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죽음의 부정 - 복간본
어니스트 베커 지음, 노승영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쑥쑥 크는 아이의 모습은 삶의 시계를 연상시킨다. 나는 늙고 아이는 큰다. 지금 나는 영원한 현재를 살고 있다고 여기지만 수백 년이 지나면 이 현재는 머나먼 과거로 붙박힌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가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것같은 순간이 있다. 정말 여기 지금을 의식하는 내가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면 숨이 막힌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견디고 능란하게 모든 일을 헤쳐나가는 것만 같은데 나는 무능하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 책은 그런 나의 느낌을 정확하게 간파한다. '죽음의 공포'를 직시하는 것이 삶의 부적응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낯선 것이 아니었다. 저자 어니스트 베커는 실제 말기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 그는 죽음을 얘기하기에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적절한 시점에 도달한 셈이었다. 가차없는 분석은 우리의 삶 자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괴롭고 더욱 불안했고 그럼에도 무언가 흐릿한 장막이 걷히는 느낌에 시원했다. 




인간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다. 자신이 지금 여기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무'로 돌아간다고 항상 의식한다면 도저히 일상을 살아낼 수 없을 것이다. 어니스트 베커는 그 허울에 사회에서 제공하는 세속적 영웅주의의 상징적 행위 체계를 제시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사회적 성취,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한편 대의, 이상적 신념 체계, 심지어 종교에 빠지는 행위조차도 결국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라는 얘기다. 



인간은 말 그대로 둘로 나뉘어 있다.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아 자연으로부터 돋보인다는 점에서 자신이 독보적임을 자각하면서도, 눈멀고 벙어리가 된 채 1미터 아래 땅속으로 돌아가 영영 썩어 사라진다. 이것은 우리가 처한, 짊어진 채 살아가야 하는 끔찍한 딜레마다. 

p.69


이러한 딜레마를 말끔하게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는 프로이트가 역설한 모든 인간 행동의 말썽의 원인이 성적 충동에서 비롯되었다는 명제가 지극히 편협하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간과한 분석이다. 그의 정신의학적 분석의 깊이와 넓이에 대한 경의는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한계를 성적 본능으로 환원시키는 단편적인 시선에는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어니스트 베커는 프로이트를 시종일관 개관하면서도 그의 이론의 한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프로이트를 넘어서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심리학과 종교를 결합한 키에르케고르가 있다. 실존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에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는 결국 더 시원적이고 절대적이고 무한한 이상에 기대는 것으로밖에는 해결한 방법이 없다는 결론은 좀 모호하다. 


그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그 자신이 바로 그 실존적 한계에 갇힌 그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가 인간 존재의 근본적 소멸에 따른 허무감과 공포에 대한 절대적인 답을 삶 안에서 찾아낼 수 있을까? 어니스트 베커는 과욕을 부리지 않는다. 대신 그의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과 혜안은 놀라운 차원의 깊이와 명철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두려워하며 정작 응시할 수 없었던 것들을 가감없이 추려내어 가차없이 논증한다. 이 책의 후반부가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을 들여 독자적 존재가 되고, 자기만의 재능을 발전시키고, 세상에 대한 분별력을 가다듬고, 취향을 넓히고 벼리고, 삶의 실망거리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성숙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연 속의 고유한 피조물이 되고, 존엄과 고귀함을 갖춰 동물적 조건을 초월하며, 더는 휘둘리지 않고 더는 완전한 반사작용에 머물지 않고, 어떠한 틀에서도 찍혀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앙드레 말로가 <인간적 조건>에서 말한 진짜 비극이 시작된다. 60년간 어마어마한 고통을 겪어가며 그런 개인을 만들어놨는데, 이제 그가 잘하는 것은 죽는 일 뿐인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역설은 당사자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p.4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오래 살면서 소설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 사람, 사진 보면 완전히 할아버지잖아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놀랍습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니 충격이긴 하네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p.245>


인터뷰는 자신을 규정하거나 포장하거나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쉽다.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때로 과장이나 거짓이나 속단이 되어 버린다. 인터뷰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란 그래서 어렵다. 애초부터 작은 기대와 많은 한계를 감안하며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면 그냥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인터뷰의 대상은 하루키. 인터뷰를 하는 작가는 가와카미 미에코.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로 데뷔했다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루키의 팬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을 공들여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루키의 우물에 가닿는 그녀의 신공이 놀랍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진지하고 머뭇거리고 솔직하다. 이제 곧 일흔이 될 그는 자주 불러오는 삽십대 중반의 주인공의 감성과 직관과 개방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꼰대 마인드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의 그 성실함에 대한 언급은 하루키 작품 속 남자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진다. 꾸준히 성실히 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영감에 의존하여 일필휘지로 완성해 내는 작품과 하루키는 멀다. 언제나 성실히 열 장 가량 매일 쓴다. 열 번 이상 고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문장을, 문체의 정밀도를 높여 나간다. 결국 궁극의 문장을 향한 그의 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좁혀질 것이다. 


