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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습관의 힘 - 최고의 변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임스 클리어 지음, 이한이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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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복잡다단한 현실의 과도한 단순화다. 거기에 따른 일률적인 해법 제시는 자칫 현실 도피적인 추구가 되기 쉽다. 그럼에도 힘들 때, 지칠 때 이러한 류의 책을 읽는 일은 의미가 있다. 일단 매일 규칙적으로 조금씩 이러한 책을 읽는 일 자체가 일상의 루틴이 되면 소소한 응원이 된다. 우울의 늪에 빠질 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위안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괜찮아질 수도 있다, 너만 그런 게 아냐,라는 거짓말 같은 조언은 폄하될 만한 사소한 거짓말이 아니다. 


저자 제임스 클리어는 본인이 실제 자신의 삶에 일어난 사고에서 재기하는 과정에서 작은 습관의 힘을 경험한 사람이다. 저자의 체험과 뒤따른 인지 과학적 연구는 전문가 수준은 아니더라도 적절히 잘 어우러져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습관을 시스템과 개인의 정체성 차원에서 접근한 것 또한 뻔하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습관에서 멀어지고 나쁜 습관에 쉽게 물드는지에 대한 분석적 관찰과 예시에 깊은 공감이 갔다. 



환경과 행동의 함수 관계


제임스 클리어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직설적이다. 그는 인간의 절대의지를 신봉하지 않는다. 환경과 분리되어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자신의 통제권하에 두고 저돌적으로 걸어가는 초인은 그의 독자가 아니다.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고 유혹에 쉽게 지는 대부분의 약한 우리들이 그의 청중이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의 인간의 행동이 사람과 환경의 함수 관계라는 전제의 인용은 제임스 클리어의 인간에 대한 시선과 이 책 전체의 방향을 암시한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부정적인 환경에서 긍정적인 습관을 유지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p.131


이를테면 제임스 클리어에게 '개천에서 난 용'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이상에 다름 아니다. 환경이 가지는 촉매적 역할에 대한 신뢰는 결국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 환경을 전략적으로 설계하라는 조언으로 연결된다.  그의 해법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비교적 자신의 구미에 맞게 재편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한테 한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남았다. 


그럼에도 젊은 저자의 인간의 행동 기제에 대한 관찰, 해석, 분석은 분명 명쾌하고 통찰적이다. 환경에 의해 인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는 비극적 고찰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드물고 어렵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인정하고 나면 평범하고 탐욕스럽고 위선적인 대다수의 우리들이 지금 이 상황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훈련에 대한 조언은 충분히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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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네 살이고, 그녀도 열네 살이었다. 그게 우리가 만나기에 실로 마땅한 나이였다. 우리는 사실 그렇게 만나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하루키가 사회의 시스템의 맹점을 탐사하는 방식, 시선이 비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여성을 묘사하는 그 독특한 성적 판타지가 때로 불편하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의 남자들은 아내나 연인의 배신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삶에 아연한 흠이나 공백을 남기지만 그녀들이 곁에 있었을 때에 차지했던 공간은 다분히 성적이다. 여자가 떠나고 남자는 성장한다. 그 성장이 한때 여자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여자가 떠나고 남긴 그 필연적 상실감과 상처 때문인지 모호하다. 그에게서 여성은 너무 가볍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립 로스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도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는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솔직함과 더불어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이자 존재로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루키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을 장식한 같은 표제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십대에 만났던, 혹은 십대의 정서와 그 순수한 사랑의 교감을 간직했던 여자가 떠난 이야기는 아련한 마침표다. 하루키는 영리하다. 이미 성장해버리고 이미 사회 시스템의 각종 억압에 길들여진 사랑의 기호를 밀고 나가 도착하고 싶은 지점을 그는 간파한다. 순수하고 어리석었던 시간들의 흔적. 소년과 소녀의 사랑.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중략>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중 '십대 소녀'

 

 

폴란스의 시인 쉼보르스카는 더 나아가 시 습작을 하던 십대 소녀 시절의 자신을 불러낸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시인 앞에 선 그녀의 소녀는 낯설고 미숙하다. 그리고 그녀의 느낌은 반갑다기보다는 낯설고 당혹스러워 보인다. 어쭙잖은 확신들 속에 선 소녀 앞에서 그녀의 성장과 노쇠는 조금 안타까운 것도 같다. 그녀는 그녀의 소녀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거나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니다. 언제나 삶의 비의를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 포박해 들어가려 했던 시인은 성장과 시간의 무게를 그 숱한 미숙한 실수들과 시행착오들의 도정을 다 같이 존중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열정과 순수의 가치를 알긴 하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또 다시 열네 살로 다시 기꺼이 갈 것같다. 미숙하지만 어설프지만 이미 잘못된 결론이 될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 힘겨웠던 시간을 또 다시 살고 싶다.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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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freyja-고마워영화 2016-03-1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마지막 단락, 저도 동감이에요.
그리고 하루키는 영리하기도 영악하기도 귀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구요.
그 시절, 열 네살의 시절로 돌아가 다시 살고 싶은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다,예요.^^
봄햇살에 속지 말고 아직 차가운 봄바람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6-03-13 13:2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도 역시 바람이 너무 차요.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는데...
하루키 안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쉽게 섞이기 힘든 것들이 한데 모여 있어서
알다가도 모를 작가인 것 같고 바로 그 점이 대중성을 띠는 것 같기도 하고..아직 소설은 많이 읽어보지 않아 사실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힘들기도 해요. 프레이야님도 꽃피는 봄 함께 기다리며 감기 조심하세요.^^

기억의집 2016-03-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그는 언제나 여자의 배신을 말하죠!!! 그러면서 시작되는 모험! 하루키는 문장도 좋은 작가같아요.

blanca 2016-03-13 13:24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하루키는 참 신기한 게 갑자기 `쨍`하는 문장이 막 나와요. 분명 스토리텔러적인 강점이 있는 작가인데도 문장까지 잘 잡고 있어서... 하지만 역시 전적으로 좋아하기에는 참 저한테는 무언가 찝찝한 작가입니다.--;; 여성을, 사랑을 그리는 방식이 거슬려요.

