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다시 읽어봐야지 하고 내내 벼르던 책이었는데, 마침 일요일 오전에 이 책 생각이 났다. 조카들이 아직 제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까먹을까봐 책장으로 가 이 책을 꺼내왔다. 조카들을 보내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백화점과 시장에 다녀오고, 저녁을 먹고, 그렇게 그 날 해야지 마음 먹은 것들을 다 해낸 뒤에 이 책을 펴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게된 책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 읽자마자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는데, 처음 읽었던 몇 해전에도 그랬지만(아마 십년도 넘은것 같다), 어떻게 이 관계가 가능했을까, 싶다.


헬렌 한프는 뉴욕에 살면서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고서점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매할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띄운다. 1949년의 일이다. 고서점의 직원은 그 편지에 답장해주고 헬렌 한프가 원했던 책들의 2/3 가량을 보내주면서 이 편지를 주고 받는 관계가 시작되는데, 이 편지는 1969년까지, 20년간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책과 청구서, 책값만 주고받게 되는 게 아니라, 런던이 식량배급 받던 어려운 때임을 아는 헬렌은 달걀, 고기, 통조림을 선물로 보내주기 시작한다. 이에 응답하고자 서점 직원들도 저마다 손수 짠 식탁보와 아름다운 책을 보내주고. 게다가 서점 직원 한 명과 주고받던 편지는, 그 서점의 다른 직원들과 또 서점 직원의 가족들, 그리고 서점 직원의 이웃에게 까지도 이어진다. 관계가 쭉쭉 뻗어간달까.



다른 말인데,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흐름도 이와 같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상대만 보이고 상대만 중요하다. 상대를 알아가기 위해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이 있었다면, 이제 함께하는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게 된다. 그렇게 《비포 미드나잇》이 있다. 이런 식의 흐름이라니, 너무 좋잖아? (비포 컬렉션, 꼭 사야지!)


















자,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실제로 있었던 아름다운 사연이 너무 좋아서, 재작년이었나, 런던에 갔을 때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갔었다. 그 주변에 여전히 고서점은 많았지만, 내가 기대한 이 서점, [마크스 & Co. 중고서적]은 보이질 않았다. 찾아 헤매다가 보이지 않아 다른 서점에 가 물어보니, '네가 말하는 그 서점이 뭔지 아는데, 그 서점은 이제 없어' 라고 말했다. 슬픔의 새드니스... 가서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시무룩)




알라딘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나는 책을 나누고 있었다. 중고서점 생긴 뒤에 중고로 팔기도 했고 또 가끔은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가끔은 읽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 이왕 보내는 거, 선물 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자 싶어 택배비도 내가 부담해 보내는데, 나는 그저 내가 읽지 않는 책을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므로, 받는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하진 않았다. 다만, '잘 받았다'고, 무사히 받았는지만 알려주면 충분했다. 혹여라도 이 책을 받고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느낄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무얼 받자고 보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얼마전에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나로부터 책 나눔으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는데 잘 읽었다며, 커피 두 잔과 케익 한 조각을 기프티콘으로 보낸 거였다.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놀랐지만, 굉장히 새로운 감동이 찾아왔다.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의 가격이면, 나로부터 중고로 받은 책이 아니라 새 책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중고책을 산 다면 두 권을 살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 분은 나로부터 중고책을 받고서는 커피 두 잔과 케익이라는, 새책을 뛰어넘는 금액의 선물을 보내신거다. 이걸 순전히 '돈'으로만 따진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커피 두잔과 케익이라는 선물에는 돈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선물을 받고 한동안 '인간은 대체 뭘까' 생각했다. 인간은 대체 뭐길래, 돈으로만 보면 더 손해인 일을 이렇게 한걸까? 새 책을 사고도 남았을텐데, 왜 중고책을 받아놓고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를 보낸걸까?



나는 엄마와 함께 까페에 가 커피 두 잔에 케익한 조각을 앞에 두고 이 사연을 얘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 인간 너무 신기하지 않아? 뭘까? 덜한 것 받고 더한 것을 내주잖아. 돈으로 따지면 손해인데."



그러자 엄마는 말했다.



"너한테 받은 게 고마웠나보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물론 이렇게 책 나눔을 했을 때 고맙다고 표현한 사람들은 그 전에도 있었다. 칠봉이만 해도 내가 이 공간에서 처음 책나눔을 했을 때, 나로부터 책을 받고 영화예매티켓 네 장을 보냈었으니까. (아, 잠깐만, 눈물 좀 닦고요.) 그런데 이 커피 두 잔과 케익 한 조각이 참 뭐랄까, 받는 순간부터 되게 마음에 남았다. 뭘까, 이건 대체 뭘까. 인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간.. 뭘까? 도무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인간...아, 인간이여...




헬렌 한프는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가난하게 살았고, 어쩌다 일이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나는, 그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그렇게 가진 돈을 조금씩 보내서 책을 한두권씩 구입하면서도(한꺼번에 많이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서점의 직원들에게 달걀, 고기, 통조림을 보내는거다!! 인간... 진짜 뭘까? 뭐지? 내가 많아서가 아니라, 나누고 싶어 나누는 삶이라니.. 인간..뭔가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p.46)











저희는 모두 당신 편지를 좋아하고, 어떻게 생긴 분인지 상상해보곤 해요. 저는 당신이 젊고 아주 세련되고 총명할 거라고 생각해요. ‘노老‘ 바틴 씨는 당신이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지만 좀 학구적으로 생겼을 거라고 그래요. 사진 한 장 보내주시지 않겠어요? 한 장 있었으면 좋겠어요.


- P25

당신의 수많은 자상한 선물에 과연 보답할 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영국 여행을 결심하신다면, 머물고 싶은 한 언제까지나 쓰실 수 있는 침대가 오크필트 코트 37호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 P76

친애하는 헬렌,
다시 편지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네, 우린 아직 여기 있습니다.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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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4-29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요일 아침 따뜻한 사연 , 따뜻한 글이네요.
‘여전히 여기에’라는 말이 얼마나 뭉클한 말인지.

다락방 2019-05-01 17:22   좋아요 0 | URL
여전히 여기에, 라는 말은 저 역시 하면서도 뭉클한 말이에요. 정말 좋지요?

저는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가끔은 이해안될 정도로 너무나 따뜻하거든요.
나인님, 5월의 첫날 잘 보내고 계신가요?
:)

비연 2019-04-29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훈훈해지는 글이네요. 저도 이 <채링크로스 84번지> 읽으면서 그들의 그 따뜻한 교류가, 한번도 보지 않으나 통하는 마음들이 참 고맙게 느껴졌었습니다. 사람이 정성을 다해 표현해도 상대가 제대로 받아주지 않으면 그 정성이란 게 무의미한 것처럼 흩어지기 마련인데, 정성이 화답을 받는 것만큼 사는 데 힘이 되는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님의 글이 오늘 하루, 제게 버틸 힘을 주네요. 그리고 커피와 케잌을 선물한 어느 님으로부터도.

