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서 대금업자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항해 중인 안토니오의 상선 대신 그의 가슴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는다. 해적이 들끓던 16세기, 무역선이 못 돌아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뱃사람들이 위험을 감수한 동인(動因)은 ‘원금의 수백 배에 이르는 고수익’이었다. 투자가들은 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여럿이 돈을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곤 했다. 이것이 주식회사의 시작이다.

 

 

 

 

 

이익 앞에서 투자가들은 초인적 용기를 보여 준다. 이를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이라 했고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야성적 충동’이라고 불렀다. 야성적 충동은 케인스가 경기변동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만들어 낸 말이다. 케인스는 “투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가의 직감에 의존해 결정되며 투자의 이 같은 불안정성 때문에 경기가 변동한다”고 설명했다.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기업가의 직감이 바로 야성적 충동이다.

 

 

 

 

 

기업가의 야성적 충동이 잘 발휘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불확실한 상황 속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작정 투자를 감행한다는 건 쉽지 않다. 오히려 무모한 투자는 외환위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2001년 레몬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던 조지 애커로프 교수와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로버트 쉴러 예일대 경제학 교수는 공동 출간한 『야성적 충동』에서 금융위기로 파탄 난 세계 경제를 비유하는데 ‘험프티 덤프티’를 사용했다.

 

 

 

 

 

루이스 캐럴의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달걀이다. 영국 자장가에 나오는 원래 고집불통에 유식한 체를 잘하는 캐릭터로 소설에 등장하는 험프티 덤프티는 높은 담장 위에 위태로운 자세로 앉아 있다가 떨어져 깨져 버리는 인물이다. 험프티 덤프티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담장 위에 앉아 있지만, 권위 의식과 자만심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야성적 충동』의 저자들은 현재의 금융 위기도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다며 금융 시장의 달걀은 이미 깨져버렸다고 진단했다. 이들은 "애초에 험프티 덤프티가 세계의 작동 방식에 대해 정확한 시각을 가졌더라면 담장에서 떨어지지 않았을 것처럼 사람들이 경제의 진정한 작동 방식을 깨달았더라면 자산을 구매할 때 좀 더 신중했을 것이며 결국 경제는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케인즈가 맨 처음에 ‘야성적 충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경제적 상황 또한 무관하지 않다. 1930년대 대공황도 ‘야성적 충동’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 시장의 낙관론에 도취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열 상태로 돌진한 시장은 결국 거품이 꺼지면서 자신감을 상실하고 극도의 침체를 경험했다. 지나친 오만과 자신감과 같은 야성적 충동은 또 한 번 경제를 큰 위기로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야성적 충동으로 인해 이미 깨진 ‘경제’라는 달걀을 원상 복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새로운 달걀로 교체해야 한다. 어떻게 교체해야 하는가?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는 최선의 방법은 정부의 개입이라 결론짓는다. 그리고 그 개입은 언제나 야성적 충동이라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을 최우선의 요인으로 파악한 후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서서 적절히 관리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정부밖에 없는 것 같다. 앞으로 다가올 시장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인식의 교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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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10-17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 익고 갑니다.그나저나 경제이야기에 베니스의 상인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을 함께 쓰시다니 내공이 대단하심니당^^

cyrus 2013-10-17 21:29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잘 지내시죠? 오랜만입니다. '험프티 덤프티' 이야기는 로버트 쉴러의 <야성적 충동>에 인용되어 있어요. 그냥 잘 아는 이야기가 있길래 다시 한 번 기억해볼 겸 글로 정리해봤습니다.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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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탄생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지만 고도의 지능과 욕구를 가진 까닭에 다른 동물 세계와 비교해 수준 높은 사회와 문화를 이루며 이를 무대로 삶을 살아간다. 무엇을 얻을지,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 인간 욕구가 지적 활동을 이끌어 낸다. 이 결과로 얻은 지식·정보가 수단과 방법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는 시작과 더불어 욕구 실현은 물론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를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인 지식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인간 사회는 무엇 때문에 책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먼저 책을 보면 단순하게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다. 하지만 책에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면 종이 여러 장이 묶인 물건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은 인간과 주변 사물에 대해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또 관찰과 측정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정리한 지식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지식과 정보는 인간의 욕구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회와 문화를 이루고 발전시켰다. 책을 읽고 독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문명사회에서 책 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지식에의 목마름 때문이든지, 교양을 향한 딜레당트적 취향 때문이든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든지, 우리를 책으로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책을 향해 뻗는 손길은 아름답다고 상찬된다. 목적을 따지지 않은 독서를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 지식과 진실의 보고(寶庫)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증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 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모욕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이익과 모욕을 피하려고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마치 읽은 것처럼 거짓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뜻밖에 많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일생을 책 읽기에 바친다 해도 우리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신성한 것이고, 어떤 책을 읽지 않거나 대충 읽는 것은 눈 밖에 나는 일이다.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눈총받기에 십상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저자나 작품은 자칫 잘못 엮이면 빈곤하고 천박한 당신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짐짓 얼마나 선호하는지 숨기기도 한다.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어떤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드는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지적대로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책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다. 오히려 습득한 정보를 남들에게 과시용으로 비평하기 위한 총구가 있는 ‘무기’가 되었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혹은 지식)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러면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정통하고, 일가견이 있는 지식인 대접을 받게 된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4~1596년

