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바다 창비시선 403
도종환 지음 / 창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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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밥을 먹어야만 끼니를 제대로 해결한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종종 면발이 당기는 날이 있다. 식당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즉석에서 말아주는 국수를 먹는 것은 소박한 즐거움이다. 나름대로 의미가 담긴 잔칫집에서의 국수는 어떤가. 생일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혼례 때는 부부가 해로하라는 의미로 대접하는 국수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다. 겨우내 곰삭은 묵은 김치를 쫑쫑 썰어서 참기름 넣고 버무려 국수 위에 올려놓아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국수의 맛이 최고라는 생각하는 것은 입안에 감도는 그 ‘맛’이 아니다. 맛있는 국수를 먹을 때 마음속까지 아련해지는 것은 옛날에 여러 사람과 함께 국수를 먹으면서 느꼈던 ‘정(情)’ 때문이다. 소찬이지만 둘레 상에 모여앉아 젓가락을 움직이며 나누는 국수에는 서로를 아우르고 위로하는 힘이 있다.

 

끊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

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어느 저녁』 중에서, 14~15쪽)

 

도종환 시인의 『어느 저녁』에서 차려진 국수는 평등한 음식이다. 나도 한 그릇, 너도 한 그릇. 누구에게나 평등한 음식이어서 좋다. 굳이 여유를 부리지 않아도 좋은 사람과 한 몸이 되어 말없이 국수를 먹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어떤 위로의 말보다 큰 위안이 된다.

 

 

 

 

 

Scene #2

 

 

인생의 본질은 니체(Nietzsche)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amor-fati)’다.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체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내 운명이라면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위버멘쉬(Übermensch)는 타고난 운명에 순응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재창조하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이전과 다른 나를 부단히 재창조하는 인간상이다.

 

모래벌판으로 난 길과 낙타들의 행렬을 따라가다

오늘 수첩을 꺼내 아모르파티라고 적는다

오라 운명이여

한낮의 모래언덕과 초저녁의 푸른 초승달과

내게 오는 운명을 사랑하리라

세상은 오래도록 모래와 바람이 휘몰아치며

열사의 뜨거움과 밤의 냉기가 충돌하는 곳

쓰러질 때까지 내 운명을 지나가리라

선택하고 뉘우치고 또 나아가리라

 

(『아모르파티』 중에서, 58~59쪽)

 

『아모르파티』의 화자는 현재의 정체성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신을 시도하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Zarathushtra)를 닮았다. 그는 살아가면서 무엇을 위해서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멈춰 서서 성찰한다. 우리는 흔히 목적의식 없이 사는 사람을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감을 잃지 않고 매진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목적으로 바라보면 그 순간부터 목적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볼 기회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목적의식을 부여하면 그 목적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그 사람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이 닫혀버린다. 삶은 우연한 마주침의 연속이다. 그래서 의도하지 않았지만 숱한 고뇌와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현실적 삶에 거리를 두는 성찰의 시간이다.

 

 

 

 

 

Scene #3

 

 

세상은 지난 4월 16일에 멈춰버린 괴로운 순간을 털고 일어서자고 한다. 일각에서는 ‘유독 세월호 희생자들에게만 과도한 슬픈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냉소적인 의견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나 내 의견은 다르다. 우리가 남의 일인 사고로 인해 슬픔을 느꼈다면, 그 슬픔은 단순히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수준을 넘어 본인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이입이 된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느끼는 슬픔을 조금은 털어내고 냉철히 현상을 짚어보는 것은 맞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는 것 자체를 집단적 무기력 증세로 보고, 이를 금기시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매년 4월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슬픔은 ‘화인(火印)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기도 하다.

