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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삶의 음악
안드레이 마킨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의 도입부에는 화자가 연착된 기차로 인해 우랄 지역의 역 대합실에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을 읽으며 반사적으로 곽재구 시인의 '사평역'이 떠올랐다. 역 대합실에 모인 인간 군상의 모습을 통한 고단하고 찰나적인 삶에 대한 은유가 공통의 정경을 떠올리게 했다. 시공간을 가로질러 지난한 생의 집적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화자는 우연히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는 한 노인과 만나게 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그 노인의 스탈린 치하 개인의 삶이 익명화되고 파편화된 과거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작가 안드레이 마킨의 문장은 잘 정제된 시어처럼 유려하게 흐른다. 하나하나의 문장이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고 소리를 듣게 하고 냄새를 맡게 기능한다. 피아노 연주회를 앞둔 소년이 시대의 잔인한 우연성으로 인해 그 연주회를 하지 못하고 전장의 병사들에 숨어들게 되고 죽은 또래의 병사의 신분으로 살게 하는 비극은 그러나 덮어놓고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화자를 데리고 그 노인이 참석하게 되는 음악회는 그럼에도 가능한 그 무엇, 삶의 열쇠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연주를 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밤을 가로질러 전진했다. 얼음과 나뭇잎과 바람의 무수한 단면들로 이루어진, 이 밤의 투명하고 불안정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의 안에 불행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한 공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도 후회도 없었다. 그가 헤치고 나아가는 이 밤은 불행과 공포와 만회할 수 없이 산산조각 나버린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모두가 이미 음악이 되어 오로지 그 아름다움으로 존재했다.
-pp.119
한때 감히 사랑했던 상관의 딸 앞에서 했던 연주, 이미 피아니스트였지만 신분의 위장을 위해 우스꽝스러운 그녀의 학생으로 연주해야 했던 그날 그가 느낀 감정이다. 그가 그녀를 가질 수 없었던 열패감은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는 대신 그녀를 삶의 뒤안길에서 돌보고 끝까지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상쇄된다.
<어느 삶의 음악>은 삶에서 그렇게 기능한다. 기차의 우연한 연착, 늙고 가난한 연주자와 청년의 만남에서 건져진 삶의 비의는 그렇게 빛난다. 삶의 정경의 카메라의 렌즈처럼 기능했던 화자의 시선은 이윽고 이런 희망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 순정한 아름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