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이 세상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은,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빈번한 것만 같은...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그 '초콜릿 상자' 같은 인생에서 달콤한 것이 아닌 씁쓸한 맛의 초콜릿만 하필 내가 뽑은 것 같은...


물론 그럴 리 없다. 지금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 누구라도 한 명 지목하여 그 사람이 '분투하는 것'에 대하여 묻는다면 다들 나름대로의 처절한 대답을 가질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가 겪는 이 일들이 타인들에 비해 유달리 쉽고 나는 행운아라고 바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 사람이 있다. 그가 얻어낸 응답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의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투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어떤 사람의 짧은 대답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행간에 응축하고 있어 여러 번 곱씹게 된다. 꼭 인류 역사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못해도 우리가 저마다 살아내는 인생에서는 저마다 고난의 주인공이자 유의미한 승리자다. 




















표지를 장식한 이 화사한 노란 원피스의 할머니는 언뜻 프랑스 파리의 귀부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은 전쟁의 참화가 벌어지기 전의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할머니다. 처음에는 사진 요청을 거절했다 다른 행인의 열성적인 설득으로 다시 저자 브랜던 스텐턴의 카메라 앞으로 왔단다. 그 설득의 내용이 뭉클하다.


"당신은 이 나라 여자들을 대표해야 하니까 사진 찍는 걸 거절하면 안 돼요'라고 했어요.

'이제 영원으로 가는 거예요!'라고요."

-브랜던 스탠턴 <휴먼스>


아늑하고 아기자기해 보이는 오데사 거리의 저 귀엽고 우아한 할머니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물성을 가진 무한체다. 생명이 늙고 꺼져도 사진은 남는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풍경은 저러했다. 평화, 기대, 사랑, 자유, 우아함을 한데 담은 것 같은 할머니의 표정과 포즈가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가 맞물려 한없이 먹먹하다. 


전세계 40여 개국에서 5년 넘게 만난 1만여 명의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의 무작위적인 사진과 인터뷰 요청에 의외로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짧은 시간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과 깨달음을 쏟아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족과 친구한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야기들과 표정들이 지면을 뚫고 나와 닿는다. 


내가 겪는 고통과 통과하고 있다고 믿는 어려움이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른 모습과 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앎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남자는 자기 생에서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임종을 어떻게 자신이 감당할지 몰라 헤매고 어떤 아버지는 약물 중독으로 생모와 헤어진 아이에게 잔뜩 기대감을 고취시켜 설레게 만들었다 소개하려던 여자친구과의 뒤늦은 실연을 고백해야 하는 고통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중년의 열정적인 커플은 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의 삶을 그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평범한 산책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입을 열자 이런 상상도 못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벤치에 앉아 있던 턱수염이 수북한 중노년의 남자는 현자의 조언을 남겨준다.


"난 모든 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게 놔두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럴 일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잘 되는 일은 없다. 생각을 하는 것보다 우선 살고 볼 일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닐 수 없어 교복 입은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파키스탄의 아버지는 딸아이가 하교하기만을 기다린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해내어 미주알고주알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젊은 아빠에게 이야기해준다. 아버지는 오늘도 그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딸의 존재만으로 그 아버지의 하루는 빛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버텨낸 사람들의 눈빛이 아름답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뉴욕에서 저자가 평생 해로한 아내가 떠난 후 셰익스피의 소네트를 읽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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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0-04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까 당장 읽고 싶어져요!!^^

blanca 2022-10-04 18:20   좋아요 0 | URL
너무 좋아서 <휴먼스인뉴욕>도 주문했어요. 사진만 좋은게 아니라 테마별 도입부마다 쓴 저자 글이 어마무시 좋아요. 이 사진작가 뭐지? 하며 찾아보니 삼십 대에 만든 책이라 더 놀랐어요.

scott 2022-10-0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내마음대로 그어 버릴 수 있는 일직선이 아닌 곡선!^^

blanca 2022-10-04 18:21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위로가 필요합니다. 임윤찬 직관 및 하루키 신간이 큰 위로가 될듯한데 두 가능성 다 요원해 보입니다.