 

비 올 바람이 숲을 훑고 지나가자

마른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져내렸다

오후에는 먼저 온 빗줄기가

노랑붓꽃 꽃잎 위에 후두둑 떨어지고

검은등뻐꾸기는 진종일 울었다

사월에서 오월로 건너오는 동안 내내 아팠다

자식 잃은 많은 이들이 바닷가로 몰려가 쓰러지고

그것을 지켜보던 등대도

그들을 부축하던 이들도 슬피 울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섬 사이를 건너다니던 새들의 울음소리에

찔레꽃도 멍이 들어 하나씩 고개를 떨구고

파도는 손바닥으로 바위를 때리며 슬퍼하였다

잊어야 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이제 바다는 내게 지난날의 바다가 아니다

눈물을 털고 일어서자고 쉽게 말하지 마라

하늘도 알고 바다도 아는 슬픔이었다

남쪽 바다에서 있던 일을 지켜본 바닷바람이

세상의 모든 숲과 나무와 강물에게 알려준 슬픔이었다

화인처럼 찍혀 평생 남을 아픔이었다

죽어서도 가지고 갈 이별이었다

 

(『화인(火印)』, 114쪽)

 

세월호 사고를 기억하는 일은 집단적 슬픔 · 애도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계기’였을 뿐이다. 세월호 사고와 연관된 각종 문제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극우 세력은 세월호 사고라는 하나의 사건이 갖는 사회성을 부정한다. 희생자에 향한 애도하는 행위마저 이념의 색깔을 입혀 깎아내린다. 그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오만하다. 우리는 슬퍼하고 추모할 자유가 있다. 잠깐의 슬픔 후에 다시금 일상으로 걸어 들어가 숨죽이며 사는 것도, 그 슬픔을 딛고 느낀 바대로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어 행동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다.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너무 쉽게 말하지 마라. 우리가 느낀 대로 고인들을 추모하는 자유를 당신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왈가왈부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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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04-16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아직 잊을 권리가 없다..

cyrus 2017-04-17 15:18   좋아요 0 | URL
어제 영국 프로 축구팀 맨유 유나이티드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한국말로 세월호 사고 3주기 추모 성명서를 공개했어요. 이 소식을 전한 네이버 뉴스 게시물의 댓글 게시판에 맨유의 추모 성명서에 시비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고, 화가 났습니다.

영국은 매년 힐스보로 참사를 잊지 않고, 추모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당연한 건데, 우리나라는 3년이 지난 사고를 추모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겨울호랑이 2017-04-16 16: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게 가장 맛있는 국수는 80년대 중반 서대전역 기차역에서 먹었던 가락국수로 기억되네요.^^: 기억할 사람은 평생 가지고 갈 사건이 세월호 참사라 생각이 들어요. 물론 잊고 싶은 이들도 있겠지요..

cyrus 2017-04-17 15:23   좋아요 1 | URL
대구 서문시장에 파는 칼국수가 유명합니다. 오늘 같이 비 오는 날에 먹기 좋은 음식입니다. ^^

세월호 사고에 대한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 싫어서 잊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건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추모하는 일을 사회통합에 저해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주도하는 것처럼 매도해서 지나간 일을 덮어버리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싫습니다.

AgalmA 2017-04-17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달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여러 문화권 사람들이 지능으로 여기는 측면을 연구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같은 사회적 속성을 지능의 한 측면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특히 동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화권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졌다.˝
-리처드 리스벳 <무엇이 지능을 깨우는가> 중

그 분들에게 생각 좀 하고 살고 말하자 그러면 더 욕 들을라나요^^;

cyrus 2017-04-17 22:35   좋아요 0 | URL
차분히 설득을 해도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은 그런 좋은 말조차 듣기 싫은 적의 말처럼 들릴 거예요. ^^;;
 

 

 

 

일본어 ‘후조시(腐女子)’는 한국말로 옮기면 ‘썩은 여자’로 해석된다. 원래 남성 동성애를 그린 만화나 소설, 즉 야오이(やおい)와 BL(Boy’s Love)을 즐겨 읽는 여성들이 자조의 의미로 만들어낸 단어였다. 지금은 만화와 소설에 푹 빠진 2, 30대 여성 오타쿠(otaku)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일본의 여성 중심의 하위문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타쿠는 ‘마니아(Mania)’의 일본식 표현이다. 야오이와 BL을 보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드는 자연스러운 취미활동일 뿐이다. 그런데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기성세대의 눈에는 오타쿠가 비정상으로 보인다. 오타구의 성적 환상은 평범하지 않아서 오타쿠는 변태이거나 잠재적 성범죄자라는 편견이 생긴다. 그래도 취미와 관련된 특정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덕후’라고 부르게 되면서부터 오타쿠를 이해하는 시선이 부쩍 많아졌다.

