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전쟁] Boys Will Be Boys















몇해전에 (아마도) 시사인을 통해 사채업자들의 기사를 읽게 됐다. 사채업자들은 주로 여성에게 돈을 빌려주는데 여성들이 더 잘 갚기 때문이었다. 여성들에게 네 남편에게 알리겠다, 네 가족에게 알리겠다, 네 자식이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알고 있다, 라고 협박하면 여성들은 어떻게든 기어코 돈을 갚으려고 한다는 것.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여성들이 사채를 한 번 빌리고 나면 지옥으로 발을 들여놓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김주희'의《레이디 크레딧》을 어젯밤 자기 전에 읽기 시작했다. 자려고 누웠다가 하도 잠이 오지 않아 다시 불을 켜고 책을 들었다. 추천의 말들을 거쳐 서문인 <책을 펴내며> 부분을 읽는데, 나는 아주 오래전에 《지식e》시리즈를 읽고 알게된 '그라민 은행'을 뜻밖에 만나게 된다.


'빈민들에게 적게라도 돈이 주어진다면 이들이 그 돈으로 사업을 해서 가난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방글라뎃의 그라민은행으로 대표되는 마이크로파이낸스(소액 대출) 정책의 모토와 성과는 이렇게 알려져 있었다. 그라민은행의 설립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빈곤퇴치에 앞장선 공로로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98%라는 비현실적인 대출 회수율은 소액 대출의 주된 수해자였던 가난한 농촌 여성들의 성실과 도덕성 덕분이라고 알려져왔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태생의 인류학자 라미아 카림Lamia Karim은 '수치의 경제economy of shame'라는 개념을 통해 세계 최빈국 방글라데시 농촌에서 이루어진 소액 대출 사업이 성공을 거둔 비밀을 드러냈다.

그라민은행의 대출은 주로 남편이 아니라 아내에게 제공되는데, 연체가 발생하면 이들 여성에게 망신을 주는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카림은 관습상 집안의 여자를 모욕하는 것이 곧 남자를 모욕하는 것임을 지적하며 방글라데시 농촌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여자 망신 주기'의 다양한 방식을 포착하고 이를 고발했다.정작 대출금을 사용하는 이들은 집안의 남성들일지라도, 여성에게 대출을 해주면 가족과 연체자 여성은 망신을 피하고자 집안의 물건을 팔거나 다른 곳에서 돈을 빌려와 대출금을 상환했다.(Karim, 2015[2011:157-171). 그라민은행은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젠더화된 수치심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이 은행의 성공을 보장한 여성들의 성실성과 도덕성은 사실 이들에게 부과된 성별 규범성 그 자체이며, 그라민 은행은 의도치 않았을지라도 이를 통해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복무했다. -p.10-11



앗, 그라민 은행이라면 나 역시도 지식e를 통해 알고 너무 놀랐던, 선한 은행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근데 원금 회수를 위해 저런 방법을 썼단 말인가. 가난한 자들에게 소액을 빌려주는게 좋은 아이디어임에는 틀림없고 또한 그 은행으로 인해 빈곤에서 탈출하는 사례도 역시 많았음은 사실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젠더화된 수치심이 존재했다니.


지식e <최고의 자격>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시청하기



그라민 은행에 대한 지식이 채널은 위의 링크 ↑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레이디 크레딧의 이 서문을 읽으면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의 인신매매와 성매매 부분이 떠올랐다. 















가난한 나라, 미래에 대한 가망이 없어 다른 나라에 가 직업을 구하길 시도하다 인신매매되는 여성들, 그리고 그 여성들의 여권을 빼앗고 강간을 한 뒤 무력하게 만들어 성매매에 내놓는 사람들. 우리가 익히 행복한 나라로 알고 있는 덴마크에서도 그런 일은 벌어졌다.

보스니아와 코소보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찾아온 유엔평화유지군은 현지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왔지만 인신매매된 여성들의 성을 착취한다. 우리는 인신매매되었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피해자들이 말하지만 그들은 상황이 복잡해지는 게 싫다고 외면한다.