다락방 2019-05-01 17:23   좋아요 1 | URL
너무 좋지요? 오래전에 읽었을 때도 좋았는데, 다시 읽어도 역시 좋더라고요. 좋은 책은 시간이 흘러 다시 읽어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십 년 후에 읽어도 또 여전히 좋겠지요. 같은 책을 읽고 이 책 참 좋지? 하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 역시 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여기에서 계속 같이 읽고 이야기 나누면서 지내도록해요, 비연님. 이렇게 가끔은 아주 따뜻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서로에게 들려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복잡한 마음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여자 디제이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이라면 전혀 달랐겠지만, 대학시절 사귀었던 첫사랑 남친에게 왜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르겠다고. 심지어 그 남자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 매달리고 고가의 지갑까지 선물로 주었었다는 거다. 같이 방송하던 게스트도 왜그랬냐고 하고, 디제이 역시도 왜그랬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나 역시도 의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바람을 피운 건 나를 배신하는 행위인데, 나를 속이는 행위인데, 나를 잠시라도 밀어둔 것인데, 왜 그런 남자에게 날 떠나지 말라고 매달린걸까?




어제 자기전에 침대에 누웠다가, 갑자기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영화속의 자쿠지 신이 너무 보고 싶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그 씬이 갑자기 너무 보고싶은거다. 그 영화속에서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장면. 그 장면이 보고 싶어서 틀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너 때문에 그 먼 데 있는 한인마켓가서 네가 좋아한다는 요구르트도 사왔다'고 하는 피터에게 '그 요구르트가 그렇게 맛있었나 보지?' 하고 부러 엉뚱하게 대답하는 라라 진을 보고 좋아서 웃었다. 그 때의 실망하는 남자의 표정과 행동이란. 그런데,


그 남자의 전(前)여친은 그 둘의 관계를 떼어놓고 싶어 라라 진에게 '네 남자친구가 어제 내 방에 왔었다'고 말한다. 게다가 라라 진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머리끈이 왜 피터의 전여친에게 가 있는걸까. 라라 진은 너무 속이 상하고, 전날 밤의 다정함이 다 뭐였나 싶다. 라라 진은 피터에게 묻는다.


"너 어젯밤에 젠 방에 갔었어?"

"그거 설명할게,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내 머리끈도 젠 줬고?"

"...그건...."



라라 진은 우리 그만 끝내자며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피터는 그 날밤 라라 진을 찾아와 오해를 풀고자 한다. 얘기를 좀 나누자고 한다. 그런 피터에게 라라 진은 이렇게 말한다.



"항상 밀려나는 것도, 척하는 것도 지겨워."



나는 이 자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라 진은,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밀려나는' 상대이고 싶지도 않고, 그들의 관계에 대해 거짓으로 '척'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한다면, 밀려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밀려나는' 상대이고 싶지 않다. 뒤로 제껴두는 상대가 되고 싶진 않아. 함께 있으면서 마음 아프고 속상한 관계보다는, 혼자면서 자유로운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밀려나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우리의 관계를 '척'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서는 안될짓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런 자세가 나를 우선 순위에서 밀어두지 않는 상대를 만나게 한다고 생각하고. 왜냐하면, 피터는, 오해를 풀지 못하고 서로 기분이 안좋은 상황에서 헤어지는 와중에도 라라 진에게 이렇게 말했으니까.



"넌 밀린 적 없단 거 알아줘."



내가 나를 밀려나는 위치에 두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세로 살아야, 나를 밀어두는 상대를 만나지 않을 수 있다. 오늘 아침 라디오 디제이는 대학시절 상대로 하여금 자신을 한 쪽으로 제껴두는 걸 허용했기 때문에, 그 나쁜 관계에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나쁜 관계에 왜, 도대체 어째서, 왜, 왜 매달린걸까?




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5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는 《여자는 인질이다》로 정했다. 4월에 이미 이 책의 앞 몇 장을 읽어본 나로서는 꽤 힘겨운 독서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 아침 라디오 디제이가 바람 핀 남친에게조차 매달렸던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다시 처음부터 읽을 생각인데, 자, 여러분, 5월에도 우리 열심히 읽고 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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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4-29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월의 책을 미리 공수해놓은 단발머리입니다. 5월에도 여성주의책 같이 읽기, 같이 하고 싶습니다.

참, 피터의 자쿠지 신은 사랑입니다💜

다락방 2019-05-01 17:19   좋아요 0 | URL
항상 함께해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님. 단발머리님 덕에 제가 꾸준히 갈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 5월에도 읽으면서 열심히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피터의 자쿠지 신은 너무 좋아서 저는 어제도 자기 전에 보면서 미소지었답니다. 라라 진의 천연덕스러움 크- 너무 좋아요! >.<

공쟝쟝 2019-04-30 0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가 눈에 화악! 꽂혀요!!
캘리번과 마녀가 너무 좋고 어려웠어요 ㅜㅜ저 혁명의 영점이랑 가부장제의 창조 빨랑읽고 (아쉽지만 여자전쟁은 패스하고 5월도서루 직진할게여🙋🏻‍♀️) 다락방님 따라서 고고🏃🏽‍♀️🏃🏽‍♀️

다락방 2019-05-01 17:20   좋아요 1 | URL
캘리번과 마녀가 저도 어려웠어요. 저는 혁명의 영점은 더 어렵더라고요 ㅠㅠ
네, 쟝쟝님 부지런히 따라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읽고 항상 글 남겨주시는 것도 너무 좋고 고마워요! 쟝쟝님도 읽고 쓰는 게 반복될수록 성큼성큼 앞으로 걷는 게 막 느껴져요. 이렇게 같이 책 읽는 게 쟝쟝 님께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럽고 그렇답니다. 우리 할 수 있는 한 함께해요!

공쟝쟝 2019-05-01 21:24   좋아요 0 | URL
어렵긴 하지만 ㅎㅎ 한분야의 책을 꾸준히 함께 읽고 나누는 건 저에겐 정말 귀하고 고마운 경험이예요~ 함께해요 ^.^

블랙겟타 2019-05-01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슬그머니 매달 참여하는 것으로... ^^;;;

앞장에서 미리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내용이라고 말해두는군요. ㅠㅠ

다락방 2019-05-01 17:21   좋아요 1 | URL
블랙겟타 님이 함께한다고 해주신 순간부터 저는 정말이지 감사하고 기쁘답니다.
그리고 5월 도서는 블랙겟타님도 각오하고 읽으셔야 할 거에요. 아주 세게 시작하는 책이거든요.
그렇지만 주저앉지 말고 우리 함께 읽고 써보도록 합시다. 화이팅!!

