙은 아버지의 머리채를 잡고 문밖으로 끌어내는 순간, 노인이 이렇게 외쳐댄다. “그만 둬 이놈아, 나는 내 아버지를 여기까지 끌어내지는 않았어.”

 

서구문명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중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노인들이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정중하고 예의바른 대접을 받았다. 오랜 세월 변화가 없는 세계에서는 경험처럼 가치 있는 자산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세대 간의 관계도 급속도로 변했다.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나 배려는 시들어 가고 있다. 노인의 특권인 안정과 전통은 도외시되고 승리는 빠른 변화에 대처해가는 젊은이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노인의 경계선이 한창 일할 나이인 50대로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50에 이르면 자기 앞에 ‘그늘의 경계선'이 보이고 오싹하는 기분으로 그 경계선을 지나고 나면 젊음의 매혹적인 영역이 끝난 것으로 믿게 된다”는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인생추분론'이 딱 들어맞는 말이 돼가고 있다.

 

 

 

 

 ♣ 지금의 20대가 노인이 된다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복지에 대한 수요와 노인층은 늘어나고 요구도 갈수록 커지는 형편이다. 반면에 세계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기업 투자가 위축돼 일자리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민심을 위한 공약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전환, 정년연장 등의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던 노인연금은 재정 및 복지부 내부 갈등 문제 등으로 인해 보류된 상태다. 이는 기업과 재정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법제화를 통하여 정치의 논리로 정치의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다. 이것은 안 될 일이다. 지금의 비정규직을 생산한 것도 취업률을 높이기 위한 정치논리에서 비롯됐다. 그 결과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사람도 2년이면 재계약 없이 해임하는 폐단이 생겼다. 그리고 연금 지급을 통한 복지 문제는 재정적 지원이 가능하도록 돈만 푼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지금 시행되는 노인 정책들이 포퓰리즘 일색으로 민심을 얻기 위한 단기정책이란 느낌이 앞선다. 물론 노인에게 필요한 것들이겠지만.

 

이미 고령사회에 접어든 국가들은 대부분 막대한 복지예산을 지출한다. 미래에 우리도 엄청난 복지예산이 필요로 할 것이며 결국 국민 세금으로 충당할 것이다. 노인문제도 소득에 따라 차별화해야 한다고 본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면 ‘혜택’으로 여겨질 수 없다. 한정된 재원의 국민 세금인 까닭에,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 노인들에게만 돌아가야 한다.

 

 

 

 

 

『맹자』(孟子)에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존경할만한 사람을 가리키는 ‘달존(達尊)'이란 말이 나온다. 맹자는 그런 인물의 세 가지 조건으로 사회적 ‘명예'와 ‘나이', 그리고 ‘덕'을 꼽았다. 이 세 가지 중에서 덕을 가장 중요시하여 나이에 알맞은 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 존경을 받으며 ‘멋있게 늙어가는' 길은 현재 이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아득한 과거와 미래에 비추어 보면 현재란 하나의 점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 나와 공존하는 주위의 모든 사람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미래에 노인이 되는 우리는 생각을 바로 잡아야 한다. 우린 결코 지금 노인만큼 대접받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도를 고쳐, 한평생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발상은 너무 유치하다. 지금의 20대가 백발의 노인이 되는 미래를 상상한다면 암울하다. 취업을 위해 스펙 쌓기에 열중하고, 경제적 자립이 없는 베이비부머를 봉양하느라 젊은 시절부터 고생했다고 우리는 청춘의 과거를 후손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후손들이 겪고 있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로움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위로와 용기의 말도 전한다. 그러면서 경제적인 혜택을 통한 예우와 대접을 받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황혼의 반란’은 일종의 유전병처럼 다음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먼 훗날 젊은 세대가 ‘당신이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라고 물었을 때, 우리는 말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노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연장자로써 모범을 보이고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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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0-10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새 '오십 고개'를 넘었는데 이래저래 '우리의 미래'가 참 여러모로 걱정이 되긴 합니다. 저같은 50대에 대해서나 cyrus 님 같은 20대에 대해서나 똑같이 말입니다. cyrus님의 이 글에 마침 등장하는《몽테뉴 수상록》이 너무 반가워서 그 책 속에서 읽었던 '오십 고개'에 대한 재미있는(?) 구절을 덧붙여 봅니다.

