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인지한 사물이나 현상은 우리에게 단단한 믿음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 믿음에 가끔 착각할 때가 있다. ‘내가 본 것이 진짜라는 환상에 속는 것이다. 착시는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인지 양식의 결과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눈과 뇌는 불완전하다.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는 형태가 모호한 대상에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욕구가 빚어낸 착시 현상이다. 뇌는 사람의 얼굴 모양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어두운 밤 형체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 환경에서 사람과 비슷한 형상을 발견하면 뇌는 즉각 반응해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뇌의 인식 오작동 때문에 우리는 뚜렷하지 않은 형상을 귀신이라고 믿는다.

   

 

 

 

 

 

 

 

 

 

 

 

 

 

 

 

 

* 피츠 제임스 오브라이언 아니물라(바른번역, 2016)

 

 

파레이돌리아 현상은 자신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게 지나친 자기 확신이다. 과잉 확신의 늪에 빠지면 정확한 분석이 어려워진다. 피츠 제임스 오브라이언(Fitz James O’Brien)아니물라(원제: 다이아몬드 렌즈)에 등장한 린리(Linley)의 직업은 과학자다. 하지만 그는 과학자가 경계해야 할 인식의 오류에 빠질 정도로 미숙한 면모가 있다. 현미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미세한 세계(micro world)에 푹 빠진 린리는 물방울 속에 보이는 불가사의한 형체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착각한다. 린리는 물방울의 우연한 형태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찾으려고 한다.

 

 

 

 

 

 

 

 

 

 

 

 

 

 

 

 

 

 

* E.T.A. 호프만 모래 사나이(문학과지성사, 2001)

* E.T.A. 호프만 모래 사나이(지만지, 2011)

     

 

호프만(Hoffmann)의 소설 모래 사나이에는 왜곡된 시각적 기억 때문에 엄청 고생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린 나타나엘(Nathanael)은 변호사 코펠리우스(Coppelius)의 흉측한 외모를 잊지 못한다. 코펠리우스는 나타나엘의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악한 존재다. 어린 나타나엘은 밤마다 찾아와 잠자는 아이의 안구를 훔친다는 모래 사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코펠리우스에게 투영한다. 그가 코펠리우스와 닮은 청우계 장수 코폴라(Coppola)를 만나게 되면서, 유년 시절에 느꼈던 그것과 유사한 두려움에 빠진다. 코펠리우스와 코폴라의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가 있는 ‘coppo-’잔 모양의 물건또는 눈구멍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다. 코펠리우스와 코폴라를 만나면 자신의 안구가 강탈당할까 봐 두려워한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나타나엘은 비슷한 것만 봐도 겁을 낸다. 그는 자신의 과장된 공포를 망상이 아닌 실제라고 확신한다. 모래 사나이, 코펠리우스, 코폴라가 자기에게 적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그때부터 편집증적 환상이 구체화하기 시작된 것이다. 원래 이 작품의 초고에 코펠리우스와 코폴라가 동일 인물임을 알려주는 대목이 있었다고 한다. 인쇄하기 위해 정리한 원고에 이 문장이 삭제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무질서한 사실들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고 한다.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기를 쓴다. 그리하여 그 의미를 근거 삼아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거나 불안한 미래를 예견해 보려 한다. 모르면 모르는 것으로 놔두든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급해서 뭐든 빨리 확신한다. 끝내 의미를 찾지 못하면 자신이 보고 싶은 걸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가짜 뉴스와 조작된 사진을 검증 없이 사실인 양 믿는다. 확증편향은 자신의 선입견을 확증하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탐색하는 경향이다. 우리 사회에 파레이돌리아, 과잉 확신 그리고 확증편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손가락으로 어두운 거짓의 그림자를 가리켜 진짜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그림자는 착각과 지나친 망상이 만들어낸 아주 위험한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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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02 12:11   좋아요 1 | URL
사진에 속지 않으려면, 결국 사진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사진을 보는 법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진 관련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책을 미리 사두길 잘했어요. ^^

