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쓴 공저자로서 나와 내 동료들은 독자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한다. 첫 번째로 우리는 여기서 여남 관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이며, 여러분은 다시는 이전 같은 방식으로 여자, 또는 남자, 또는 여남 관계를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는 건 감정적으로 힘겨운 여정이 될 것이다. (p.35)



이 책의 70페이지까지 읽은 현재, 머리말에 쓰여진 이 구절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추천의 말, 옮긴이의 말, 해설, 감사 인사, 머리말.. 까지, 읽을 게 많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되게 '쎄다'. 와 쎄다, 하면서 읽다가 저 머리말을 딱 만나게 되는데, 그 후에 시작되는 본문을 읽노라면 다시 앞페이지로 돌아가 저 머리말을 읽고 끄덕이게 된다. 아, 거짓없이 과장없이 당신이 한 말은 사실이네요.



이 책의 1장은 일단 스톡홀름 증후군 의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겨나게 된 바로 그 사연에 대해 자세히 들려주는데, 이 자세한 사연만 읽으면서도 너무 충격적이라 멍해진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톡홀름 증후군에 대해서 알고는 있을 것이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동화되는 현상. 나도 그렇게는 알고 있었지만, 그 용어가 탄생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된 건 이 책 때문이었는데, 아, 외부에서 보는 것과 내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싶었다. 


내가 누누이 얘기했던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어떤 감정에 깊이 빠져있을 때, 그것이 분노나 슬픔이나 어떤 감정이든 거기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때는 판단하기를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 때 내릴 판단은 잘못된 확률이 크므로. 그 때의 나는 내 감정의 내부자이니까. 그 감정에서 조금만 비켜나도 우리는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온전히 내 개인에 대한 문제라면, 사회적으로도 역시 마찬가지. 


나는 종교에서 일어나는 성폭행을 여기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에 깊이 들어가있을 때, 그 종교를 열렬하게 믿고 있을 때, 그 때 성직자는 신도에게 매우 힘이 세다. 절대적인 권력자. 그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해 신도들을 성폭행을 하게 될 때,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왜 그사람 말을 듣고 그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겠지만, 그 내부 안에서는 그런 판단을 내릴 수가 없는 거다.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인질은 철저하게 내부자였다. 외부자인 내가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당연히 인질은 인질범을 두려워한 후 증오해야 한다. 왜 자신을 인질로 잡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했는지, 그러므로 인질범을 미워하고 경멸해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인질범의 편이 되어 인질범을 동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거야말로 내부와 외부가 나눠지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됐을까.



'스톡홀름 증후군'은 1973년 인질로 잡힌 4명의 은행 직원이 인질범에게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자 이를 설명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p.47)



인질로 잡힌 4명중 3명이 여자였는데, 인질범은 2명이었고, 인질범들은 이들을 인질로 잡아 목숨을 위협함과 동시에 인질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아직도 왜 신호가 안 떨어졌는지는 모르겠다. 다리에만 쏘겠다니 올손은 너무나 친절하다고 감격했던 게 아직도 떠오른다. 당연히 올손은 강도였고, 친절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 목숨을 위협했던 범법자였으며, 언제든 우리를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노력하지 않으면 자꾸 그 사실을 잊게 됐다." (p.53)



그들이 며칠간 인질로 잡혀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건 인질범들 때문이었다. 인질범들이 은행으로 들어와 총으로 위협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인데, 인질들은 오히려 그들의 요구를 제때 들어주지 않는 경찰들을 원망하게 된다. 경찰들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최루 가스를 살포하기로 했고 가스를 살포할 구멍을 금고실 천장에 뚫으려고 하자 인질범은 환기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



이후 폭발물에서 멀어지려던 올손은 바닥에 함께 웅크리고 있던 엔마르크와 올드그렌에게 다가왔다. 둘은 손으로 귀를 막고 머리 위로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올손은 참을성 있는 말투로 둘에게 벽에서 움푹 들어간 곳까지는 폭발물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자기처럼 폭발물에서 더 멀리 떨어질 것을 충고했다. 귀를 막을 필요는 없지만 입은 열고 있는 게 좋을 거라는 팁도 주었다. 올드그렌은 인터뷰에서 "전 그때 경찰은 왜 저이만큼 배려심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p.59)



인질범이 인질로 잡지 않았다면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폭발물 설치도 인질범이 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질범에게 '배려심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내가 가장 놀란 건 이 사건이 종결되고난 후였다. 