블랙겟타 2019-05-01 17:56   좋아요 1 | URL
저역시 이렇게 함께 읽으면서 얻어가는 것이 많기때문에 감사하죠.
이번 책은 각오 단단히 먹겠습니다!!
(๑•̀ㅂ•́)و✧
 
여자 전쟁 - 잔혹한 세상에 맞서 싸우는 용감한 여성을 기록하다
수 로이드 로버츠 지음, 심수미 옮김 / 클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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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다 힘든 내용이었지만 특히 마지막에 계속 강간에 대해 다룰 때는 더했다. 평화유지군이 미성년자 성매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너무 충격이었는데, 이런 걸로 충격받는 나는 아직도 남성이란 성별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 되묻게 만들었다. 순진하게도, 평화유지군이라면 평화에 더 힘쓸 줄 알았지 뭐야. 고통에 가담할 줄은 몰랐어. 아, 나는 아직도 너무 순진했구나.


그간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통해 다뤄온 도서들, 특히 《페미사이드》,《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와 연결되는 내용이 많다. 이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저 책에서 나오는 내용과 겹치는데,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려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겹친다. 페미사이드와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에서는 사례들이 다 나온 후에 마지막 결론으로 희망에 찬 부분을 얘기했다면, 《여자, 전쟁》은 매 꼭지마다 이 모든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수 로이드 로버츠는 벌어지는 일들에 대하여 취재하고 거기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옳지 않다고 말하며 고통받는 편의 서려는 여자들의 노력이 그러나 언제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고통을 주고자 하는 남성 세력이 워낙에 강했으므로. 소위 알탕 카르텔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저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고 했지만, 미성년 강간을 비롯하여 전쟁 강간까지 봐주기에 힘을 쏟는다. 



'문화'라는 것이 대체 뭘까에 대해서도 한참 생각해야 했다. 내가 생각한다고 결론 내려진 건 아니지만, 문화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기를 잘라내는 일들, 어린 아이를 신부로 팔아버리는 일들이, 그러나 그 나라를 벗어나 다른 나라에 가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 단단한 중심이 되어 유지되어 왔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것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학대라면,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용인해야 하는걸까? 여성의 성기를 잘라내는데? 어린 아이를 신부로 팔아치우는데? 수 로이드 로버츠는, "우리는 문화적 차이를 받아들이고 관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닫힌 문 뒤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학대를 허용하기도 한다" 고 자신의 책을 빌어 말한다.




어제 SNS 를 통해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아동 구조 연합> 관련 연설을 보게됐다.






영상을 보면 알게되겠지만,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아동 포르노에 관련된 괴로운 일들을, 말하기도 듣기도 고통스러운 그것을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현실을 직시해야 그 다음 과정을 밟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내가 저 연설을 듣는 자리에 있었어도 그러했겠지만, 영상을 보면서도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듣고 싶지 않다고. 아동 포르노라는 말만 들어도 괴로운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 설명을 듣는 것은 또 얼마나 괴로울까. 그러나 블레이크 라이블리는, 미안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여성주의 책을 읽는 것, 페미사이드와 강간에 관한 이 고통스러운 일들에 대해 읽는 것으 바로 여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읽는 것은 물론 괴롭지만, 아는 것 역시 괴롭지만,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알고 또 거기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것.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하기보다 두 눈 부릅뜨고 알고자 하는 것. 그것이 그 다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며 또 더 강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읽을 것이다. 계속 두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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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4-24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화유지군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에 도우러 갔던 NGO 직원들 일부도 돕는 일은 하지 않고 ‘나쁜‘ 일만 하고 있다는 뉴스도 최근에 들었던 것 같아요.
그런 단체들 이름에 ‘children‘ 들어가 있고, 그런 거 보면 정말 피가 거꾸로 솟구치죠.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의 정당성 또는 의미와 자신의 욕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을 구별해버리는 그런 ‘뇌 구조‘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락방님의 ˝괴롭지만, 알아야 한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습니다.
맞아요.
괴롭지만 우리는, 알아야 해요......

다락방 2019-04-24 11:07   좋아요 1 | URL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알면 많은 것들이 달라지죠. 블레이크 라이블리가 이 연설에서 잔인한 현실에 대해 말을 하고 그 후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단체를 도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인것 같아요. 이런걸 보면 여자들은 계속 세상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거기에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저는 평화유지군의 행태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나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제 자신의 순진함에 너무 놀라고요. 그런 한편, 내가 아무리 나쁘게 상상해도 세상 남자들은 내 상상보다 더한 나쁜 짓을 저지르는구나 싶어요. 세상이 너무 절망적이에요, 단발머리님...

비연 2019-04-2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 정말 힘들고 괴롭네요. 선듯 읽겠다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생각하고 이해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 괴롭지만 알아야 할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참 심란해요...ㅜ

다락방 2019-04-24 11:15   좋아요 0 | URL
매 장마다 맞서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실려있어서 좋긴한데, 고통에 대한 얘기는 정말이지 무뎌지지 않네요. 이 세상은 전체적으로 다 여성을 혐오하고 성적대상화 하고 있어요. 게다가 거기에 미성년자까지 동원되니.. 세상을 다 갈아엎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어요.ㅜㅜ

2019-04-24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4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자 나라의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성착취 인신매매범은 나이지리아와 태국, 동유럽 국가들에서 성노예 여성들을 실어 나른다. 그들은 이것이 투자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위험 부담은 낮고 수익률은 높은 산업인 것이다. (p.182)




한 사람이 완벽하게 모든 면에서 선할 수는 없다.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았는데 나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때로는 알면서도 선한일을 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안의 모순과 수없이 맞닥뜨릴 것이다.


나의 경우, 비행기 한 번 타면 말짱 꽝이 되어버린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고 장바구니를 가지고 다닌다. 가급적 비닐을 쓰지 않기 위해 애쓰고 가급적 일회용품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 가끔 시위에 나가기도 하지만, 사실은 돈으로 하는 게 가장 쉽다고 생각해 <한국 여성의 전화>, <유니세프>, <DSO>, <국제엠네스티>에 정기후원을 하고 가끔 다른 단체나 정치인에게 기부를 한다. 나는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 놓인 아이들과 여성들을 돕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다. 또한 지구가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데도 힘을 보태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고기를 먹고 있고 비행기를 탄다.


나보다 더 많은 것들을 나보다 더 열심히 행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러다가 '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일'임을 알면서도 내 인생의 즐거움이란 생각에 놓지 못할 것이다. 내적갈등과 모순속에 갈등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겠지. 그러면서 수시로 더 할 수 있는 건 뭘까를 고민하기도 할테고, 내가 과연 포기할 수 있는 건 뭘까를 생각해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의 6장은 <인신매매로 사라지는 소녀들>이란 제목을 달고 있고 부제는 '해체된 구소련 국가들'이다. 해체된 구소련 국가들. 가난한 나라, 직업을 구할 수 없고 미래에 대한 가망이 없어 해외에서 일자리를 찾고 싶어하는 소녀들. 그 소녀들은 더 넓은 세상, 더 잘 사는 나라에 성매매여성으로 팔려간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자리는 가보고나면 성매매업소였고, 일단 그곳에 도착한 이상 여권도 빼앗기고 강제로 감금된다.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느라 돈이 들었다며 갑자기 그녀에게 빚을 덮어 씌우고, 그녀가 도망가거나 반항하지 않게끔 여러차례의 강간과 폭력으로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첫 사례는 덴마크에서 벌어진 성매매였다. 덴마크... 덴마크라고? 거기 행복지수 높다던 선진국 아니었어?



