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
말콤 글래드웰 지음, 김태훈 옮김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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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 날은 뒤늦은 한파가 몰아닥쳤다. 오후에 외출하기 전에 아이는 피곤해서 쉬고 싶다고 했다. 금요일 오전에 병원에 다녀온 후 아이는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주말에도 해열제로 버텼다. 계속 예감이 안 좋았다. 그냥 감기가 아닌 독감이나, 신종플루, 폐렴이 연상되었다. 수요일 외출부터가 잘못 끼어진 단추였다. 자아비판은 계속된다. 그 때 그렇게 안 했더라면, 맞아! 왠지 그랬어! 역시 엄마의 직감이 맞는거야. 내 생각대로라면 주말에 응급실에라도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때부터 치료했으면 이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거야. 갑자기 나의 직감력에 대한 신뢰는 고양되고 주변에 비난할 구실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사후판단 편향은 사태가 벌어진 후 뒤늦게 그 불가피성을 확신하는 경향을 말한다. 사후판단 편향 때문에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인식한다.
-p.266

 

말콤 글래드웰한테 들켰다. 나는 사후판단 편향에 빠져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있던 중에 이 책을 만났다.

 

사후판단 편향이 초래하는 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 과거의 문제를 바로잡는 데 집착하다 다른 미래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p.272

 

말콤 글래드웰이 <뉴요커>에 실었던 글 중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인간의 충동과 관련해 흥미롭고 색다른 이야기를 가려뽑았다(머리말 중 인용)는 이 책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태들이 '사후판단 편향'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언뜻 가벼운 칼럼집 정도로 치부되어 평가절하될 수도 있는 그의 글들에는 다른 모든 모호함을 봐 줄 수 있을 정도로 명료하고 진중한 경구들이 군데군데 튀어 나온다. 말콤 글래드웰이니까 가능한 얘기이다. 아마도 그건

 

아이디어를 찾는 비결은 모든 사람과 사물에는 그들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p.9

 

이러한 그의 자세 덕택일 것이다. 이것은 비단 아이디어의 원천 탐색에만 그칠 얘기가 아닐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사물에 그들 각자 나름의 서사가 깃들어 있다고 믿는 자세는 삶을 대하는 가장 사랑스러운 자세이기도 하다. 염색약 광고, 개 심리학자, 유방조영술과 항공사진 판독의 한계,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펀드 매니저의 몰락, 토니상 후보에도 올랐던 <프로즌>의 표절 논란, 거대 에너지 기업 '엔론'의 파산 등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단편 소설처럼 생생하게 재현된다. 저자는 이윽고 이 에피소드들을 색다른, 때로는 이단아적인 시선으로 해부한다. 머리말에서 저자가 했던 '독자를 설득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어 때로 모호한 결론으로 이어져 좀 맥 빠지게 하는 구석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의 재기와 기지는

여전히 빛난다.

 

지적 재산권에 의외로 열정적으로 매달리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돈을 관리하는 사람을 뽑는 데 더 많은 돈을 들이는 사회를 비판하며 채용을 개인과 회사가 맺는 낭만적인 관계로, 면접관이 듣고 싶어하는 말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헛된 약속이라고 중얼거리는 말콤 글래드웰, 그를 나는 지극히 편파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의 문제를 바로잡는 데 집착하다 미래를 망쳐버릴 지도 몰랐던 나를 구원해 주는 지점에 그가 서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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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과 생명에 관한 지적 탐구
다치바나 다카시.NHK스페셜 취재팀 지음, 이규원 옮김, 명승권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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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시험을 당하고 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병이 내 앞을 가로막고 들이밀며 묻는다. 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강하냐고.

-p.131 <방송인 치쿠시 데츠야 폐암 투병 중 메모>

 

 

병원 생활 이 주 동안의 풍경은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갈라 놓는 차광막을 쳤다. 가족이 아파서 치료를 받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들 앞에서 참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생각들이 밀려왔다. 입원하며 관리를 받아야 하는 만성질환으로 고통받는 그들은 환자복을 입고 닝겔 거치대를 밀며 병실 복도를 산책하는 것이 운동이자 유일한 외출이자 소통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호한 그 모습들 속에 미래의 가족, 나를 훔쳐보고 움찔했다. 산다는 것이 이다지도 간절하고 흉포한 것일까. 살고 싶다. 살리고 싶다. 다 같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됐다. 가장 단순해지는 것은 결국 생존 앞이다.