모니카가 이어서 하는 말이 더욱 가관이었다. "손님 상당수가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군인과 경찰관이었어요.  현지 사람을 도와주러 파견 온 사람들요. 그들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죠,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요." 보스니아 전쟁이 끝난 후 유엔은 수천 명의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명목상 시민사회와 민주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 법과 질서를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역 주민 아무에게나 물어보면 두둑한 월급을 받는 평화유지군이 도착하고 얼마 안 가 인신매매범들과 그 피해자들이 생겨났다고 말해줄 것이다.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204


어린 나이에 끌려와 성매매에 내몰렸음을 알고 있어도 그들은 성착취를 한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있는 곳이면, 인신매매범들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오늘날 유엔의 가장 큰 수치인데도 책임자들은 그저 어깨를 들썩이고는 눈을 감고 말아요."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206


물론 유엔 평화유지군이란 타이틀이 반드시 그들의 도덕적 순결함을 의미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윤리적으로 언제나 바른 길을 간다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맡은바 일에 다름아니며, 그러니 나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대로 하겠다, 는 것이 그들의 내면에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진 직업이 그것이므로 이렇게 행동할 것이다, 하는 것은 그 직업에 대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편견일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인신매매는, 미성년자 성매매는,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가진 타이틀이 무엇이든 간에 해서는 안될 일 아닌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곳에 가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질서와 평화를 돕는 사람들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들은 그 뒤로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걸까.



"나를 요청하는 손님 누구나와 섹스를 해야 했어요. 하룻밤에 최소한 세 번 이상이었고, 어느 날은 일고 여덟 명까지도 됐죠. 대부분 미국인이었어요. 그들은 재미를 보고 싶어했고,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그 행태를 상상도 못 할 거예요. 그들은 늘 만취해서 큰소리로 여자애들을 조롱하고, 우리를 그냥 쓰레기처럼 대했어요. 그런 행동들을 못하게 막고 싶습니다. 그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뿐 아니라 이런 상황에 처한 소녀들에게 옳지 않아요."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손님들이 유엔 평화유지군이나 나토의 평화정착유지군Stabilisation Force(SFOR), 유엔 국제치안임무군the International Police Task Force(IPTE)-1990년대 후반 보스니아의 국가 재건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사회에서 만든 치안경찰-소속이었다고 한다. 파괴된 국가를 재건하는 임무를 띤 이들은, 도망가게 도와달라는 모니카의 요청을 모두 외면했다. "그들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다고, 왜냐면 이런 종류의 술집에 가는 것 자체가 규정 위반이라서 곤란하다고 했어요. 만약 나를 돕는다면 자신들이 해고될 거라고요. 나는 혼자서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했죠."

경찰서에서 모니카는 IPTE 소속 경찰 네 명과 유엔 평화유지군 소속 네 명을 성매수자로 지목했다. 그녀는 법정에 가서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지만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내가 고향에 보내졌기 때문이에요. 영문을 모르겠어요. 무슨 이유인지 납득이 안 가요. 나는 집에 가려고 서두르지 않았거든요. 처음부터 나는 다른 피해자들이 또 생기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몹시 화가 나요. 나는 정의가 있다고 믿어왔지만 전혀 없는 것 같아요. 누군가 반드시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데, 사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숨기기에 급급할 뿐이에요." -《여자 전쟁》, 수 로이드 로버츠, p.207-208



정의는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여자들에게는.



《레이디 크레딧》의 서문만 읽었는데도 이렇게나 한숨을 쉬게 되는데 뒤에 마주치게 될 내용들은 어떤 것일까. 무겁게 읽어나가야겠다. 무겁게.


그리고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다시 읽어야겠다.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 담겨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의 빚을 떠안았던 여자, 쫓아다니는 사채업자들, 성매매에 몰리게 된 일, 결국 살아남기 위해 다른 여자가 되기로 했던 일.
















자, 저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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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08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화를 빙자한 성 착취... 서문만으로도 한숨이 나오네요ㅜㅜ 저도 이따 시작하겠습니다.

다락방 2022-04-08 09:33   좋아요 1 | URL
네네, 거리의화가 님. 이번 한 달도 힘차게 읽고 쓰도록 합시다!!

잠자냥 2022-04-08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라민 은행 충격적이네요. 저도 그냥 선한 방식으로 가난을 구제해준 은행인줄 알고 있었더니…. 휴 모든 일에는 언제나 이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22-04-08 10:01   좋아요 2 | URL
저도 지식 e 읽으면서 그라민 은행의 존재를 알고 너무 좋았거든요. 세상은 역시 아름답다고,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흥분했었는데 이런 이면이 있었네요. 씁쓸합니다...

청아 2022-04-08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덕분에 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최근 우리나라의 방송에 출연했었는데요. 한국의 젠더문제 질문을 받자(질문자는 꽤 구체적인편)많이 달라졌다고만(심플하게)말하고 넘어가는 모습에 두번정도 그의 책을 정독했던 저는 크게 실망했어요. 편집과정의 누락이 좀 있었을수는 있겠지만 이른바 ‘정의‘의 문제를 파고드는 학자조차 여성문제만큼은 이렇게 분명한 한계를 보이는구나 싶더라구요. 제가 볼땐 가장 근본적인 착취고 최초의 노예고. 이렇게 시작한 문제가 지금의 많은 부정의의 근간인데 말이예요.