이 책의 7장은 <유엔 평화유지군이 지나는 자리> 이며 소제목은 '보스니아와 코소보' 이다. 나는 갑자기 왜 유엔 평화유지군이 나오는지, 그러니까 좀 생뚱맞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나쁜 상황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유엔 평화유지군이 나와?


7장은 6장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가난한 나라에서 일자리가 없었던 여자들이 끌려간 곳에서, 그 여자들은 유엔평화유지군을 만난다. 아니, 유엔평화유지군에게 당한다. 평화를 유지하고 불행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라고 기대되어졌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오히려 여자들을 그리고 미성년자들을 불행으로 끝없이 몰아넣고 있었다. 인신매매 당한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 평화유지군들이, 경찰들이 그녀들을 돕기는 커녕 그녀들을 이용한다.




모니카가 이어서 하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손님 상당수가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군인과 경찰관이었어요.  현지 사람을 도와주러 파견 온 사람들요.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죠,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요." 보스니아 전쟁이 끝난 후 유엔은 수천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명목상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법과 질서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역 주민 아무에게나 물어보면 두둑한 월급을 받는 평화유지군이 도착하고 얼마 안 가 인신매매범들과 그 피해자들이 생겨났다고 말해줄 것이다. (p.204)




유엔평화유지군이 반드시 선함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건, 그들이 해야하는 맡은 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일을 하라고 월급을 받는 것일테고. 그러니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산다고 한들 그들을 비난할 순 없다. 한 인간이 온전히 선할 수 없듯이, 유엔평화유지군도 온전히 선할 수 없는 개인들일 테니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일'은 분명히 있다. 즐거움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일들이야 수없이 많겠지만, 그러나 즐거움 때문에 허락되어서도 안되는 일들. 그것이 바로 인신매매이고, 인신매매로 인한 성매매이고, 게다가 그 안에 갇힌 미성년자 성매매일 것이다. 성매수는 경찰들 내에서도 해서는 안되는 일로 정해져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다. 여자들은 자신들이 납치되었음을, 끌려왔음을, 나이가 어린것을 얘기하고 도와달라 말하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무시한다. 그 때의 유엔평화유지군이 맞닥뜨리는 건 평범한 인간이 맞닥뜨리는 '내 안의 모순' 혹은 '내적갈등'과 다르다. 그들은,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은 가해를 하고 있다.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큰 트라우마를 주고 있다. 그들은,



성폭력 가해자가 되고 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있는 곳이면, 인신매매범들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오늘날 유엔의 가장 큰 수치인데도 책임자들은 그저 어깨를 들썩이고는 눈을 감고 말아요." (p.206)




그들이 그런 일을 벌인다는 걸 내부에서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안다. 게다가 그곳에서 탈출한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싫다고 하는데도 자신을 강간한 자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고, 그렇게 그들을 짚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모니카는 집에 가는 교통편을 거부하고 사라예보에 남아 자신의 포주와 착취자 들을 밝혀내겠다고 용기를 냈다.



"나를 요청하는 손님 누구나와 섹스를 해야 했어요. 하룻밤에 최소한 세 번 이상이었고, 어느 날은 일고 여덟 명까지도 됐죠. 대부분 미국인이었어요. 그들은 재미를 보고 싶어했고,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그 행태를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들은 늘 만취해서 큰소리로 여자애들을 조롱하고, 우리를 그냥 쓰레기처럼 대했어요. 그런 행동들을 못하게 막고 싶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뿐 아니라 이런 상황에 처한 소녀들에게 옳지 않아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손님들이 유엔 평화유지군이나 나토의 평화정착유지군Stabilisation Force(SFOR), 유엔 국제치안임무군the International Police Task Force(IPTE)-1990년대 후반 보스니아의 국가 재건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사회에서 만든 치안경찰-소속이었다고 한다.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띤 이들은, 도망가게 도와달라는 모니카의 요청을 모두 외면했다. "그들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왜냐면 이런 종류의 술집에 가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라서 곤란하다고 했어요. 만약 나를 돕는다면 자신들이 해고될 거라고요. 나는 혼자서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죠."

경찰서에서 모니카는 IPTE 소속 경찰 네 명과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네 명을 성매수자로 지목했다. 그녀는 법정에 가서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내가 고향에 보내졌기 때문이에요. 영문을 모르겠어요. 무슨 이유인지 납득이 안 가요. 나는 집에 가려고 서두르지 않았거든요. 처음부터 나는 다른 피해자들이 또 생기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몹시 화가 나요. 나는 정의가 있다고 믿어왔지만 전혀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반드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데,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에요." (p.207-208)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규정에 위반된다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했다. 도와달라는 요청을 무시하면서 그들은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욕구. 욕망. 성욕. 대체 남자들의 성욕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든 해소되어야만 삶이 유지되는 것인가. 왜 성욕에 그들 스스로는 갇혀 버렸는가. 여자들이 없는 곳에서라면 어떻게 살건데. 그 성욕은 본능으로부터 온것이니 땅바닥에 구멍을 뚫어 할 것인가? 다른 남자들을 강간할 것인가? 상대가 없는 곳에서라면 할 수 없을 것이고, 상대가 없다면 해서도 안되는 것일텐데, 그런데 그들은 상대를 기어코 강제로 만들어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욕이라는 핑계로 뒤로 숨을 게 아니라, 그들안에 내재된 폭력성에 더 두 눈을 부릅떠야 하는 게 아닌가.




미국에서 10년간 경찰을 하다가 1999년 자원해서 보스니아에서 일을 하게 된 '케이시 볼코백Kathy Bolkovac'은 내부고발자가 된다. 자신이 속한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일에 결코 눈감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어리고, 너무나 연약한, 그저 서구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자발적으로 집을 떠난 소녀들이었어요." 볼코백은 회상했다. "자신에게 성매매를 강요한 인신매매범과 포주 들에게 협박당한 상태였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소녀를 갑자기 사창가에 데려다놓고는 일을 시작하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그 일을 하게 하려면, 끔찍한 트라우마를 남길 만큼 강간하고 학대해서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죠" (p.212)




그러나 내부의 일을 알게 되고 가담자들을 찾아내려고 했던 케이시 볼코백은 해고당한다. '정신적으로 방전' 상태라며 업무에서 배제되고 조작된 근무시간 기록표를 이유로 해고된다. 그녀는 열심히 누구보다 일을 잘 해내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항의해봤지만 조직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짐을 싸면서도 그는 위협을 느꼈다. 어떤 동료들은 그녀의 목숨을 걱정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그녀는 본연의 업무에서 배제되었느냐고 내가 다시 물었다. "최일선에서 인신매매된 여자들을 인터뷰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IOM 프로그램을 거친 인신매매 여성들을 하나하나 전부 인터뷰했죠. 그리고 자신이 맡은 임무에서 매우 매우 뛰어났어요. 그러면서 이런 피해자를 확산시킨 거대한 성범죄에 IPTE도 관여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중이었죠." 볼코백은 자신을 미국에서 채용했던 영국 용병업체 다인코프를 상대로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다. 2002년 영국 남부 해안의 사우샘프턴 재판부는 전원 일치로 볼코백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녀가 지목한 몇몇 경찰은 해고됐지만, 보스니아에서 복무하는 동안 받게 되는 기소면책권 때문에 아무도 처벌받거나 기소되지 않았다. (p.215)



볼코백은 승소했지만 그러나 다시 같은 일자리에 돌아갈 수 없었다. 그녀를 써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일을 담은책 《내부고발자The Whistleblower》를 썼다.

