* * *

아아, 가련하게도
이제 오십 고개를 넘은 자를
두려워 마오. (호라티우스)

자연은 이 나이를 꼴사납게 만들 것 없이, 가련하게 만든 것만으로 만족했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이것이 일주일에 세 번쯤 허약한 힘으로 일어나며, 뱃속에 당연히 해낼 어떤 위대한 힘이나 가지고 있는 것처럼 거칠게 부스럭거리는 꼴이 보기도 싫다. 솜털에 불이 붙은 꼴이다. 그리고 지금 둔중하게 얼어붙어서 볼이 꺼진 이 나이에 이렇게도 생기 있게 팔딱거리는 자극이 놀랍다. 이런 욕망은 청춘의 꽃다운 시절에나 가질 일이다. 이런 충동을 믿고, 그대에게 있는, 이 피로할 줄 모르게 꾸준하고 충만하고 장엄한 열기를 한번 거들어 보라. 좋은 꼴을 보게 될 것이다.

cyrus 2013-10-10 21:26   좋아요 0 | URL
저는 동서문화사에 나온 수상록을 소장하고 있어요. 분량은 두껍고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가끔 생각날 때마다 책장에 꽂혀있는 수상록을 읽곤 합니다. 흥미롭고 인상깊은 이야기나 멋진 명언을 만나면 밑줄이나 표시를 해둡니다. 그래서 밑줄 친 부분만 반복해서 읽곤 합니다. 옛날 시대의 글이지만 몽테뉴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감정이 지금과 별반 다를게 없는거 같습니다.

oren 2013-10-10 22:21   좋아요 0 | URL
"한 양서를 요약해서 만든 축소판은 모두 어리석은 축소판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아니더라도, '참다운 작품'은 가급적 완역본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해요.

저는 이번에 '두 번째'로 완독하면서 예전에 20대 초반에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몽테뉴의 글 속에서 길어올릴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래서 독서노트에 옮겨 적거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메모한 분량이 (지금 세어보니) 무려 112쪽이랍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많은 내용들을 자판을 두드려가며 필사하다시피 기록해 뒀답니다. 노트에는 '한 줄' 정도로 메모한 내용들까지도 가급적 여러 줄씩 풍성하게 옮겼으니 아마 두꺼운 노트 한 권으로는 다 담지 못하는 분량쯤을 옮겨 놓지 않았을까 싶네요. ㅎㅎ

cyrus님께서도 나중에 저처럼 '오십 고개'를 넘어서 다시 한번 몽테뉴 수상록을 읽으신다면 처음에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한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실 수 있으리라 믿어요.

cyrus 2013-10-11 21:38   좋아요 0 | URL
정말 대단하시네요. 한 권의 책에 대한 애정과 성찰 없이는 만들 수 없는 기록물이네요. 저도 oren님의 길을 따라고 싶어요 ^^
 

 

 ♣ 집안일을 하는 딸, 집안일을 시키는 부모

 

KBS 2TV ‘대국민 토크쇼-안녕하세요’에 온 집의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딸의 사연이 공개됐다. 사연의 주인공인 딸은 중학교 2학년생인데 온 집안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픈 날도 전혀 예외 없이 엄마의 심부름에 숨 쉴 틈 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털어놨다. 여섯시에 일어나 씻고 밥하고 동생 깨우고 엄마 식사를 준비한다.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저녁하고 청소하고 숙제한다. 주말에 부모님이 쉴 때도 끊임없이 혼자서 심부름과 집안일을 맡을 정도다.

 

딸의 부모님은 딸의 고민에 대해 반박했다. "우리는 자식을 상전처럼 모시지 않는다가 교육관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의 의무는 다 나눠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남다른(?) 교육관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였다.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딸이 거의 맡다시피 하게 되고, 그 일을 어머니가 딸에게 시키는 횟수가 잦아지자 자신 또한 습관적으로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딸의 고민에 대해 정찬우는 집안일을 시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칭찬해 주지 않는 태도의 부모님이 문제라고 정확히 진단했다.

 

그의 말에 동의한다. 딸이 고민이라는 이름으로 방송에 직접 나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본인의 일상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딸은 가족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집안일에 임했다. 자신이 청소를 안 하면 집은 돼지우리처럼 지저분하게 되고, 밥을 안 하면 동생이 밥을 안 먹는다고 한단다. 가족을 항상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중학교 2학년생은 집안일을 하면서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또래 아이들보다 마음이 성숙하고 기특했지만, 부모는 딸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집안일을 시켰던 것이다.

 

 

 

 ♣ 칭찬 능력이 부족한 우리나라 부모

 

식물도 자살을 한다. 일명 ‘스트레스 생리’라고 부른다. 식물도 크고 작은 환경적인 요소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생장한다. 데어 죽을 수도 있고, 동사, 건조사 등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경우는 환경이 회복되더라도 식물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마련이다. 요즘 사람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늘어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만약에 집안일을 하는 딸이 자신의 불만과 고민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살았더라면 사춘기 특유의 우울증에 의한 스트레스가 더 심각했을 수도 있었다. 식물이 햇빛을 받고 자란다면, 사람, 특히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성장한다. 그러니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행복해진다. 특히 가족과 동료들에게 하는 칭찬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 ‘칭찬의 보약’은 누구나 먹고 싶어한다. 만약 사람이 칭찬과 격려를 받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감성은 위축되고 시들어 버릴 것이다.

 

학생들은 왜 열심히 공부할까? 한창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야 하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왜 집안일을 열중하는 걸까?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장점을 발견해서 인정해 줄 때 엔도르핀이 솟게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때 삶의 의욕이 충만해진다. 그래서 칭찬은 가장 빠르게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행복감을 갖게 하고 자석처럼 서로 끌어 당겨 하나가 되는 마력이 있다.

