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감각 없던 대학생이 어버이날 선물을 사러 잠시 멈춘 곳은 백화점 정식 매장이 아닌,  엘리베이터 귀퉁이에 마련된 넥타이 가판대였다. 어머니뻘의 판매사원은 그런 나를 홀대하지 않았었다. 삼만 원짜리 넥타이들을 하나 하나 같이 판매하고 있는 와이셔츠에 대어 주면서 아버지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고려하여 여러 선택지를 제시해 주었다. 마침내 황금빛 바탕에 사선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들고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던 젊은 나는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릴 수 있었다. 그 넥타이는 아직도 아버지가 가끔 매신다. 끝이 다 해어진 그 넥타이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행운을 가져 온다고 아버지는 믿고 계신다. 아직도 나는 그 백화점 판매 사원 아주머니의 정성과 존중이 그 넥타이에 주술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구매력이 없는 사람에게 백화점은 어느 정도 위압적인 공간이다. 취업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들어가 무언가를 내 카드로 사고 그 물품을 걸친 일이었다는 것은 그러한 공간에 들어갈 자격을 얻고 그 공간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착각이라도 얻고 싶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생에서의 결핍은 물질 소비 욕구와 자주 혼동되고 그 혼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성적으로 권장된다. 소비하는 능력과 삶을 영위하는 능력은 같지 않을진대 자주 그런 것으로 오해되고 곡해된다.

 

행복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쇼핑,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조경란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 사람> 중

 

 

불완전하며 부족한 나는 결코 사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순간이 아무리 짧을지라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한 즐거움이다. 나는 구매했다. 여기에 필수적인 요건은 '나는 선택했다'라는 감정이다. 나는 선택했고 그것은 즐거움으로 남는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 소비의 이유도 소비의 기쁨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 조경란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 사람> 중

 

생일 선물로 받은 지갑이 마침내 구멍이 났을 때 솔직히 많이 기뻤다. 소비의 당위성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지갑을 죄책감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셈이다. 어떤 지갑을 살까, 이리 저리 재고 구경할 수 있는 나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착각도 덤으로 얻는다. 드디어 구멍 난 지갑이 들어가고 새로운 핑크빛 가두리의 지갑이 손 안에 들어오자 기대 만큼 뛸듯이 기쁘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소비는 이윽고 잊혀진다. 나는 다시 나의 새로운 지갑에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진다. 심지어 내가 왜 이렇게 동전을 넣고 빼는 것이 불편한 지갑을 선택했는지 후회마저 밀려온다. 새로운 지갑을 살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지갑도 이모저모 살펴보고 했던 시간들보다 지금 새로운 지갑을 가진 내가 덜 행복한 것은 삶의 아이러니와 닮아 있다.  정말 필요한 것을 사도 구태여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도 결국은 비슷해지는 것을 보면 소비는 사기성이 농후한 행위인 것 같다. 현명한 소비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상인 것인 지도 모르겠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회자되는 에밀 졸라가 19세기 중반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미끼상품, 반품 조치, 세일, 문화강좌 등의 백화점 판촉전략이 1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의 백화점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백화점과 지역 소상인 간의 갈등, 지역 재래 시장의 붕괴, 판매원들 간의 살벌한 경쟁, 여성들의 쇼핑 중독, 물품 도난 등도 그러하다. 두 남동생을 데리고 몰락해 가는 큰아버지의 나사 상점에 도착하며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판매 사원이 되는 드니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류층 여성들의 백화점 소비 행태, 소유주 무레의 주도면밀한 마케팅 전략, 그 안에서의 인간 군상들의 갈등과 반목, 스캔들 등이 놀랍도록 생생하고 유려하게 그려지고 있다. 가난한 소녀 드니즈와 백화점 소유주의 로맨스는 그간 드라마에서 꾸준히 차용된 것이 아닌가 싶게 진부하기는 하다. ^^

 

 

 

여인들은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의 백화점을 찾았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예배당에서 보냈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그곳에서 죽여나갔다. 백화점은 불안정한 열정의 유용한 배출구이자, 신과 남편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며, 아름다움의 신이 존재하는 내세에 대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숭배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곳이었다.
- 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2 중>

 

 

살롱에 모인 부인네들이 백화점에서 구입한 레이스를 서로 돌려 보며 백화점의 각종 상품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에서 남성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한켠에서 백화점 소유주 옥타브 무레는 여자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팔아치울 수 있다는 자신의 신앙에 기대어 연적과사업적 제휴를 도모하고 부인네들의 남편 중 하나는 그 여인의 소비를 감당하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이 작품에서 남녀의 역할은 철저하게 소비자와 생산자로 대별되어 있다. 에밀 졸라는 그 접점에 여주인공 드니즈를 투입한다. 드니즈는 옥타브 무레의 무자비한 사업 확장과 소상공인들의 탄압에 제동을 건다. 그녀도 근본적으로는 재래 경제의 붕괴와 대량 생산, 소비의 혁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간에서 스러져가는 가치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자 한다. 도식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의 행태는 이 작품의 한계이기도 하고 에밀 졸라의 이상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의 이상은 세기를 뛰어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다. 착각도 연민도 아쉬움도 진보와는 무관하게 반복된다는 것이 하나의 가르침 같기도 하고 삶 그 자체인 것도 같다.

 

백화점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레깅스의 색깔을 고르고 가판대에서 스타킹 두 개를 사도 소비는 소비다. 환각과 착각을 사고 파는 거대한 기만의 장이라고 해도 에밀 졸라의 말처럼 여기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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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책 진짜 궁금했는데 이미 사둔 에밀 졸라 책이 몇 권 있어서 차마....ㅜㅜ 에밀 졸라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고....블랑카님 페이퍼보니 또 보관함을 들추게 되네요 ㅎ 루공-마카르 총서가 계속 출간되는 건지도 궁금하고....저도 이
책 보자마자 조경란의 백화점을 같이 떠올렸어요^^*

blanca 2012-05-15 21:5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혹시 <목로주점> 읽으셨어요? 저는 에밀 졸라 작품이 처음이에요. 추천해 주신다면 도전해 보려고요. 이 책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영화로 만들어져도 너무 근사할 것 같아요. 루공-마카르 총서의 11권이 이 책이라고 하는데 책 만듦새도 좋고 여기에서 계속 출판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조경란 책에서 추천된 다른 백화점 관련 책들도 읽고 싶어요.