시스템이 양산해 내는 악에 대한 일침이 와닿는다.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악을 근원적으로 완벽하게 몰아내기도 힘들다,는 인식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악을 탐사하고 그 악을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의 우물이다. 그 이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얘기의 자리가 아쉽다. 그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 그 이상에 대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남자 인물들이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나 구도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에 대한 언급은 사실 항상 느꼈던 바라 궁금했다. 하루키의 대답은 싱겁고 사과는 빠르다. 자기는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의식하거나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의 해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해 준 가와카미 미에코와 그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인터뷰 내내 흐른다. 인터뷰의 내용은 그래서 쉽게 우회하거나 얄팍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쓰는 일에 대한 작업 비밀을 어떻게든 솔직히 알기쉽게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가 서 멈추지만 결국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가 요체가 될 것 같다. 가르칠 수 없지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후배 작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려는 그의 사려깊음이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결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피아니스트의 아흔 해 인생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시모어 번스타인.앤드루 하비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면 그 때의 그 어떤 날을,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일주일 내내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설레는 느낌은 다시 맛보기 어렵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그 때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 그 때의 내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시간과 공간은 간데 없다. 대신 여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포박한다. 나이가 들면 이제, '절대', '정말', 같은 부사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분명 잃게 되는 다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이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로 내 생활 전반이 흔들리거나 누군가가 나를 부정했다고 해서 내 전존재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거나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릎 꺾여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경우는 그 전보다 줄어든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상황을 깔끔하게 재단하거나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섣부른 믿음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다. 지혜나 깨달음의 축적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된 효과로만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물론 나의 삶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내 전존재나 내 삶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렴풋한 자각에서도 비롯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듦과 노인이 된다는 것, 죽음이라는 그 확연한 예정된 종말로 서서히 다가서는 일, 그리고 삶.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하기 힘든 힘, 섭리. 그래서 아흔이 가까운 거장 피아니스트와 환갑이 넘은 시인이 나누는 <말>을 듣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선망으로 물들였던 <스탠 바이 미>의 그 배우 에단 호크에게 헌정된 인터뷰집이라니...


배우 에단 호크와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친분은 에단 호크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둘은 할리우드와 클래식 음악계, 적지 않은 나이차를 건너 뛰어 자신의 재능과 삶을 통합하려는 그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서 만나 진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의 부산물들을 절제 없이 향유하는 대신 더 거대한 생의 과제와 영혼의 탐사,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보는 '성공'이라는 열매는 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치거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오히려 거대한 난관으로 작용했는지 수많은 예가 있지 않은가.


여든여덟 살의 노인이 30년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독주회를 열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삶과 죽음, 우주를 둘러싼 그 수많은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독선적으로 자신의 논리나 아집을 강요하는 대신 겸허하게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고 자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가르침을 주는 울림을 준다.


잘 늙어가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7-18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이 비트겐슈타인의 격언(˝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과 일맥상통합니다.

blanca 2017-07-19 06:45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말을 했군요. 비트겐슈타인은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철학도 삶도 흥미롭더라고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목차를 본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그것은 힘들게 묻어버린 기억들을 들추어 낸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을 논한다는 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감내하기 힘들다. 늙어가고 기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독립된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노부모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는 쉽게 꺼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달갑지 않은 주제다. 저자 아툴 가완디도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고 시작한다. 더 많은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생은 때로 과대평가되어 왔다. 그 자명한 유한성은 예술이나 우리가 소비하는 각종 영상들의 마디마다 활용되어야 할 일이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인 필립 라킨의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지 않은 거리는 없다."<앰뷸런스>, 이 단 하나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는 초입에서 머뭇거렸다.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쉽지 않은 나날들에 이러한 이야기까지 사실 듣고 의식하며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은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사실 중간 중간 계속 대면하고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어야 하는 데에서 더한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때로 후회가 들기도 했다. 정말 이런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그럴 거면 왜 태어나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야...결국 이런 거면서...