찾아보니 아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는 모양이다. 자, 출판사 여러분들, 이 책 어서 빨리 번역해줘요. 빨리요!



이 책은 레이철 와이즈 주연의 영화로도 나와있다고 하는데, 나는 들어본 적이 없어 국내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인지 검색해 보았다. 오, 있다! 게다가 네이버 굿다운로드도 가능하다!
















볼코백은 자신이 나선게 무슨 소용이었을까 후회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나섰기 때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여자 전쟁》의 '수 로이드 로버츠'는 과연 그 변화가 가능했을까, 가능할까를 의심한다. 그건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볼코백의 용기와 대담함, 그녀가 한 일에 대해 받는 칭송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과연 변화를 가져왔을까? 슬프게도, 젊고 취약한 여자들을 납치하는 성산업이 대규모 남성 인력을 동원하는 국제 평화유지군 주둔 지역과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경향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제 입증되어 명백한 현상이 눈앞에 있는데도, 지휘구조의 최상층부에서 이를 덮으려고 시도 하는 것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p.216-217)




몇 해전에 국내 SNS 에서도 '경찰이라니 가해자인줄' 해시태그가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숱한 폭력의 피해자들로부터 경찰에 신고했지만 도움받지 못했다는 말을 듣지 않았던가. 피해자의 편이 되어줄거라고 생각한 경찰이, 약자를 보호해줄 거라 생각한 경찰이 그러나 약자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안다는 건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인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평화유지군이 코소보에 처음 도착했을 때, 현지인들은 비로소 세르비아인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알바니아계 지역사회를 재건할 수 있도록 군인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감에 이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이제는 소위 보호자라는 이들 평화유지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품고 있다. 이미 프리슈티나 시내는 성착취 인신매매 산업으로 곪을 대로 곪은 흔적을 곳곳에 품고 있다. 다락방에 갇힌 여자들로 운영되는 클럽, 마사지숍, 비밀 업소들 말이다. (p.222)




남자들은 인신매매를 하고 강간을 하고, 그런 일들을 서로 감싸준다. 여자들은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본국으로 보내려고 노력한다. '셀리아 드 라바렌' 역시 인신매매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이 곳에서 저 곳으로 계속 이동하며 인신매매 피해자들을 돕는다. 그말인즉슨, 이곳과 저곳 어디에서도 인신매매 피해가 있고, 그녀가 기습해야할 성매수가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셀리아 드 라바렌과 그녀의 STOP 팀은 2년간 처음에는 보스니아에서, 그다음에는 코소보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 아직까지 발칸 반도에서 일하고 있다. 수백 개의 술집과 클럽을 기습 단속해 폐업 시켰고, 수많은 젊은 여자들을 도와 본국에 돌려보내거나 사회 복귀 교육을 시켰다. 유엔 직원들이 라이베리아로 이주하면서 평화유지군의 성욕 해결을 위해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발칸반도에서처럼 동유럽의 가장 가난한 나라의 여자들이 인신매매를 통해 들어오자 셀리아는 또다시 그곳에서 같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p.224)



피해여성들이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지목하고 또 증언하려고 하는데도, 어떤 여성들은 내부고발자가 되어 조직의 범죄를 드러내려 하는데도, 또 어떤 여성들은 계속해서 여기저기로 이동하며 피해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는데도, 또 이렇게 수 로이드 로버츠처럼 그런 일을 바깥으로 보도하려 하는데도, 남자들이 성욕을 핑계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 감금하고 성폭행 하는 일들이 지속될까봐 무섭다. 돈을 벌기 위해 직장을 찾아간 소녀들을 비롯해서, 하교 후에 갑자기 길거리에서 납치된 소녀들이 계속해서 발생할까봐 무섭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결코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지속해나가며 그것을 단순히 쾌락을 위한 걸로 소비하는 남자들이 계속 존재할까봐 무섭다. 이 지독한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어떡하지?




셀리아와 계속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사라예보에서 '사창가 소탕'을 함께 한 지 12년 만에 비로소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됐다. 스페인의 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그녀는 우리가 발칸반도에서 함께 목격했던 일들이 현재 라이베리아에서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소녀들은 여권을 빼앗기고, 방에 갇혀서 강간당하고, 강제로 약물에 취하고, 두들겨맞고, 성매매를 강요당하고 있어요. 그리고 손님은 그 옛날과 똑같아요. 이른바 '국제평화유지군' 말이에요." (p.225)




어떻게 해야 그들이 이 끔직한 짓을 멈출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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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이디 크레딧]여성이란 점을 이용하기
    from 마지막 키스 2022-04-08 08:39 
    몇해전에 (아마도) 시사인을 통해 사채업자들의 기사를 읽게 됐다. 사채업자들은 주로 여성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여성들이 더 잘 갚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에게 네 남편에게 알리겠다, 네 가족에게 알리겠다, 네 자식이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알고 있다, 라고 협박하면 여성들은 어떻게든 기어코 돈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여성들이 사채를 한 번 빌리고 나면 지옥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김주희'의《레이디 크레딧》을 어젯밤 자기 전
 
 
단발머리 2019-04-22 17: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골적인 성산업 뿐만 아니라, 여성을 ‘성의 도구‘로 착취하는 산업이 얼마나 거대한지,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되었어요.
이 책의 저자인 수로이드 로버츠만 이 사실을 고발하는게 아닐텐데요...
인구의 반인 여성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이런 고통 속에 묶어 놓을 수 있는 이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의 근본은 뭘까요.
정말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범행들이 멈춰질까요...

저도 반 이상 읽었는데 아직 페이퍼를 하나도 못 썼네요. ㅠㅠ 얼른 따라갈께요.

다락방 2019-04-24 09:56   좋아요 0 | URL
수 로이드 로버츠만이 이 사실을 고발하는 게 아닐뿐더러, 세계 곳곳에서 여자들이 옳지 못하다고 부르짖고 있는데도 이 거대한 여성혐오 세상은 바뀌지를 않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책 읽다가 유엔평화유지군이 성매수에 적극 가담하는 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실망했고요. 실망하는 자신에게 또 놀랐습니다. 아, 내가 아직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구나, 그 성별에게.. 그 성별을 여전히 인간으로 대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여성들은 계속 피해자들을 구해내려고 하는데, 성매수를 하고 강간하는 남성들이 너무 크고 넓게 퍼져있고 힘도 세서 도무지 세상이 바뀔것 같지가 않아요. 수차례 절망하다가, 그래도, 그래도 하면서 또 기운을 내곤 합니다.