2017-06-02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02 19:40   좋아요 0 | URL
사진 책을 안 보던 사진가가 일반인들이 사진 감상하는 것에 따진다면, 정말 가관이겠어요. 맹탕인 사진가들한테 무시 받지 않으려면 사진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어요. ^^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
박숙자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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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 공부하지 않고 재미있는 책만 읽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소중한 보물이 있었다. 책장에 가득 채워놓은 오래된 책들이었다. 나는 곰팡내가 풍기는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거기에는 현실보다 재미있고, 영화보다 흥미진진한 일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데 지루할 틈이 있다면 오히려 이상한 지경이다. 책 속에는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있었다. 존경하는 과학자, 작가, 정치인 그리고 한 시대를 살다가 간 뛰어난 선인들도 있다. 노력에 따라서 그들을 만날 수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정성을 쏟아 읽은 책마다 번호를 매겨 나갔다. 그때는 읽은 책의 권수에 집착했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얇은 책도 포함했다.

     

어느새 십여 년이 지났다. 우리는 정신없이 바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먹고사니즘에 치여 비타민처럼 필요한 책들을 외면하고 있다. 어린 시절 나와 함께 책을 읽던 친구들은 책과 담쌓은 지 오래다. 경쟁사회에서 낙오는 인생의 실패와 다름없이 여겨진다. ‘먹고사니즘의 열망이 클수록 민주적 가치고 나발이고 돈벌이에 도움만 된다면 뭐든지 허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먹고사니즘은 단순히 생존본능을 위한 투쟁 의식이 아니다. 지나친 경쟁 심리가 만들어낸 이기주의의 극치다. 이 세상에 낙오하지 않고 한가롭게 독서를 하는 일은 진정 불가능한 일인가. 잠시라도 책에 한눈을 팔면 우리 삶이 정말 불행해질까.

     

잠재했던 유전인자가 몇 대를 뛰어넘어 불쑥 나타나는 것을 격세유전이라 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를 읽으면 그 말이 실감 난다. 노후를 걱정하는 오늘의 6, 70. 이들을 ‘4 · 19세대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도 사회에 대해 고민했던 시절, 인생의 꽃이라 불리는 20대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는 문학청년, 문청(文靑)의 연대였다. 젊은이들의 관심은 시와 소설, 그리고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었다. 대학생들은 <사상계>를 끼고 다녔고, 그들의 문화적 영웅은 김승옥이었다. 문학평론가 김현의 표현대로 4 · 19세대는 4 · 19혁명과 5 · 16 군사쿠데타 사이에서 20년간 방황했다. 민주화를 열망했던 젊은이들은 가능성과 좌절사이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답답하고 허무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을 손에 쥐었다. 그렇지만 책이 민주주의에 대한 허기, 미래의 위기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지 못했다.

     

광장(최인훈의 소설)()준은 밀실도 광장도, 그것이 상징하는 남한도 북한도, 자유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다 거부하고 나섰다. 결국,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선택한 뒤 배를 타고 가다가 숨 쉬는 바다로 몸을 던진다. ()혜린은 우리나라 여성 최초의 독일 유학생이다. 그녀는 자기가 독일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진실 어리게 글을 쓰고 싶어 했다. 환상수첩(김승옥의 소설)의 정우는 보다 나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었다. 하지만 어른들은 정우를 어쭙잖은 아이로 여겼다. 정우의 귓가에 울리는 무관심 하라라는 말은 혁명에 갈망한 청년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독일 유학생 (전)혜린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진실 어리게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아무리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도 번역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번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의 괴리감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소설을 쓰겠다는 소망을 채 이루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쉽게 알려줄 대학생 친구를 만나지 못해 종이에 적힌 법 한 글자 한 글자 보듬느라 힘겨워했다. 이 네 명은 젊은 4 · 19세대들의 사회적 · 심리적 한계상황을 겪었다. 네 명의 젊은이들은 답답하고 허무한 마음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들의 삶과 희망은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생애로 종이에 남게 되었다.