... 2012-05-16 00:1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목로주점>이 대기순위 1위에 있어요 ^^ 열린책들에서 나오자 마자 샀는데, 그 이후로 다른 출판사에서도 주르륵 나오더군요. 거의 대부분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목로주점>으로 에밀 졸라를 시작하지 않나요? 박찬욱 감독의 박쥐의 모티브가 되었다해서 <테레즈 라캥>도 많이 읽는 것 같긴 하던데... 제가 알기론, 에밀 졸라의 대표작을 말할 땐, <목로주점>-<나나>-<제르미날> 이렇게 추천하는 것 같아요. 모두다 루공마카르 총서에 들어가 있어서, 루공마카르 총서가 20권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표작만이라도 나오면 좋겠어요. 제가 가장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마네와 모네를 모델로 했다는 <작품>인데, 여기까진 나와줘야 하는데...

다락방 2012-05-1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페이퍼 엄청 좋아요, 블랑카님. 처음부터 고개 끄덕여가며 읽었네요. 언젠가 블랑카님의 페이퍼들을 엮어서 책으로 한 권 내어도 많은 여성분들의 공감을 얻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전 에밀 졸라의 책은 패쓰하고 대신에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겟할래요.

그러고보니 블랑카님도 브론테님도 명품 페이퍼를 쓰시는 분들. 닉네임을 ㅂ 로 시작하면 명품 페이퍼를 쓸 수 있을까요? (이건 갑자기 무슨 엉뚱한 댓글 ㅎㅎ)

blanca 2012-05-15 21:5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 저는 제가 쓴 페이퍼 다시 읽으면 괴로워서--;; 책이 된다는 상상은 감히 못하겠어요. 여하튼 칭찬해 주시니 이런 기회로 또 한번 뿌듯해 보렵니다.ㅋㅋ

레와 2012-05-1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한 소비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상인 것인 지도 모르겠다.'는 블랑카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에게 소비의 기쁨은 뭔가를 사기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고민하는 그 찰나의 순간인 것 같아요.
그 순간이 영원이 되면 참 좋겠는데..^^;

blanca 2012-05-15 21:5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저도 그래요. 딱 돈 내고 사기 전까지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이것 살까, 저것 살까 고민하는 시간들과 함께요. 인생에 있어 모든 선택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moonnight 2012-05-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명품페이퍼. 라는 다락방님 말씀에도 추천 ^^
대학생 블랑카님이 선물하신 넥타이를 여전히 소중하게 매시는 아버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따뜻합니다.

에밀 졸라의 책은, 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세이 비슷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 때문일까요?;;) 소설이었군요. -0-;;;;;;

blanca 2012-05-15 21:5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참 신기하게도 그 넥타이는 참 오래 오래 저희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어요. 다른 선물들도 드렸었는데 유독 그것을 고르고 사던 저의 시간들과 그 판매사원 아주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답니다.

감은빛 2012-05-1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은 아니지만 여전히 돈 없고 감각없고 게다가 사교성없고 고집까지 쎈
저는 백화점 판매원의 그런 친절도 사실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블랑카님의 경우 그분 덕분에 아버님께서 오래도록 아끼는 넥타이를 갖게 되셨군요.
사소하지만 그런 느낌의 물건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블랑카님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2-05-15 22:01   좋아요 0 | URL
ㅋㅋ 감은빛님. 어떤 기억이었을까요? 다시 떠올리셨을 때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진 2012-05-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 이라며 손가락을 치켜들래요. 블랑카님의 페이퍼는 언제 읽어도 알뜰살뜰(?) 꽉 뭉쳐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여자도 아니건만 처음부터 다락방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답니다. 그래도 여성분들보다 공감은 덜 가네요. 다만 블랑카님의 글 실력에 감탄하며 물러납니다. 추천 백만개!

blanca 2012-05-15 22:0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고마워요. 시험도 끝나고 여유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좋은 페이퍼 꾸욱^^
저는 문득 소설 '화차'에서 말한 그 거울이 생각나요.
뱀에게 다리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이는 착각의 거울, 결국 그 거울을 구매하려고 돈을 벌고 쓰고 아둥바둥.
정말 현명한 소비란 애초에 없었던 걸까요? 우리는 만족을 모른다는 점에서^^

blanca 2012-05-15 22: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화차>도 연결될 수 있겠군요. 마음이 허할 때 소비하고 싶어지는 욕구가 더 강렬해지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소비할 힘을 갖추기 위해 하루 하루를 또 소비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참 씁쓸하게도 느껴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딜레마인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5-1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님이 말씀하신 <작품>은 10년 전에 번역되었어요.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재미있기로는 <제르미날>이 제일 낫더군요.단 광산노동자들의 참상을 처절할 정도로 사실주의 수법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싫어하는 사람이 읽으면 안 됩니다.

blanca 2012-05-17 09:41   좋아요 0 | URL
아, 혹시 그것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어렴풋이 제럴드 빠라디유인가 그 코가 특이하게 생긴 남자 배우가 나왔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데. 아, 좋은 책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3:20   좋아요 0 | URL
예.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순오기 2012-05-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서재 마실 왔어요.^^
서재 마실도 오랜만이지만 백화점 나들이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요, 아마도 7`8년은 되지 않을까...

blanca 2012-05-31 10:0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우아, 정말요? 저는 몇년 전 전주에 결혼식이 있어 갔다가 거기 백화점 갔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백화점이 욕망을 자꾸 자극하고 추동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지 않도록 해야 겠어요.
 

