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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박공의 집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2
너대니얼 호손 지음, 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읽은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주홍글씨>의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제목에서부터 의문이 들었다. 대체 '박공'이 무엇을 얘기하는 건가 싶었다. 원문 제목은 <The House of the Seven Gables>다. 게이블. 바로 <빨간머리 앤>의 아름다운 집, '그린 게이블즈'가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면 꼭 그들의 앤이 아니더라도 머슈 아저씨와 마릴라가 반갑게 맞아줄 것 같은 그 집도 이 '박공'과 관련이 있었다. 알고보니 가장 흔한 ㅅ자 지붕형태를 얘기하는 단어였다. 장소가 바로 제목이자 소재, 주제가 되는 책이 어떤 내용을 품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붕이 일곱 개인 집이 잘 그려지지 않아 인터넷에 검색하니 실제 비슷한 모델의 집의 이미지가 있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집의 정경을 불러올 수 있었다.
그 건물 자체가 마치 화려하고 음울한 회상들로 가득 찬, 자기 생명을 가진 거대한 인간의 심장과 같았다.
-p.39
친정집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온 곳이다. 일곱 박공의 집처럼 두 세기까진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장소 이상의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지위를 부여받는 것 같다. 그 집에서 매번 최대한 교통이 불편한 학교, 직장 등에 나갔다 어깨에 먼지떠께를 얹고 귀환하곤 했던 기억들은 구석 구석마다 먼지처럼 가라앉아 또르르 말려 있는 느낌이다. 벽마다 가족 구성원들의 추억, 회한들을 숨기고 이 집도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일곱 박공의 집'에는 쇠락한 귀족 핀천 가문의 후손인 헵지바가 숙부을 죽인 혐의를 받고 수감 중인 오빠 클리퍼드를 기다리며 그 집에 구멍 가게를 열어 생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이 노년의 오누이는 더없이 음침하고 비참하다. 하루 하루를 견뎌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시련이자 고문이다. 외부 사람들과의 교류도 없고 내일에 대한 희망도 기대도 없다. 그 집 한 귀퉁이에 세들어 사는 청년 은판 사진사 홀그레이브에게 핀천 가문의 처녀 피비가 이 집에 온 것은 하나의 구원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구원의 세례는 이 늙은 오누이에게도 미친다. 꼬장꼬장한 할아버지처럼 만연체의 연설을 늘어 놓던 작가 호손의 목소리가 갑자기 청랑해지는 것도 자신이 만든 이 캐릭터에 빠져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너무 예쁜 묘사들.
그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듯이 피비를 읽었다. <중략> 그녀는 그에게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지상에서 그가 갖지 못했지만 그의 생각에 아주 절실한 모든 것에 대한 통역이었다.
-p.191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하나의 사실이 아니라 내가 여기에서 갖지 못했지만 절실하게 원하는 것들에 대한 통역이라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이러한 언어들은 또 다른 차원의 감정을 고양한다.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구체화하고 해석해 주는 존재로서 다가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자 희망. 그 극대점에는 비참하게도 살인 누면을 쓰고 감옥에서 젊음을 소진하고 풀려 난 클리퍼드가 있다.
평생 동안 그는 마치 외국어를 배우듯이 비참해지는 법을 배워 왔다.
-p.202
고난은 언제나 사람을 각성시키고 상처의 생채기는 언제나 저릿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포기해도 비참해지는 법은 언제나 다른 경로를 통해 새롭게 학습된다. 손을 놓았다 다시 접하면 또다시 외국어 실력은 저만치 물러가 있다. 호손은 예리하지만 잔인가히도 한 것 같다. 고딕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을 환기시키고 고통을 소환해 낸다. 핀천 대령과 땅의 소유권을 놓고 분란이 일어 마법사 누명을 쓰고 처형되는 매슈 몰이 단말마에 짜내었다는 예언은 만화경처럼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후손들에게 돌아온다. 갑작스러운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갖가지 억측과 오해. 그 속에서 태어나는 희생양. 고색창연한 이 집은 딱딱해져가는 심장처럼 몰락의 징후를 예감하며 힘겹게 박동한다.
결말에서야 밝혀지는 무고한 클리퍼드를 감옥까지 가게 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촌 핀천 판사의 묘사에는 매우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는 외부에서 볼 때 더없이 고상하고 인자한 존경받을 만한 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근접해서 보면 그의 모든 면은 탐욕과 위선에서 나온 일종의 타락한 연기다. 그 연기는 지역에서 사회에서 너무나 잘 먹힌다. 정계에까지 진출하려는 그의 의도는 무지한 대중 앞에서의 그럴듯한 연기로 갑작스러운 죽음만 아니었다면 곧 현실화될 전망이었다. 그가 그의 선조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바로 그 의자에서 시들어 가고 있을 때 호손이 장황하게 그가 그렇게 마침표를 찍지 않았으면 행해졌을 일들을 늘어놓는 대목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이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는 것들에 대한 잔인한 실체를 눈 앞에 그려주는 그의 명민함 때문이다. 핀천 판사는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유형이면서도 가장 욕망하는 것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야망이 마법보다 무서운 부적'이라는 호손의 경구는 인간이 한 곳에 뿌리박고 앉아 대대 손손 부귀 영달을 누리고 싶어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사실은 하나의 잘 변장한 야망의 또 다른 모습임을 드러내고 있다.
남매가 '일곱 박공의 집'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시 돌아오고 나서 새로운 정착지를 향해 떠나는 결말은 동화적이기도 하면서 호손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들에 대한 결말이기도 하다. 현실과 비현실, 시간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그가 그려낸 스케치는 그가 삶에서 깨달은 남겨진 자들에게 해주고 떠나고 싶었던 애기인 것만 같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누구나에게도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인 것도 같다. 상처도 후회도 회한도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우리 인간 세상에서 정말 잘못된 일은, 내가 행한 것이든 당한 것이든 진정으로 바로잡히지 못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중략>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정당함을 찾을 수 있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을 끼워 넣을 마땅한 구석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보다 나은 치유는 고통을 당한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라고 여겼던 그것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p.425
+ 작가의 문체는 때로 굉장히 장황하고 교조적이다. 하지만 이런 서술이 지루함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캐릭터와 배경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능력과 초현실적이고 마법적인 서사의 힘이 매력이다.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결말의 해피엔딩은 그래서 아쉽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다. '그린 게이블즈'에 앤이 오지 않았더라면 마릴라와 머슈 남매가 핀천 남매처럼 되지 않았으리란 보장이 없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