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고 감각 없던 대학생이 어버이날 선물을 사러 잠시 멈춘 곳은 백화점 정식 매장이 아닌,  엘리베이터 귀퉁이에 마련된 넥타이 가판대였다. 어머니뻘의 판매사원은 그런 나를 홀대하지 않았었다. 삼만 원짜리 넥타이들을 하나 하나 같이 판매하고 있는 와이셔츠에 대어 주면서 아버지의 라이프 스타일까지 고려하여 여러 선택지를 제시해 주었다. 마침내 황금빛 바탕에 사선 무늬가 있는 넥타이를 들고 항상 주눅이 들어 있었던 젊은 나는 아버지에게 선물을 드릴 수 있었다. 그 넥타이는 아직도 아버지가 가끔 매신다. 끝이 다 해어진 그 넥타이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행운을 가져 온다고 아버지는 믿고 계신다. 아직도 나는 그 백화점 판매 사원 아주머니의 정성과 존중이 그 넥타이에 주술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구매력이 없는 사람에게 백화점은 어느 정도 위압적인 공간이다. 취업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들어가 무언가를 내 카드로 사고 그 물품을 걸친 일이었다는 것은 그러한 공간에 들어갈 자격을 얻고 그 공간에서 내가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착각이라도 얻고 싶었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생에서의 결핍은 물질 소비 욕구와 자주 혼동되고 그 혼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양성적으로 권장된다. 소비하는 능력과 삶을 영위하는 능력은 같지 않을진대 자주 그런 것으로 오해되고 곡해된다.

 

행복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위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쇼핑, 물건을 구매하는 것이다.
-조경란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 사람> 중

 

 

불완전하며 부족한 나는 결코 사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물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 즐거움의 순간이 아무리 짧을지라도 그것은 확실하고 분명한 즐거움이다. 나는 구매했다. 여기에 필수적인 요건은 '나는 선택했다'라는 감정이다. 나는 선택했고 그것은 즐거움으로 남는다. 소비에 당위성은 없다. 소비의 이유도 소비의 기쁨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한순간, 우리는 행복했다.

- 조경란 <백화점 그리고 사물.세계. 사람> 중

 

생일 선물로 받은 지갑이 마침내 구멍이 났을 때 솔직히 많이 기뻤다. 소비의 당위성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지갑을 죄책감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셈이다. 어떤 지갑을 살까, 이리 저리 재고 구경할 수 있는 나는 무언가를 선택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착각도 덤으로 얻는다. 드디어 구멍 난 지갑이 들어가고 새로운 핑크빛 가두리의 지갑이 손 안에 들어오자 기대 만큼 뛸듯이 기쁘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의 소비는 이윽고 잊혀진다. 나는 다시 나의 새로운 지갑에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진다. 심지어 내가 왜 이렇게 동전을 넣고 빼는 것이 불편한 지갑을 선택했는지 후회마저 밀려온다. 새로운 지갑을 살 생각에 조금 설레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지갑도 이모저모 살펴보고 했던 시간들보다 지금 새로운 지갑을 가진 내가 덜 행복한 것은 삶의 아이러니와 닮아 있다.  정말 필요한 것을 사도 구태여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도 결국은 비슷해지는 것을 보면 소비는 사기성이 농후한 행위인 것 같다. 현명한 소비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상인 것인 지도 모르겠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회자되는 에밀 졸라가 19세기 중반의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미끼상품, 반품 조치, 세일, 문화강좌 등의 백화점 판촉전략이 1세기도 더 지난 오늘날의 백화점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백화점과 지역 소상인 간의 갈등, 지역 재래 시장의 붕괴, 판매원들 간의 살벌한 경쟁, 여성들의 쇼핑 중독, 물품 도난 등도 그러하다. 두 남동생을 데리고 몰락해 가는 큰아버지의 나사 상점에 도착하며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판매 사원이 되는 드니즈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상류층 여성들의 백화점 소비 행태, 소유주 무레의 주도면밀한 마케팅 전략, 그 안에서의 인간 군상들의 갈등과 반목, 스캔들 등이 놀랍도록 생생하고 유려하게 그려지고 있다. 가난한 소녀 드니즈와 백화점 소유주의 로맨스는 그간 드라마에서 꾸준히 차용된 것이 아닌가 싶게 진부하기는 하다. ^^

 

 

 