 

미국인 의사 아툴 가완디는 그 이국적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 출신의 이민 2세대다. 아버지, 어머니, 그 자신이 다 의사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은 현대 서구 의학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결론적으로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저지르고 있는지와 난립하는 요양 병원, 요양원이 노인들의 어떠한 핵심적인 바람을 놓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늙고 병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가족적 지지 안에서 경험하는 전통적인 동양 사회의 모습은 그의 할아버지대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나머지 가족들의 희생과 다툼 등을 들어 그게 최선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현대의 죽음이 어떻게 최신의료기술이라는 미명 아래 과도하게 관리, 제어 당하며 그것을 겪는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지에 대한 자신의 환자, 심지어 아툴 가완디의 아버지와의 그 힘들었던 마지막 시간들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불편하고 너무 두려워서 마냥 다 맡겨놓았던 그것들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이 이야기를 통해 대리경험할 수밖에 없다. 딸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는 그 일과들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두려워했던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의 이야기, 만삭에 폐암 말기임을 알고 아이를 조기 출산하고 아무 성과 없었던 암치료로 마지막까지 고통 당해야 했던 새라, 그 자신이 유능한 의사였지만 생의 말기에 아들을 붙잡고 울먹이며 내가 고통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아툴 가완디 자신의 아버지.  그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생의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이들은 비록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갔다. '한계'와 '끝'을 직시하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소중하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숱하게 그들에게서 그 자신을 빼앗아 왔다. 이제 그들은 치료받고 관리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객체가 되어버린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들이 원하고 편안해하는 곳보다 내 마음이 편할 곳으로 요양원을 생각한다는 요양원의 대안적인 기관인 어시스티드 리빙 설립자의 이야기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아툴 가완디가 힘들게 시작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의 이야기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가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죽음 앞에서의 어렵고 때로는 잔인하고 숭고한 대화들은 사실 우리를 예습 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가장 우려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묻고 어떻게 당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는지를 되물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나고 남는 것들은 사실 그러한 것들일지 모른다. 현대의료행위가 그 수많은 인공장치로 그 시간을 계속 지연시키며 끝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나 갈무리도 하지 못한채 아직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석별들을 당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대목은 차마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하니까.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가 저자를 앞에 놓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라고 했던 이야기가 겹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 내내 밤새 곁에서 책을 읽으며 그 처절한 소진 과정을 지킨다.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버지 유골의 일부를 수천 년 간 그들의 조상이 그래왔던 것처럼 갠지스 강에 뿌린다. 아들은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의 마침표를 성의 있게 찍는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다.

 

노력을 멈추고 '한계'를 인정해고 수용해야 하는 시기는 고통스럽게 온다. 태어나는 힘보다 더 끈질기게 엉겨붙어 그것은 죽음을 학습시킨다. 모두가 기피하는 바로 그 힘겨운 이야기를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분명 나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나라고 특별할 리 없으니 말이다. 덜 늙고 더 오래 살아도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마침내 나까지 저마다의 삶의 충실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제대로 완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도 역시 그것을 의식하는 일은 힘들다. 버티는 게 때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쉽다. 무언가를 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덜 가책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돌아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성에 저항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나아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나이가 들어 배워야 하는 것들은 어쩌면 다 이렇게 절절하고 엄혹한 것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5-11-2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 가완디의<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나오자마자 사놨는데 아직도 못 읽었어요. 왠지 두렵ㅜㅜ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열심히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겠지요.

blanca 2015-11-20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이 저자 책들이 참 좋더라고요. 이과적 지식과 문과적 글쓰기 소양을 고루 갖춘 작가인 듯해요. 사실 읽고 나면 자꾸 생각나고 우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2015-11-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8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강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월 3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감기로 뒤채다 견딜 수 없어 타이레놀을 찾아 일어났다. 약을 삼키니 이제 마저 읽고 싶어져 바닥에 퍼더 앉아 그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따라갔다. 이미 죽을 것임을 알고 일어나는 모든 현재진행형 일들이 사소하게도 느껴지고 엄혹하게도 느껴지고 너무 무기력하고 가련하게 보여 중간 중간 멈춰야 했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바야흐로 미국 단편의 거장으로 그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축소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미니멀리스트 그 자체로  가는 시점이었다. 모든 실현되지 않을 여행 계획들, 출판할 책들이 죽음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동반자 시인 테스 갤러거는 그의 작품을 위해 자원해서 삶을 헌납했던 메리앤의 헌신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그'를 완성시켰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간행하고 세상에 정련된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그 여자가 결국 그의 마침표에 동했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친 자료수집, 생존자들과의 면담, 저자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실함과 레이에 대한 애정, 경탄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 만큼이나 그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복원해 내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이의 틈새를 허룩하게 방치하며 검증된 낱낱의 사실들의 공허한 나열도 아니고 성급하게 그 막간에 개입하여 소위 소설을 써 나가는 오만도 아닌 가장 균형 있는 지점에서 이 모순적이고 매력적이고 천진한 작가의 삶을 관조하고 언어의 결들에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니 그 모든 성실한 취재의 틈마다 생략된 잊혀진 이야기들은 공백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따른다. 레이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느라 웨이트리스로 심지어 백과사전 세일즈까지 했던 전처 메리앤과 왜 결국 결혼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 지, 편집자 고든 리시의 오만에 왜 그다지도 미온적으로 반응했었는 지에 대한 의문들은 그러니 그 자체로 가지고 이 사내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도 괜찮다. 모든 상상력의 여지와 생략과 말줄임표 사이에 진실의 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캐롤 스클레니카는 잘 알고 있으니까.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아들처럼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아들에게 불성실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웃의 사내에게 주말마다 사냥에 아들을 데려가 자연 속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까지 했다.  이 시간은 오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레이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분명 무언가를 남겼다. 아버지는 소멸로 가는 그 여정에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육체 노동은 이제 글쓰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길 거구의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존재감이었다. 레이는 그 자신조차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의 한계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딸을 아파하면서도 그 딸이 재정적으로 너무 기대어 올 때는 부담스러워했고 자신과는 다르게 착실하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은연 중 내비치는 단편으로 아들을 아프게 한다.