     

그 뒤로 80년대 사회변혁의 맹렬한 주역으로 대학생들이 나섰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절망에 빠진 오늘, 50년 전의 그 암담한 심경은 격세유전으로 재현되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상황은 고뇌의 진원지가 정치가 아닌 경제라는 점이다. 60년대에는 노력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팽배했다. 학생들은 짜장면을 먹지 않고, 버스 등교 여덟 번 포기하면 200원짜리 삼중당 문고를 내 책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그들은 200원짜리 책을 읽었고, 책을 통해 희망으로 이어줄 삶의 길을 찾고 싶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독서는 사치다. 그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힘들게 모은 돈은 입시 참고서, 어학 학습서, 취직 수험서를 마련하기 위한 비용이 된다. 한가롭게 소설을 읽을 수 없다. 독서하는 세대가 사라지면서 교양의 의미도 점차 희미해진다. 4 · 19세대가 공유한 교양은 삼중당 문고라면, 삼포세대의 교양은 취업상식 사전이다. 취업상식 사전은 내 책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취업을 목표로 상식을 달달 외운다. 취업만 성공하면 지긋지긋한 책을 안 봐도 된다.

     

지금으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은 삼포 세대의 독서문화사를 어떻게 기록할까. 삼포세대가 역사로 기록될 앞날이 오려면 한참 멀었다. 사실 그보다 더 큰 걱정이 앞선다. 삼포세대가 겪은 좌절과 모멸감이 다음 세대에 이어질까 봐 걱정된다. 이 세상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더 많아지면 안 된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책 읽기의 저자는 서문에서 살아남지 못한 자를 기억하는 일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아물지 않는 상처라고 말한다.

     

살아남지 못한 자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에 들씌워진 가면을 잠시 벗겨낸 자리에 남아 있는, 아물지 않는 상처이다. 그래서 우리 삶과 역사는 그 상처와 고통에 빚지고 있다. (8)

 

아주 오랫동안 깊게 파인 역사의 상처를 직면하는 일은 무척 괴롭고 아프다. 그렇지만 이 상처와 고통의 연속을 끝내려면 과거의 기록에서 교훈을 찾아내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아픈 역사를 잊고, 덮는다고 해서 무너진 자존심이 회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픈 역사가 만들어 낸 상처가 덧난다. 그 상처가 덧나면서 생기는 통증이 다음 세대에 이어진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는 과거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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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02 0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02 07:02   좋아요 1 | URL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시는군요. 시험 공부할 때 틈틈이 보는 글이 재미있어요. ^^
 

 

 

 

 

 

 

 

“어서 오세요, 주인님!”

 

검은색 원피스, 흰색 두건에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 복장의 종업원이 카페 문을 열며 인사한다. 오타쿠의 성지로 유명한 도쿄 아키하바라(Akihabara, 秋葉原)에 여러 개의 메이드 카페(Maid cafe)가 들어서 있다. 메이드 카페는 코스튬플레이 레스토랑(Costume play restaurant)의 일종이다. 유럽풍 하녀 복장을 입은 종업원들이 손님을 극진히 대한다. 한때 우리나라에도 메이드 카페가 들어선 적이 있다. 그러나 부정적 시선이 만만치 않다. 성 상품화 등을 이유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아무리 좋게 봐도 여성을 눈요깃감으로 전락시킨다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다.

 

 

 

 

 

 

 

 

 

 

 

 

 

 

* 이케가미 료타 《도해 메이드》 (AK커뮤니케이션즈, 2010)

 

 

하녀를 뜻하는 ‘메이드’라는 단어 자체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한다. 메이드는 ‘여성 사용인(Maid servant)’, ‘가정부(housekeeper)’를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는 메이드 전성기였다. 상류층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다양한 가사 일을 전담하는 사용인(집사, 하인, 마부, 보모, 가정부, 하녀 등)을 고용했다. 경제 소득이 늘어난 중류 계층 사람들은 상류층 사람들처럼 호화롭게 살고 싶어 했다. 중류층 사람들도 사용인을 고용하게 됐다.

 

가사 사용인으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하층 사람들이다. 하류층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었다. 잡일이나 바느질일, 공장 노동 같은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그나마 가사 사용인이 하류층 여성들에게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가사 사용인으로 일하게 되면 먹을 것과 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하녀가 해야 하는 일이 아주 많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하고, 커다란 저택 내부를 청소한다. 사용인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직업이 집사와 가정부다. 이들은 고용주를 보좌할 뿐만 아니라 남녀 사용인의 노동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집사와 가정부는 안주인의 지시를 받고, 하녀에게 지시받은 업무를 하달한다.