여인들은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그의 백화점을 찾았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예배당에서 보냈던 불안하고 두려운 시간들을 그곳에서 죽여나갔다. 백화점은 불안정한 열정의 유용한 배출구이자, 신과 남편이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는 곳이며, 아름다움의 신이 존재하는 내세에 대한 믿음과 육체에 대한 숭배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곳이었다.
- 에밀 졸라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2 중>

 

 

살롱에 모인 부인네들이 백화점에서 구입한 레이스를 서로 돌려 보며 백화점의 각종 상품들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장면에서 남성들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한켠에서 백화점 소유주 옥타브 무레는 여자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팔아치울 수 있다는 자신의 신앙에 기대어 연적과사업적 제휴를 도모하고 부인네들의 남편 중 하나는 그 여인의 소비를 감당하지 못해 허우적거린다. 이 작품에서 남녀의 역할은 철저하게 소비자와 생산자로 대별되어 있다. 에밀 졸라는 그 접점에 여주인공 드니즈를 투입한다. 드니즈는 옥타브 무레의 무자비한 사업 확장과 소상공인들의 탄압에 제동을 건다. 그녀도 근본적으로는 재래 경제의 붕괴와 대량 생산, 소비의 혁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간에서 스러져가는 가치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자 한다. 도식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여주인공의 행태는 이 작품의 한계이기도 하고 에밀 졸라의 이상이기도 하다. 에밀 졸라의 이상은 세기를 뛰어 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이다. 착각도 연민도 아쉬움도 진보와는 무관하게 반복된다는 것이 하나의 가르침 같기도 하고 삶 그 자체인 것도 같다.

 

백화점 안으로 걸어들어간다. 레깅스의 색깔을 고르고 가판대에서 스타킹 두 개를 사도 소비는 소비다. 환각과 착각을 사고 파는 거대한 기만의 장이라고 해도 에밀 졸라의 말처럼 여기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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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15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이 책 진짜 궁금했는데 이미 사둔 에밀 졸라 책이 몇 권 있어서 차마....ㅜㅜ 에밀 졸라의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분위기인 것 같기도 하고....블랑카님 페이퍼보니 또 보관함을 들추게 되네요 ㅎ 루공-마카르 총서가 계속 출간되는 건지도 궁금하고....저도 이
책 보자마자 조경란의 백화점을 같이 떠올렸어요^^*

blanca 2012-05-15 21:5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혹시 <목로주점> 읽으셨어요? 저는 에밀 졸라 작품이 처음이에요. 추천해 주신다면 도전해 보려고요. 이 책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영화로 만들어져도 너무 근사할 것 같아요. 루공-마카르 총서의 11권이 이 책이라고 하는데 책 만듦새도 좋고 여기에서 계속 출판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조경란 책에서 추천된 다른 백화점 관련 책들도 읽고 싶어요.

... 2012-05-16 00:19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목로주점>이 대기순위 1위에 있어요 ^^ 열린책들에서 나오자 마자 샀는데, 그 이후로 다른 출판사에서도 주르륵 나오더군요. 거의 대부분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목로주점>으로 에밀 졸라를 시작하지 않나요? 박찬욱 감독의 박쥐의 모티브가 되었다해서 <테레즈 라캥>도 많이 읽는 것 같긴 하던데... 제가 알기론, 에밀 졸라의 대표작을 말할 땐, <목로주점>-<나나>-<제르미날> 이렇게 추천하는 것 같아요. 모두다 루공마카르 총서에 들어가 있어서, 루공마카르 총서가 20권 전체는 아니더라도 대표작만이라도 나오면 좋겠어요. 제가 가장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마네와 모네를 모델로 했다는 <작품>인데, 여기까진 나와줘야 하는데...

다락방 2012-05-15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페이퍼 엄청 좋아요, 블랑카님. 처음부터 고개 끄덕여가며 읽었네요. 언젠가 블랑카님의 페이퍼들을 엮어서 책으로 한 권 내어도 많은 여성분들의 공감을 얻을거란 생각이 들어요. 전 에밀 졸라의 책은 패쓰하고 대신에 블랑카님의 페이퍼를 겟할래요.