아버지가 나의 아이를 업고 에스컬레이터에  서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느낌들이 밀려왔다. 고마움, 미안함, 회한. 아니다. 사람의 감정은 언어를 초월해 있다. 언어는 기만과 착각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듣고 있다고 여기게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버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세상에 내어 놓는 순간 부모와 아이는 오해와 상처 주고 받기를 시작한다. 그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조금씩 좁아지다 만나려는 순간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또 어긋나버리고 만다. 아버지의 삶은 온전히 내 입으로 이야기될 수 없고 오류없이 내 머리로 이해될 수 없으며 완벽하게 내 가슴으로 공감될 수 없다. 평범한 우리들은 부모의 입에서 얘기되는 당신들의 이야기로 재창작된 삶을 한 덩어리로 그저 오해하고 곡해해서 당신들을 일부나마 나누어 가진다.

 

 

 

 

 

 

 

 

딸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의 지난 삶을 복기하는 과정은 더없이 건조하고 담담하다.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저자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삶과 아버지를 언어로 구조화하기 위한 의식적인 거리 두기일까? 아버지의 세계와 딸이 이룩해 놓은 세계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노동자 아버지가 낳은 작가 딸은 아버지의 삶을 시처럼 추억할 수 없다. 서사화할 수도 없다. 그것은 파편화되고 객관화되기 위하여 대기 중이다. 자식이 객관하려는 부모의 삶은 역설적으로 더 처절하고 처연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작업을 아니 에르노는 해내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도저히 공감할 수 없기도 하고 전부 다 이해해 버리고 싶기도 하다.

 

 

나는 이 글을 천천히 쓴다. 일련의 사실들과 선택들 가운데에서 한 생애의 의미 있는 줄기를 드러내려 애쓸 때, 나는 점차로 아버지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 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도식이 자리를 온통 차지해 버리고, 추상적인 생각이 제멋대로 달려가려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추억의 이미지들이 미끄러져 들어오게 놔두면, 난 있는 그대로의 그의 모습, 그의 웃음과 그의 거동을 다시 보게 된다. 그는 내 손을 잡아 놀이 장터로 데려가고 , 놀이 기구들은 날 오싹하게 만들며,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어떤 조건의 모든 지표는 내게 더 이상 중요하기 않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나의 개인적 관점이라는 덫을 떨치듯이 빠져나온다.
-p.47

 

 

여기에서 그녀는 아버지와 공유했던 아름다운 추억에 잠기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자리에서 딸은 걸어 나온다. 자식을 먹이고 가족을 혹독한 풍파에서 사수하려 버둥거렸던 분투 속에서도 그녀는 슬몃 다리를 뺀다. 반은 상인이고 반은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딸의 가방끈이 길어지고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서 온 남자와 만나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반은 두렵게 반은 경의에 차서 지켜 본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거나 아버지의 뻣뻣하게 굳어 가는 몸을 부여잡고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는 모습도 아니다.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부럽기도 했고 그럴 수 없어서 안도도 됐다.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p.126,127

 

여기에서 그녀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의 관계에 발을 담근다. 빗속에서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던 아버지. 아버지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함으로써 아버지의 삶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준 딸. 당신들은 말한다. 네가 잘 살아야 네가 행복해야 그게 효도다. 나는 되뇌인다. 내가 성공하고 내가 잘 살면 그거면 된다. 이 말에는 무수한 함정이 있다. 관계로 맺어야 하는 소통이 나의 삶으로 대치되어 버린다. 쉽기도 하고 낭패이기도 하다. 사실은 이런 말들의 눈속임일 지도 모른다. 나한테 와라. 내 손을 잡아 주어라. 나를 안아줘라. 내가 너를 낳고 키웠으니 그 정도는 해 주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엄마 아빠가 제일 좋아. 하늘 만큼 땅 만큼. 노인이 되어도 작별을 하는 순간이 와도 그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단순하고 유치한 말이 때로는 가장 진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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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 멋진 글에 첫 추천은 접니다 ^___^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사진 보고 또 깜짝 놀랐잖아요. 사진이 바뀔 때마다 이진님인가 하고 유심히 보고 그런갑다, 착각하고 그러는 단순한 저입니다.

하늘바람 2012-05-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하고 갑니다

blanca 2012-05-06 23:33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추천은 언제나 힘이 나지요. 감사합니다.

cyrus 2012-05-06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보면서 읽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었어요. ^^
이틀 뒤면 어버이날이기도 하고요

blanca 2012-05-06 23:34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오늘 그래서 저도 효도하고 왔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나 아쉽고 후회되는 얘기들이 쌓이는 것 같아요. 특히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는요.

다락방 2012-05-0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블랑카님이 인용해주신 이 문장 때문에, 저는 이 책을 사야겠습니다. 아니 에르노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요.

blanca 2012-05-07 22:54   좋아요 0 | URL
이 책에는 거의 감정에 대한 얘기가 없어요. 그런데 글의 갈피짬마다 왜이리 가슴이 스산해지고 슬퍼지는지요. 그냥 아버지 얘기를 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요. 예전 대학 동기들과 모인 자리에서 누가 한 명 그냥 아버지,라고 했는데 다 눈이 벌게졌던 기억이 나요. 다락방님은 어떻게 읽으실 지 궁금합니다.

마녀고양이 2012-05-08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찌 부모님을 알 수 있겠어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요즘 깨달은 것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 제 마음 속의 부모님과 화해하는거라는 겁니다. ^^

진짜 부모님과 제 내면의 부모님은 동일하지만, 다른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전,
둘 다 사랑합니다. 지금 화해 중이거든요,, 큭큭.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그죠, 마고님. 부모님 인생을 머리로 판단하고 옳다, 그르다, 그랬어야 한다는 등의 치기를 부렸던 지난 날들이 부끄러워집니다. 그냥 저를 이 세상에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신 것만으로 감사하려 합니다.