 

지식이나 정보라는 게 이토록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 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21~22쪽)

 

 

사사키 아타루는 ‘비평가’란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자크 라캉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신을 ‘똑똑한 만능인(지식인)’이 되는 ‘향락’에 빠지게 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외모에 스스로 반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결국, 똑똑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비평가에게 책은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일 뿐이다. 이러한 비평가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마냥 우쭐대거나 악의에 찬 지적질을 할 것이다. ‘지식의 우월함’을 앞세워 자신보다 부족한 상대방의 기를 억눌리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복종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자칭’ 비평가들이 넘쳐 난다. 우리 주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소아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비평적 판단력이나 감식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 텍스트나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앞세운 발언을 일삼는 등 여러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읽고, 고쳐 읽고, 쓰며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읽은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사키 아타루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저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가차 없는 제목을 단 사사키 아타루의 생각은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이었는지를 제목만큼 호기롭게 들려준다.

 

책은 비평가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지식의 무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수준을 비교하거나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무기를 많이 보유하는 나라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느껴진다. 최근에 우리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통계조사 결과, 우리 대학생들이 한 해 평균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도서가 아홉 권 남짓 된다는 것인데, 이 요령부득의 지표를 놓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통계에서는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들이 이른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지만, 서울대 학생들조차 베스트셀러 위주의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성질의 독서를 하고 있음이 밝혀진 적도 있다. 이런 사실을 들어 사람들은 학생들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바라보는 책의 미래는 암울하다. 대학생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무조건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그들과 같이 지적 수준이 동등해질까?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 된다는 일방적인 독서 인식이 문제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으로 대학생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는가도 의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것과 쓰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한다. 읽고, 고쳐 읽고, 쓰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우리가 모두 읽는 일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은 ‘책은 읽어서 뭐하나’라는 냉소에 맞설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동적인 독자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텍스트를 외우거나 그 내용을 전부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서를 피하는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지 않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 사회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통찰력이 없는 ‘비평가’ 좀비들의 서식지로 전락한다. 오로지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괴물답고 심지어 폭력적인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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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어.

 

 

 

일본 작가 쓰지 히토나리가 쓴 연애 소설 『안녕, 언젠가』한 대목이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면 과연 나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 중 어느 쪽의 인생을 마주하게 될까.

 

 

 

 

 

 

얼마 전 SNS에서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진을 보게 됐다. ‘노부부의 동심’이라는 제목이 달린 여러 장의 사진이다. 사진 속, 머리가 하얗게 센 노부부는 놀이터에서 그네와 회전 뱅뱅이 등 놀이기구를 함께 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부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지만 사진 속 상황만으로도 이들의 즐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노부부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 그 때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노부부만의 행복한 시간을 몰래 촬영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 장면을 우연히 발견한 익명의 촬영자는 멀리서 지켜보는 내내 흐뭇했을 거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의 사진이라면 여러 사람이 보면 좋다.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뉴욕타임스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황혼’에는 자연의 황혼과 인생의 황혼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1. 해가 지고 어스름해질 때, 2. 사람의 생애나 나라의 운명 따위가 한창인 고비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이육사의 「황혼」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오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그가 노래하는 것은 인생의 황혼이다. 비록 한창 고비를 지났지만 아직도 정성된 마음으로 맞아들일 대상이 남아있다. 황혼이 곧 종말이라는 부정적인 관념, 특히 외로움으로 대표되는 골방의 커튼을 걷고 인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삶이라는 본질은 달라진 것이 없다.

 

딱히 몇 살부터를 황혼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인생은 60부터’라는 말과 상관이 있어 보인다. 황혼기에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라고 격려하는 뜻에서 생겨난 말일 것 같다. 이 황혼기가 머지않아 거의 30년 기간이 될 것인데 “이처럼 긴 시간들을 어떻게 아름답고 의욕적으로 보낼 것인가?”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질문이다.