 

 

 

 

 

 

 

 

 

 

 

 

 

 

 

 

 

 

 

 

 

 

 

 

 

 

 

 

 

 

 

 

 

 

 

 

 

 

 

 

 

 

 

 

 

 

 

 

* 《셜록 홈즈의 모험》 (구판, 시간과 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모험》 (2판, 황금가지, 2015)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1》 (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모험》 (동서문화사, 2003)

* 《셜록 홈스의 모험》 (엘릭시르, 2016)

* 《셜록 홈즈의 모험》 (문예춘추사, 2012)

* 《셜록 홈즈의 모험》 (개정판, 코너스톤, 2016)

* 《셜록 홈즈의 모험》 (구판, 더클래식, 2012)

* 《셜록 홈즈의 모험》 (개정판, 더클래식, 2014)

 

 

셜록 홈즈(Sherlock Holmes)의 친구 존 왓슨(John Watson)은 의사 일로 충분히 먹고살 만한 중류층에 속한다. 그와 메리 모스턴(Mary Morstan)과 함께 사는 신혼집에도 하녀가 있었다. 홈즈가 처음 등장한 첫 번째 단편소설 『보헤미안의 스캔들(A Scandal in Bohemia)』에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왓슨은 홈즈와 함께 살던 베이커가 221B 하숙집을 떠나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는 행복한 신혼생활을 한다. 그래도 홈즈의 근황이 궁금할 때마다 하숙집을 방문한다. 홈즈는 오랜만에 하숙집을 찾은 왓슨의 복장을 관찰하면서 추리한다.

 

 

 “얼마 전에 비를 많이 맞았고, 자네 집에는 몹시 솜씨 없고 조심성 없는 가정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네.”

 

“이것 봐. 자네한텐 못 당하겠어. 사실, 목요일에 시골길을 가다가 비를 흠뻑 맞고 돌아왔네. 그러나 옷도 갈아입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추리를 했지? 그리고 가정부 메리 제인에게는 두 손 들었다네. 아내도 고개를 저으면서 곧 내보내야겠다고 하더군.”

 

(《셜록 홈즈의 모험》, 시간과공간사-구판, 13쪽)

 

 

홈즈는 왓슨의 구두만 보고 메리 제인(Mary Jane)‘몹시 솜씨 없고 조심성 없는 하녀(a most clumsy and careless servant girl)’라는 점을 알아낸다. 메리 제인의 직업은 ‘servant girl’이다. 사실 ‘servant girl’은 ‘하녀’로 번역해야 한다. 가정부는 가사 경험이 풍부한 여성이다. 메리 제인이 몇 살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지위를 생각하면 확실히 젊은 나이는 아니다. 나이 많고, 가사 경험이 풍부한 하녀가 가정부 지위에 오를 수 있다. 왓슨의 구두를 닦는 일은 하녀가 담당하는 잡일 중 하나다.

 

셜로키언(Sherlockian)이라면 런던 베이커가 221B 하숙집 주인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다. ‘허드슨 부인(Mrs. Hudson)’은 괴팍한 성격의 손님인 홈즈를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보헤미안의 스캔들』에서 홈즈는 하숙집 주인을 ‘허드슨 부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 원문 :

 

“When Mrs. Turner has brought in the tray I will make it clear to you. Now,” he said as he turned hungrily on the simple fare that our landlady had provided.

 

 

* 시간과공간사 (구판, 33쪽) :

터너 부인이 식사를 준비하면 이야기하지.” 그는 부인이 준비한 간단한 식사를 들면서 말을 이었다.

 

* 황금가지 (2판, 35쪽) :

허드슨 부인이 음식을 가져오면 그때 자세히 말해 주지. 저기 오는군.” 홈즈는 말하고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가져다준 간소한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 현대문학 (주석판, 110쪽) :

터너 부인이 음식을 갖다 놓았으니, 슬슬 먹으면서 얘기할게.” 그는 우리의 하숙집 주인이 차려준 소박한 음식에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 동서문화사 (32~33쪽) :

터너 아주머니가 식탁을 준비하고 나면 이야기하지.” 그는 하숙집 여주인이 차려준 간단한 식사를 급히 먹으면서 말을 이었다.

 

* 엘릭시르 (35쪽) :

터너 부인이 음식을 가져다주었으니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홈스는 하숙집 주인이 가져다준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 문예춘추사 :

터너 부인이 음식을 가져오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네.” 홈즈는 부인이 가져온 간단한 요리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며 말을 했다.