후애(厚愛) 2012-05-08 0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이요~!! ㅎㅎ

blanca 2012-05-08 21:48   좋아요 0 | URL
후애님, 감사합니다.^^
 

박진영이라는 뮤지션은 강해 보인다. 에너지도 넘치고 삶의 대부분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끌고 수 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무기력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고 여기는 요즈음 <힐링캠프>에서 그의 극도로 엄격하고 절제된 일과를 보니 눈이 번쩍 뜨였다. 기상 시간, 조식 시간, 스트레칭, 발성 연습 등의 자기 자신만의 일정이 조금 엽기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로 강박적인 부분이 있었다. 사랑하는 음악을 팬들 앞에서 오래도록 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관리란다. 이른 나이에 성공적인 입지를 구축하기까지의 과정을 들으니 더더욱 그의 앞에서 그의 삶은 통제 가능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주무를 수 있는 유연하고 호의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 같았다. 돈을 벌고 명예를 얻고 자선을 행하고도 남는 그 1%의 결핍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찾아 헤매는 대목이 공교롭게도 읽고 있던 책과 겹쳤다.

 

 

 

이 책은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다. 대형 서점에서 이제 막 집으로 가려던 참에 들춰 보고 돌아섰다 다시 돌아가 손에 쥐었다. 육아서라면 꼬맹이가 자고 먹고 하던 시절 줄까지 그어가며 정독했던 기억에 물렸던 와중이었다. 육아서를 읽는 순간 만큼은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느낌이 왔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사실 '나'의 개인적인 자존감을 높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가능하다. 세상에 하나의 인간, 하나의 삶을 온전히 선물하는 일이 양육이라고 포장한다면. 하지만 양육은 온전하게 자신과 삶을 주체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어른도 불가하지만) 작고 무기력한 생명을 보살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고 자는 게 힘들어 두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버둥거리며 들썩거리는 아이를 잠까지 인내하고 안내해야 하고 밤에 열이라도 나면 밤을 꼬박 새우며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고 해열제를 먹이다 여차하면 병원까지 업고 뛸 수 있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힘듦에는 달콤한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아이를 세심히 보살피고 최선을 다해도 어느 날 아이는 갑자기 중병에 걸려 나의 마음을 타들어가게 할 수도 있고 사춘기의 아이가 '엄마가 대체 나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갈 수도 있다. 부모가 되는 일은 인간이 삶을 통제할 수 있고 무언가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찬란한 기만이었는 지를 뼈아프게 깨달아 가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우리가 격하고 방어적인 사람이 되는 이유는, 엄마로서 살아가다 보면 자신이 모든 일을 통제할 수 없고 살아가면서 언제든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아찔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p.73

 

네 아이의 엄마이자 소아과 의사인 저자 메그 미커는 이제 동양에서 보는 기준으로라면 지천명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육아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나이에 접어들어 삶 속에서 깨달은 것들을 얘기해 주고 싶었던 것같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아주 놀라웠다. 육아서 안에서 삶에 대한 통찰과 위안을 얻는 일은 드물고도 기쁜 일이다. 내가 요새 자꾸 느끼게 되는 나의 무기력함이 비단 나의 '엄마'라는 위치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여기에 기인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자 좀 덜 의기소침해졌다. 항상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특히 삼십 대 중반을 넘어가면 다른 사람들은 삶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자신감과 통제감을 느끼는지. 박진영은 세속적인 기준에서라면 성공한 축에 속한다. 게다가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로 그러한 일들을 이루었다. 무언가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젖혀 둘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삶에 있어서 철학적이고도 근원적인 고민을 화두로 던지고 싶어한다. 진행진들은 난감해한다. 예능 방송이 무거워지는 건 부담스럽기도 하고 겁나기도 하는 일인가 보다. 괘념치 않고 혼자 도취되어 자못 철학 강연처럼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그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했다.

 

뒤돌아 보면 나의 계획대로 된 일들보다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일이 풀리고 나의 좌표가 바뀐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예증이기도 하고 박진영 말마따나 그러니 편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특히 자식과 관련된 일에서는 더더욱. 아이는 나의 못다한 꿈의 대리만족을 위해 내가 미처 수습하지 못한 상처를 기우기 위하여 동원되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나는 아이의 꿈을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나는 무기력하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최선을 다해서 살게 된다는 것. 작은 것들을 통제하고 나를 관리하는 것은 큰 것을 통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다. 이 책의 저자 메그 미커는 희망을 품는 일이 통제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덧붙인다. 역설 같기도 한 그녀의 얘기가 와 닿았다. 무언가를 다 나의 통제 권한 속에 몰아 넣기 시작하면 나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고등학교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다. 나도 그 아이도 어떤 얘기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스무 살을 기다리던 열일곱은 이제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들 앞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말하고 들어주며 잠시 친구 하나면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을 다 쥐락펴락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시간들의 느낌이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세상이 주먹 안에 들어오는 작은 공만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고 아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너무나 많이 남아 있는 삶과 시간들이 어찌 그때보다 더 폄하되고 있는지 슬프기도 하고 그것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편안해졌으면 좋겠다. 무기력하게 느끼지도 않고 희망과 꿈을 포기하지도 않지만 그 모든 것을 내가 어쩔 수 있다고 자만하거나 기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아, 살면 살수록 인생은 알 수도 없고 어렵기만 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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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5-0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그래요. 살수록 인생은 어렵고 알 수도 없고.
전 어제 박진영 볼까하다가 그만 sbs '안녕하세요'를 봤어요.
재밌더라구요.ㅎㅎ
어찌보면 누구나의 삶이든 들여다보면 일면 빚좋은개살구가 아닐까 싶어요.
살면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비우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쉽지 않지만 노력하려구요.^^
엄마의자존감, 좋은 책 같아요.^^

blanca 2012-05-01 23:0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 원래 '힐링캠프' 잘 못 보는데 어젯밤은 정말 우연히 보게 되어 완전 몰입해서 봤어요. 제 집 앞에 바로 중학교가 있어 여러 풍경들을 많이 보게 되고 아이도 커가고 하니 참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아이 생각을 하다 보면 또 '나'는 어디로 간 건가 싶기도 하고요. 봄이 왔다고 좋아했더니 바로 여름 분위기라 좀 지치기도 했나 봐요.