 

"암에 걸렸다, 암으로 투병 중이다, 암으로 죽었다, 암환자를 간호 중이다"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대인에게 암은 익숙하다. 나이들어 가는 것과 암과의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언론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암 정복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건만 과연 우리는 암의 완치를 향해 내딛고 있는 것인지 모호하고 의심스럽기만 하다. 분명 그 분은 암을 치료하기 위하여 힘든 수술을 하고 항암요법, 방사선치료를 받았건만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다 힘들게 가셨다. 대체 암은 무엇이고 왜 이다지도 인간을 괴롭히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을, 그러한 의심들을 명료하게 걸러내어 준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고 의심하고 회의한다.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프로그램에 관련된 제작 의도, 제작 과정 등에 대한 서술과 더불어 실제 자신의 방광암 투병기를 통하여 암의 본질에 대한 탐사를 시도한다. 실제 다큐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친절한 책이다.

 

이란 무엇인가

암은 세포의 병입니다. 정상 세포가 미쳐 버려 무한 증식 능력을 가진 암세포가 되는 병입니다. 정상 세포는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거듭하는 유한한 수명을 가진 세포인데, 암세포는 죽지 않습니다. 불사의 세포입니다.
-P.33

암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다. 인간 몸을 이루는 60조 개의 세포가 복제를 거듭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동안 생긴 오류에 의한 변이의 축적으로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불온한 일이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난 이 일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다. 저자도 전문가들도 암정복이 우리 세대에서 가능한 일인지에 회의한다.

 

의학은 아직 암 극복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암에 관하여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P.99

그렇다면 정상 세포의 손상까지 각오하며 받는 항암치료에 대한 의구심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애초 항암제는 독가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항암제가 효과를 발휘하는 암은 소수이며, 환자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연명 효과와 증상 완화에 불과하다는 절망적인 얘기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암 정복을 위해 경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암게놈프로젝트가 진행중이긴 하지만 아직 장님 코끼리 더듬기 정도라고 한다. "암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한 와인버거 교수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암을 낳는다. 암은 다세포 생물의 숙명'이라고 말한다."(인용) 이 책은 인간의 숙명에 가 닿는다. 우리는 그 간단 명료하지만 직시하고 싶지 않은 진실, "인간은 아파 죽는다"는 명제와 또 만나고 만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되기도 싫고 가족도 되고 싶지 않기에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한계를 정작 이 책에서는 아프도록 절감해야 한다. 생의 본질은 때로 무력함에 닿아 있다.

 

그렇다. 이제는 이러한 다큐를 만들었던 저자까지 중기 이후의 암에 걸려 투병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첩첩산중이다. 마음은 한없이 무겁지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하나하나 관찰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며 자신이 천착했던 문제의 핵심에 가 닿으려는 그 간절한 노력에 우리는 저릿한 마음을 누르고 다가가야 한다.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수술 과정까지 증언하는 모습은 건조한데 깊은 곳에서 공명한다.  수술대 위에 누워서까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그 정상적이지 않은 세포의 발작을 제어하려는 인간의 시도와 노력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얘기하는 대목. 그리고 그는 가차없이 인정하고 말한다. 암의 재발확률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 책은 절망과 체념에 관한 것일까. 살면서 우리는 몸 속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오류들마저 그러안고 잠식당하며 견뎌야 하는 걸까. 외부와 내부에 모두 속수무책으로 좌지우지당하면서도 남고야 마는 것이 있기는 하는 걸까.

 

암의 최대 무기는 오랜 진화의 역사상 가장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 자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에 맞서는 우리의 무기는 진화의 오랜 역사가 낳은 두뇌이며, 그 두뇌가 주는 우리의 불굴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이 제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그것을 기필코 극복해 내고야 마는 우리의 강한 의지, 이것이 암에 맞서는 인간의 최대 무기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시간은 걸리겠지만 암은 반드시 극복될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p.167

 

반드시 극복될 거라 믿는 그 의지가 왜 이리 서글프게 들리는 걸까. 영생을 갈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며 종착점에 가 닿게 하는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 그 의지가 제발 무력하게 패배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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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5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5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12-02-2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기만 하고 못 읽은 책이에요. 왠지 손에 들기가 두려워지더라는.

blanca 2012-02-25 23:20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저도 이 책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나서도 지금도 참 여러가지로 우울해지네요. 괜시리 걱정도 되고. 마지막 문장이 참 무섭거든요. 익명의 독자들이 암에 걸려 있을 확률을 경고하는...살면 살수록 왜이리 두려워지는 것들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꼭 한번 읽어 보세요. 비단 암뿐 아니라 사람이 병에 걸린다는 것에 많은 통찰을 주는 책이고 일단 재미도 있답니다.

마녀고양이 2012-02-27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이란, 우리가 진화학적으로 설계된 나이보다 훨씬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일종의 자연에 맞서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라 할 수 있겠죠. 제 주위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먼저 자궁암 유방암을 걸리는 것을 보면서, 너무 속이 상하고,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작년 내내 그랬죠. 회사 다니며 술 많이 먹는 친구들은 위암이 걸렸구요. 바로 얼마전 대학원 오티에서 만난 동기는, 곧 갑상선 암 수술 들어간답니다.