단발머리님, 천천히 따라와요, 천천히. 열심히 따라오다가 지치면 안되니까요. 우리 천천히 갑시다!
 















"탈무드를 한 장씩 읽으면 7년 반 후에는 다 읽게 되거든. 진짜 멋지지? 7년 반 후면 가장 중요한 유대 율법서를 통독하게 된다니까." (p.10)



친구 안드레아와 조깅을 하던 이 책의 저자 '일라나 쿠르샨'은 친구의 말에 자극을 받아 자신 역시 탈무드를 읽는 7년반짜리 프로젝트를 실행보기로 한다. 7년 반.



오후 7시쯤 조깅을 마치고 헤어졌지만 안드레아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장 7년 반짜리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어떤 기분일까? 7년 반 후의 내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여전히 이스라엘에 살까? 가슴에 쌓인 고통과 수치심을 여전히 느끼려나? 다들 장담하듯 시간이 약이 되어 거기서 벗어나 있을까? 내가 즐겨 인용하는 시에서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시간은 평온을 가져오지 않네 / 당신들 모두 거짓말을 한 것" 이라고 썼다. 시간은 평안을 가져오지 않고 끝없이 뻗은 듯했고, 7년 반 후에도 여전히 슬픔에 젖은 나를 상상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p.11-12)



7년 반 짜리 계획이라니, 너무 새로웠다. 7년 반이라니. 그러고보면 내가 무언가 하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빨리, 빠른시간, 단기간을 요했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다이어트 광고를 보면 언제나 한 달 만에 8kg 감량, 세 달만에 20kg 감량 등으로 써있지 않던가. 그러나 다이어트를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건강한 몸, 건강한 체중으로 만들기 위해서 체중을 감량하는 일을 그렇게 단시간에 해낼 수 없을 뿐더러, 단시간에 한다면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다이어트든 공부든 그게 뭐든, 장기간에 천천히 가는 것이 목표에 가장 근사치로 이룰 수 있는 길이 아니던가. 다이어트도 그리고 내 경우엔 영어 공부도 나는 조급했다. 이번 해에 영어를 마스터 하는거야! 라고 숱하게 결심했지만 언제나 영어 책을 펼쳐 보지도 않았지. 어쩌면 답은 바로 이거였는데! 7년 반 이라고 저자가 말한 것처럼, 뭔가 내 안에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성취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오래가 답인것인데!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자, 그렇다면 내가 오랜 시간을 들여 꾸준히 천천히 하면서 성취할만한 목표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 역시 장기간 프로젝트 하나를 설정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구체적 목표가 있다면 살아가는데 좀 더 의욕이 생기니까. 물론 내게 구체적 목표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의 시간을 7년 반 이라든가 3년 혹은 6개월이라 정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며 삶의 방향을 그쪽으로 설정해두었다. 그러나 7년 반짜리 장기 프로젝트 하나를 내 인생에 더해도 좋을 것 같다. 일라나 쿠르샨은 탈무드를 팟캐스트로 듣고 또 읽으면서 매일 공부한다. 그렇다면 나는 성경을 읽어볼까?



살면서 성경은 한번쯤 읽어봐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상 해오던터라, 일라나 쿠르샨의 탈무드에 나는 이내 성경을 떠올렸건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게 된 건, 모든 종교가 여성혐오를 바탕으로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놀랐던 것은 작가가 페미니스트이며 하버드대를 졸업했고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말하는 탈무드를 계속해서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작가의 아버지가 랍비라는 것, 그리고 그녀의 생활 터전이 이스라엘이며 그녀가 유대인이라는 것이 아마도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매일 아침 하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 책의 성격상 저자는 수시로 책에서 탈무드를 인용하는데, 그 인용문들을 읽으면 '도대체 종교는 여자에게 왜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버려.... 종교여, 여자들에게 왜그래요? 왜 모든 종교가 여자들을 이렇게 다루는거죠?





탈무드 역시 인생을 함께할, 특히 한 침대를 쓸 남자가 없는 여자를 안쓰럽게 본다. 바빌로니아 탈무드에서 현자 헤이시 라키시는 유명한 금언을 인용해 이런 말을 다섯 번이나 한다. '탈브 엘메이타브 탄 두 몰메이타브 아르멜로', 문자 그대로 '여자가 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둘로서 앉아 있는 게 더 낫다'란 뜻이다. 이 말에 대해 랍비들은 다채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탈무드의 여러 현자들은 여자가 얼마나 견뎌야 남편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다.


아바이에이: 남편이 개미만 하더라도 아내는 자유로운 여자들 사이에 의자를 놓는 걸 자랑스러워 한다.

라브 파파: 남편이 소모기(보풀 세우는 기계)라 해도, 아내는 그를 대들보에 걸어 놓고 부부 생활을 한다.

라브 아쉬: 남편이 쭉정이여도, 아내는 냄비에 렌즈콩이 부족하지 않다.


탈무드는 여자가 싱글이면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듯하다. 그렇더라도 아바이에이, 라브 파파, 라브 아쉬는 마지막 말은 하지 않는다. 마지막은 이런 주장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여자들은 다 간통을 저지르고 자식을 남편의 아이라고 한다." 즉, 결혼에 목멘 여자들은 사실은 혼외정사로 임신하고 핑계를 찾으려고 결혼을 하려는 것이다. 왜 그들에게 남편이 필요한가? 그것은 바로 불륜으로 가진 아이의 법적인 아버지를 지목할 수 있으니까! (p.135-136)



싱글의 반대 개념은 기혼이겠지만, 탈무드의 결혼관에는 괜찮은 점도 제법 많다. 캐투봇 편은 결혼 생활과 결혼 계약서 '케투바'에 명기된 책임과 관련된 계율을 다룬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논제가 여자들에 대한 평가(그리고 폄하)에 집중된다. 현자들은 결혼의 재정적인 면, 즉 남자가 특정 액수를 주고 아내를 얻는 거래를 검토한다. 특히 규수가 혼인 당시 처녀인지 여부가 액수를 좌우한다.

처녀성은 케투봇 편의 첫 챕터의 핵심 주제다. 신랑이 신부가 처녀가 아닌 걸 알면 허위 거래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자가 성관계를 하지 않았지만 상처를 입었음이 드러나면, 이 경우 처녀가 아닌 규수들처럼 액수를 깎아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이 나온다. 아무튼 모든 여자는-처녀든 아니든- 전 재산을 갖고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한 남자에게서 다른 남자에게 넘겨졌다. (p.145-146)


우리는 이미 『페미사이드』를 통해 여자로 인해 이동하는 재산이 여자의 손에는 쥐어진 적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래 인용은 '인도'의 것.