cyrus 2012-05-0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지나간 과거의 인생을 그리워하면서도 곧 다가올 미래의 인생 앞에서는
복잡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어요, 결국에는 블랑카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인터넷 기사에서 본 건데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균형잡힌 식단처럼
과거, 현실, 미래를 적절하면서도 충실하게 살아라고 하는군요.
너무 좋은 과거만 바라보는 것도 않 좋고, 그렇다고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고 즐기는 것도 좋지 않고,
그리고 너무 먼 미래에만 바라보는 것도 좋은 것도 아니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시간 자체를 균형적으로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일리가 있는건 같아요. ^^

blanca 2012-05-01 23:09   좋아요 0 | URL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것들을 깨알 같이 알고 계셔서 부럽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앞으로만 달렸던 시간들이 그립기도 하고 후회되기도 해요. 인용해 주신 기사 참 좋아요. 저는 요새 과거와 현재에 너무 끄달리고 있나 봅니다.

Jeanne_Hebuterne 2012-05-0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어제 고등학교 때 벗을 만났어요. 둘이서 카페에 앉아 허니 브레드를 먹으며 `우리의 신세한탄도 엄밀히 말하면 반가사유에 들지 않겠니'라고 자조했는데, 이런 말을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 누구도 내가 이렇게 살아있을 거란 건 몰랐을걸.'
전 언젠가 그녀에게 `너 지금 교복 입고 나 만나러 나오면 백만원 준다' 라고 말했고 스무살의 그녀는 나에게 `미쳤어'라고 답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걸 할 수 있대요. 오히려 멀어진 지금, 시차가 생긴 시각.
'돈 필요하냐'라는 나의 물음에는 깔깔 웃으며, 둘이서 문제는 늘 결핍에서 오는 것. 이란 말을 했어요. 이렇게 보면 늘 나란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무엇을 하여도 아무 상관 없이 나의 결핍에서만 모든 게 생겨나는 것 같아서요.
블랑카님의 이 글을 읽으니, 통제와 풀어짐의 경계에 계신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죔쇠를 더 조일까. 조인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까. 이런 느낌이오.

어차피 저는 하루하루를 굉장히 열심히 살았으되 인생 전체를 막 살고 있어요. 그러나 그 어떤 답도 들은 적이 없으니, 블랑카님의 마지막 글의 바램-나만 그런 게 아니었으면-에 있어서 더한 1인이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아주셔요! 쓰고 나니 전혀 자랑도 아닌데 자랑스러워하는 실수를!

blanca 2012-05-01 23:15   좋아요 0 | URL
쥬드님 ㅋㅋ 하루하루를 굉장히 열심히 살되 인생 전체를 막 살고 계시다는 말이 왜 이리 부러운지요 ㅋㅋ 쥬드님도 어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셨군요! 교복이 갑자기 그리워집니다. 맞아요. 객관적인 조언도 결국은 나의 결핍을 가장한 경우가 많더라고요. 완전해지거나 놓아버리지 않으면 항상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저의 이 우울함이 일정한 주기를 가진 것인가, 아니면 나이 탓인가, 어떤 상황 때문인가,를 전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0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식을 통해 나의 못다이룬 꿈을 이루게 해야겠다며 무리수를 두는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제가 아는 50대 초반의 남성은 부모가 강요해서 자신은 원치도 않은 대학의 학과를 나왔는데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할 때 한을 품고 해요.50이 넘었는데도...어찌 그 분 뿐이겠습니까...
자식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아직도 동반자살이라고 쓰는 기자들도 있고요...자식을 소유물로 보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만연되었나를 보여주는 예입니다.뭔가 깨어있을 것 같은 고학력의 젊은 부부들도 자식성향 무시하고 사교육폭탄을 안겨주는 사람들도 많고요...

blanca 2012-05-02 23:15   좋아요 0 | URL
노자님,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더라고요. 자식은 분명 세상에 나왔을 때 나와 분리된 존재인데 자꾸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의 연장인 것처럼 느껴져서요.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성장하고 가정을 이루어 독립해도 품 안의 자식으로 여기는 정서가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쿨하고 너그러운 부모가 되고 싶은데 정말 어려운 과제인 것 같습니다.

jamanta 2012-05-02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소개를 읽고 나니 어서 저도 이 책을 읽고 싶어지네요. 이제 주문하러 갑니다~

blanca 2012-05-02 23:17   좋아요 0 | URL
jamanta님 안녕하세요. 이 책은 육아서라기보다는 그냥 누군가가 곁에 앉아 공감해 주고 치유해 주려는 다정다감한 느낌이 들었답니다. 다만 말미에 이르러 약간 종교적인 색채가 있어 이 부분은 조금 아쉬워요.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저한테는 참 좋은 책이었답니다. jamanta님께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2012-05-03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8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9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5-0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2-05-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진영이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려고, 하니까,, 진행자들이 난감해했다는 부분 보고 ㅋㅋ 프로보면서 그런 맥락도 읽으시는군요 ^^
엄마의 자존감을 서점을 나서려다 다시 돌아가 쥐고 왔다는 부분도 ㅎㅎ 상당히 극적인 만남인 거 같아요. 그런 책들이 있더라고요. 지천명이면 50살인가요? 그 작가의 연륜을 몹시 듣고 싶기도 하네요 ^^

2012-05-03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2-05-06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인생은 살아갈수록 어렵고 힘들고.... 가끔 왜 나에게만? 하는 원망도 생기고요. 특히 아이들이 클수록 고민꺼리도 늘어갑니다. 엄마의 자존감, 아이들의 자존감 키우기 어려워요. ㅠ

blanca 2012-05-06 23:32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요? 저에게 세실님은 부러움의 대상인걸요. 가장 아름다운 직업, 사서님이시고 게다가 공부도 하시고 하루 하루 발전해 나가시는 세실님이잖아요. 아, 저는 여섯 살밖에 안된 딸 두고서도 키울수록 어렵다는 말 실감한답니다.^^ 어렸을 때는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편했는데 이제 커가며 여러 가지로 혼란이 오네요.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면 또 어떤 과제들을 엄마한테 안겨 줄지. 한편으로 참 이쁘면서도 그 이쁜 만큼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아요.
 