다들 초기라 하지만, 그것은 죽음의 직접적인 경험이라는 점에서... 많이들 힘들겁니다.
그러니 더욱 한순간 한순간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 나아지셨나요? 블랑카님, 봄이예요. 우리 화이팅해요.

blanca 2012-02-28 22:14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아이는 다 나았어요. 이제 빨리 봄이 와서 이런 생각들 다 잊고 단순하게 따뜻함, 꽃향기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제가 조금 더 담대해졌으면 좋겠어요. 너무 나약한 것 같아서요. 대학원 오티라니 듣기만 해도 향기롭습니다.^^

프레이야 2012-02-27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 가족이 암 수술을 한 걸 보게 되고 암으로 사망하는 것도 보게 되니
암이란 게 정말 남의 얘기가 아닌 것 같아요. 힘든 시간 견디고 이젠 나아져가는 모습을 보며
그저 보는 이와는 달리 그걸 몸소 겪고 이겨내는 사람들 스스로는 어떤 마음일까 감히 짐작도 안 되어요.
암과 친하게 같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인가 봅니다.
덜컥 겁이 나요. 스트레스 안 받고 살아야되는데 말에요.

blanca 2012-02-28 22:16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도요. 살면서 점점 두려워지는 것들이 많아지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 즐겁다, 느끼면서 곱게 늙어가고 싶어요. 이것도 큰 욕심일까요?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 분명 어떤 깊이가 생기는 것 같아요. 어깨 너머에서 그 분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마태우스 2012-05-0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거 의대생들한테 수업할 때 한 시간을 이 책에 할애했어요. 근데 학생들이 읽기엔 좀 난해한 느낌도 들었답니다.

blanca 2012-05-09 22:26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암치료'에 지나치게 회의적인 시각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고 그랬지만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어 유익했어요.
 

처음에는 콧물감기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외출도 했다. 주말부터 여덟 시간 간격으로 열이 사십 도까지 오르기 시작했다. 예감이 안 좋았다. 아이는 열이 오르자 처지기 시작했다.

 

그는 비에 젖은 어두운 거리를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속도를 늦췄다. 지금까지 그의 삶은 순탄하기만 했고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대학도, 결혼도, 경영학 고급과정 학위를 받기 위해 다시 다닌 일 년의 대학생활도, 투자회사에 하위 파트너로 들어가게 된 일도, 아빠가 된 것도, 그는 행복했고,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다. 그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형제 자매들은 다들 자리를 잡았으며 대학친구들은 모두 사회에 나가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레이먼드 카버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p.101

 

 

나의 삶은 하워드처럼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우여곡절도 있었고, 때로는 운이라고는 따르지 않는다고 비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쓰라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이는 폐렴에 걸렸다. 겁먹고 아픈 아이를 입원시키고 보조침대에 웅크려 세 밤을 자기까지 절망하지는 않았었다. 기관에 다니는 유아가 폐렴에 걸리고 입원해서 치료를 받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인생>을 갖고 와 베개로 쓰고 읽기도 하고 그랬다. 와닿는 구절들에는 줄도 그었다.

 

 

조지프 캠벨의 "모든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말은 슬픈 예언처럼 가슴을 찔렀다. 아이는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악화되었다. 입원하고 오일 째 되던 날 아이는 하루종일 열에 들떠 먹지도 놀지도 않고 자고 또 잤다. 너무 무서웠다. 나는 모든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경구인 줄 체감하는 중이었다. 눈이 펑펑 오기 시작했다. 눈발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닿아 선뜩하게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았다.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서 부부의 아이는 생일날 등굣길에 당한 교통 사고로 혼수 상태에 빠진다. 그 아이는 잘못되었었다. 펑펑 내리는 눈발 속에서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 속에 나 혼자 철저히 불행했다. 아이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아이는 휠체어조차 탈 힘이 없는지 눈을 보지 않으려 했다. 강아지처럼 눈 위를 뛰어 다니던 과거의 나의 아이와 이렇게 누워 있는 아이가 같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알라딘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확인하던 그 평범한 일상들이 백 년도 더 오랜 옛날 일같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단 한 마디가 필요했다. 그 한 마디를 해 줬던 사람은 담당의가 아니라 외국인 의사였다. 낫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고 더 심한 아이들도 있었다,고. 미묘한 조사도 억양의 간극도 뛰어 넘어 눈이 파란  그 사람의 위로 한 마디에 나는 견딜 수 있었다.

