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면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절대적인 선인도 절대적인 악인도 대체로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도 비판하는 것도 그래서 조심스럽다. 인간은 무엇보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였던 나혜석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그녀는 1927년에 이미 파리에 간 여성이다. 1934년에 남편과의 이혼 과정과 자신의 소회를 이야기한 <이혼고백장>을 발표했다. 가부장제의 위선과 모순을 일찍이 간파하고 그것을 공론화한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녀가 쓴 글은 지금 읽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을 정도로 당시 시대상으로서는 급진적이었고 깨인 여성이었다. 부유한 환경에서 재능과 미모를 가지고 태어나 독립적으로 대등한 부부관계를 조건으로 내걸었던 결혼 생활 등 그녀의 화려한 전반기의 인생은 그러나, 질병과 빈곤 등으로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나혜석의 인생 그 자체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하나의 드라마다.


나혜석은 배우 나문희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나문희 배우는 어린 시절 본 나혜석이 파킨슨으로 투병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예술적 재능이 흐르는 집안이었던 듯하다. 명배우 조카에게 남긴 마지막 기억이 안타깝다. 
















<경성에서, 정월>이라 했을 때, 나는 무심코 1월에 관한 나혜석의 글일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 '정월'은 나혜석의 호다.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어머니로서, 부인으로서, 화가로서, 독신자로서의 정체성에 관련된 나혜석의 글들이 실려 있다. 나혜석은 주로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로서의 필력도 대단하다. 주변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묘사하는 데 짧은 단편처럼 생생하고 풍성한 글로 장면을 그려낸다. 자신만의 논리를 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설득당해 버릴 정도다. 결혼생활에 관련한 그녀의 생각은 지금 시대에도 받아 들여지기 어려운 대목이 여전히 있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네 아이로서의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진 것에 대해서도 그렇다. 뭐라 한 마디로 단정 짓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녀가 결국 벗어던지고 남은 정체성이 그녀 자신 그 자체로서 존중 받고 인정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그렇다. 


모두가 침묵하고 체념하며 따랐던 정통 가부장 구조가 한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을 적시한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조차 생경했던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돌올한 나혜석의 유산이다. 그녀는 자기가 한 명의 '언니'로서 전인미답의 길에 발자국을 낼 것을 예감했다. 


아직 밝지도 않은 이 새벽에 누가 벌써 수레를 끌고 가는구려. 그 바퀴 구르는 소리가 마치 우레 소리와 같이 내 귀에 들리오. 이 이른 새벽 깊이 든 잠에 몇 사람이 깨어서 저 바퀴 소리를 들었겠소. 이와 같이 만물이 잠들어 고요한 중에 그는 먼길을 향하고 일찍이 일어나서 튼튼히 발감개하고, 천천히 걸어가며 새벽하늘의 고운 빛을 노래하고 맑은 공기에 휘파람 불며 미소하리다.

-나혜석 <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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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27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나문희 씨가 조카군요.
호가 정월이라니. 넘 불행한 삶을 살았던지라 어떨까 싶은데 이 책 관심이 가네요. 표지도 예쁘네요.^^

blanca 2024-02-28 09:44   좋아요 1 | URL
제목을 참 잘 지었다고 생각했어요. 표지도 판형도 참 예뻐요.

등대지기 2024-02-27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누구든 쉽게 비난하지 말자 싶어요. 다들 연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나혜석을 알게 되었을 땐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아갈수록 멋진 면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24-02-28 09:46   좋아요 0 | URL
자녀들에 대해서는 분명 무책임한 부분도 있더라고요. 선각자적 면도 있고 참 복합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옛날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놀랍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