여성들은 결혼할 때 부모의 집을 떠나 매우 멀리 떨어진 남편의 가정으로 들어간다. 젊은 여성들은 일단 결혼하고 나면 죽은 뒤에라야 남편의 집을 떠날 수 있으며 모든 고통과 굴육을 참아내야 한다는 권고를 받는다. 며느리는 새 자겅에 적응하려면 늘 최선의 행동을 해야 한다. 며느리는 시가 식구들에게 고분고분 순종해야 하며, 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해서도 사심 없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남편의 가족은 현금은 물론 특별히 지참금 용도로 제작하거나 구입한 보석 및 가정용품을 받는다. 지참금을 딸이 받는 상속 재산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Goody 1976).

이와 관련해서 집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이 있다. 첫째, 지참금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 가족에게 전달된다. 시부모는 지참금의 분배에 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갖는다. 둘째, 내가 아는한, 토지는 절대 지참금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여성에겐 재산이 없다. 이른바 그녀의 재산으로부터 아무런 부를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젠더에 따라 특정된 성격이 만들어진다. 남자들은 국가 경제에 공헌하고 생계비를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여자들은 남자에게 의존하고, 외부세계에 대해 무지하며, 자녀양육과 가사에 몰두한다. 그런 이유로 여자들은 지나치게 과소평가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지참금 마녀 사냥에서 핵심이 되는 문제다. (p.231-232)






소타(부정한 여자)는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의 손에 이끌려 성전으로 끌려간다. 대제사장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망신스런 재판에서 '쓴 물'을 마시게 한다. 여인이 죄가 있다면, 물의 마법이 그녀의 배를 부풀리고 허벅지를 처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의 저주'가 될 것이다. 여인이 결백하다면, 아기가 들어서 배가 부풀 테고. 그러니 유죄든 무죄든 소타의 운명은 몸에 물리적으로 남아서 모두가 보게 되고, 그녀를 간녀에서 구경거리로 만든다. (p.178-179)




어떻게든 여자의 몸에 물리적으로 남는다라. 이것은 드라우닝 풀, 익사의 웅덩이와 같은 게 아닌가.





Drowning Pool '익사의 웅덩이'라는 뜻으로, 봉건 시대 스코틀랜드의 법에 따라 여성 범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 웅덩이나 우물을 가리킨다. 16-17세기 마녀 재판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마녀로 고발당한 여성의 유무죄를 시험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물에 빠뜨려진 여성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면 마녀가 아닌 것으로, 물 위로 뜨면 마녀로 간주되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p.7)












어떻게 이런 것을 깨우침과 가르침의 책으로 매일 공부할 수 있는지 내가 갸웃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랬다. 그녀가 탈무드를 가르치는 여러 젊은이들. 그들이 탈무드에 불만을 가졌고 의심을 품었다.




산헤드린 편 마지막에 토라의 한 구절이라도 신성하지 않게 여기면 내세에 자리가 없다고 나온다. 한 학생이 "그렇군요. 한데 제 성생활을 혐오스럽다고 말하는 구절은 어쩌죠?" 라고 받아쳤다. 이 학생처럼 나도 어떤 구절들은 부정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또 평등하고 다양성이 확보된 요즘 세상에서 문제가 될 구절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미드라시가 '출구'를 제공하기에 특정 문구들을 삭제할 필요는 업을 것이다. 물론 오랜 훌륭한 미드라시의 전통도 고려해야 할 테고. 토라는 아주 촘촘하기 때문에, 저마다 독창적으로 읽어도 될 것 같다. 미드라시의 독창적인 가능성을 높이 산다고 해서, 토라에서 우리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긴 해도 난 전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후자가 겁난다고 물러나진 않는다. (p.240-241)



물론 저자는 탈무드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가장 인상적인 건 쌍둥이를 대하는 자세였다. 일라나 쿠르샨은 첫 결혼에 실패하고 재혼을 했다. 재혼해서는 아들을 낳고 뒤이어 쌍둥이로 여자아이 둘을 낳았는데, 어린이집에 맡긴 쌍둥이들에게 수유하러 가면서 늘상 엄마를 반기는 아이들을 보고는 '누구에게 먼저 젖을 먹일까'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두 딸 중 선택해야 할 때마다 '미츠바를 지나치면 안 한다'는 계율이 떠올랐다. 페사힘과 탈무드 전반에 나오는 이 계율은, 눈앞에 명령이 있으면 완수한 후에 다른 명령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제는 제단의 네 귀퉁이에 제물의 피를 뿌릴 때 가장 가까운 귀퉁이부터 뿌려야 한다. '미츠바를 지나치면 안 되니까.' 나는 이 계율을 바꿔서 속으로 읊조렸다.

"쌍둥이를 지나치면 안 된다."

사제가 피를 뿌리러 제단에 가서 한 귀퉁이를 지나쳐 다른 귀퉁이로 가지 않듯, 나도 한 아이를 지나쳐서 다른 아이에게 가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멀리 있는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안아준 아이를 내려놓고 다른 아이에게 갈 즈음에는 둘 다 울고. (p.353)



이거야말로 지혜로운 방법이 아닌가 감탄에 감탄을 했다. 한 명을 지나쳐서 누군가를 먼저 안아주지 않는 것. 지나치는 순간 아이는 '나를 지나쳤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테지만, 지나치지 않고 가까운 곳의 아이를 먼저 안으면 더 멀리 있는 아이는 일단 울음을 터뜨리긴 하겠지만 자기 차례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일라나 쿠르샨이 그러했듯이, 그것이 어떤 책이든 자신의 상황에 맞게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삶 안에 녹여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종교인인 내 입장에서 탈무드를 읽거나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일라나 쿠르샨처럼 받아들이며 읽어낼 수 있을지, 내 뜻대로 독창적으로 해석이 가능할지는 난 여전히 자신할 수가 없다. '왜이래?', '나한테 왜이러지?' 가 먼저 나오지 않을까. 우리는, 그러니까 일라나 쿠르샨과 나는 태어난 장소와 자란 환경이 다르므로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가장 다른 점은 그녀가 남자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어쩌면 그래서 탈무드에 대한 거부감이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독신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오므리와 교제 중이었지만, 관계에 파열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이즈음 이별을 확신했다. 어쩌면 훨씬 전에 헤어져야 마땅했지만, 혼자인 것 보다는 안 맞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나았다. 바로 2년 전에 안 맞는 사람과 결혼하고 이혼했으면서도. (p.133)



어떻게...어떻게 혼자인 것 보다는 안 맞는 사람이라도 곁에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렸는데, 영화속에서 마츠코도 혼자인 것보다는 개같은 남자라도 옆에 두는 걸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대체 그런 마음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걸까? 깊은 외로움인걸까? 안 맞는 사람을 옆에 두느니 혼자인 게 훨씬 낫지 않나? 내가 이별을 결심한 데에는 그가 나를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어둘 기미가 보였기 때문인데? 차선으로 그의 옆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  탈무드에서 여자가 싱글이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듯이, 일라나 쿠르샨도 싱글이면서 행복한 자신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건가? 아, 괴롭다.....




