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값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는 한국에 아직 발간되지 않은 원서를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읽는 것이다. 일단 도착까지 오래 걸리고 읽는 속도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영어 공부까지 덤으로 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모르는 단어를 모조리 찾겠다,는 일념으로 덤벼야 한다. 번역본이 없으니 모르는 문장은 구글링까지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진되다 보니 차마 다른 책을 주문할 엄두가 안 난다. 책값은 굳고 영어 실력은 는다. 

















소설읽기의 재미를 잃은 사람이라면 <올리브 키터리지>를 권한다. 소설은 난해하거나 지루하면 아무리 이야기가 훌륭해도 소설 특유의 힘과 매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일단 재미있다. 공감할 수 있다. 외국 작가의 작품임에도 동떨어졌다거나 문화적으로 거리감을 느낄 새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인간 보편의 정서를 묘사하는데 이골이 난 작가다. 누구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 들 수 있는 생각, 오만, 편견, 질투, 비교, 욕망을 그녀 만큼 직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이 시대에 별로 많지 않은 것같다. 이를테면 올리브의 남편 헨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륜의 감정도 그녀의 펜끝에서는 도저히 비난하거나 경멸할 수 없고 오히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픈 공감의 감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놓친 것들을 그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독자를 단숨에 아군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Olive, Again]이라는 제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전편의 문을 열었던 헨리가 죽고 홀로 된 올리브는 노년에 재혼한다. 거기에서 또 거의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려지는 연작 소설은  전편처럼 올리브를  중심으로 메인 주의 크로스비라는 작은 해안가의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엮어진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여전히 괄괄하고 화통하고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각자의 삶의 난제와 고민과 절망과 그것을 딛고 살아나가는 그 생의 힘에 대한 눈부신 경의가 있다. 이야기는 전편보다 더욱 깊어지고 조금 더 어두워지고 확장된다. 죽음과 상실과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모두 두려워하지만 차마 터놓고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 매력적인 노부인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과도 겹친다. 노인요양시설에 가는 것에 대한 공포, 나이듦이 가져오는 자립의 한계, 빈부격차에 따른 소통의 단절, 불륜이 결혼생활에 가져오는 상흔 등 각각의 단편은 근사하게 집약된 삶의 고충의 형상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과 사람들에 가지는 식지 않는 애정의 열정은 올리브 키터리지 특유의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한다. 


다 읽기도 전에 작가의 맺음말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어린 시절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에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졌다. 환갑이 훌쩍 넘어도 내 곁에 남아 이런 감사를 받을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 인생은 얼마나 값진 것이 될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잠시 쓸쓸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친구는 없는 것 같다.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 끝에 있다. 여러 모로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녀를 만들어 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부러워지는 연말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12-10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가 다시 돌아 왔군요...

속히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lanca 2019-12-10 15:57   좋아요 0 | URL
아마 곧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특유의 너스레를 잘 살릴 수 있는 번역을 기대해 봅니다.

stella.K 2019-12-1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 소설 읽는 감이 좀 떨어졌나 봐요.
오래 전 누가 선물해 줘서 받아두고 두 번 정도 읽기를 시도하다가
매번 손에서 멀어졌어요. 좋긴한데 넘 잔잔한 느낌이라.
다시 끌어다 놔야겠어요.ㅠ

blanca 2019-12-10 15:59   좋아요 1 | URL
아, 스텔라님 말씀이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여러 작가 단편 모음집 읽을 때 특히 그래요. 주인공들 이름도 계속 잊어버리고 몰입이 안 되면 이야기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장편보다 읽는 데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이 책은 그나마 연작이라 서로 서로 연결되는 인물들 스토리가 많아 몰입이 아주 어렵진 않았어요.

수연 2019-12-10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 글 읽으니 읽어보고싶은 마음이 확 들어요!

blanca 2019-12-10 15:59   좋아요 0 | URL
그래요? ^^ 기분이 좋네요.