일곱 박공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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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제목에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박공'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다. 원문 제목은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다. 게이블. 바로 <빨간머리 앤>의 아름다운 집, '그린 게이블즈'가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면 꼭 그들의 앤이 아니더라도 머슈 아저씨와 마릴라가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그 집도 이 '박공'과 관련이 있었다. 알고보니 가장 흔한 ㅅ자 지붕형태를 얘기하는 단어였다. 장소가 바로 제목이자 소재, 주제가 되는 책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붕이 일곱 개인 집이 잘 그려지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하니 실제 비슷한 모델의 집의 이미지가 있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집의 정경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 건물 자체가 마치 화려하고 음울한 회상들로 가득 찬, 자기 생명을 가진 거대한 인간의 심장과 같았다.
-p.39

 

친정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온 곳이다. 일곱 박공의 집처럼 두 세기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장소 이상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 집에서 매번 최대한 교통이 불편한 학교, 직장 등에 나갔다 어깨에 먼지떠께를 얹고 귀환하곤 했던 기억들은 구석 구석마다 먼지처럼 가라앉아 또르르 말려 있는 느낌이다. 벽마다 가족 구성원들의 추억, 회한들을 숨기고 이 집도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일곱 박공의 집'에는 쇠락한 귀족 핀천 가문의 후손인 헵지바가 숙부을 죽인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인 오빠 클리퍼드를 기다리며 그 집에 구멍 가게를 열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 노년의 오누이는 더없이 음침하고 비참하다. 하루 하루를 견뎌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련이자 고문이다.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기대도 없다. 그 집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청년 은판 사진사 홀그레이브에게 핀천 가문의 처녀 피비가 이 집에 온 것은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세례는 이 늙은 오누이에게도 미친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처럼 만연체의 연설을 늘어 놓던 작가 호손의 목소리가 갑자기 청랑해지는 것도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예쁜 묘사들.

 

그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듯이 피비를 읽었다. <중략> 그녀는 그에게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가 갖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에 아주 절실한 모든 것에 대한 통역이었다.
-p.191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서 갖지 못했지만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에 대한 통역이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언어들은 또 다른 차원의 감정을 고양한다.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체화하고 해석해 주는 존재로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자 희망. 그 극대점에는 비참하게도 살인 누면을 쓰고 감옥에서 젊음을 소진하고 풀려 난 클리퍼드가 있다.

 

평생 동안 그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비참해지는 법을 배워 왔다.
-p.202

 

고난은 언제나 사람을 각성시키고 상처의 생채기는 언제나 저릿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포기해도 비참해지는 법은 언제나 다른 경로를 통해 새롭게 학습된다. 손을 놓았다 다시 접하면 또다시 외국어 실력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호손은 예리하지만 잔인가히도 한 것 같다. 고딕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고통을 소환해 낸다. 핀천 대령과 땅의 소유권을 놓고 분란이 일어 마법사 누명을 쓰고 처형되는 매슈 몰이 단말마에 짜내었다는 예언은 만화경처럼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후손들에게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억측과 오해. 그 속에서 태어나는 희생양. 고색창연한 이 집은 딱딱해져가는 심장처럼 몰락의 징후를 예감하며 힘겹게 박동한다.

 

결말에서야 밝혀지는 무고한 클리퍼드를 감옥까지 가게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촌 핀천 판사의 묘사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 더없이 고상하고 인자한 존경받을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근접해서 보면 그의 모든 면은 탐욕과 위선에서 나온 일종의 타락한 연기다. 그 연기는 지역에서 사회에서 너무나 잘 먹힌다. 정계에까지 진출하려는 그의 의도는 무지한 대중 앞에서의 그럴듯한 연기로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다면 곧 현실화될 전망이었다. 그가 그의 선조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바로 그 의자에서 시들어 가고 있을 때 호손이 장황하게 그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면 행해졌을 일들을 늘어놓는 대목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잔인한 실체를 눈 앞에 그려주는 그의 명민함 때문이다. 핀천 판사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유형이면서도 가장 욕망하는 것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야망이 마법보다 무서운 부적'이라는 호손의 경구는 인간이 한 곳에 뿌리박고 앉아 대대 손손 부귀 영달을 누리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사실은 하나의 잘 변장한 야망의 또 다른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매가 '일곱 박공의 집'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떠나는 결말은 동화적이기도 하면서 호손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한 결말이기도 하다. 현실과 비현실, 시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그가 그려낸 스케치는 그가 삶에서 깨달은 남겨진 자들에게 해주고 떠나고 싶었던 애기인 것만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누구나에게도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도 같다. 상처도 후회도 회한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중략>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정당함을 찾을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끼워 넣을 마땅한 구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p.425

 

 

+ 작가의 문체는 때로 굉장히 장황하고 교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술이 지루함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캐릭터와 배경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능력과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의 힘이 매력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결말의 해피엔딩은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다. '그린 게이블즈'에 앤이 오지 않았더라면 마릴라와 머슈 남매가 핀천 남매처럼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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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27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까지 박공을 마음대로, 조개껍데기 비슷하게 생긴 무엇으로 상상하고 있었답니다...
블랑카님 때문에 이제 제대로된 상상을 하겠네요.... ㅋㅋ. 그런데, 옛날 러시아 동화 읽을 때 스프라든지 아니면 유럽 동화의 무슨 빵 이런거를 상상할 때 정말 가슴이 뛰었는데 실제 접하니.... 음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호손은 주홍글씨 밖에 못 접해봤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황하고 교조적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오니 말이죠.
오랜만에 뵙는거 같은데, 잘 계시죠?