 

오타쿠는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몰입할 때 고립한다. 반대로 은둔형 외톨이는 세상과 담을 쌓으며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채 집 안에만 지낸다. 그동안 오타쿠는 방구석에 처박혀 하나에만 몰두하는 은둔형 외톨이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그들이 ‘덕후’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양지로 나왔지만, 여전히 ‘오타쿠 문화’의 확산을 부정적으로 보는 여론이 남아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는 만화, 드라마, 야오이 등 비현실 속 등장인물의 연애담에 푹 빠져 현실에서의 연애와 결혼을 등한시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일본은 이미 인구절벽으로 치닫고 있고, 결혼 자체가 기피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덕후 문화’가 확산될수록 젊은 비혼 인구는 증가하게 될까?

 

 

 

 

 

 

 

 

 

 

 

 

 

 

 

 

* 우에노 치즈코, 미나시타 기류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동녘, 2017년)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는 덕후 문화의 영향이 비혼(非婚)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녀라면 누구나 동화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읽고 나면 한 번쯤은 멋진 왕자를 만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 소녀들이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꿈을 꾼다고 해서 실제로 왕자와 결혼하려고 하는가. 소녀들은 성장하면서 현실과 상상을 뚜렷하게 구분한다. ‘백마 탄 왕자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온다는 사실, 이젠 다들 안다. 대신 ‘왕자님’은 TV 드라마에 있고 하이틴 로맨스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 야오이 · BL 문화를 잘 모르거나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야오이와 BL을 보는 소녀들이 동성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과 거리가 먼 착각이자 편견이다.

 

미나시타는 동성애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는 기혼 여성이고, 이성애자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알고 지냈고, 지금도 연락하면서 지내는 ‘여사친’은 야오이 만화를 즐겨 읽었다. 그녀 역시 작년에 결혼했다. 야오이와 BL를 좋아하는 여성이 이성애자가 되어 결혼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것만 봐도 야오이 · BL 문화가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인과 관계가 성립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에노는 후조시가 동성애 커플을 좋아하는 이유를 ‘남장한 이성애 커플’에 대한 환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므로 여성은 야오이와 BL를 보면서 느꼈던 사춘기 시절의 성적 환상을 스스로 넘어설 수 있다. 이것은 어린 시절에 사로잡힌 ‘백마 탄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끗이 지우는 일과 같다.

 

반면 일부 남성은 포르노 영상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섹스의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포르노 배우가 등장하는 야한 영상을 본 남자들이 자신이 만나고 싶은 여성은 포르노 배우처럼 저렇게 해야 한다는 환상과 강박관념을 갖는다.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도 현실적인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다. 그래도 이성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 중에 무의식적으로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이 기억나게 되고, 그것을 잊지 못할 때가 있다. 음경이 커야 섹스를 만족스럽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거나 사랑하는 여자의 동의 없이 항문 성교를 시도하는 등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앞서는 남자들이 종종 있다.

 

 

 

 

 

 

 

 

 

 

 

 

 

* 《대한민국 넷페미史》 (나무연필, 2017년)

 

 

여성 혐오를 부추기는 남자들은 비현실적 드라마에 푹 빠진 여성이 현실 구분 못하는 ‘김치녀’, ‘된장녀’가 될 수 있다고 악의적으로 왜곡한다. 그들의 주장은 ‘거짓 원인의 오류’에 가까운 여성 차별이며 여성이 향유하는 하위문화마저 무시하고 있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야오이 · BL 문화를 비정상으로 보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 또한 잘못된 원인을 사실인 것처럼 믿고 있는 오류에 불과하다.