단발머리 2019-12-10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 읽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어공부법 + 책값 절약하는 법이 없을 듯 합니다.
얼른 <Olive, Again>을 읽고 싶으나, 사실 <My name is Lucy Barton>도 몇개월째 ‘읽고 있어요‘ 중인지라,
침만 삼키고 있네요. 꿀꺽!

blanca 2019-12-10 16:00   좋아요 0 | URL
ㅋㅋ 다 읽고서 영어로 리뷰까지 써야겠다고 결심하면 한 몇 달은 새 책 구입 않고도 견딜만해진답니다. 영어 실력은 덤으로 따라오지요. 저 한동안 책을 너무 사대서 반성하는 마음에서 시도한 거랍니다. ^^;;;

psyche 2019-12-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워라! 도서관에서 대기 걸어넣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차례가 되서 빌려왔어요. 무척 기다린 책인데 막상 책을 빌려오고 나서 거의 손을 못대고 있네요. 대기자가 많아 연장도 안될테니 빨리 읽어야할텐데...

blanca 2019-12-11 09:26   좋아요 0 | URL
오, 프쉬케님, 어서 시작하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감동적이에요. 저 이제 한 챕터 남았는데 아까워서 못 읽을 정도랍니다. 자,자, 어서요.
 

도저히 오지도 가지도 않을 것 같았던 2019년도 이제 한 달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세기가 온다. 여전히 읽고 썼다. 기억은 희미하고 기록은 남는다,는 이야기가 맞다. 그래서 또 남긴다.



리처드 플래너건이 하는 전쟁 포로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의 증언과 죽음과 맞물려 있다고 한다.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고 과거형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인간의 의지를 압도할 때 그럼에도 남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여운이 길다. 감히 앉아서 읽기에 황송했던 책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그가 얘기하는 한국인 경비병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분명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깨달음이 전해져 왔다.









연령과 인습과 상식을 뛰어 넘는 사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어떤 개인적 편견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작가의 성취일 것이다. 구태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수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저력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책은 죽지 않았고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 억지로 쥐어짜지 않고 나오는 삶들의 형상화에 절로 경탄하게 되는 이야기들.










자신이 속물이라고 어렵게 고백하는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그것을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감히 그 화자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작가의 자전적인 성장기는 소년이 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짙은 호소력을 지닌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소년의 삶은 그 틈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조언은 깊은 울림을 가진다. 전체를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과연 어떻게 그 전장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충고는 공허하지 않고 가식적이지 않다. 그 자신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 연마한 것들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제목이 가지는 것 이상의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 힘들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뻔한 책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벼운 책도 아니다. 요리의 노하우도 걷기의 노하우도 심지어 삶의 노하우도 있다. 하정우는 분명 뭔가를 겪었고 알고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이자 작가라고 생각한다. 빌려 읽지 말고 사서 읽으시기를...












너무 우울하거나 힘들 때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다. 모든 허식과 망상과 환상이 일순간에 타격되고 적나라한 인간의 두려움과 삶의 허약함이 일순간 드러나면 한없이 공허해지고 두려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이 가져오는 그 폭력성과 무자비한 무의미를 직시한다는 것은 의식이 있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비극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대면하며 토로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가 끄달리던 숱한 그 사소한 번뇌, 집착이 얼마나 가볍고 추악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심연의 끝에 가닿게 만드는 책.









그리고 2020년의 읽기를 기다리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12-04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처드 플래니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포로가 아니라 포로 감시원
이지 싶습니다.

blanca 2019-12-04 14:02   좋아요 0 | URL
헉, 경비병입니다. 감사해요. 수정하겠습니다.
 