 

* 코너스톤 (개정판) :

터너 부인이 음식을 갖다 놓았으니 이제 더 자세히 말해줄게.” 허기가 많이 졌던지 주인아주머니가 간단히 차려준 한 끼에 맹렬히 달려들며 홈즈가 말을 이었다.

 

* 더클래식 (구판, 개정판) :

허드슨 부인이 음식을 가지고 오면 자세히 알려 줄게. 저기 왔군.” 홈즈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가지고 온 음식을 허겁지겁 입속에 밀어 넣었다.

 

 

 

허드슨 부인은 어디 가고, 어째서 이름이 낯선 ‘터너 부인’이 식사를 준비하는 걸까? 홈즈 연구가와 셜로키언 들은 ‘터너 부인’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내놓는다.

 

 

첫 번째 가설 :

홈즈가 맡은 사건을 글로 기록한 왓슨의 실수다.

 

 두 번째 가설 :

터너 부인이 부재중인 허드슨 부인을 대신해 잠시 일을 해준 것이다.

 

세 번째 가설 :

터너 부인은 하숙집에서 일하는 하녀다. 그녀의 고용주는 허드슨 부인이다.

 

 네 번째 가설 :

‘터너’는 허드슨 부인이 홈즈와 밀회를 즐길 때 사용한 가명이다. 

 

 다섯 번째 가설 :

아이린 애들러(Irene Adler)가 변장한 가짜 인물 혹은

홈즈의 강적 제임스 모리어티(James Moriarty)가 보낸 스파이다.

 

 

허드슨 부인이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이 홈즈 시리즈의 두 번째 장편소설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Four)이다. 이 소설 발표 이후에 나온 작품이 『보헤미안의 스캔들』이다. 작가 코난 도일(Conan Doyle)이 하숙집 주인의 이름을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두 번째 가설과 세 번째 가설을 지지한다. 터너 부인은 허드슨 부인이 고용한 하녀이고, 그녀가 잠시 허드슨 부인을 대신해 임시로 하숙집 주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허드슨 부인은 중류층 여성이다. 그녀의 경제적 수준이라면 충분히 하녀를 고용할 수 있다. 하녀의 일은 업무에 따라 세분되어 있다. ‘주방 하녀(Kitchen maid)’는 항상 주방에서 일해야 한다. 주방 하녀는 주방에서 식재료를 준비하고,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다. 가끔은 완성된 음식을 고용주의 식탁 위에 차리는 일도 했을 것이다. 허드슨 부인이 홈즈와 왓슨을 위해 차린 음식들은 터너 부인이 직접 만든 것일 수 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대한 열망이 컸던 상 · 중류층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가서 여가 생활을 즐기길 원했다.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바라던 이상적인 삶은 ‘일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었다. 허드슨 부인은 19세기 중기 중류층 여성들처럼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외출하고, 쇼핑을 즐겼을 것이다.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보면, 허드슨 부인은 ‘백인 중산층 여성’이다. 같은 여성일지라도 사회 계급에 따라 맞닥뜨리는 상황이 달랐으며 그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은 심각했다. 19세기 후반에 상 · 중류층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높아지기 시작했지만, 빈곤층 여성들의 삶에 결코 와 닿지 않는 ‘그녀들만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남녀 불문하고 누구나 고용주의 위치에 오르면 사용인을 당장 해고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아마도 왓슨과 메리 모스턴은 새로운 하녀를 고용하기 위해 하녀 메리 제인은 쫓아냈을 것이다. 실직자 메리 제인의 미래가 어둡기만 하다. 그녀가 하녀 일을 원한다면, 또 다른 고용주가 자신을 선택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하녀 일을 구하지 못하면 공장에 들어가야 한다. 정말 궁핍한 생활을 해야 하는 그녀가 딱하다. 왓슨과 모스턴이 하녀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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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6-0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한 문장 속에서도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군요. 때론 수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편이 사실을 밝히는 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7-06-01 18:57   좋아요 1 | URL
주석판을 읽으면서 홈즈 시리즈를 다시 보게 됐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 이런 책을 계속 보면 질리지 않습니다. ^^