 

언젠가는 우리 사회도 비혼 문제의 원인을 덕후 문화의 확산으로 보는 전문가의 입장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야오이와 BL를 보는 여성들을 심각하게 바라볼 것이고, 여기에 팔을 걷은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야오이와 BL을 불태워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거로 믿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야오이와 BL를 보는 것도 문화를 향유하는 일이라는 점을 떳떳하게 주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야오이 · BL 문화를 누리는 여성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비정상인’과 결혼을 기피하는 ‘이기적이며 까다로운 여성’으로 동시에 낙인찍힌다. 나는 야오이와 BL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야요이 · BL 문화가 사회 망조의 조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테르(Voltaire)의 말을 인용하면서 야오이 · BL 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겠다.

 

 

“나는 당신의 취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 취향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이 취향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 딴지 걸기

 

“옛날엔 2PM의 <죽어도 못 보내>가 참 좋았는데, 이제 이런 노래를 들으면 안전 이별을 생각하게 된다. 왜 죽어도 못 보내는 거냐?” (《대한민국 넷페미史》 90쪽)

 

→ <죽어도 못 보내>를 부른 가수는 ‘2A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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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토낑 2017-04-09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혼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었네요. 저는 완전 의외에요. 제주변에도 비혼선언하신분들 꽤나 있으시지만 저런 이유로는 전혀 없으셔서요 ㅎㅎ

cyrus 2017-04-09 08:03   좋아요 0 | URL
야오이를 본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될 리가 없고, 결혼을 기피한다고 원인으로 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

2017-04-1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14 21:24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아서 며칠동안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매일 글을 올리면 보는 분들 입장에서는 지겨울 수도 있어요. ㅎㅎㅎ

transient-guest 2017-04-15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만화책을 보거나 전자오락을 하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속설(?)이 있었죠.ㅎㅎ 20년이 지나고 나니 왜 우리나라에선 Nintendo를 못 만드냐던 인간이 나왔구요.ㅎㅎㅎㅎㅎ 사실 남들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많은 것들이 용납되긴 해요.. 학자들이야 현상을 분석하고 이론을 내놓는 걸로 밥먹는 사람들이구요..ㅎㅎㅎ

cyrus 2017-04-15 19:52   좋아요 0 | URL
게임과 만화책을 성적 향상에 방해되는 악의 축으로 설정되다보니 지금도 그런 속설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판다의 엄지 - 자연의 역사 속에 감춰진 진화의 비밀 사이언스 클래식 29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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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기독교와 끊임없는 갈등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시초를 규명하는 이론이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양분되었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진화론이 전혀 근거 없는 억측이라고 주장한다. 그 비판 근거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다. 생물의 진화 경로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화석 증거물을 일컫는다. 복잡한 진화과정에 비하면 발굴된 화석의 수가 많지 않다. 진화학자와 고생물학자 들은 진화의 흐름에서 중간을 이어주는 생물들을 찾아내기 위해 애를 써왔다. ‘잃어버린 고리’는 다윈(Darwin)의 《종의 기원》에서 시작된 진화론을 완성해주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다윈은 ‘잃어버린 고리’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점진론’을 내세웠다. 모든 진화는 오랜 세월 자연선택과 도태를 거쳐 점진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복잡한 생물계를 이루게 됐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다윈주의자들은 화석 기록의 불연속성을 대충 얼버무리며 “자연은 결코 비약하지 않는다.”(naturanon facit saltum)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화석 기록이 없는 ‘진화론’은 고생물학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래서 ‘잃어버린 고리’를 꼬집으며 창조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진화론자들이 먼저 싸움을 걸지 않는다. 진화론자들은 ‘잃어버린 고리’가 진화론의 약점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들이 해야 하는 일은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처럼 진화론의 약점을 보완해줄 과학적 근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굴드의 《판다의 엄지》는 ‘잃어버린 고리’ 때문에 궁지에 몰린 고생물학자들을 구원한 책이다.

 

굴드는 다윈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이 항상 점진적으로 발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순간적 도약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굴드는 닐스 엘드리지(Niles Eldredge)와 함께 단속평형이론을 주장한다. 생물이 오랫동안 거의 변하지 않다가, 환경이 변화하면 갑작스럽게 형태의 변이나 종의 분화가 일어난다. 즉 생물은 생태계가 안정된 평형 상태에서는 거의 진화하지 않다가 빙하기, 운석 충돌 등으로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진화하거나 소멸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화의 역사에서 그런 사건이 자주 있었다. 4, 5억 년 전부터 지구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생물 종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다.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매우 다양한 주요 동물 군(群)이 대거 출현했다는 점에서 캄브리아기는 혁명적인 지질시대로 구분된다.