바람돌이 2022-10-04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노란 옷의 할머니는 이번 전쟁에서 무사하실까하는 생각부터 먼저 드네요.
사실 모든 사람은 다들 자기 삶만큼의 걱정을 다 안고 살아가는거고, 그건 누군가의 고통이나 고민과 비교 불가이지 싶어요. 결국 내가 타인의 고통을 다 알수는 없는거고, 나의 고통은 나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또 가끔은 달콤한 초콜릿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날도 있으니 아 이래서 또 사는구나하기도 하잖아요. ^^

blanca 2022-10-05 10:21   좋아요 0 | URL
저도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하더라고요. 오늘 하늘이 눈이 부시네요. 또 이런 하늘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1-0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2-11-09 20:09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11-09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blanca 2022-11-09 20:09   좋아요 1 | URL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도 행복한 나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형의 것들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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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게 된 고이케 마리코의 <이형의 것들>은 뚜렷한 색채가 있는 단편집이다. 공포 장르 소설이라기에는 순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과 더불어 사유의 깊이가 있고 또 순문학으로만 보기에는 죽음의 세계, 영혼, 미스터리적 요소가 수시로 들고 난다. 과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의심하며 읽기 시작하면 몰입이 어려운 이야기들이고 그냥 긴장을 풀고 작가가 만든 이야기로 들어가면 몽환적 분위기에 흠뻑 젖어 아름답고 신비롭고 약간 으스스한 고이케 마리코의 세계에 입장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얼굴>은 어머니의 고독사로 뒷정리를 위해 귀향한 화자가 우연히 이형의 가면을 쓴 얼굴을 만나게 됨으로써 과거 그의 가족 내의 갈등, 지금 아내에게 저지른 실수를 환기하게 되는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자애로운 어머니 대신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이 남긴 상흔,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장성한 아들의 현실의 결혼생활에까지 드리우는 그림자는 짙고 중층적이다. 밖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겪으며 서로를 때로 타인보다 더 미워하게 되는 일, 거기에 따르는 죄책감은 짧은 <얼굴>에 농축되어 많은 질문거리를 남긴다. 


이계,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 사람들과의 우연한 스침에 대한 이야기는 <히카게 치과 의원>에서도 계속된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사촌의 집 근처로 잠시 가게 된 화자는 우연히 치과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치료뿐만이 아닌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과거의 아픔, 상실이 아물게 되고 주인공이 뒤늦게 그 치과에 관련해 알게 된 사연은 사실 예견된 것이었지만 단순히 작가가 이계의 것들과 주인공들과의 조우를 흥미거리가 아니라 이 생을 살아나가는데 어떤 위로, 치유의 역할로 불러왔음을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과거는 공존하고 한데 섞인다. 그 모호하고 흐릿한 경계에서 작가는 공력을 발휘해서 독자를 초대한다. 


마지막 작품 <붉은 창>은 마무리로 맞춤한 작품으로 잔영이 길다. 언니의 집에 묵게 된 주인공이 건너편 집에서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다 죽은 젊은 여인의 유령을 본 건 그리고 그녀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된 건 자기 자신의 그림자 같은 삶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그림자, 내 삶의 어두운 절망 지대는 그렇게 내 눈 앞에 하나의 이형의 것들로 화하여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져 간다. 우리는 사랑하는 혹은 미워했던 사람들과 작별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선을 우리 자신도 넘어가야 한다. <이형의 것들>이 작가가 공포를 의도하고 만든 이야기가 아니듯 우리의 저 너머도 마냥 두렵고 어두운 곳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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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9-24 2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혹적인 단편집 같아요.
블랑카 님 리뷰로 더욱 그런 느낌이 듭니다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이고 정말 제목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책, 살포시 데려갈게요 ~^^

blanca 2022-09-25 08:45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오랜만에 흠뻑 빠져 읽은 단편집이에요.

stella.K 2022-09-24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보면서 뭔가 끌린다 싶었는데 블랑카님 이리 쓰시니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아름다운 문장과 사유의 깊이라니. 딱 내 스타일입니다.ㅠ

blanca 2022-09-25 08:46   좋아요 2 | URL
몇 편 안 실려 있어 아쉽더라고요. 너무 아쉬워서 이 작가들 다른 책 찾아보니 대부분 절판...북스피어에서 신간을 낼 예정이라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의집 2022-09-24 2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포라 해서 읽기 주저했는데 블랑카님 말씀대로 문장이 아름다워서 좋았어요. 공포도 이렇게 서정적으로 쓸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blanca 2022-09-25 08:47   좋아요 1 | URL
기억의집님, 저 정말 재미있게 읽어서 북스피어 ‘이판사판‘ 시리즈 다 읽어보려고요.