2017-06-01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6-01 18:59   좋아요 0 | URL
책이 숲이고, 그 책 속에 있는 글자를 나무로 비유하면 저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잘 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06-0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치밀한 페이퍼군요..

cyrus 2017-06-01 18:59   좋아요 0 | URL
일주일동안 준비한 글입니다. ^^
 

 

 

 

 

 

 

 

 

 

 

 

 

 

 

 

 

 

 

 

 

 

 

 

 

 

 

 

 

 

 

 

* 샌디 피터슨 외 《S. 피터슨이 안내하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초여명, 2016)

* 모리세 료 《도해 크룰루 신화》 (AK커뮤니케이션즈, 2010)

* 노무라 마사타카 《크룰루 신화 대사전》 (AK커뮤니케이션즈, 2013)

* 모리세 료 《크툴루 신화 사전》 (비즈앤비즈, 2014)

 

 

 

오늘 먼저 공개한 《S. 피터슨이 안내하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약칭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리뷰는 이 글의 서론에 불과하다. 이 글은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을 좀더 깊숙이 파고든 글이다. 사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은 ‘크툴루의 부름 TRPG’ 게임을 처음 시작하는 이용자를 위해 만들어진 안내서다. 물론, 러브크래티안(Lovecraftian)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을 읽으려면 당연히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들을 먼저 읽어야 한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에 소개된 총 53종의 생명체 대부분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 종종 언급되거나 등장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먼저 읽은 다음에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을 읽으면 생명체의 실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의 2차 창작에 대한 정보가 많이 반영된 《도해 크툴루 신화》, 《크툴루 신화 사전》, 《크툴루 신화 대사전》도 참고할 만하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의 별점을 ‘4점’으로 준 이유가 있다. 이 책은 러브크래프트의 문장을 인용했는데, 문장의 출처는 그가 썼던 글(소설 혹은 공포문학의 의미를 정리한 비평문의 일부)이다. 그런데 작품명을 단 한 개도 소개하지 않았다. ‘신화의 괴물들을 소개하는 글’에 보면 글쓴이(미스카토닉 대학교 중세 형이상학부 명예교수 엘리파스 코드빕 풀워스-미스카토닉 대학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나오는 가상의 장소이다. 당연히 대학에 소속된 인물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가 작품에 남겨 둔 자세한 묘사를 꼭 읽어 보세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은 지금도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습니다”라고 썼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9쪽) 저자와 번역가 중 한 사람이라도 1%의 센스를 발휘해서 작품명까지 알려준다면, 독자들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찾아볼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두 개의 인용문은 '틴달로스의 사냥개'를 설명한 내용의 일부이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는 각도 120° 이하인 곳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방의 구석, 바위에 간 금, 접힌 나뭇잎 등, 어떤 것에서도 그 조건만 충족하면 사냥개의 출현이 가능하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62쪽)

 

차원을 넘어 인간계에 출현하기 위해서는 90도 이하의 각도가 있어야만 하며 90도보다 각도가 큰 곳에서는 들어올 수 없다.

 

(《크툴루 신화 대사전》 70쪽)

 

 

틴달로스의 사냥개(Hounds of Tindalos)는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언급되지 않은 괴물이지만,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적 공포’에 딱 어울리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틴달로스의 사냥개는 2차원의 세계에서만 서식하다가 90도 이하의 각도가 있는 공간을 발견하면 인간 세계로 들어온다. 괴물은 원통형의 혀로 생명의 정수를 빨아들인다. 그 녀석이 등장하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한다. 틴달로스의 사냥개가 나타나기 전에 미리 대피하는 방법이 있다. 괴물의 등장을 알리는 위험 신호를 감지해야 한다. 괴물이 출몰하기 전에 90도 이하의 각도로 이루어진 모서리에 악취가 나기 시작하거나 검푸른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런데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에서는 ‘120도 이하의 각도’가 이루어진 곳에 괴물이 나타난다고 적혀 있다.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것일까? 아무튼, 직각에 가까운 모서리가 있는 곳은 피하자.

 

초자연적 존재들의 이름은 부르는 사람마다 다르다. 옛 지구의 지배자인 ‘크툴루’는 인간이 발음하기 어려운 외계의 이름이다. 편의상 ‘크툴루’로 통일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미국 구글을 검색하면 ‘크툴루’의 다양한 이름이 나온다. 몇 개만 소개하자면 Tulu(툴루), Clulu(클룰루), Clooloo(클룰루), C‘thulhu(쓰툴후), Cighulu(시굴루) 등이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56쪽을 보면 ‘하스투르’라는 이름이 나온다.