사십 대에는 사십 대의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이십 대에는 이십 대만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 어떤 연령대를 통과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안에 있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육십 대의, 이만 여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병리학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와 깊이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리처드 셰퍼드는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일을 하는 영국의 법의학자다. 아홉 살에 생모를 잃고 어머니의 역할까지 함께 그러안은 아버지의 양육 아래 그가 법의병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친구가 학교에 갖고 온 [심슨 법의학]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된 알렉산더 포프의 <비평론>의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그의 안치소에서, 법정에서 하나의 금언이 된다. 여러 죽음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비인간성을 대면하게 되는 에피소드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결국 진실의 힘과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할 용기다. 죽음이 만연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페르소나를 다시 재창조해내어야 하는 그 간극의 어려움에 대한 표현도 진솔하다. 셰퍼드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한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런 생활에 어떻게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삶 자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가 이야기하는 그 숱한 죽음들에서 진실의 체를 거르는 일과 더불어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학습된다. 비단 죽음 뿐 아니라 그것과 교차되는 그의 생애의 내레이션의 교훈 또한 여운이 길다. 종반부에 그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통과하는 여정의 그 생생한 고통은 읽는 이에게도 전해져 올 정도로 절절하다. 그가 속한 학계와 사회의 변화와 그 자신의 노화, 삶의 경로의 전환,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간 죽음들의 진실들의 귀환은 긴밀하게 서로 얽혀 이야기의 현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그는 이 책이 하나의 치유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투병을 고백하면서 그가 객관화했던 죽음들은 공포나 환멸이 아니라 공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결국에는 종국의 안식으로 수렴한다. 때로 섬뜩하고 끔찍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화자의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그 비극성으로 마음을 산란하게 했지만 차갑지만 고요한 여운을 남긴다. 이 책 안에서 진실의 정의가 필요했던 미제의 살인 사건들은 결국 정의의 축으로 이동하여 안도를 준다. 그를 괴롭혔던 억울한 혐의들도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결국 그렇게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남겼던 그 숱한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삶과 죽음은 결국 만난다는 하나의 비장한 은유처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27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와 비슷한가, 싶어지네요. 저도 읽어볼게요.

blanca 2019-11-28 11:4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는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순간순간 섬뜩섬뜩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추리 단편 같아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13년에 시작해서

1914년에 마침.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E.M 포스터 <모리스>

















'더 행복한 날들에 바친다.' 지금까지 숱한 제사를 봤지만 포스터의 이 헌정이 최고인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날들에 바치는 <모리스>를 거의 단숨에 읽었다. 흡인력이 대단한 소설이다. 등장 인물들이 거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떤 선택, 그 선택의 반향, 열린 결말은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일에 대한 어떤 판단 자체를 유보시킨다. 그것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초래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은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은 실패했다. 사랑은 이따금 기쁨을 가져다주는 감정일 뿐이었다.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p.330


모리스 쪽의 이야기다. 모리스는 그렇게 느낀다.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첫사랑 클라이브는 모리스를 떠난다. 클라이브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페르소나와 타협한다. 심지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모리스도 그런 식으로 살아주기를, 그래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어떤 꺼림칙한 잔여를 깨끗이 치워주기를 바란다. 모리스를 일깨운 쪽은 그인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오히려 모리스다. 모리스의 좌절과 모리스의 두려움은 지극히 사실적이다. 어리석고 무모하고 쩨쩨하다. 타협과 안주가 없으니 언제나 위태위태하다. 우리의 삶이 클라이브와 더 가깝다고 해서 그를 응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포스터는 영리하게 포착한다. 모리스에게서 우리는 우리의 잃어버렸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본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이미 모리스는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뒤에 남은 흔적이라곤 조그맣게 쌓인 달맞이꽃의 꽃잎뿐이었다. 꽃잎들은 꺼져가는 모닥불처럼 땅 위에서 애처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클라이브는 죽을 때까지도 모리스가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알지 못했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도 확신하지 못했다. 블루 룸은 희미한 빛을 발하고, 고사리 풀숲은 물결쳤다. 영원한 케임브리지 어딘가에서 친구는 온몸에 햇살을 입고 그에게 손짓하며 5월 학기의 소리와 향기를 떨치기 시작했다. 

