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다시 읽어봐야지 하고 내내 벼르던 책이었는데, 마침 일요일 오전에 이 책 생각이 났다. 조카들이 아직 제집으로 돌아가기 전, 나는 까먹을까봐 책장으로 가 이 책을 꺼내왔다. 조카들을 보내고 목욕탕에 다녀오고, 백화점과 시장에 다녀오고, 저녁을 먹고, 그렇게 그 날 해야지 마음 먹은 것들을 다 해낸 뒤에 이 책을 펴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게된 책은, 내가 예상한 그대로, 읽자마자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는데, 처음 읽었던 몇 해전에도 그랬지만(아마 십년도 넘은것 같다), 어떻게 이 관계가 가능했을까, 싶다.
헬렌 한프는 뉴욕에 살면서 런던 채링크로스 84번지에 있는 고서점의 존재를 알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책을 구매할 수 있는지 묻는 편지를 띄운다. 1949년의 일이다. 고서점의 직원은 그 편지에 답장해주고 헬렌 한프가 원했던 책들의 2/3 가량을 보내주면서 이 편지를 주고 받는 관계가 시작되는데, 이 편지는 1969년까지, 20년간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책과 청구서, 책값만 주고받게 되는 게 아니라, 런던이 식량배급 받던 어려운 때임을 아는 헬렌은 달걀, 고기, 통조림을 선물로 보내주기 시작한다. 이에 응답하고자 서점 직원들도 저마다 손수 짠 식탁보와 아름다운 책을 보내주고. 게다가 서점 직원 한 명과 주고받던 편지는, 그 서점의 다른 직원들과 또 서점 직원의 가족들, 그리고 서점 직원의 이웃에게 까지도 이어진다. 관계가 쭉쭉 뻗어간달까.
다른 말인데,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흐름도 이와 같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상대만 보이고 상대만 중요하다. 상대를 알아가기 위해 《비포 선라이즈》,《비포 선셋》이 있었다면, 이제 함께하는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게 된다. 그렇게 《비포 미드나잇》이 있다. 이런 식의 흐름이라니, 너무 좋잖아? (비포 컬렉션, 꼭 사야지!)
자,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이 실제로 있었던 아름다운 사연이 너무 좋아서, 재작년이었나, 런던에 갔을 때 채링크로스 84번지를 찾아갔었다. 그 주변에 여전히 고서점은 많았지만, 내가 기대한 이 서점, [마크스 & Co. 중고서적]은 보이질 않았다. 찾아 헤매다가 보이지 않아 다른 서점에 가 물어보니, '네가 말하는 그 서점이 뭔지 아는데, 그 서점은 이제 없어' 라고 말했다. 슬픔의 새드니스... 가서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시무룩)
알라딘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나는 책을 나누고 있었다. 중고서점 생긴 뒤에 중고로 팔기도 했고 또 가끔은 단체에 기부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가끔은 읽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 이왕 보내는 거, 선물 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자 싶어 택배비도 내가 부담해 보내는데, 나는 그저 내가 읽지 않는 책을 선물로 주고 싶은 마음이므로, 받는 사람에게 어떤 기대를 하진 않았다. 다만, '잘 받았다'고, 무사히 받았는지만 알려주면 충분했다. 혹여라도 이 책을 받고 나에게 보답해야 한다고 느낄까봐 걱정되기도 했다. 무얼 받자고 보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얼마전에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나로부터 책 나눔으로 책 한 권을 받게 되었는데 잘 읽었다며, 커피 두 잔과 케익 한 조각을 기프티콘으로 보낸 거였다.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아 놀랐지만, 굉장히 새로운 감동이 찾아왔다.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의 가격이면, 나로부터 중고로 받은 책이 아니라 새 책을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중고책을 산 다면 두 권을 살 금액이었다. 그런데 그 분은 나로부터 중고책을 받고서는 커피 두 잔과 케익이라는, 새책을 뛰어넘는 금액의 선물을 보내신거다. 이걸 순전히 '돈'으로만 따진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커피 두잔과 케익이라는 선물에는 돈 이상의 것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 선물을 받고 한동안 '인간은 대체 뭘까' 생각했다. 인간은 대체 뭐길래, 돈으로만 보면 더 손해인 일을 이렇게 한걸까? 새 책을 사고도 남았을텐데, 왜 중고책을 받아놓고 커피 두 잔에 케익 하나를 보낸걸까?
나는 엄마와 함께 까페에 가 커피 두 잔에 케익한 조각을 앞에 두고 이 사연을 얘기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 인간 너무 신기하지 않아? 뭘까? 덜한 것 받고 더한 것을 내주잖아. 돈으로 따지면 손해인데."
그러자 엄마는 말했다.
"너한테 받은 게 고마웠나보지.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물론 이렇게 책 나눔을 했을 때 고맙다고 표현한 사람들은 그 전에도 있었다. 칠봉이만 해도 내가 이 공간에서 처음 책나눔을 했을 때, 나로부터 책을 받고 영화예매티켓 네 장을 보냈었으니까. (아, 잠깐만, 눈물 좀 닦고요.) 그런데 이 커피 두 잔과 케익 한 조각이 참 뭐랄까, 받는 순간부터 되게 마음에 남았다. 뭘까, 이건 대체 뭘까. 인간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인간.. 뭘까? 도무지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인간...아, 인간이여...
헬렌 한프는 잘 알려진 작가가 아니었다. 가난하게 살았고, 어쩌다 일이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나는, 그런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였다. 그렇게 가진 돈을 조금씩 보내서 책을 한두권씩 구입하면서도(한꺼번에 많이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서점의 직원들에게 달걀, 고기, 통조림을 보내는거다!! 인간... 진짜 뭘까? 뭐지? 내가 많아서가 아니라, 나누고 싶어 나누는 삶이라니.. 인간..뭔가요?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고 자상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p.46)
저희는 모두 당신 편지를 좋아하고, 어떻게 생긴 분인지 상상해보곤 해요. 저는 당신이 젊고 아주 세련되고 총명할 거라고 생각해요. ‘노老‘ 바틴 씨는 당신이 멋진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지만 좀 학구적으로 생겼을 거라고 그래요. 사진 한 장 보내주시지 않겠어요? 한 장 있었으면 좋겠어요.
- P25
당신의 수많은 자상한 선물에 과연 보답할 길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영국 여행을 결심하신다면, 머물고 싶은 한 언제까지나 쓰실 수 있는 침대가 오크필트 코트 37호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 P76
친애하는 헬렌, 다시 편지를 받고 반가웠습니다. 네, 우린 아직 여기 있습니다. 갈수록 나이가 들고 바빠지지만 더 부자가 되지는 않는군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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