2022-09-30 15: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30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2-10-07 14: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이달상 추카!

장바구니 털러 ~@@@

blanca 2022-10-07 15:03   좋아요 2 | URL
ㅋㅋ 책 구입의 정당화. 어제 민음사 티비 보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10월달 나온다는군요.!

새파랑 2022-10-07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역시나 입니다~!!

blanca 2022-10-07 17:22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님~

thkang1001 2022-10-07 16: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blanca 2022-10-07 17:22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도 가을의 멋진 휴가 보내시기를~

mini74 2022-10-07 2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 이 책 재미있겠어요 ㅎㅎ 축하드립니다 *^^*

blanca 2022-10-08 09:45   좋아요 1 | URL
재미있어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0-07 2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blanca 2022-10-08 09:45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시기를...
 

며칠 전 메일로 내가 원하지도 않은 미국 신용 카드 갱신 소식을 받았다. 역시 어떤 확인 절차도 없이 미국의 옛주소지로 이미 발송했다는 소식.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미국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내가 타국에 있으니 자기 확인 절차도 번거롭고 잘 되지도 않았다. 해지 부서 연결만 거의 몇 번을 실패하고 가까스로 연결되어 내 이름을 묻는 직원들 목소리에는 인사부터 피곤이 가득했다. 거기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거의 모두가 잘 안 들린다, 다른 번호로 걸으라며 바로 끊어버리는 것이다. 외국에서 걸려온 어려운 발음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퇴근 시간 가까워서 그것도 안 좋은 발음, 서툰 영어로 카드 해지를 요구하니 그들 입장에서 반가운 전화일 리 없다. 그래도...난 요새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고 그런 그들의 대처에 충분히 상처 받는다. 


밤 늦게까지 깨어 있다 다시 시도하니 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온다. 내가 너무 여러 번 전화해서 이상 움직임이 느껴져 일처리를 해줄 수 없단다....24시간 지나 시도하란다. 이건 또 무슨. 뭐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마침 <콜센터의 말>을 읽고 있던 터라 그냥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그들도 매뉴얼에 따른 것일 테니. 그걸 두고 내가 뭐라 한다고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미국의 서비스는 대체로 느리고 차갑다. 여기엔 장단이 있다. 고객 입장이 되면 괴롭고 힘들지만, 노동자 입장이 되면 누리는 지위가 있고 이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단순히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는 입장이라 해서 직원을 상대로 고객이 쉽게 갑질을 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은 왕이다,는 어쩌면 폭력적인 슬로건일 수 있다. 이 표어는 우리를 고객의 위치인 것처럼 착각하게 하지만 많은 경우 누구나 그런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노동자의 입장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에서 일한 한국인 저자의 경험담이다. 일본 콜센터라지만 결국 동양적인 정서를 공유하는 만큼 우리나라 콜센터에서 일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콜센터 직원들은 과도하게 친절하다. 아마 미국의 콜센터처럼 응대했으면 고객들의 민원이 빗발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도한 요구, 때로는 감정의 배설구로 콜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은 무방비다. 콜센터의 직원도 감정과 인격을 가진 노동자다. 그러나 현실은 조직의 부속품으로 고객의 버퍼존으로 치부되며 끊임없이 붕괴된다. 


이런 이유들로, 무례함을 견디는 일은 상담원의 숙명이다. 다행히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경험이 쌓이면 어떤 말을 들어도 침착히 업무를 완수할 내공이 길러진다. 상처에 무디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괜찮다고 착각하는 순간에도 몸과 마음은 착실히 병든다. 작은 물방울이 축적되면 거대한 바위도 뚫듯, 매일 시퍼렇게 날 선 말을 들으면서 멀쩡하기는 힘들다.