 

 

 

 

 

 

 

 

 

 

 

 

 

“우리는 자녀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왔을 때 칭찬을 게을리 하며, 아이가 과자를 굽거나 처음으로 새 집을 만드는데 성공했을 때도 격려해 주기에 인색하다. 아이들이 부모의 관심이나 칭찬보다 더 기쁜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데일 카네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교육열이 강하다. 그래서 아이들이 국내외 일류대학에 들어가기를 갈망하고, 학원 수강이나 과외공부를 파김치가 되도록 시키는 부모들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의 능력이나 적성을 감안하지 않고 시키기 때문에 탈선하는 아이들도 가끔씩 발생한다. 무조건 시키는 것은 무관심만큼이나 문제가 된다.

 

가장 안 좋은 것은 열심히 아이가 공부를 했는데도 성적이 나쁘면 “누구는 잘 하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 하면서 비교를 담은 충고를 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이런 충고를 귀가 아프도록 자주 들은 아이는 어떻게 될까? 아이는 자신에 대해 ‘나는 할 수 없어!’라는 부정적 이미지나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소심한 아이가 되는 등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데 조그만 실수했다고 부모가 딸에게 핀잔을 준다면 딸 입장에서는 얼마나 섭섭할까? 딸은 당연히 옳은 일(집안일)을 하고 있었고, 간혹 실수 한 두 번쯤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칭찬보다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거나 꾸중만 한다면, 딸은 가사 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칭찬을 하는 경우에도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다. 사고능력이 성인보다 미숙한 아이들에게 격려나 칭찬을 할 때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 켄 블랜차드의 ‘칭찬 10계명’

 

 

 

 

 

 

 

 

사람은 장점과 단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누구도 온전히 장점만, 혹은 단점만 가진 사람은 없다. 단점이 그 사람에게 없어져야 할 불순물이라면 이것을 걸러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칭찬이라는 약이다.

 

 

그렇다면, 칭찬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칭찬 10계명’이 있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책에서 추린 내용이다.

 

첫째, 소유가 아닌 재능을 칭찬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을 인정받는 순간 둔재(鈍才)도 천재가 되는 것이다.

 

둘째, 결과 보다는 과정을 칭찬한다. 올라온 높이보다 헤쳐 나온 깊이를 바라보고 그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다.

 

셋째, 타고난 재능보다는 의지를 칭찬하는 것이다. “머리 하나는 타고 태어났네요”보다 “그 성실성을 누가 따라가겠어요”가 훨씬 낫다. 원석도 다듬어야 보석이 된다. 영혼을 자극하는 것이다.

 

넷째, 나중보다는 즉시 칭찬하는 것이다. 100번 하기보다 오늘 칭찬 한번이 더 낫다. 머리를 붙잡지 꼬리를 붙잡아선 안 된다. 칭찬도 늦으면 철 지난 옷처럼 어색할 뿐이다.

 

다섯째,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칭찬하면 좋다. 별 거 아닌 일에도 ‘음’, ‘와우’가 훨씬 위력을 발휘한다.

 

여섯째, 애매모호한 것보다 구체적으로 칭찬해야 한다.

 

일곱째, 사적으로보다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혼자보다는 적어도 셋 이상의 자리에서 칭찬하는 것이 낫다. 칭찬의 옥탄가를 높이는 것이다. 특히 장본인이 없을 때 남긴 칭찬은 그 효용가치가 배가된다.

 

여덟째, 말로만 그치지 말고 보상으로 칭찬하는 것이다. “한 턱 내세요”보다 “내가 쏠게요”가 훨씬 낫다. 때로는 선물도 필요하다. 언어적 수사에만 머물지 않고 물질적 보상이 따르는 순간 명품칭찬이 되는 것이다.

 

아홉째, 객관적인 것보다 주관적으로 칭찬하는 게 낫다. “참 좋으시겠어요”보다 “제가 다 신바람이 나더라니까요”가 낫다. 관계의 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열째, 남을 칭찬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이다. “훌륭했어! 정말 멋졌어! 난 네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내 자신에게 자주해주는 것이다. 자신을 칭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을 칭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가족에게도 칭찬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가 순종하지 않을 경우 먼저 아이들을 협박하거나 소리를 지른다. 이는 어린아이나 성장한 아이들 모두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 비판하고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는 것이 아이들을 위한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옳은 일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의 말이 무색하다.

 

가족에게서 받은 무관심과 마음의 상처는 골이 깊고 오래간다. 사회적인 관계와는 기본적인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배려하지 않고 서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서로 타협하고 이해할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칭찬의 기술을 타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안하던 칭찬할 때 쑥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을 칭찬하는 것이 창피할 일은 아니다. 자녀는 부모가 모범을 보인 데로 성장한다. 부모가 먼저 칭찬하고, 감사하고, 사랑할 때 가정에 행복이 가장 먼저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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