-p.348

포스터의 묘사는 눈부시다. 향기와 시각은 시간의 결을 넘나든다. 꺼져가는 꽃잎과 지는 청춘의 모습은 겹친다. 여전히 남는 것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는지에 대한 몫은 읽는 이들의 것으로 남겨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19-11-14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읽어보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는데 블랑카님 벌써 읽으셨군요! 블랑카님의 리뷰를 읽으니 저도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사랑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까요?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이 생각나네요. 그 책에서도 서로 사랑했던 남자 둘이 헤어져서 한 쪽은 나중에 커밍아웃하는 작가가 되지만 한쪽은 여자랑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거든요. 그리고 내내, 그 작가의 행보를 좇습니다.

blanca 2019-11-15 11:30   좋아요 0 | URL
포스터 자신의 생각도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약력을 보니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배신 당하고 이것에 반복이었더라고요. 다락방님 예랑 비슷하게 사랑했던 남자들 대부분이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뤄요.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심지어 그 사이에 낳은 애의 대부까지 서주고...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포스터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삶 자체가 아주 드라마틱하더라고요. 그냥 몇 살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만 읽어도 가슴이 시려오는 그런 삶을 살았더라고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가 길어진다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 분량 안에 집적해야 한다는 채근이 더 농밀하고 말해져야 할 것을 다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앤드루 포터는 그것을 영리하게 포착한 작가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화자가 그러했는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어쩌면 아주 뻔한 불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젊은 여학생과 노교수의 로맨스는 숱하게 반복되어 온 서사다. 성차, 연령차, 심지어 위계의 헤게모니까지 개입하는 이 설정은 전형적이지만 우리의 복잡하고 굴곡어린 삶의 층위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많이 살아버린 사람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망을 앞둔 이의 만남은 시간이 가로지르는 삶의 어떤 단면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기 좋은 장치다. 앤드루 포터는 적절하게 힘을 주고 빼야 하는 지점을 의식하며 되도록 뒤로 물러나 로버트와 '내'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그 은밀한 교감을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만든다. 일주일에 한번 결혼할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나이 든 교수와 절대 넘어가지 않는 그 팽팽한 선과 통념의 경계 안에서 그 누구도 이 둘을 결코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공감을 자아낸 것은 작가의 저력일 것이다. 


소년의 시선으로 붕괴되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는 <코요테>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픈 아름다움이 있다. '회상'은 앤드루 포터 이야기의 근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사실 그건 이랬던 거야. 라고 마치 약올리는 듯한 반전이 곳곳에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현재 시점에서의 과거의 복기는 언제나 허술하고 맹탕이고 왜곡되어 있어 진실의 맹점은 언제나 우리를 가격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는 남고 소년은 성장한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다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소년은 남은 어머니보다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상실을 치유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가 열여섯 살이던 그해 봄"을 회상하는 <외출>에서 스치듯 지나간 아미시 공동체 소녀와의 사랑은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고 마침표를 찍게 한다. 작가는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는 소년, 사회 전체적으로 고립된 아미시 공동체 출신의 소녀가 만나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톨이들의 교감과 성장통이 남기는 상흔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 둘이 만난다고 해서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차가운 깨달음과 함께. 뼈아픈 성장이 남기는 아련한 추억은 남아 예술이 된다. 


<코네티컷>에서 어머니가 이웃 부인과 가진 관계의 색깔 또한 그렇다. 둘은 동시에 각자의 상황으로 불행했고 이 시점에서 나눈 관계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다. 여지없이 소년은 이것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어떤 상식, 통념,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생의 속살을 알른알른 내비치는 앤드루 포터의 시선은 가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의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나 새롭고 뭉클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11-1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년 전, 21세기북스 출판사의 것으로 이 책을 읽었어요. 다 좋았는데 표제작이 제일 좋았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 같아서 마음이 아팠었죠.
남자 교수의 절제된 사랑이 존경스러웠고... 그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여 주인공이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땐 남편의 존재 따위를 의식하지 않고 실컷 슬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만나니 반가운 책입니다.


blanca 2019-11-14 12:4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미 읽으셨군요. 댓글 읽으니 그 내용이 연상되어 또 뭉클해집니다. 명작이란 이런 건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