-<콜센터의 말> 이예은


우리는 익명의 이들과 하루에도 여러 번 만난다. 무심코 그들에게 하는 행동들, 말들이 작은 물방울들이 되어 서로에게 떨어진다. 이건 사소한 것 같지만 그건 피부를 뚫고 마음을 뚫고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상처는 아물지만 다른 힘든 일이 겹치면 그 상처는 다시 열린다. 그러면 멀쩡하기는 힘들다. 서로가 감정과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의식한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럼에도 여러 겹의 층위가 있는 미국의 콜센터를 상대하는 일은 부담스럽고 괴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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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9-29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미쿡 콜센타 직원들 대부분 인도 출신들인데,,,

블랑카님 클 날 뻔했습니다
그쪽 서비스가 울 나라 같이 빠르거나 소비자를 위한게 없거든요

요즘 콜센타 음성은 AI가 ^^

blanca 2022-09-29 15:38   좋아요 1 | URL
진짜 불친절하더라고요. 대부분 인도 출신인지 몰랐어요. 우리나라 서비스가 세계 최고죠. 그런데 그러기 위해 또 서비스노동자들의 감정 노동이 당연시되니 이것 또한 문제고요. 여튼 해결 못했어요. 미국에 와서 해결하라는 식이던데요? --;;
 
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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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화자가 연착된 기차로 인해 우랄 지역의 역 대합실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반사적으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이 떠올랐다. 역 대합실에 모인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한 고단하고 찰나적인 삶에 대한 은유가 공통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지난한 생의 집적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화자는 우연히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노인과 만나게 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그 노인의 스탈린 치하 개인의 삶이 익명화되고 파편화된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작가 안드레이 마킨의 문장은 잘 정제된 시어처럼 유려하게 흐른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고 소리를 듣게 하고 냄새를 맡게 기능한다. 피아노 연주회를 앞둔 소년이 시대의 잔인한 우연성으로 인해 그 연주회를 하지 못하고 전장의 병사들에 숨어들게 되고 죽은 또래의 병사의 신분으로 살게 하는 비극은 그러나 덮어놓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화자를 데리고 그 노인이 참석하게 되는 음악회는 그럼에도 가능한 그 무엇, 삶의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안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pp.119


한때 감히 사랑했던 상관의 딸 앞에서 했던 연주, 이미 피아니스트였지만 신분의 위장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학생으로 연주해야 했던 그날 그가 느낀 감정이다. 그가 그녀를 가질 수 없었던 열패감은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대신 그녀를 삶의 뒤안길에서 돌보고 끝까지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상쇄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삶에서 그렇게 기능한다. 기차의 우연한 연착, 늙고 가난한 연주자와 청년의 만남에서 건져진 삶의 비의는 그렇게 빛난다. 삶의 정경의 카메라의 렌즈처럼 기능했던 화자의 시선은 이윽고 이런 희망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순정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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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04 13: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관심가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두었었는데 이런 느낌이군요. 뭔가 아련한 느낌도 들구요.

blanca 2022-09-04 14:06   좋아요 2 | URL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 요즘 웬만큼 좋은 소설은 사실 몰입이 잘 안 되는데 깜짝 놀랄 정도로 빠져 읽었어요. 분량이 짧아서 너무 아쉬웠고요.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으려 합니다.

수이 2022-09-04 19: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드레이 마킨 책은 아직 구입 전인데 블랑카님 글 읽으니 주저하는 마음이 접히네요. 얼른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blanca 2022-09-05 07:55   좋아요 2 | URL
1984Books에 대한 신뢰가 있긴 하지만 이건 좀 도가 지나치게 좋더라고요,^^;;;

transient-guest 2022-09-12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아련한 추억이 느껴집니다.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으니 언젠가는 저도 읽을 날이 있겠지요?

blanca 2022-09-12 13:28   좋아요 2 | URL
책 분량이 너무 짧아 아쉬웠어요. 참 좋더라고요. 잘 쓴 책에는 많은 지면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읽는나무 2022-10-01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글이 또 날아와서 읽게 되었습니다.
마침 관심있던 책이었거든요.
좋네요~^^

2022-10-01 1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1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따금 이런 글을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허투루 쓰는 혹은 쓰게 될 시간들을 아낄 수 있다. 쓸데없는 슬픔들, 쓸데없는 회한들, 쓸데없는 열패감, 소모적인 우울. 그리고 무엇보다 스마트폰.