blanca 2012-04-27 22:21   좋아요 1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박공이 무슨 목수 같은 직업을 얘기하는 줄 알았어요. ㅋㅋ 이런 뜻일 줄은 저도 몰랐답니다. 저는 <주홍글씨>를 어렸을 때 아마 계림문고판으로 지루하게 읽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참 신기한 건 이 책은 재미있답니다. 독특한 즐거움이 있는 책이라 간만에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대체 왜 바쁜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가운데 항상 잠도 모자라고 그런 상태예요. 코알라양 만큼은 아직 아니지만 이제 꼬맹이도 친구처럼 어디 데리고 다닐 수준이 되어 재미지기도 하고요. 마녀고양이님 생활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 2012-04-27 1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헤밍웨이를 정주행하면서, 미국문학을 전공하며 헤밍웨이와 피츠제랄드와 포크너를 읽었어야 했는데...하는 생각을 하는 중인데, 블랑카님 리뷰를 보니 그들 이전에 호손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되네요. 큰바위 얼굴같은 동화도, 영 굿맨 브라운같은 단편도, 주홍글씨같은 청교도 사회를 그려낸 장편도 척척 써내는 호손인데, 게다가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라니... 이 사람 천재입니까!!!

blanca 2012-04-27 22:24   좋아요 1 | URL
브론테님, 헤밍웨이 정주행하고 계시는군요! 우아, 근사해요. 저는 브론테님이 얘기하신 책들 중 <큰 바위 얼굴>만 읽었어요. 이 책은 옮긴 이가 자칫 지루할 수 있다고 덧붙였는데 일단 아주 재미있더라고요. 동화 같은 느낌도 있는데 군데군데 호손의 이야기들이 삶의 경구들 같아서 철학책 같기도 해요. 천재 맞는 것 같아요. 저는 미국문학을 전공할 뻔했는데 영어가 너무 부족해서--;; 접혔어요.(접은 게 아닌고요--) 브론테님의 헤밍웨이 정주행 경과가 궁금해집니다. 간간이 올려주실거죠?

노이에자이트 2012-05-02 15: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홍글씨 상당히 재미있어요.저는 서른 넘어서 읽었으니 그럴까요? 사실 어린이가 읽기엔 좀 어렵죠.성인이 된 지금 읽으시면 그 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blanca 2012-05-02 23:19   좋아요 1 | URL
노자님, 그럴까요? 저는 참 지루하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른 넘었으니 이제 한 번 제대로 읽어볼까요?^^;; 호손의 문체가 만연체 및 약간 교조적인 면이 있는 게 참 재치있긴 하더라고요. 발자크도 생각나고요.

icaru 2012-06-15 14: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표지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 나오는 그림인데 ㅎㅎ) 뒤늦은 딴소리 지송^^;;;

blanca 2012-06-15 22:15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저 표지가 의외로 여기 저기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놀라고 그래요. <위기의 주부들> 시작할 때도 나왔군요!

saint236 2012-09-26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표지는 아내의 역사라는 책의 표지로도 사용된...

blanca 2012-09-27 10:07   좋아요 1 | URL
아, 저도 본 것 같아요!
 

독감은 감기와 고통의 차원이 달랐다. 일단 장염이 동반됐다. 열이 주기적으로 계속 오르는데 37도 정도부터 시작하더니 스멀스멀 39도까지 올라갔다. 속은 미식거리고 배는 부글거리고 콧물은 줄줄 흐르고 머리는 흔들리고 목은 따끔거리고 총체적 난국이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얘기였다.  자고 싶은데 도저히 잠도 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해도 빠지지 않던 체중이 하루에 1킬로씩 빠졌다.

 

이 정도 되면 만사가 귀찮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얄미워할 이유가 생긴다. 그 어떤 불행의 무게도 내가 지금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 바이러스보다는 가볍게 보였다. 독감에 걸려 있는 '나'는 건강할 때의 너그러운 나를 아련하게 추억한다. 모든 미덕이 실종되고 시앗을 본 본처처럼 아들을 빼앗긴 며느리처럼 손톱을 세우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없고 '상황'이 있는 것이라는 얘기는 어느 정도 맞는 것 같다.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관용과 배려의 미덕을 가지기란 행복한 사람이 절망하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얘기다.

 

독감이 낫고 체중은 우습게도 바로 원상복귀되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만난 책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정말 뒤늦게 만난 책. 통혁당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던 신영복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글들이다. 자체 검열을 받고 세상에 나온 편지들은 그가 연루되었던 사건에 대한 해명도 무기징역 선고에 대한 분노도 보이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때로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정제된 멀끔한 고백들이다. 너무나 잘 닦인 말들. 나를 그 처지에 넣어 보면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할 것 같다. 넌 영원히 사회와 격절되어 닫힌 공간에서 있으라!, 고 사람이 사람인 나에게 명령하고 실제 그것을 집행한다면 과연 내일을 믿고 내년을 기약하고 여생을 상상하며 하루 하루 견뎌나갈 수 있을까? 20년 후 세상 밖으로 나온 그지만 그 속에서 그는 그럴 것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의 하루 하루는 진실했고 때로 경건하기까지 했다. 절망을 얘기하지 않고 그 안에 자신을 가두지도 않고 섣불리 희망에 기대지도 않고 그저 하루 하루를 연자방아를 돌리는 노새처럼 성실하게 지내며 내면에 세상 밖으로 뻗어나갈 나무 한 그루를 키워냈던 그의 나날들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진정성 있는 희망이란 이런 곳에서 피어나는 것일게다.