 

다윈은 필요 때문에 진화한다는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을 반박하면서 종의 다양성을 ‘우연’으로 설명했다. 진화는 목적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이다. 그래서 판다(panda)는 사시사철 푸른 잎을 먹을 수 있는 대나무를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손목뼈를 변형하여 다섯 개 손가락과 별개인 가짜 엄지를 만들었다. 환경에 따라 진화의 방향은 역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종의 능력을 퇴화시키기도 하고, 종을 더욱 연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인류의 출현은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이라는 진보를 상징하는 승리의 과정이 아니라 위험과 우연한 성공의 연속이다. 생명의 진화는 인간의 출현으로 완성되지도 끝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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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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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전통마을은 산을 뒤로하고 하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가파르지 않은 남향 산기슭에 발달했다. 마을 앞의 논은 오랜 세월 산에서 흘러내린 유기질 토양이 쌓인 문전옥답(門前沃沓)이었다. 마을 뒤 경사면은 연결되었다. 이런 공간 배치는 풍부한 샘물로 취수가 편리하고, 일조량이 많고, 북서 계절풍을 피할 수 있으며 연료 채취에 유리했다.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전에는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이치를 절로 체득했다.

 

역사학자인 저자가 펴낸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우리 선조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생태학적 관점을 찾아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생물은 주위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생물 상호 간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생물과 환경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계를 이루는 것을 생태계라고 한다. 생태학(ecology)은 자연 존재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각종 지구 생명체를 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과 인간 문화도 그런 자연의 순환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각으로 보면, 15세기 조선 건국 초기에 이미 생태주의에 반하는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땅은 삶의 터전이자, 귀중한 목숨과도 같다. 농부들은 자연이 일으키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땅을 지키고 가꾸며 수확했다. 자연의 대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그곳에서 서식하던 호랑이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가죽이 비싼 값에 팔리는 털가죽 때문에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마구잡이로 포획되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온 일본인 사냥꾼들이 호랑이 가죽을 얻을 겸 민족정신 말살 목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호랑이 개체 수가 줄어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초기부터 호랑이 사냥 정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호랑이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나무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가 된 것은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전을 일구면서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활엽수는 줄고, 침엽수인 소나무가 늘어났다. 전염병은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전염병의 유행을 일종의 재난으로 치부해 위정자의 허물을 물어 권력 교체가 이뤄진 적도 있다. 이런 전염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저자는 농지를 소중히 여기는 농경문화에 혐의를 두고 있다. 조선의 전염병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걸린다고 하는 홍역은 전염성도 강해 일단 발생하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온통 죽음의 강토로 변하곤 했다. 그래서 ‘홍역을 치렀다’는 표현은 비참의 극을 형용하는 말이 되었다. 선조들은 전염병을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땅이 내린 재앙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조들이 소중히 가꾼 농지에 전염성 세균이 득실거렸다.

 

안정된 생태계는 어떤 원인에 의해 평형이 부분적으로 깨지더라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나 자기 조절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생태계는 균형을 잃게 되어 평형은 깨어지고, 결국 생태계 전체가 파괴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번 파괴된 생태계는 원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만약,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생존에 뜻하지 않은 중대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농지를 만들기 위해 무너미(범람원의 순우리말)를 개간하면서 그곳에 서식하는 동물이 사라졌다. 선조들은 풍족한 쌀 수확량을 확보했으나 홍수와 전염병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자연에 대한 15~19세기 한국인의 태도는 기존에 생각한 것과 다르게 ‘자연 친화’와 거리가 멀다. 자연을 섬겼어도 생존과 직결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자연을 이용했다. 그 시절 한국인들도 자신을 한반도의 주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연 정복을 정당화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조선 시대의 생태환경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끝까지 따라가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자연에 대해 전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딴지 걸기

 

“일찍이 찰스 다윈(1809~1882)《동물학》(Zoonomia, 1794)에서 생명체를 개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강조한 바 있다.” (프롤로그 10쪽)