1985년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and World Report] 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인질이었던 여자 세 명 중 두 명이 인질범 두 명과 각각 약혼했다. (p.62)



정말 놀랐다. 너무 놀랐다. 어떻게 인질로 만든 사람과 약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외부인의 시각과 이토록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아, 대체 스톡홀름 신드롬이란 무엇인가. 너무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다. 초반에 이미 스톡홀름 신드롬의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어 내 영혼이 탈탈 털리는 느낌인데,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이야기될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서 어떤 식의 흐름으로 진행될지 짐작이 되면서,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지는 거다. 읽고 싶으면서 동시에 읽기 싫은 마음. 알고 싶으면서 동시에 알기 싫은 마음이 공존해서 마음이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본문 전에 나오는 옮긴이의 말과 해설에도 쎈 말들이 가득해서, 와, 이거 이성애자인 사람들이 읽으면 대단히 충격받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아래 밑줄긋기로 추가하겠다.



아아, 일요일 밤, 나는 이 책을 조금 더 읽을 것인가, 여자 전쟁과 여자는 인질이다로 지친 마음, 줌파 라히리로 달랠 것인가 잭 리처로 달랠 것인가, 조금 고민해봐야겠다. 

오늘 봄날의 선물이라며 친구에게 이 책을 같이 읽자고 선물했는데, 내가 잘한걸까.... 못할짓 한 건 아닐까... 아아 혼란스럽다.




"너는 창녀, 아기는 사생아라 불리겠지.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가리키는 말은 없어." 1920년대가 배경인 한 영국 드라마(피키 블라인더스)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제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남자를 ‘싸튀충(정액을 싸고 튄 사람이라는 뜻)‘ 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새로운 이름으로 가해자를 끌어낼 때 페미니즘은 가속 페달을 밟은 듯 거칠게 돌진했다. (유혜담, 옮긴이의 말) - P19

꼭 소개하고 싶었던 용어가 ‘탈혼‘이다. 온라인을 주축으로 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만들어낸 이 단어는 이혼이 일종의 탈출 감행임을 지적한다. 결혼 제도 속의 여자는 인질이나 마찬가지라는 통찰이 담겨 있다. 책을 읽지 않고도 책의 메시지를 꿰뚫는 용어를 만들어낸 셈이다. 실제로 책의 주요 주제 중 하나가 ‘탈출‘이며, 6장 전체를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범에 할애하고 있다. (유혜단, 옮긴이의 말) - P22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시각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가해자와 애착을 형성한 것은 이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피해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선택한 심리적 기제였더 것이다. (박혜정, 해설) - P2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남자들이 조직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을 때리고 강간하고 살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대다수가 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가 하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남자들의 폭력과 이성애는 서로의 존재를 상호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한 순간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남자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고 자신을 보호해줄 남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게 된다. 여자에게 서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신사적인 남자라 할지라도, 그는 분명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여자들의 남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종속적인 이성애 관계 안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감정적, 성적, 가사적 무보수 노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박혜정, 해설) - P28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한편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면, 가부장제는 기름칠 잘 한 기계처럼 남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되어 있다. 여자 계급이 피억압 계급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지배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게 되므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이 매우 효과적으로 차단되는 셈이다. (박혜정, 해설) - P28

6장은 여자들이 계속 남성 폭력을 경험하며, 서로로부터 사상적.물리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탈출할 수도 없고, 남자의 사소한 친절에 기댄채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우리의 인질 심리(사회적 흐톡홀름 증후군)를 바꿀 수 있을지를 다룬다. 지배나 복종이 아닌 상호성에 기반을 둔 관계만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런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머리말) - P41