 

동향인 우리 방에는 아침에 방석만한 햇볕 두 개가 들어옵니다. 저는 가끔 햇볕 속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수한 무지개를 만들어봄으로써 화창한 5월의 한 조각을 가집니다.
-p.150

 

나는 그러지 못했다. 햇볕의 한 조각은 의당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눈감고 속눈썹에 무지개를 만들 만한 상상력의 배포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니 화창한 5월 한 뼘은 말도 없이 도망가 버리곤 했던 것이다. 신영복은 감옥 안에서 계절의 순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옥 안에서 무더위,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될 아들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그 염려를 염려하며 자신도 극한의 더위와 추위 사이 사이 아름다운 절기들을 만끽할 수 있음을 얘기한다. 호한에서는 동료 죄수들의 체온으로 서로를 덥힐 수 있고 더위가 성한 여름에는 이름모를 동료가 잠도 자지 않고 가운데에서 부치는 부채 바람으로 허락된 시원함으로 너끈히 견디는 그의 모습은 난방과 에어콘 바람으로 계절의 단련을 거치지 않고 1년을 보내어 버리는 우리들의 빈곤함을 부끄럽게 한다. 자연이 주는 시련을 일종의 연대로 이겨 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그 시련마저 기계의 힘으로 거부해 버리고 나날이 더 외로워지고 더 말라가는 우리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히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p.155

 

그가 갇힌 곳은 내가 자유로운 이곳보다 더 열려 있었다. 내가 온전하게 잡고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일상들보다 그의 일상은 더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나는 점점 더 객관의 지평을 잃어가는데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의 자리에서는 객관의 지평이 한없이 확장되고 있었다. 이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더 깊숙이 발목을 박았고 자신의 옆에 있는 그들을 더 간절하게 원하고 더 가까이 안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그가 봉재공장에서 미싱 땜방 일을 할 때에도 그는 자신의 추락한 위상과 처지를 떠올리는 대신 땀을 흘리며 손으로 붙잡고 하는 노동이 주는 기쁨에 겨워했다. 이것이 객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방끈이 긴 인텔리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혀 밖에서라면 접할 기회도 별로 없었을 밑바닥의 인생들과 부대끼며 견뎌야 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그가 발을 헛디딘 곳에서 그는 더 큰 사람이 되었다.

 

다시 만나지 말자며 묵은 사람이 떠나고 나면 자기의 인생에서 파낸 한 덩이 체험을 등에 지고 새 사람이 문 열고 들어옵니다.-p.164

 

떠나고 들어오는 수인들에 대한 그의 묘사가 눈물 한 방울을 부른다. 온몸에 문신을 하고 욕설이 태반이 사람들이 지고 들어오는 삶에 대한 그의 존중과 이해가 뭉클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역사를 등에 지고 저마다의 삶과 희망과 꿈을 오롯이 몸에 채우고 타인을 대면한다. 사회에서는 그들 속에 있는 그 귀중한 추억과 지향을 무시한 채 그들이 세속적 기준에 부합하는 것들을 성취했는 지를 놓고 그들을 평가하고 재단한다. 우리는 알 수 없는 만남이 이 곳에서는 절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작 독감 하나로 내가 불행해질 이유를 수십 가지 만들어 내고 내가 사람을 미워할 이유를 꼽아 보던 어제가 몸서리나게 부끄러워졌다. 신영복도 나라는 생각은 '나'와 '처지'가 부딪쳤을 때 공중에 떠오르는 생각이라고 했지만 처지만으로 내 삶을 규정하고 나의 감정을 합리화해버리는 습관은 고질적인 비겁증이다. 모든 사회와의 연대가 깨어지고 모든 자유를 속박당하고 모든 미래의 약속과 꿈을 저당잡혀 버려야 하는 수형 생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성장해 나가며 수감 생활이 주는 함정도 단속했던 그의 삶을 대하는 그 경건한 자세에서 인간이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추한 인간을 얘기하고 비감한 인생론을 설파하기 쉬운 자리에서 인간의 연대를 믿고 대중의 선량함을 확신하는 그의 모습은 삶의 의미의 현현이었다.

 

나는 아직은 달팽이의 보수와 칩거를 선택하는 나이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P.180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그의 바람은 나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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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4-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코, 독감에 걸렸다 오셨군요.
요새 감기는 참 힘들덥디다. 저도 거의 한달간 끊이지 않는 기침과, 감기 첫주는 빠질 듯한 어깨 담과 썩어 문드러진 듯한 목의 느낌과 아픔, 누런 콧물과 위가 나올듯한 기침... 아 생각만 해도 힘이 들어옵니다.
체중은 보란듯이 늘고 있구요. 그래도 나으셨으니 다행입니다!

blanca 2012-04-16 09:0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이랑 거의 비슷한 시기에 걸렸어요. 감기는 삼사 일 바짝 앓으면 낫는데 독감은 정말 차원이 다른 고통이--;; 소이진님도 힘드셨겠어요. 고마워요. 오늘 보니 또 다시 독감이 유행한대요. 게다가 또 아침 저녁으로 쌀쌀해서 일교차가 크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프레이야 2012-04-26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글이 요즘 더디 보여 들렸어요.
열흘이네요. 아직 몸이 편치 않으신가요? 제 서재 댓글 반가웠어요.^^
신영복님의 마지막 저 문장, 날선 청년의 정신이네요.
저 책을 다시 꺼내봐야겠어요.

blanca 2012-04-27 09:3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감기 낫고 나서 밀린 일들을 하려니 이래 저래 정신이 없네요. 게다가 날씨도 너무 좋아서^^ 퍼지려는 차도 고치고 그러고 있어요. 운동도 하고요. 세상에서 젤 무서운 게 독감이에요--;;이제 정말 완연한 봄이지요? 파란 귀한 하늘을 보면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이 봄을 많이 보고 살고 싶다, 이런 생각 해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