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이 세상 사람은 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불행한 것 같은,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빈번한 것만 같은...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나온 그 '초콜릿 상자' 같은 인생에서 달콤한 것이 아닌 씁쓸한 맛의 초콜릿만 하필 내가 뽑은 것 같은...


물론 그럴 리 없다. 지금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 누구라도 한 명 지목하여 그 사람이 '분투하는 것'에 대하여 묻는다면 다들 나름대로의 처절한 대답을 가질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내가 겪는 이 일들이 타인들에 비해 유달리 쉽고 나는 행운아라고 바로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 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진 사람이 있다. 그가 얻어낸 응답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의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투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어떤 사람의 짧은 대답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행간에 응축하고 있어 여러 번 곱씹게 된다. 꼭 인류 역사에 대단한 업적을 이루지 못해도 우리가 저마다 살아내는 인생에서는 저마다 고난의 주인공이자 유의미한 승리자다. 




















표지를 장식한 이 화사한 노란 원피스의 할머니는 언뜻 프랑스 파리의 귀부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의 주인공은 전쟁의 참화가 벌어지기 전의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할머니다. 처음에는 사진 요청을 거절했다 다른 행인의 열성적인 설득으로 다시 저자 브랜던 스텐턴의 카메라 앞으로 왔단다. 그 설득의 내용이 뭉클하다.


"당신은 이 나라 여자들을 대표해야 하니까 사진 찍는 걸 거절하면 안 돼요'라고 했어요.

'이제 영원으로 가는 거예요!'라고요."

-브랜던 스탠턴 <휴먼스>


아늑하고 아기자기해 보이는 오데사 거리의 저 귀엽고 우아한 할머니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사진은 물성을 가진 무한체다. 생명이 늙고 꺼져도 사진은 남는다. 전쟁이 벌어지기 전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풍경은 저러했다. 평화, 기대, 사랑, 자유, 우아함을 한데 담은 것 같은 할머니의 표정과 포즈가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가 맞물려 한없이 먹먹하다. 


전세계 40여 개국에서 5년 넘게 만난 1만여 명의 사람들은 이 낯선 이방인의 무작위적인 사진과 인터뷰 요청에 의외로 친절하고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짧은 시간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의 여정과 깨달음을 쏟아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쩌면 가족과 친구한테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야기들과 표정들이 지면을 뚫고 나와 닿는다. 


내가 겪는 고통과 통과하고 있다고 믿는 어려움이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른 모습과 강도로 나타나고 있다는 앎은 결코 가볍지 않다. 어떤 남자는 자기 생에서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임종을 어떻게 자신이 감당할지 몰라 헤매고 어떤 아버지는 약물 중독으로 생모와 헤어진 아이에게 잔뜩 기대감을 고취시켜 설레게 만들었다 소개하려던 여자친구과의 뒤늦은 실연을 고백해야 하는 고통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중년의 열정적인 커플은 한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있다. 그녀가 떠나고 난 후의 삶을 그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겉으로만 보면 그저 평범한 산책자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입을 열자 이런 상상도 못할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브라질 상파울루의 벤치에 앉아 있던 턱수염이 수북한 중노년의 남자는 현자의 조언을 남겨준다.


"난 모든 걸 깨달았습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게 놔두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그럴 일이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잘 되는 일은 없다. 생각을 하는 것보다 우선 살고 볼 일이다. 어린 시절 학교를 다닐 수 없어 교복 입은 아이들을 부러워했던 파키스탄의 아버지는 딸아이가 하교하기만을 기다린다. 딸아이는 학교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기억해내어 미주알고주알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젊은 아빠에게 이야기해준다. 아버지는 오늘도 그 딸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자신이 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는 딸의 존재만으로 그 아버지의 하루는 빛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버텨낸 사람들의 눈빛이 아름답다. 젊은이들의 거리인 뉴욕에서 저자가 평생 해로한 아내가 떠난 후 셰익스피의 소네트를 읽던 할아버지의 사진을 찍었던 것처럼.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2-10-04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니까 당장 읽고 싶어져요!!^^

blanca 2022-10-04 18:20   좋아요 0 | URL
너무 좋아서 <휴먼스인뉴욕>도 주문했어요. 사진만 좋은게 아니라 테마별 도입부마다 쓴 저자 글이 어마무시 좋아요. 이 사진작가 뭐지? 하며 찾아보니 삼십 대에 만든 책이라 더 놀랐어요.

scott 2022-10-0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내마음대로 그어 버릴 수 있는 일직선이 아닌 곡선!^^

blanca 2022-10-04 18:21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위로가 필요합니다. 임윤찬 직관 및 하루키 신간이 큰 위로가 될듯한데 두 가능성 다 요원해 보입니다.

바람돌이 2022-10-04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 노란 옷의 할머니는 이번 전쟁에서 무사하실까하는 생각부터 먼저 드네요.
사실 모든 사람은 다들 자기 삶만큼의 걱정을 다 안고 살아가는거고, 그건 누군가의 고통이나 고민과 비교 불가이지 싶어요. 결국 내가 타인의 고통을 다 알수는 없는거고, 나의 고통은 나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니까요.
그런 와중에도 또 가끔은 달콤한 초콜릿이 문득 내 앞에 나타나는 날도 있으니 아 이래서 또 사는구나하기도 하잖아요. ^^

blanca 2022-10-05 10:21   좋아요 0 | URL
저도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하더라고요. 오늘 하늘이 눈이 부시네요. 또 이런 하늘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1-09 1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blanca 2022-11-09 20:09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덕분에 알았네요.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2-11-09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blanca 2022-11-09 20:09   좋아요 1 | URL
따뜻한 댓글 감사합니다. thkang1001님도 행복한 나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