 

거의 열흘 만에 열이 떨어지고 놀기 시작하게 된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인간이란 이다지도 나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한 존재인가 싶었다. 생명이 있기에 가능한 모든 일들 앞에서 정작 그것은 잊혀지고 수많은 자잘한 것들에 끄달리고 절망하고 집착했던 하루 하루가 어리석게도 느껴지기도 하고 눈물나게 그립기도 했다. 근시가 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삶이 진저리가 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퇴원 후 집에 와서 레이먼드 카버의 차마 그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단어 하나 하나, 구절 하나 하나, 문장 하나 하나 이렇게도 절절하게 와닿을 수 있을까. 이미 이건 그냥 그런 소설이 아니었다. 카버는, 소설 속 아이를 끝내 잃고 만 부부는 이미 내 등 뒤에 가만히 다가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 나의 아이는 건강해졌지만 때로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삶이 숨긴 이 예리하고 잔인한  칼날을 엿보고 나니 많은 것들이 다르게 보인다.

 

또 다시 다 잊어버릴 것이다. 사소한 일들에 한숨을 쉬고 불평하고 질투를 하고 좌절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또 이러한 가르침의 순간이 와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게 생이고 그게 인간일까? 그럼 하나만 아니 둘만 기억하기로 하자. 하나는 평범한 일상은 눈부신 축복의 찰나라는 것, 둘은 누군가에게 주는 작은 위로가 그 사람을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것. 솔직히 위로보다는 불길한 복선처럼 나를 겁나게 했던 책이지만 그래도 정말 정말 추천하고 싶은 카버의 책도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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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오늘 문득 브랑카님이 생각났는데...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래도 딸래미 장하네요.
정말 다행입니다.^^

blanca 2012-02-21 23:1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살면서 참 다행이다, 싶은 일들도 많이 만나게 되네요.

... 2012-02-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를 읽고 <대성당>을 꺼내고야 말았어요.

blanca 2012-02-21 23:19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사실 저도 이렇게 <대성당>을 이따금씩 떠올리고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게 카버의 힘이겠지요?

oren 2012-02-2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께서 그동안 '정말 힘든 일'을 겪으셨군요. 아이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니 정말 다행이고, blanca님께서도 어서 빨리 소소한 일상의 평온과 행복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기를 빌께요.

저는 요즘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 책을 다 읽은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시간이 날 때마다 여전히 그 책을 붙잡고 지낸답니다. 왜냐하면 아예 그 책을 '필사를 하다시피' 베끼고 있거든요. 그 와중에 요즘 읽은 책이 조셉 캠벨의『신화의 힘』이었는데, 저는 그 책 속에서도 무수히 자주 '쇼펜하우어'를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blanca님의 이 글에서 마주친『신화와 인생』도 꼭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 * *
캠벨은 계속해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한다.
"쇼펜하우어는 마침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진실로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지난 일을 돌아보면 당시에는 엄청난 재난으로 보였던 일들이 결과적으로 내 인생과 경력의 실로 커다란 일면을 형성했음을 발견한다."
- 필립 로건, 리처드 로건, 『위대한 영감』 중에서

blanca 2012-02-21 23:21   좋아요 0 | URL
지나고 보니 참 고통스러웠지만 의미없는 경험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살면 살수록 인생은 참 다층적이고 다이나믹한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배우고 되짚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oren님이 인용해 주신 쇼펜하우어의 말이 참 와닿네요.

2012-02-21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2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02-21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분홍공주가 많이 아팠군요.ㅜㅜ
아이가 아플때의 부모 마음은 겪은 사람만이 알겠죠.
대신할 수 없는 그 속수무책이란....
아이도 엄마도 고생이 많으셨네요, 정말 건강이 최고로 소중하다는 걸 또 다시 느껴요.
아이도 엄마도 맛난 거 많이 먹으면서 기운 회복하시길...

blanca 2012-02-21 23:2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건강보다 더한 가치, 생명보다 더 절박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아주 뼈아프게 배운 시간들이었답니다. 병실에서 순오기님을 화면으로 뵈었어요. 회복되어가는 와중이어서 반갑게 열심히 볼 수 있었답니다.^^

굿바이 2012-02-21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괜찮은건가요?
저는 <대성당>이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blanca님의 글을 읽으니 만나야 할 순간이 아니어서 그랬구나 싶네요.
평범한 일상이 축복이라는 것을 저도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리석어요.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여튼 아이도 blanca님도 무조건 건강하세요!!!!! ^---^

blanca 2012-02-21 23:26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예, 이제는 아이가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네요^^ 저도 당시에는 카버에게 전적으로 몰입할 수 없었어요. 이렇게 다시 읽으니 특히 이 단편이 아주 다르게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감사합니다.^^

cyrus 2012-02-21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아이가 건강에 회복되어서 다행이네요.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블랑카님도 건강에 유의하세요 ^^
알라디너분들 사이에서는 카버의 <대성당>을 소개하는 글이 많이 있던데 저도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blanca 2012-02-21 23:27   좋아요 0 | URL
cyrus님 안 그래도 이제 겁이 덜컥 나서 건강 염려증이라도 생길 것 같아요. 아,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읽어 보세요. 단편에 있어서 아주 월등한 부분이 있는 작가랍니다. cyrus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기대가 됩니다.