정혈: 여자가 주기적으로 자궁에서 피를 흘리는 현상. 남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깨끗하다는 뜻의 ‘정액‘ 이라고 부르면서, 여자가 배출하는 체액은 더러운 것처럼 ‘생리‘, ‘그날‘, ‘월경‘등으로 돌려 말하는 문화에 반대하여 만들어진 말이다. - P57

웨셀리어스와 데사르노는 두 번째 인질 피해자만 스톡홀름 증후군 증상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이 피해자가 인질범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긍정적인 접촉도 가장 많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또 다른 인질들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반면 이 피해자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감금 기간이 짧았음에도 이 피해자에게 스토골름 증후군이 나타났다는 근거로는 "그가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다는 점, 외부에 있던 책임자들에게 분노했다는 점, 인질이 죽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워 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인질범이 실제로는 악취를 풍기고 행색이 초라했음에도, 인질범이 말쑥하고 매력적이었다고 묘사한 유일한 피해자였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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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5월, 여자는 인질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4-29 07:53 
    오늘 아침 눈뜨자마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여자 디제이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이라면 전혀 달랐겠지만, 대학시절 사귀었던 첫사랑 남친에게 왜그렇게 매달렸는지 모르겠다고. 심지어 그 남자는 바람을 피우기까지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 매달리고 고가의 지갑까지 선물로 주었었다는 거다. 같이 방송하던 게스트도 왜그랬냐고 하고, 디제이 역시도 왜그랬나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나 역시도 의문이었다.'왜 그랬을까?'바람을 피운 건 나를 배
  2. [여자는 인질이다] 바람남은 바람남이다
    from 마지막 키스 2019-05-07 11:27 
    어제 늦은밤. 컵라면에 밥을 먹고 홍콩에서 돌아온 짐을 풀며 틀어둔 티비에서는 <연애의 참견>을 방송하고 있었다. 사연 속의 여자는 남자와 일년 가까이 연애하면서 사랑을 키워나가던 중, 남친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핀 사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복수를 결심한다.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든 뒤에 보란듯이 빵 차주겠어!' 하며 D-day 를 50일 뒤로 잡는다. 그렇게 남자의 집에서 다른 여자의 흔적을 찾아 확보하던 중, 까페에서 남친이 다른 여자와
 
 
단발머리 2019-04-09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이 밑줄긋기 해주신 옮긴이의 말, 해설만 따라 읽어봐도 어마무시하네요.
<혁명의 영점>의 ˝우리는 하녀이자 매춘부이고 간호사이자 정신과 의사이다. (45쪽)˝의 문단급 폭풍 감동이 예상되요.
다락방님의 친구라면 봄날의 선물인 이 책에 대해 큰 기대를 갖게 될 거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부럽부럽^^

다락방 2019-04-09 11:2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혁명의 영점 그 문구 떠올렸어요. 와, 이 책은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을 책이에요. 읽는데 막 너무 후려치고 아파요. 단발머리님, 단단히 각오하셔야 해요. 저는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인질들이 인질범과 약혼한 거 읽고 너무 망치로 머리 맞은 것 같았어요. 힘들어요 ㅠㅠ

단발머리 2019-04-09 14:12   좋아요 0 | URL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하시니 진짜 각오는 필요할 것 같아요.

현실에 대한 적확한 인식이 있는 여자가 이 세상을... 남성 위주의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봐요.
저를 포함해 많은 여자들이 타협하고, 이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죠. 그래야만 생존이 가능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테니까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처럼요 ㅠㅠ
다락방님께 망치로 맞은듯한 충격을 주는 책이라면 저도 꼭 읽어봐야하는 책이었네요.
두려움과 기대가 공존합니다.

다락방 2019-04-10 10:24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여자 전쟁도 또 여자는 인질이다도 읽게 되시면 틈틈이 글 남겨 주세요.
저 어제 여자 전쟁 2장 읽었거든요. 아르헨티나 할머니. 또 여러가지로 마음이 복잡했어요. 휴..
여자들은 계속 강했는데 왜 세상은 ‘여자는 약하다‘는걸 그토록이나 주입하려 한걸까요. 마치 남자가 지켜줘야 되는것처럼.
저는 틈틈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 힘겨운 책들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