 

 

차토구아는 강력한 위대한 옛 것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이다. 비슷한 외계의 존재들로는 크툴루, 이타콰, 형언할 수 없는 하스투르가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56쪽)

 

 

‘하스투르’는 하스터(Hastur)의 동일 이름이다. ‘형언할 수 없는 하스터(Unspeakable Hastur)’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스터는 바람의 속성을 가진 옛 지배자다. 그는 크툴루와 사이가 좋지 않다. 크툴루가 잠들고 있는 고대 도시 ‘를리에(R’lyeh)’는 ‘르뤼에’의 동일 이름이다. 러브크래프트 작품을 번역한 황금가지 판본에는 ‘리에’라고 되어 있다.

 

 

 

 

 

 

 

 

 

 

 

 

 

 

 

* 로버트 블록 《사이코》 (해문출판사, 2001)

* 로버트 블록 《사이코》 (도서출판 다시, 2004)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3쪽에 목차가 있고, 그 바로 밑에 헌사가 적혀 있다.

 

로버트 블로크에게 이 악몽들이 돌아가기를.

 

헌사에 언급된 ‘로버트 블로크’는 미국의 작가 로버트 블록(Robert Bloch, 1917~1994)이다. 그의 대표작은 영화로 더 많이 알려졌다. 그 작품이 바로 《사이코(Psycho)》다. 블록은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러브크래프트와 블록은 장르문학 연재 잡지 <위어드 테일즈(Weird Tales)>에 글을 발표했고, 두 사람은 서로 편지로 교류할 정도로 친분을 쌓았다.

 

 

 

 

 

 

 

 

 

 

 

 

 

 

* 러브크래프트 《러브크래프트 전집 1》 (황금가지, 2009)

 

 

1935년 블록은 『The Shambler from the Stars』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이 소설에 러브크래프트를 닮은 작중 인물이 등장하는데, 죽고 만다. 이 소설을 읽은 러브크래프트는 블록을 위해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는가?(The haunter of the dark)』를 썼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블레이크는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인물이지만, 누가 봐도 ‘로버트 블레이크’가 ‘로버트 블록’에서 따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블록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소설의 주인공을 죽인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이 엄청 살벌하게 글 쓰는 작가처럼 보이지만, 서로를 비방하기 위해서 소설을 쓴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의 절친한 관계 덕분에 재미있는 두 편의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앞에 언급했던 블록에게 바친 헌사를 다시 읽어보자. 어떻게 보면 러브크래프트가 블록에게 쓴 것처럼 보인다. “내가 악몽으로 엄청 고생했어. 친구, 너도 한 번 이 악몽의 고통을 똑같이 느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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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5-2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툴루 신화? 첨들어 봅니다. 이런 신화집도 있군요!
근데 냐루코 양은 재밌나요??
쓰신 페이퍼의 내용이 생소하기만 합니다그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재밌으면 구매할까 합니다..ㅎ

cyrus 2017-05-30 08:54   좋아요 0 | URL
만화의 장르가 개그라서 볼 만합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과 크툴루 신화를 모르는 분들이 만화를 보게 되면 만화 속 장면과 대사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

AgalmA 2017-05-29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서리 귀신 괴담도 많죠. 모서리에 대한 공포는 심리적인 건지 집단 무의식인 건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cyrus 2017-05-30 08:54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심리적인 이유로 모서리에 공포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방 안에 혼자 있거나 누워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이 천장과 (벽과 벽이 만난 생긴) 모서리에 향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존재가 천장이나 모서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 - S. 피터슨이 안내하는
샌디 피터슨 외 지음, 박나림 옮김 / 초여명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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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가면 안 되는 장소가 있다. 하지만 누르면 누를수록 튕겨 나오는 것이 인간의 호기심이다. 금기는 곧 미지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촉발한다. 드림랜드(Dreamland)로 가는 법을 아는 랜돌프 카터(Randolph Carter)가 금기의 장소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는 고대 신들이 사는 ‘미지의 카다스(Unknown Kadath)’를 찾으러 여행을 떠났다. 그곳은 오싹하고 음산한 냉기로 가득하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녔기에 누구나 미지의 영역에 대한 환상을 품을 수 있다.