2012-02-22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2-02-2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급하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라는 책으로 읽었거든요.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 또한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이 책 속에 단편 중 하나가, 대성당이 있었는데요. 노란 표지의 대성당이 나왔을 때도 다른 책인 줄 알고, 덥썩 샀는데, 같은 내용이려나요~ 아직 읽지 않아서 아마 대성당을 표제작으로 해서 개정된 같은 책이지 싶어요.
제가 깜짝 놀란 이유는, 저 또한 아이가 아플 때, 아이와 관련해서 불길한 예감이 드는 상황에 처할 때마다 레이먼드 카버의 이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단편이 문득 떠오르곤 하거든요. 평범한 일상과 그렇지 않은 일상 사이의 미묘한 간극이랄까,,,
제가 느끼는 블랑카 님의 글 속에 임팩트 있는 통찰은,,, "또 다시 다 잊어버릴 것이다." 인 것 같습니다. ㅎㅎ 저릿했습니다.

blanca 2012-02-23 18:34   좋아요 0 | URL
icaru님, 맞아요. 이 단편이 좀 불길하잖아요. 병원에 있는 동안 자꾸 떠오르는데 참 기분이 그렇더라고요. 퇴원하고 나서 다시 읽어 봤는데 문장 하나 하나가 어찌나 절절하게 와 닿던지요. 카버는 분명 아이를 입원시켜 봤을 거예요^^;; 벌써 잊어버리고 아이랑 싸우고 있답니다.^^

2012-02-25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컷 저항하고 있었는데, 결국 <신화와 인생>을 사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슬픔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한다,니요. 정말 어쩌려고 조셉 켐벨을 이토록 멋진 분인지!

blanca 2012-02-25 23:22   좋아요 0 | URL
사실 병원에 있을 때는 이 말이 참 과하다고 생각했어요. 지나고 나니 무슨 말인지 어떤 의도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됩니다. 거기에 캠벨의 위력이 있는 것인가 봐요.
 

어렸을 때는 아무리 좋아하는 책이라도 인상적이거나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나와도 줄을 긋지 않았다. 접지도 않았다. 그래서 신혼 때 이사를 하면서 고스란히 기증하고 팔고 하며 책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갈피로 연필을 사용하며 줄을 좌악좍 그어대기 시작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아름다운 묘사, 기억해 두고 싶은 경구, 잘 이해가 안 가는 어구, 공감 백배인 인물의 고백.

 

줄을 긋기 시작하면 그 책은 마음에 안 들어도 안고 가야 한다. 팔 수도 기증할 수도 없고 빌려주기도 뭣하다. 줄 그은 문장은 들키고 싶지 않은 나의 내밀한 고백 같아서다. 그래서 법정 스님의 책을 친구에게 빌려 주면서 줄 그은 문장들이 괜히 걸렸다. 지나고 보면 왜 줄을 그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을 때도 많다. 뜬금없는 대목에 별표까지 되어 있는 경우는 정말 낯선 사람이 이 책을 읽고 건네준 것 같다. 시간의 지형은 모든 것을 이해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한다. 과거의 나와 지금와 나와 미래의 나는 타인만큼 낯설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은 줄긋기를 참는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곤혹스럽다. 색깔 간지, 북다트, 심지어 영수증도 줄긋기를 대신한다. 중반쯤 와서 이 책은 반드시 소장할 것이고 너무 표시해 두고 싶은 곳이 많다는 깨달음이 오면 앞서 번거롭게 붙여 두었던 간지들을 처절하게 추억하며 잡아 빼고 줄을 긋기 시작한다. 간지가 문어발처럼 붙어있던 책을 발견한 친구는 기겁하는 표정으로 "이게, 이게 참..."하며 말을 잊지 못했다. 간지가 해도 해도 너무 많이 붙어 있었다. 돌아서서는 누군가에게 참 이상한 독서벽이 있다고 뒷담화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빌린 책도 줄을 그을 수 없다. 이 책.