 

 

 

 

 

 

 

 

 

정두영 목사 작곡의 성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는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에 곡을 붙인 것이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고 전 생애를 통하여 추구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내일을 향한 소망,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베풀며 따뜻하게 보듬는 사랑이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며 특히 황혼기에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랑이다.

 

 

 

 

 ♣ 사랑하면서 함께 늙어가기

 

 

 

청춘의 사랑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라면 황혼의 사랑은 화롯불같이 불씨를 품고 안으로 타오르는 열정이다. 후반부에서의 사랑은 그저 만화나 소설에서 꾸며 낸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이라면 앙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가 시각 교정에 도움이 된다. ‘당신은 이제 막 여든두 살이 되었습니다.…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해 전 세계를 울렸다. 죽을 때조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쇼’를 했다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삶이라는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든 연출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감동의 드라마 아닌가. 83세의 앙드레 고르는 자다가 깨어나 82세의 아내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 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저무는 세밑의 끝자락, 다들 아쉽고 뜻대로 안 된 일도 많을 터다. 그래도 곰곰 생각해 보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혼이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젊은 연인들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유치환 「행복」)는 시 구절을 한번 떠올려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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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운데 소비라도 줄여야지, 하지만 턱없는 소리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문화는 이미 소비시장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유행에 종속된 현대인들이 소비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늘날 문화는 무엇보다도 이제 소비자로 전환된 사람들이 경험하는 거대한 백화점으로 변해버린 이 세상의 여러 매장 중 하나로 자신을 바라본다. 이 거대한 상점의 다른 매점들과 마찬가지로 선반은 매일 바뀌는 매력적인 상품으로 넘쳐나며, 계산대는 그들이 광고하는 한물간 참신한 제품들처럼 곧 쓸모없어질 최신 홍보물로 장식되어 있다. 계산대의 광고와 선반에 진열된 상품들은 선천적으로 억누를 수 없는 순간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키도록 계산되어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중에서)

 

현대인은 소비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소비를 통해 나를 발견한다. 현대인이 선택하는 건 상품이 아닌 이미지다. 현대인은 이미지에 열광한 나머지 이미지를 따라하고 이미지를 먹고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미지를 지배하는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이미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미지를 통해 상품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다다이스트 마르셸 뒤샹이 소변기에 ‘R Mutt’라고 사인한 뒤 그걸 독립예술가협회전에 ‘샘’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으로 출품했다. 불경스럽고 비도덕적이고 표절이고 어떤 미적 대상도 될 수 없는, 현대미술에 대한 모욕이라는 이유로 출품되자마자 작가의 사전 동의 없이 작품은 사라졌다. 그러나 1964년에 다시 만들어진 복제본을 보고 그 누구도 “불경하다” “비도덕적이다” “표절이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한 뒤샹이 직접 소변기를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지저분한 소변기에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 전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시각과 생각을 심어주었다. 발상의 전환이었다. 똑같은 이미지인데 사람들은 이제 그 앞에서 기념촬영하기 바쁘고, 콧대 높았던 미술관들은 전시를 하고 싶어 안달이다.

 

이미지는 사전적 의미로는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태도다. 그리고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새롭게 해석하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비자의 취향은 나날이 변한다. 싼 것을 찾다가도 기능과 디자인을 보고 또 친환경 제품인지를 따진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에너지 효율이 어떤지 살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는가에 소비자들은 동전을 던진다. 이렇듯 소비는 수많은 이미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특별한 행위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음악을 듣고, 무엇을 하며 여가를 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는 소비대중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소비자의 특권이다. 이런 특권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 점심을 사 먹는 일차원적인 소비를 넘어 특정 생각을 지지하고 특정 문화를 후원하는 소비에 이르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 보니 무엇을 소비할까 고민하는 동물이 되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쇼핑을 즐기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흑백 사진의 오른손이 마치 신분증이라도 제시하듯 ‘I shop therefore I am’이라는 하얀색 글씨가 쓰인 붉은색 사각형 명찰을 들고 ‘저는 쇼핑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데요’라고 소개하는 것 같다. 쇼핑을 최고의 가치로 치켜세우고 쇼핑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는 당대 여성을 비꼬는 동시에, 무엇을 소비하는가를 통해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해 버리는 소비 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역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이미지 소비와 해석을 통해 그 한계를 극복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 이미지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변신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이 방법이야 말로 앞서 이야기한 이미지를 지배하는 해법은 아닐까.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을 통해 왕성하게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는 작가 바바라 크루거라면 그런 한계를 극복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동시에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예술가다. 모든 예술가가 다 그런 건 아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기존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건 단순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시점을 제시해 주는 이미지가 진정한 의미의 새 이미지다. 그리고 이 새 이미지야말로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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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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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불평등, 그 중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전 세계적인 이슈다. 이는 그저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시장의 힘과 정치적 권모술수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생겨난다. 자본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을 희생시키면서 상위 계층에게 이익이 되는 방식으로 움직여 왔다. 부자는 갈수록 부자가 되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은 더 큰 부자가 되고 있다. 반면, 중산층은 공동화되어 가난한 사람이 갈수록 더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사회적 기회는 기득권자들이 독식하며 양극화의 심화와 승자독식이라는 불평등은 우리들이 해결해야할 공동의 숙제가 되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미국의 부자들이 담장 공동체(gated community)에 살면서 호화로운 혜택을 받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국사회의 부자들 역시 ‘영훈국제중학교’ 입시 비리 사건에서 보았듯이 온갖 탈법으로 자신들만의 성을 쌓아가기에 바쁘다. 최근 ‘부유세’ 논란 속에서도 1%의 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 나머지 다수의 약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관념을 심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우리를 설득한다. 이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부자들의 부의 증가는 부와 소득의 위계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사하고 부자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낙수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악명이 자자하지만 그나마도 갈수록 환상이 되어가고 있는 계층 상승의 ‘사다리’는 오늘날 점점 더 통과할 수 없는 수많은 격자들과 넘을 수 없는 장벽들로 바뀌어가고 있다.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한다. (59쪽)