유엔 평화유지군 충격입니다.ㅠㅠ

다락방 2022-04-08 11:10   좋아요 2 | URL
저도 정의란 무엇인가 꽤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마이클 샌델이.. 그랬군요. 흐음. 몰라서라기 보다 괜히 발언했다 이슈가 되고 싶지 않아서 피한걸 수도 있겠어요. 미미님의 마이클 샌델 얘기 들으니 재래드 다이아몬드 인터뷰 생각나네요. 이 인터뷰 읽어보셨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니 링크 놓을게요. 저는 이 인터뷰 읽고 <총,균,쇠> 를 샀답니다.

https://news.v.daum.net/v/20210407030051188

유엔 평화유지군 뿐만 아니라, 타이틀이나 인상 같은 것은 도대체 어떤 말을 해주는가 싶어요. 누구보다 약자 편을 든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결국 뒤로는 여성폭력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요. 지긋지긋하네요 진짜. ㅜㅜ

청아 2022-04-08 11:25   좋아요 0 | URL
저도 재래드 다이아몬드 교수 저말 몇번 페이퍼에서 인용했을정도로 공감해요~^^♡ 왜 유발하라리도, 다이아몬드 교수도 최재천교수도 말하는데 마이클 샌델 교수는 말 못하는지 이런 지식인들 역할이 중요한거같아요ㅜㅜ읽다 말았는데 <여자전쟁> 사야겠어요.

다락방 2022-04-08 11:49   좋아요 1 | URL
대부분의 남성들이 남성들에 의한 지지나 공감을 얻고 싶어하는것 같아요. 발언을 하고 안하고는 본인의 선택에 따른 것이지만, 어쨌든 샌델이 말했다고 해도 사실 큰 위험이나 위협은 없었을텐데요. 샌델이니까요. 여자들이야 일자리도 짤리고 뉴스에도 나고 그러겠지만, 뭐 백인 남자가 무슨 해를 입겠습니까. 근데 그냥 음, 뭐, 자기가 넘어가겠다는데야 별 수 있나요. 흠흠. 미미님과 제가 열심히 말합시다!

등롱 2022-04-08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차! 그러게요 다시 화차를 읽어봐야겠어요, 저는 화차 리뷰를 이것저것 봤었는데 젠더 관점에서 본 리뷰는 거의 보지 못하고 대부분 다 다른 신분을 쓴 이중성에 대해서만 본 것 같아요, 레이디 크레딧 아직 시작 못했는데… 주말에 스타트하렵니다~~!!

다락방 2022-04-08 11:47   좋아요 2 | URL
저 화차도 아까 다시 구매했어요. 다시 읽어보려고요. 이번에 읽어보면 저도 오래전과는 다른 것들을 보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당시에 그렇게 읽지 않았었는데 오늘 딱 화차가 생각나더라고요.
주말 스타트, 화이팅입니다, 등롱 님!!

책읽는나무 2022-04-08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래전에 화차 구매해놓곤 빛에 바래져 중고책 만들어 놓았는데도 여적 안읽었는데...화차도 읽어봐야 겠군요?
이번 달, 이 책도 가슴 아플 것 같은 책이에요!!!

다락방 2022-04-25 08:21   좋아요 1 | URL
저 화차 샀어요! 4월 안에 레이디 크레딧 다 읽고 화차까지 읽는게 제 계획이었는데 일단 레이디 크레딧으로 다 읽는걸로 급하게 목표를 수정해야겠어요. 아놔. 벌써 4/25 네요 ㅠㅠ 화차는 언제 읽죠? 이렇게 미루면 한참 걸려도 못읽는 채로 쌓이게 될텐데.. ㅠㅠ

독서괭 2022-04-08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넘 충격적이네요.. 여자전쟁도 읽기 힘드셨을 것 같은데, 레이디크레딧은 어떨지.. 마음 단디 먹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책 오기 전에 주말에 여성괴물을 끝낼 수 있을 것인가..? <화차> 이야기 예전에 김수정이다혜의 범죄영화프로파일에서 들어서 대략 줄거리는 아는데 현실이라 생각하면 더 끔찍하네요 ㅠ

다락방 2022-04-25 09:03   좋아요 0 | URL
4/25 인데 저 아직 레이디 크레딧 못끝냈네요. 아니 어째서 매달 이렇게 말일까지 허덕이며 읽는 것일까요? 이러지말자고 새로운 달에 늘 새롭게 결심해도 또 이모양이네요.. 진짜 다음달부터는 이러지 말아야겠어요.

이 책에는 제 생각보다 충격적인 내용이 너무 많이 나오지만, 그건 제가 그만큼이나 여기에 대해 몰랐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자, 힘냅시다 독서괭 님. 제대로 알고 제대로 분노하는 게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