 

→ 《동물학》의 저자는 찰스 다윈이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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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4-06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덕분에 잘 모르는 양서를 소개받고 갑니다. 저도 베스트셀러, 신간류가 아니라 스스로 양서를 발굴해서 읽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cyrus 2017-04-06 16:04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리뷰를 쓰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그분들이 쓴 리뷰 덕분에 관심 분야를 넓힙니다. ^^

낭만인생 2017-04-0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꼭 읽고 싶네요.

cyrus 2017-04-06 16:05   좋아요 0 | URL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미시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노르베르토 보비오, 문학과지성사 (1992년)

*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 사계절 (2017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두 개의 이념 중 어느 한쪽을 맹신하면 심각한 갈등이 발생한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는 사람들은 국민 다수의 지지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 다수가 원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정의와 민주주의이며 여기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불의와 권위주의 세력이다. 그 결과 지지자의 수가 힘이고 힘이 정의가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다수의 횡포’이다. 다수의 횡포를 부리는 자들이 내세우는 다수결 원칙은 사실상 중과부적(衆寡不敵)의 논리를 민주주의적인 것처럼 그럴 듯하게 포장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다수의 독재’로 둔갑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본래 의미를 잃게 만든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기본권과 개인적 자유의 보장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국가나 사회공동체가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는 행위에 강력히 반대한다. 인간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개인에게 이러한 자유가 최대한 허용될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 전체적으로 행복이 극대화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 질서가 개인과 국가의 부를 함께 증대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도 시장경제 질서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자칭’ 자유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다. 자칭 자유주의자와 손을 맞잡은 우파 정치권과 극우 언론은 노조 결성을 ‘빨갱이’, ‘체제 전복 세력’으로 매도하기에 바쁘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전체주의다. 그렇지만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도 결합할 수 있다. 특정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이념과 신념을 쉽게 조종할 수 있다. 원칙 없는 민주주의는 전체주의로 변질한다.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자유주의의 토양이 부실하면, 성숙한 민주주의가 꽃필 수 없다. 우리나라 경우 좌우간 갈등, 분단 시대로 넘어가는 격동기를 겪었기에 정치 상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당연히 이 시기 국회의 정치적 성숙도는 낮았다.

 

우리나라 헌법은 기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제헌의회부터 헌법 굴절의 역사는 시작됐다. 헌법기초위원회가 의원내각제를 기초로 한 헌법 원안을 통과시켰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고집 때문에 이는 하루아침에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었다. 그가 대통령제를 택하면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확실한 권력자로 자리매김했다. 1952년 7월 ‘발췌개헌’을 통해 직선제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했고, 1954년에는 대통령 중임 제한 규정에 부딪히자 ‘사사오입(반올림)’이라는 억지스러운 근거를 가져오면서 부결됐던 헌법개정안을 하루 만에 번복했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독재정치를 위해 대통령중심제를 택했던 것이 그 후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독재, 장기 집권, 정통성 문제 등에 대한 시비가 끊임없이 제기된 원인이 됐다.

 

조국 분단이 더욱 고착되면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기본권이 정통성 없는 권력 아래서 체계적으로 훼손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기득권을 누려왔던 국회의원들은 이승만을 옹호하고, 미화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대통령께서는 그의 거의 전 생애를 민주주의의 발상지이고 가장 모범국인 미주에서 지내셨습니다. 미주에서 공부를 해서 최고 학위를 받으시고 또 미주에서 거의 일생을 혁명운동 독립운동에 공헌한 어른이십니다. 그 어른은 철두철미한 민주주의자입니다. 그 어른이 헌법에 의지해서 국회에서 당선이 되었고 또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맹세한 어른입니다. 그 어른은 헌법에 의지해서 앞으로도 행동할 것입니다. [1]

 