그러고보니 블랑카님도 브론테님도 명품 페이퍼를 쓰시는 분들. 닉네임을 ㅂ 로 시작하면 명품 페이퍼를 쓸 수 있을까요? (이건 갑자기 무슨 엉뚱한 댓글 ㅎㅎ)

blanca 2012-05-15 21:5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ㅋㅋ 저는 제가 쓴 페이퍼 다시 읽으면 괴로워서--;; 책이 된다는 상상은 감히 못하겠어요. 여하튼 칭찬해 주시니 이런 기회로 또 한번 뿌듯해 보렵니다.ㅋㅋ

레와 2012-05-15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한 소비란 애초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환상인 것인 지도 모르겠다.'는 블랑카님 말씀에 동감합니다.

저에게 소비의 기쁨은 뭔가를 사기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고민하는 그 찰나의 순간인 것 같아요.
그 순간이 영원이 되면 참 좋겠는데..^^;

blanca 2012-05-15 21:57   좋아요 0 | URL
레와님, 저도 그래요. 딱 돈 내고 사기 전까지가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이것 살까, 저것 살까 고민하는 시간들과 함께요. 인생에 있어 모든 선택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요.

moonnight 2012-05-15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명품페이퍼. 라는 다락방님 말씀에도 추천 ^^
대학생 블랑카님이 선물하신 넥타이를 여전히 소중하게 매시는 아버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요. 따뜻합니다.

에밀 졸라의 책은, 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에세이 비슷한 걸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 때문일까요?;;) 소설이었군요. -0-;;;;;;

blanca 2012-05-15 21:5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참 신기하게도 그 넥타이는 참 오래 오래 저희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어요. 다른 선물들도 드렸었는데 유독 그것을 고르고 사던 저의 시간들과 그 판매사원 아주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답니다.

감은빛 2012-05-15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은 아니지만 여전히 돈 없고 감각없고 게다가 사교성없고 고집까지 쎈
저는 백화점 판매원의 그런 친절도 사실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블랑카님의 경우 그분 덕분에 아버님께서 오래도록 아끼는 넥타이를 갖게 되셨군요.
사소하지만 그런 느낌의 물건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블랑카님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2-05-15 22:01   좋아요 0 | URL
ㅋㅋ 감은빛님. 어떤 기억이었을까요? 다시 떠올리셨을 때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는 기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진 2012-05-15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짱, 이라며 손가락을 치켜들래요. 블랑카님의 페이퍼는 언제 읽어도 알뜰살뜰(?) 꽉 뭉쳐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여자도 아니건만 처음부터 다락방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답니다. 그래도 여성분들보다 공감은 덜 가네요. 다만 블랑카님의 글 실력에 감탄하며 물러납니다. 추천 백만개!

blanca 2012-05-15 22:0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고마워요. 시험도 끝나고 여유 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프레이야 2012-05-1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좋은 페이퍼 꾸욱^^
저는 문득 소설 '화차'에서 말한 그 거울이 생각나요.
뱀에게 다리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이는 착각의 거울, 결국 그 거울을 구매하려고 돈을 벌고 쓰고 아둥바둥.
정말 현명한 소비란 애초에 없었던 걸까요? 우리는 만족을 모른다는 점에서^^

blanca 2012-05-15 22:05   좋아요 0 | URL
아, 프레이야님 <화차>도 연결될 수 있겠군요. 마음이 허할 때 소비하고 싶어지는 욕구가 더 강렬해지는 것 같아요. 무언가를 소비할 힘을 갖추기 위해 하루 하루를 또 소비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참 씁쓸하게도 느껴지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딜레마인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2-05-16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론테 님이 말씀하신 <작품>은 10년 전에 번역되었어요.아직 절판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재미있기로는 <제르미날>이 제일 낫더군요.단 광산노동자들의 참상을 처절할 정도로 사실주의 수법으로 묘사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싫어하는 사람이 읽으면 안 됩니다.

blanca 2012-05-17 09:41   좋아요 0 | URL
아, 혹시 그것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나요? 어렴풋이 제럴드 빠라디유인가 그 코가 특이하게 생긴 남자 배우가 나왔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데. 아, 좋은 책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5-17 13:20   좋아요 0 | URL
예.정확히 알고 계시네요.

순오기 2012-05-30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서재 마실 왔어요.^^
서재 마실도 오랜만이지만 백화점 나들이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요, 아마도 7`8년은 되지 않을까...

blanca 2012-05-31 10:03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우아, 정말요? 저는 몇년 전 전주에 결혼식이 있어 갔다가 거기 백화점 갔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백화점이 욕망을 자꾸 자극하고 추동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지 않도록 해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