단발머리 2016-03-1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립 로스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도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는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솔직함과 더불어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이자 존재로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루키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 문장이 너무 좋네요. 제가 필립 로스에 대해 느꼈던 지점, 그리고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걸 블랑카님이 꼭 찍어서 말씀해 주시니 너무 후련하고 시원해요.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여성이 `성행위의 대상`으로서만 느껴져서요. 사람 같지 않고요.
필립 로스 작품에서는 다르다는 걸 느끼는데,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저는 제 자신을 욕망의 주체인 남성으로 느껴요.
제 스스로가 느끼는 욕망으로 느껴진다는 거죠. 필립 로스를 사랑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이유예요.
제 자신을 너무 많이 보여줘야 해요.... ㅎㅎ

blanca 2016-03-13 13:28   좋아요 0 | URL
그죠, 단발머리님,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필립 로스와 하루키가 나란히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게 그 지점에서 엇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애정을 가지고 그 심연을 들여다 보는 건 같아요. 그런데 하루키는 분명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성차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있어요.

필립 로스는 정말 대단한 작가인데 절필을 선언해 버려서 너무 아쉬워요.
 
아주 편안한 죽음 - 엄마의 죽음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청년정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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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해나 수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든 가까이 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보부아르는 죽음의 구체적 경험이 오히려 그것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더 부각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제목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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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0-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좀 비관적으로 봤군요. 보부아르는...
자연사가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없지는 않더라구요.
자연사가 아니어도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잖아요.
예를들면 헬렌 니어링 같은.

blanca 2015-10-25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헬린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죽음이 어떤 면에서 참 이상적인 소멸과 닮아 있다 싶었어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자연스럽게 마감해 나간 스콧 니어링의 죽음... 죽음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처음에는 줄긋지 않은 문장, 지금은 내게 가장 긴요한 문장이 되어 있었다.

제게는 미래라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당장 바로 앞의 시간이 미래인 거죠. 지금부터 30년까지, 이런 식으로 집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집합적인 미래를 대비하자면, 지금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얼마나 벌어야만 하는지 계산이 나와요. 그래서 당장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 일단 돈을 버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집합적인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장 눈앞의 순간, 지금뿐이에요.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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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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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형 김대식과 법조인 출신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동생 김두식. 엘리트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사실은 우리 기준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 형제이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한풀이라면 그 또한 감정 섞인 질시, 패배감으로 폄하될 수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누렸고 누리고 있다고 보이는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솔직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가식으로 비칠 우려도 있지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형과 동생이 만났다. 형은 진영 논리에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자신은 어느 정도 보수이고 동생은 진보라는 시각에서 오늘날 대학 사회에서의 유학파 교수들의 득세와 특목고 위주의 비평준화 정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진보 진영이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무지 몽매한 민중들을 개안시키려는 듯한 그들의 하향주의적 제스처에 일침을 가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형이 비판하는 것은 진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진보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정당화 하는 집단의 해악이다. 동생은 주춤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형은 결국 진보진영도 그들의 엘리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터라 '평등'을 아는 그들이 마치 '평등'을 모른다고 속단하고 덤벼든 사람들 앞에서 실질적 '평등'을 저어하는 그 위선적 작태를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순을 뼈아프게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유학이 명문대 교수 임용의 필요 조건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교수 임용 과정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중언부언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그것에 대한 무게중심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원급제 식의 입시 제도가 진정한 장인을 발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 입시 제도의 복잡함과 특목고에 대한 특혜가 평준화를 무너뜨리고 가진 자의 자식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늘날 각계 각처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기고 세대들의 또다른 후계자들을 키우는 역할과 다름 아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실질적 평준화가 시행되었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학력고사 같은 계량화가 쉬운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 기회와 평등 측면에 더 호의적인 것인지, 학업 성적 이외의 것들의 변수의 여유를 더 주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주 미묘하고 속단하기 힘든 부분인 듯 하다. 다만 평가 척도를 다양화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그 기준들과 척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도 노력과 비용을 요구한다면 어불성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학력고사로 갑자기 다시 회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이러한 복잡한 입시 전형을 유지하며 요리저리 허술한 구멍을 뚫어놓는 것도 답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소수의 이미 가진 자들이 또 누리는 자들로 둔갑하는 통로로 입시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살피는 노력만은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공부논쟁'이라는 표제는 어떤 확실한 결론이나 대안을 향해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자성과 비판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회 전반의 불평등적 요소를 자각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유익했고 되도록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형제의 노력과 재기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늘날 교육 제도와 대학 사회가 암암리에 엘리트주의에 물든 이들이 '평등'이라는 커다란 우산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배다른 자식들을 양성하려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도덕성의 토대와 인본주의의 기반도 갖춰지지 않은 토양에서 보수냐, 진보냐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가늠하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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