이 발언을 한 사람은 4·19 혁명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외무부 장관 허정이다.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킨 뒤 새로 발족한 제2공화국의 내각에 권한을 넘겨줬다. 기분 탓인가. 이승만 하야 이후에 나타난 허정 권한대행 체제를 바라보면서 박근혜와 황교안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허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의 망명을 도운 사람이다. 황교안은 초대 법무부 장관 이후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의 역할을 해왔고, 제기되었던 각종 문제에 대해서 통상 박근혜를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정책들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놀랍게도 50년대 국회의 수준과 지금의 국회 수준이 거의 비슷하다. 반세기동안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가치가 정치권력 아래서 훼손되었음에도 여전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외면한 구체제를 그리워하고,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려왔던 수구세력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은 박근혜 탄핵 표결을 반대하는 장문의 글을 남겼다. 그 글에서 김 의원은 박근혜가 ‘1원 한 푼 안 받은 지도자’라고 했다.[2] 전 새누리당 대표 이정현은 2012년 대선경선 후보 시절 박근혜의 5·16 역사관 문제를 적극 옹호했다.[3] 박근혜는 5·16 군사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면서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녀의 과거 발언은 5·16 군사 쿠데타를 헌법 전문에 넣어 ‘혁명’으로 정당화한 박정희 대통령의 헌법 개헌 시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뭐든지 싸우려고 하고, 상생이 아니라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또 국민을 어떻게 편안하게 할 수 있느냐.” [4]

 

이 발언을 누가 했는지 아는가. ‘수인번호 503번’으로 구치소에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이 사람은 2004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 수호 의지가 없다면서 일갈했다. 그리고 수인번호 503번은 십여 년 지난 후에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수인번호 503번은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되어 국정 운영을 하다가 임기를 1년여 앞두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당했다. 파면을 만장일치로 결정한 헌재는 ‘상쟁하려는 대통령’이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행위를 저질렀다고 봤다. 뭐든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상생이 아니라 상쟁하려는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자유와 민주라는 두 개의 가치 중에서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다. 다만, 국민을 상대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모두 이해시켜 나가는 데 있어 이념적 편협성을 극복해야 한다. 헌법의 가치를 무시한 정치권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이 땅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우게 하는 좋은 영양분이다.

 

 

 

 

[1] 《헌법의 상상력》 118쪽

 

[2] [김진태, 박근혜 탄핵 표결 앞두고 “1원도 챙긴 적 없는 지도자”]

스포츠동아, 2016년 12월 19일

 

[3] [이정현 “역사 평가는 다양, 김일성 찬양하듯 한군데로 몰수 없어”]

매일경제, 2012년 7월 25일

 

[4] [박 대표 “대통령 헌법수호 원칙 의심”] 연합뉴스, 2004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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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4-05 16: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자유‘만 강조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고, ‘평등‘만 강조하는 나라가 북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현실적으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한 가지 이념만 강조하는 사회가 정상으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04-05 16:13   좋아요 2 | URL
그동안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잘못 배웠고, 심각할 정도로 왜곡되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주의가 ‘평등’을 지향하는 건데, ‘사회주의는 악의 이념’, ‘사회주의=북한식 공산주의’라는 편견 때문에 ‘평등’을 언급하면 ‘빨갱이’ 소리 듣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전체주의라는 사실을 모르는 대학생들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뭐냐고 물어봤어요. 그때 어떤 학생이 공산주의라고 대답했어요. 정말 웃픈 일이었습니다. 그 질문을 한 교수님이 보수주의자인데, 그 학생의 대답을 듣고 어이없어 하더군요.

겨울호랑이 2017-04-05 16:20   좋아요 3 | URL
^^: 교수님께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대말이라고 설명하셨겠네요.. 현실에서는 양 극단 사이에 모호하게 수많은 체제들이 있고 이들의 정치, 경제체제가 복잡하게 얽혀서 명확하게 정의내리기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체제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우건 구성원들 다수가 동의하고, 행복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캐모마일 2017-04-06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글의 의미가 더 와닿습니다. 밀은 민주주의 하에서 다수의 횡포를 걱정하면서도 노동자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급진주의 운동을 실천했다고 하는데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란 책도 밀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드립니다.^^

cyrus 2017-04-06 16:09   좋아요 1 | URL
예전부터 밀의 <자유론>을 읽으려는 마음만 여러 번 했지, 정작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어요. 저는 밀의 자유주의를 좋아해서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