그렇게 인생의 동반자를 찾기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마침내 찾아냈다. 그래서 재혼하고 아이를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그녀가 7년 반동안 탈무드를 듣고 읽어온 기록이며 그러는 동안 그녀는 이혼을 하고,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고, 재혼을 했고, 아이를 셋 낳았다. 역시 7년 반은 긴 시간이다.


게다가 첫 결혼의 실패와 달리 이번에 만난 남자에게는 깊은 안정감을 느끼고 또 그 인연에 감사한다.



대니얼과 결혼 생활을 하면서 신의 지지를 절감했다. 이런 남자가 내 삶 속에 들어와서 함께 한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일요일 철학 클럽』-내가 좋아하는 시리즈-에서 난관 끝에 결혼한 이사벨 달하우지가 나인 것 같았다. 작가 알렉산더 캑콜 스미스는, 욕실에서 나온 사랑하는 하이메를 보면서 이사벨이 진짜 '그녀의 것'인지 의심했다고 말한다. 나 역시 밤에 대니얼이 샤워를 마치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어깨에 물을 묻힌 채 나오면 궁금하다. '당신이 진짜 내 남자일까? 당신과 함께하다니 이런 행운이! 단점투서잉인 나를, 공상에 빠져 사는 나를 사랑할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이런 큰 환히를 누리는 게 물가능한 듯했다. 나도 모르게 현재에 향수를 느꼈다. 내 어깨에 내려앉은 이 순간이 이미 날아난 것 같았다. 대니얼이-여기 있는 그의 존재가-현실일 리 없고 어느 날 깨어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일 것 같았다. 그가 눈부신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가서 다신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p.306-307)



뭐 이렇게까지 감사할 일인가, 남자 하나 만난 것 가지고.. 싶으면서도 나 역시 저런 생각과 느낌을 정확히 느껴본 적 있던 터라 '좋을 때다...' 싶다. 어느 날 깨어보면 모든 게 일장춘몽..은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부디 행복하오, 일라나 쿠르샨이여...











자, 이 책을 다 읽었고 나는 이제 7년 반짜리 장기 프로젝트... 를 찾아야겠다. 뭘 하면 좋을까. 꾸준히 쭈욱- 해나가면서 결국은 끝마칠 수 있는 것은 뭐가 좋을까. 이 생각하자마자 영어공부! 가 떠오르지만, 이내 '하기 싫다....' 이렇게 되어버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쩌면 나는 독서를 내내 하고 있고 또 이렇게 글 쓰기도 내내 하고 있으니, 더이상의 장기 프로젝트는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면 지쳐버리니까....



그나저나 어제도 리뷰를 두 개(큰 가슴의 발레리나, 그만해 거짓말)나 썼는데, 오늘은 이 페이퍼를 포함해 페이퍼 두 개 쓸 기세... 왜죠....





***102 쪽에 오타가 있는데, 하하하하. '메길라(에스더서 두루마리)'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에서 메길라 라고 계속 잘 쓰다가 다섯번째 줄에서 '메갈리아' 튀어나옴.....****************














오므리는 황제의 포도주가 금 그릇에 담기자 상한 것을 지적하면서, 그릇의 본질은 담긴 물질의 특성과 관계있다고 말햇다. 더구나 이 구절에서 토라는 포도주가 다른 액체들처럼 그릇의 모양을 띤다는 점을 제시하는 듯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나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배운 지식 전부가 담기는 그릇으로 본 것이다. 내 본모습은 내가 가진 지식과 관계가 있다. 그릇이 거기 담긴 포도주의 모양을 결정하듯이. 내 지식의 모양을 결정하는 것은 나니까. 더구나 금 그릇이 포도주를 상하게 하듯, 나와 내가 배운 토라 사이에 화학 작용 같은 게 일어난다. 내가 공부하는 토라는 날 변화시키고, 내 통찰력은 공부 중인 토라를 변하게 한다. - P84

하지만 이런 생각을 폴은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저녁 그가 저녁 기도를 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기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돈키호테』의 이 챕터를 마저 읽고 싶은데. 마리브(유대교의 저녁 예배)를 건너뛸 테야"라고 대답했다. 그는 눈에 보이게 동요했다. 난 "왜 그러는 거야?"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돈키호테』를 읽는 게 더 중요한 사람과 함께할 수 없어." - P96

어떻게 이미 지워버린 것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난 탈무드가 아니라,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시에서 답을 찾았다.


내게는 가보기 두려운 곳이 100군데나 있지
그의 기억이 넘쳐나는 장소들!
그래서 그의 발이 닿거나 얼굴이 빛난 적 없는 조용한 곳에
안도하며 들어서면 나는 말하네.
"이곳에는 그의 기억이 없네!"
그리고 경악해서 서 있지, 그가 너무도 기억나서! - P98

아이러니하게도 팔에 성구함을 두르는 날이 늘어갈수록 우리 결혼은 점점 망가졌다. 매일 아침 폴과 나는 정원이 보이는 1층 아파트 부엌에 나란히 서서 기도했다. 하지만 우린 상대보다 신과 더 오래 대화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평행 놀이처럼, 혼자 하는 놀이를 하듯, 우리도 평행 놀이를 했다. 좀 희망적인 날이면 난 프랭크 바이다트의 시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사랑은 두 사람이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랑이다.‘ 하지만 둘의 기도가 같은 방향을 향하는 지 알 수 없었다. - P108

남자들과 여자들을 슈퍼마켓에서 파는 물건이라고 상상해봤다. 여자들은 신선 식품이어서 임박한 유효 기간이 찍혀 있었다. 남자들은 통조림이라서, 마음을 끌진 않아도 결국 누군가 고를 때까지 계속 선반에 진열될 수 있었다. - P135

아침 일찍 공부를 못 하면,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끝낼 때까지 부담을 느끼도록 종일 탈무드를 갖고 다닌다. 그날의 분량을 마치지 않으면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또 하루에 할 일을 완수하는 편이다. 운동부터 일기 쓰기까지. 어떤 일에 도전하면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 P171

그 주에 일이 많아 걷지 못하면, 내 처지와 무관한 책들에 몰입해 현실을 잊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시집을 읽고 병원 대기실에서 단편 소설을 읽었다. 우체국이나 슈퍼마켓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장편 소설을 읽은 덕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책에서 많은 걸 얻었다. 가방에 책 세 권을 넣고 다닌 적도 많았다. 꼼짝 못하고 붙들렸을 때 읽을 거리가 없으면 단테가 그린 지옥에 던져진 것과 같을 테니까. - P213

대니얼이 삶에 자리를 내준 것은 내게 특권이었고, 그를 내 삶에 들일 만큼 신뢰했다. 또 함께하는 새 인생이란 벼랑에 나란히 서려니 전율이 느껴졌지만, 난 소망을 품었다. 우리가 짓는 ‘혼인의 집‘이 늘 함께하는 성소일 거라는 소망을.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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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4-23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오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9-04-24 09:56   좋아요 0 | URL
역자가 메갈인가...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