 

 

아무 기대 없이 눈에 띄어 빌려 온 이 책은 마치 나를 앞에 앉혀 놓고 내가 아이를 키우는 방식의 허점, 약점, 맹점을 예리하게 파헤쳐서 보여 주고 질타하고 조언하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제목은 진부한데 내용은 진부하지 않았다. 보상과 처벌, 특히 훈육 과정에서의 타임 아웃 같은 격리가 동물을 이용한 행동주의 실험에서 온 것이라는 데에 무척 놀랐다. 신사적이고 왠지 좀 덜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훈육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애정 철회의 훈육 방식은 아이에게 무척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칭찬 스티커 같은 보상 방식도 인간 관계를 교환 논리로 치환해서 생각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애들을 지나치게 자유 방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유 방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고 지적한 것에도 공감이 갔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한 통찰 있는 시선이 놀라웠다. 다만 대안이나 해결책에 대한 얘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해서 아쉬웠다. 형광연두 간지를 두둑하게 붙였다가 옮겨 적지도 못하고 반납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우 한 권 사서 가지고 있기도 하는데 그냥 '이런 측면에서 생각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을 안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제목이나 표지나 사실 <금각사>, <가면의 고백> 등으로 노벨문학상에 거론되기도 했던 미시마 유키오와는 잘 매치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미시마 유키오의 작품은 한 편도 읽어보지 못해서 대체 어떤 작가인가 알아나 보자는 심정으로 책갈피도 없이 빈 손으로(연필 없이) 드러누워 읽기도 하고 티비를 보며 읽기도 하고 불성실하게 시작했다.

 

줄거리와 구성의 완성도는 사실 작가의 문명에 미치지 못한다. 하이틴 로맨스 아니야? 하며 좀 의아해하며. 그런데 역시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흐릿하고 모호한 것들, 특히 언어로 결코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하는 재주가 놀라웠다.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떠돌아 다니는 것들을 하나 하나 언어로 채집해 꾸욱 꾸욱 눌러 쓴 것만 같았다.

 

 한 고개를 넘으면 연애도 역시 하나의 집을 발견하게 된다. 감정의 집이 마련되는 것이다. 만나지 않는 동안에 있었던 서로의 동정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밀회 때마다 하나의 투명한, 눈에 보이지 앟는 집에서 살게 된다.

-p.86

 

소재는 아침 드라마 같은 불륜인데 미시마 유키오는 거기에서 인간의 더없이 나약한 속성을 제대로 묘파해 낸다. 이 작가는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낼 것만 같다. 다른 작품들도 기회가 되면 읽어 보고 싶다.

 

그리고 오늘 손 안에 들어온 책. 간지를 꺼낼 것인가, 연필을 들 것인가. 기대 중.

 

 

 

 

 

 

 

 

 

 

 

 

 

 

김영하는 서사력이 소위 글발을 앞지르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한 것 같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나쓰메 소세키는 재미있을 턱이 없는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흡인력 있게 하는 재주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 같아 중독성이 있다. 가지려면 줄을 그을 것이고 떠나 보내려면 간지를 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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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29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 비틀거리는 여인은 품절이군요.ㅜ
제가 예전에 태그도 간지처럼 해 놓은 책인데 한줄도 몰랐습니다.
어떻게 구하셨나요?
김영하는 나중에 읽는다고 해도 유키오의 책과 소세키의 책은 정말 읽고 싶은데요?
제목이나 글이나 참 탁월하게 잘 쓰셨슴다.^^

blanca 2012-01-29 21:20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저는 품절인 줄도 몰랐어요. 중고가 있어 구입했는데 새 책이더라고요. 스텔라님 읽고 싶으시다면 제가 보내드릴까요? 주소 남겨 주시면 보내드릴게요. 참고로 간지 다 빼고요^^

2012-01-30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30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양철나무꾼 2012-01-29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때 책을 아주 깨끗하게 봤었어요.
도그지어나 줄은 고사하고 책등에 줄이 가는 것도 싫어했었어요.
포스트잇을 줄간격에 맞게 잘라 붙여서 표시를 했었어요.
요즘은 많이 나아졌어요, 스스로 대견해 해요~^^

저도 금각사의 그 '미시마 유키오'라고 하니까 혹 하는데, 품절이군요~ㅠ.ㅠ
저라면 김영하는 문어간지, 소세키는 연필을 들겠습니다요~^^


blanca 2012-01-29 21:22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금각사를 아직 못 읽어 봤어요.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라고 말씀하시니 꼬옥 읽어봐야겠습니다. 책등에 줄 안 가게 읽으려면 완전히 펴면 안 되잖아요. 저도 중고로 팔 책은 그렇게 읽으려고 하는데 그게 참 힘들더라고요. 어느새 줄이 좌악. 저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마음이 힘든데 연필로 줄을 못 긋겠어요. 이것도 참 이상한 심리인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2-01-29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미시마 유키오! 기어이 저 도도하고 차가운 남자를 집어드셨군요! 단편 `우국'에서 나란히 할복자살을 하는 일본인 부부의 모습을 그토록 아름답게 말하던 모습에 살짝 전율이 일었습니다만, 그 아름다움이 제국주의의 일환이라 이걸 사랑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인 기억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그 근육질의 몸매에도 불구하고(몸매가 글쓰는 데 무슨 상관이랴.....싶지만....전...뭐...이런 사람이라서...) 모든 문체는 미치도록 탐미적이었어요. 드디어 만나셨다니. 이 기이한 독서(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인 아닌 사람이 읽으면 누가 읽어도 일단 기이해요)에 박수를.