 

 

 

 

 

 

 

당신은 혼자 드림랜드를 여행하다가 인간의 머리를 뜯어먹는 구울(Ghoul)을 만날 수 있다. 역겨운 비린내가 당신의 코끝을 스치기 시작하면, 얼른 달아나야 한다. 심해에 살다가 지상으로 기어 나온 물고기 인간을 눈앞에 마주하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악몽이 시작된다. 비록 초자연적인 존재들은 한낱 꿈에 불과하므로 당신을 위협하거나 두렵게 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꿈에서 깨어 세부적인 면을 분석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꿈속의 모든 것이 매우 괴이하고 끔찍한 실체였음을 알게 된다.

 

 

 

 

 

 

 

 

《러브크래프트의 공포들》은 꿈속의 모든 것들의 실체를 알려주는 안내서다. 괴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한 컬러 삽화는 환상적이면서도 생생한 현실감을 준다. 괴물들의 그로테스크한 형태는 독자의 눈과 마음을 압도한다. 컬러 삽화를 보면 볼수록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괴물들의 서식지와 생태 방식에 관한 정보를 숙지하지 않고, 드림랜드를 여행하는 일은 무모한 행동이다. 준비를 소홀히 한 드림랜드의 여행자는 처참한 악몽에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생소한 존재는 익숙한 존재보다 거북하고, 불확실한 존재는 확실한 존재보다 더 신경이 쓰인다. 덜 익숙하고, 불확실한 존재를 만나면서 생기는 불쾌한 느낌이 인간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공포의 본질이다. 가장 먼저 드림랜드를 탐사한 러브크래프트(Lovecraft)는 ‘미지의 공포’야말로 가장 오래되며 강력하다고 말했다. 드림랜드는 지금도 가장 강력한 공포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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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5-29 14:21   좋아요 0 | URL
그림이 아주 잘 만들었어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싫어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피해야 됩니다. 호기심에 책을 펼치다가 충격과 공포를 느낄 수 있습니다. ^^;;

stella.K 2017-05-29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이제 러브크래프트는 다 읽은 건가?

cyrus 2017-05-29 14:28   좋아요 0 | URL
다 읽었어요. 그런데 리뷰나 페이퍼로 소개하지 못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몇 편 있어요. 작년부터 구상하고 있었는데, 자꾸 미루게 되니까 계획이 묻혀졌어요. ^^;;

AgalmA 2017-05-2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리언 그린 한스 루돌프 기거 그림처럼 인상적이네요.

cyrus 2017-05-29 18:48   좋아요 1 | URL
기거의 그림, 정말 대단하죠. 어떻게 보면 기거는 ‘혐짤‘을 예술로 끌어올린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의 한 사람입니다. ^^

syo 2017-05-29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보아서는 안될 어둠의 세계에 속하는 2차 저작물들을 통해 우연하게 러브크래프트를 알게 되었어요. 주로 러브크래프트의 러브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그 저작물들 속에서는 니알라토텝이라는 것이 여자였는데......험험.

일본쪽에서 이 세계관이 종종 변형되어 쓰이나보더라구요.

cyrus 2017-05-29 18:53   좋아요 0 | URL
syo님이 보신 2차 저작물, 혹시 만화 아닌가요? 저도 그 만화를 봤어요. 니알라토텝을 여 캐릭터로 만들 생각을 할 줄이야... ㅎㅎㅎ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크툴루 신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에요.


syo 2017-05-29 18:59   좋아요 1 | URL
cyurs님의 댓글을 보고 나니까, 제가 ˝우연히˝, 이 부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네요ㅋ, 하여튼 우연히 발견한 그 저작물이 2차가 아니라 3차 저작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거 어쩐지 온 세상에 죄송스럽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기어다니는 혼돈이라는 말이 멋있어서 검색했는데 그런게 나올줄은. 험험

어쨌든 일본은 엄청난 곳이네요. 어떤 의미에서든.

cyrus 2017-05-29 19:22   좋아요 1 | URL
제가 그 만화를 다 보고 나서 덕후들이 로리캐에 열광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