 

 

컵을 피라미드같이 쌓아놓고 위에서 물을 부으면 제일 위의 컵에 물이 다 찬 뒤에 그 아래에 있는 컵으로 물이 넘치게 된다. 이처럼, 대기업이나 수도권을 우선 지원하여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그 혜택이 중소기업이나 소비자, 지방에 돌아간다는 주장이 바로 낙수효과(Trickle Down)이다. 이런 논리라면 역사는 기득권이 영원히 보존되는 형국이 될 것이며, 아마 기득권자들은 이런 세상이 영구화되길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바우만은 이런 현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불평등은 자체의 논리와 추진력에 의해 계속 심화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나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외적 자극이나 압력, 충격 같은 것은 전혀 필요 없다. 오늘날 사회적 불평등은 역사상 최초로 영구기관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수많은 실패 끝에, 인간들은 마침내 영구기관을 만들어 작동시키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22쪽)

 

 

대기업이 잘 되면 덩달아 중소기업과 일반 소비자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 ‘낙수효과’는 정부가 경제정책을 대기업 중심으로 가져가는 데 주요 근거가 됐다. 정부가 감세를 통해 대기업과 부유층의 부를 늘려주면 결국 총체적인 국가의 경기를 자극해 경제발전과 국민 복지가 향상된다는 것이다. 1990년 초 미국에서 시행된 이런 정책은 문제점이 드러난 지가 오래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이런 잘못된 믿음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전면적인 경제 시스템의 교체 없이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는 ‘창조경제’, ‘경제민주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불평등 구조의 희생자들이 분노하기는커녕 부자 감세와 복지 예산 삭감에 동의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바우만은 잘못된 현상의 비밀을 우리가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거짓 믿음들에서 찾는다. 거짓 믿음은 '경제성장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소비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사회 질서의 재생산과 사회 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의 네 가지로 정리된다. 이런 믿음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자신을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그러나 바우만은 다시 자문한다. '길을 달리 하겠다고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될까, 우리가 길을 바꾸기만 하면 현실이 바뀌고 우리에게 행위를 명하는 현실의 냉혹한 요구들이 바뀔 것인가.' 결국,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방법은 거짓 믿음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예로 든다.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 엘리아스 카네티는 『말의 양심』에서 "진짜 작가로 만드는 요소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모든 것에 책임을 지려고 하고 말의 실패에 속죄를 하려고 하는 갈망"이라고 썼다.

 

바우만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비합리적인 행위"라면서 "세계에 사는 주민들은 거주권을 매정하게 거부당하지 않는 한 예언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다"며 여전히 암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어 "우리는 파국을 맞이해야만 파국이 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면서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는 한, 거듭해서 더욱 더 열심히 시도해보지 않는 한 그 생각이 틀렸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다소 힘 빠진 결론을 맺었다. 경제학적인 관점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바우만이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이 추상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적 수사와 은유를 곁들여 ‘거짓믿음’의 실체를 분석하고 그것이 심화되는 과정을 분석한 데는 공감할 대목이 많다.

 

이제 불평등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는 한 현재의 불평등 문제는 완화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게 될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을 거두고 정부 및 시민사회가 보다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의지를 가지고 대처해나갈 때 비로소 희망이 생긴다고 말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사회 공통적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 나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먼저 인식의 전환을 가로막고 있는 시장경제의 ‘거짓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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