덧-부모란, 매일 결심하는 사람들.

blanca 2012-01-29 21:27   좋아요 0 | URL
일본인 작가를 좋아하다 보면 꼭 어떤 딜레마 같은 것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정치관이나 가치관에서요. 당시 상류층 출신들이 많았고 대부분 정말 시급을 요하는 문제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미시마 유키오가 근육질이에요?^^;; 정말 문장이 놀랍더라고요. 천재 같아요. 쥬드님이 말씀하신 '우국'이라는 아름다운 단편을 읽어봐야겠어요.

마녀고양이 2012-01-3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의 14줄은, 내 이야기를 블랑카님이 대신 써준거 같아서.. 흐흐흐.. 하면서 읽었습니다.
저는 지금 <심리학, 열일곱살을 부탁해>가 그 모양인데, 간지를 하두 많이 붙여서 줄 치는 것도 힘듭니다.
리뷰는................ 끄응.

학습 심리학은 거의 행동주의에서 나왔다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공감 및 이해은 인본주의 심리학(칼 로저스)처럼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훈육 단계랄까 행동으로 내면화시키는 단계는 행동주의 및 인지 심리학 모형이 많이 들어가게 되더라구요... 하나의 논리만 적용할게 아니고, 많은 논리들을 두루 적용해야 할거 같습니다. 에너지 부족으로, 길게 말할 힘이 없어서, 담에 얼굴 보여주면, 둘이 토론해요. 홍홍.

blanca 2012-01-30 21:2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어느 하나에 치중하지 않고 다면적으로 복합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할 것 같아요. 간지 많이 붙이면 너무 징그럽잖아요^^;;

2012-02-01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2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02-04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으며 간지 붙이는 거 좋은데요!
나는 게을러서 그런 거 못하고 그냥 동그라미 치거나 밑줄 좍좍 그어요.ㅜㅜ
다트도 끼워봤는데 불편하고 나중에 빼는 것도 귀찮고, 밑줄 쳐놔야 필요한 곳 찾기도 좋고...^^

blanca 2012-02-20 21:4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답글이 너무 늦었지요? EBS에서 순오기님 방송도 잘 봤어요. 저도 이제는 아끼지 않고 그냥 긋고 표시하기로 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은 너무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가 열여덟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과 남자, 사랑.

 

 

 

진부하지 않았고 통속적이지 않았고 대신 달콤하고 선뜩했다.  친정 엄마와 혼수품을 준비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에피 브리스트의 성정, 그리고 운명까지도 암시해 버리는 그 예리하고 섬세한 문체에 일단 놀랐고

 

그녀는 가장 우아한 것만 마음에 들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없으면 둘째로 좋은 것은 아예 사려고도 하지 않았다. 둘째는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피 브리스트> p.31

 

그녀의 안온하고 때로는 지루한 결혼생활에 뛰어들어온 남자는 의외로 근사하지 않았고 바람둥이였고 둘은 하이네의 시를 가지고 유희를 한다. 바닷속에 가라 앉은 전설의 도시의 환영을 보다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려 했던 시인, 다가오는 적군에게서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하느님에게 간청한 과부가 하느님의 담으로 받은 하얀 눈. 이 시들은 이들의 사랑의 가벼움을 덧없음을 은유하고 예언하는 것 같다. 에피는 물론 파멸한다. 사랑으로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조차 용인받지 못하는 강고한 사회적 시선 앞에서. 이 소설은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 제도의 허위를, 욕망을 얘기하고 싶어했던 노작가의 소망이자 희망이다. 로맨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썰매 안에서 시작되는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남편이 에피의 배신을 알아차리고 결투를 하는 것도 에피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다수의 시선들, 그 시선들을 엮어내는 규칙, 관습들. 그 안에서 과연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에피 브리스트>는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회자된다. 상류층 여성의 외도, 그리고 파멸. 이런 지극히 통속적이고 교조적이고 싶어하는 스토리를 공유하지만 이 셋은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작가들은 나란히 세 여인의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욕망을 들여다 보지만 그녀들을 단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녀들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던 애초에 교환 조건으로 성립된 계약인 결혼 제도의 허위와 그 틈새에서 비어져 나오고 마는 본래의 욕망, 그 욕망이 어그러진 형태로 표출될 때 인간이 맞닥뜨리는 비극에 다가간다.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안나와 음독 자살을 하는 보봐리 부인과 병에 걸려 죽는 에피는 실패한 사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벌써 보듬어 주어야 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뒤늦게 추억하고 그것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착각하고 대체물을 향해 욕망을 투사하고 남는 것은 자멸감이다.