기억을 돌이켜 생각해보라.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많은 것을 삶에서 빼앗겼는지, 쓸모없는 슬픔과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회의 유혹에 얼마나 많은 것을 소진했는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자신의 계절이 오기도 전에 이미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제니 오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







이것은 제니 오델의 말이 아닌 세네카의 말이다. 그러나 오직 온라인의 연결만을 강조하며 저도 모르게 소비 마케팅의 표적이 되면서 끊임없이 인터넷 세계를 유랑하며 보내는 시간을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으로 오인하는 우리들에게 저자가 하고 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자신의 계절 속에서 삶을 흠뻑 향유하기 위하여 여기 지금 우리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세네카와 만난다. 


지하철에 타서 고요히 승객들을 관찰한 적이 있다. 정말 단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 누구도 동승자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하필 그날, 그 칸은 그랬다. 순간 으스스했다.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거나 종이책을 넘기거나 종이 신문을 접어서 보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발견할 수 없는 공간에서 나도 그전까지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가방에 도로 넣었다. 집단으로 우리는 이 가상의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훈련을 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단 10분만이라도 그 강요된 연결에서 해제되어 진짜 물리적인 현실에 다시 발을 딛는 연습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독립적으로 판단한다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다루는지 모르지만 그 세계에 오래 머무를수록 우리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마케팅에 가장 효율적인 개인 정보들을 저도 모르게 노출하여 생산자들의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공교롭게 뭔가를 하는 대신, 하지 않는 법, 최소한으로 하는 법에 관련한 고대,중세의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읽게 됐다. 이번에는 스피노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저자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의 권위자로 꼽힌다. 이 책은 한 자리에서 주르륵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분량이 많지 않은데도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읽게 된다. 어렵거나 지나치게 사변적이지 않으면서도 형식적이거나 표면적이지 않은 스피노자 철학은 지극히 현재적이다. 메멘토 모리도 아니고 죽음을 최소한으로 생각하라니, 이건 또 무슨 얘기인가. 통념에 반하는 이야기는 그러나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나의 유한함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현재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자유인은 죽음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이성적 기쁨을 누린다.

-스티븐 내들러 <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여기에서 자유인은 스피노자가 상정한 이상적 인간상이다. 현실의 격랑, 정념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이성적인 준거틀에 의해 모두에게 유덕한 판단을 내리는 삶을 영위하는 인간. 우리는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완벽하게 그렇게 되지 못할지라도 현실의 쾌락과 충동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진정한 의미에서 아름답고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자유인이 되어야 한다. 자유인은 쓸데없는 감정, 회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속박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이성적 삶을 누리며 자신의 관념이 더 큰 전체의 일부로 영원히 편입될 것임을 확신한다. 그에게 있어 죽음은 명확하지만 존재의 소멸로 삶을 일회성으로 폄하하는 차원이 아니라 더 큰 차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사물과 삶의 필연성을 이해하며 모든 이행을 관조한다. 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억지로 어떻게 해보려 덤비는 대신 그는 평온하고 평화롭게 그것을 지켜본다. 마치 자식을 키우는 것과 같다. 내 삶은 나에게서 결국 떨어져 나가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최선을 다해 그것을 양질의 것으로 충실하게 키워낸다. 


어떤 일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게 더 좋다.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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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8-30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많이 넘치게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도로 그치는 것]
삶의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시기 인 것 같습니다.
몇 일 후면 가을, 9월
추석 앞 두고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올 여름 물, 비가 넘치게 와서 걱정 ^^

blanca 2022-08-31 09:02   좋아요 2 | URL
이제 비만 오면 무섭네요. 세계 정세들 둘러싼 온갖 우울한 소식들 일색이지만 그 와중에 즐거운 일상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mini74 2022-09-08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려요. 추석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

blanca 2022-09-09 21: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