 

레이의 작품들에는 거의 대부분 부부가 나온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에는 열다섯 살, 도넛상점에서 처음 시선을 마주친 아내 메리앤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제재소에서 일하고 돌아온 소년에게 함께 보바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한 소녀는 그가 글을 쓰는 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둘째를 가지고도 과수원에 일하러 나가 타자기를 사들고 온다. 자신의 학업이나 꿈은 항상 레이 앞에서 후순위였다. 마침내 남편이 성공하여 자신을 떠나 '자신은 여전히 빗 속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레이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다른 여자 옆에 있어도 레이는 그러한 아내와 공유한 시간과 꿈들, 눈물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시인 테스 갤러거가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 레이를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를 담당했다면, 메리엔은 레이를 작가로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자 레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작품화 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를 작용한 추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레이는 전처의 천사 같았던 그 모습을 제발 염두에 달라고 테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에서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그의 사후 작품에 관련된 모든 권리에서 대부분 소외되게 된 메리앤이었지만 이러한 레이의 진심만은 어떤 형태로든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부모가 되었던 소년, 소녀는 들이닥치는 삶의 과제들을 외롭게 해결해 나가야 했던 그들은 그러한 것들 대부분을 이야기화해 나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마침내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코올 중독 시절 쏟아낸 많은 작품들이 편집자 고든 리시의 과도한 개입에 의하여 더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는 지, 카버 특유의 색깔과 신선함을 잃게 되었는 지에 대한 의견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어디까지가 리시의 편집이자 창작인 지에 대한 경계도 그러하다. 이는 저자의 "출판이란 언제나 예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키기 마련인데 거기에 리시의 과도한 편집과 카버의 알코올 중독이 합쳐지면서 이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해졌다."는 표현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모호함'의 지대에 레이먼드 카버의 것들이 놓여 있기에 논쟁의 끝은 명료한 것이 되기 힘들다.

 

그 무엇보다 레이먼드 카버가 알코올 중독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그 자신의 표현 만큼이나 팬으로서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 있었던 그가 마지막 잔을 입술에 대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들이 하루 하루 차곡 쌓여가는 과정이 마침내 술에 대한 그의 승리로 귀결되는 묘사가 아름답다. 드디어 레이먼드 카버는 삶과 글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해도 괜찮게 되는 시점, 그 원숙한 지점에 도달하고 걸작 <대성당>을 낳는다.

 

서른다섯의 하루키는 이미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가와의 조우를 계기로 그를 초대하기 위하여 그 거구를 누일 침대를 일본에서 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서 밀려오는 그 잔인하고 때로 신비로운 우연 앞에서 좌절된다. 그것 또한 레이먼드 카버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통과하며 그 모든 것들을 잉크처럼 푹 담가 써 내려갔던 그의 모든 이야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여행."이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5-09-2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 해도 한사람의 삶이 끝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죠

알코올 의존증은 고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마시지 않다 다시 마시면 다시 돌아가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도록 하면 좋겠지만 그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을 고쳤다는 말을 보고 이런 말을 했군요 딸도 그랬다니... 이것도 유전되는 걸까요 그것보다는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를 보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닮는 사람도 있잖아요

레이먼드 카버 소설 예전에 한권 읽기는 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소설은 못 봤지만, 이건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9-20 22:34   좋아요 0 | URL
그만큼 어려우니 카버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이 술끊기에 성공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술잔을 입에 대고 그 날들이 쌓여 마침내 금주에 성공하는 장면이 그의 소설들 만큼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이었어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