 

에피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인간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얘기한다. 다수의 시선, 다수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우리가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일들도 사회에서 주입당한 가치 기준하에서 비롯되는 일인 경우가 많다. 그것이 아니었다,고 깨닫는 것. 거기에는 항상 일말의 슬픔과 비극과 고통이 따른다. 거기에서 정지하고 마는 것이 이 여인들의 이야기의 한계이기도 하고 다분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극복하지도 체념하지도 않고 눈감아 버리는 것. 세 작품은 약속이나 한 듯 결말도 닮아 있다. 읽는 즐거움은 <에피 브리스트>가 제일 크고 감동은 <안나 카레니나>가 제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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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1-26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도 처음 들어본 책이에요. 저 역시도 읽게 된다면 [안나 카레니나]를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2-01-26 22:08   좋아요 0 | URL
저도 정말 우연히 읽게 되었어요. 예상 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가며 읽었답니다. <안나 카레니나>의 임팩트는 정말.... 말 줄임표 이상으로 표현할 도리가 없네요. 약간의 인내 뒤에 무한 감동이 있는 소설인 것 같아요. <에피 브리스트>가 아주 무게감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노년의 남자 작가가 이렇게 섬세하고 예리하게 여성의 심리를 흥미롭게 파헤친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stella.K 2012-01-2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 쓰신, "여든이 다 된 할아버지가 열여덟 소녀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과 남자, 사랑."
확 끌리네요. 어떻게 썼을까 궁금한데요?^^


blanca 2012-01-26 22:09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다 읽고 나서 알았어요. 이 작가가 육십이 되어 소설을 처음 쓰고 이 작품은 여든 가까이에 완성했다는 사실을요. 전혀 그렇게 안 느껴졌거든요.

stella.K 2012-01-27 12:17   좋아요 0 | URL
와우, 정말요?
이건 저에겐 완전 복음이군요. 굿뉴스!
내 나이도 늦진 않은 거네요.ㅋㅋ

moonnight 2012-01-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귀가 솔깃! 올해는 제발 책 좀 작작 사고 있는 책부터 읽자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그럴 수는 없겠네요. (체념;)

blanca 2012-01-26 22:11   좋아요 0 | URL
저도 책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찌르고 있답니다. ㅋㅋ 돈과 시간, 수용공간, 시력만 허락한다면 책의 바다에서 헤엄치고파요^^;;;

비로그인 2012-01-26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볼래요. 보관함에 담았어요 :)

blanca 2012-01-26 22:11   좋아요 0 | URL
옙, 수다쟁이님도 재미있게 읽으실 거예요. 책장이 휘리릭 넘어간답니다.

프레이야 2012-01-26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 들어본 이름, 당장 담아갑니다.^^
블랑카님의 리뷰는 지름신이에요.

blanca 2012-01-26 22:12   좋아요 0 | URL
^^ 이런 지름신은 괜찮지요?

... 2012-01-2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피 브리스트, 마담 보바리, 안나 카레니나가 한 세트라고들 해서 이 책을 사두고 아직 안 읽었네요. 이 책 살 무렵 블랑카님의 <여명> 리뷰를 보고 그 책과 같이 샀는데 ^^ 재미있는 책이었군요. 이 책에 대한 알라딘 리뷰들도 인상적이었어요.

blanca 2012-01-27 10:2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아직 안 읽어 보셨다면 이번 기회에 읽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저도 이 책 리뷰들 읽고 구입을 결심했지요.

비로그인 2012-01-26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 브리스트> 리뷰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ㅎㅎ 지금은 창고에 넣어두었지만 예전에 쓴 <안나 카레니나> 리뷰에서 함께 거론한 적이 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 공연히 반갑네요. 세 작품 중에서 가장 덜 알려진데다 주인공의 파격성에서도 가장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래도 의미 있는 작품이란 생각에 짠했었는데 블랑카님이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blanca 2012-01-27 10:25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저도 표지가 참 이쁘다, 정도였지 읽을 생각 못하다 우연히 읽게 되었답니다. 이런 책을 읽기 시작하니 다 이런 부류로 또 관심이 쏠려서 미시마 유키오의 <비틀거리는 여인>이 지금 옆에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