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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의 것들 ㅣ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평점 :
제목이 마음에 들어 읽게 된 고이케 마리코의 <이형의 것들>은 뚜렷한 색채가 있는 단편집이다. 공포 장르 소설이라기에는 순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과 더불어 사유의 깊이가 있고 또 순문학으로만 보기에는 죽음의 세계, 영혼, 미스터리적 요소가 수시로 들고 난다. 과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이 이야기가 가능한가, 의심하며 읽기 시작하면 몰입이 어려운 이야기들이고 그냥 긴장을 풀고 작가가 만든 이야기로 들어가면 몽환적 분위기에 흠뻑 젖어 아름답고 신비롭고 약간 으스스한 고이케 마리코의 세계에 입장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얼굴>은 어머니의 고독사로 뒷정리를 위해 귀향한 화자가 우연히 이형의 가면을 쓴 얼굴을 만나게 됨으로써 과거 그의 가족 내의 갈등, 지금 아내에게 저지른 실수를 환기하게 되는 이야기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자애로운 어머니 대신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이 남긴 상흔, 분노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장성한 아들의 현실의 결혼생활에까지 드리우는 그림자는 짙고 중층적이다. 밖으로는 평범하게 보이는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 그리고 그것을 겪으며 서로를 때로 타인보다 더 미워하게 되는 일, 거기에 따르는 죄책감은 짧은 <얼굴>에 농축되어 많은 질문거리를 남긴다.
이계, 죽음의 세계로 넘어간 사람들과의 우연한 스침에 대한 이야기는 <히카게 치과 의원>에서도 계속된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고 사촌의 집 근처로 잠시 가게 된 화자는 우연히 치과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치료뿐만이 아닌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과거의 아픔, 상실이 아물게 되고 주인공이 뒤늦게 그 치과에 관련해 알게 된 사연은 사실 예견된 것이었지만 단순히 작가가 이계의 것들과 주인공들과의 조우를 흥미거리가 아니라 이 생을 살아나가는데 어떤 위로, 치유의 역할로 불러왔음을 깨닫게 된다. 삶과 죽음, 현실과 과거는 공존하고 한데 섞인다. 그 모호하고 흐릿한 경계에서 작가는 공력을 발휘해서 독자를 초대한다.
마지막 작품 <붉은 창>은 마무리로 맞춤한 작품으로 잔영이 길다. 언니의 집에 묵게 된 주인공이 건너편 집에서 누군가의 내연녀로 살다 죽은 젊은 여인의 유령을 본 건 그리고 그녀가 가지는 의미를 깨닫게 된 건 자기 자신의 그림자 같은 삶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안의 그림자, 내 삶의 어두운 절망 지대는 그렇게 내 눈 앞에 하나의 이형의 것들로 화하여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점점 흐릿해져 간다. 우리는 사랑하는 혹은 미워했던 사람들과 작별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그 선을 우리 자신도 넘어가야 한다. <이형의 것들>이 작가가 공포를 의도하고 만든 이야기가 아니듯 우리의 저 너머도 마냥 두렵고 어두운 곳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믿음을 주는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