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게 얘기하면 들어 처먹지를 않는’ 이유는 좋게 얘기한다는 그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복종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동물이 보이는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지만 아무 목적이 없는 행동’을 정형 행동이라고 부른다. 돼지는 지능이 높고 지루한 걸 못 참는다. 동물학자들은 정형 행동이 사회성이 높거나 지능이 높은 동물이 고립되거나 외부 자극이 결핍된 환경에 감금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신 장애에 의한 행동 장애라고 설명한다. 주로 동물원의 동물에게서 자주 발견되는데 공장식 축산 시설 속의 돼지에게도 이런 정형 행동을 발견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2003년 2월부터 회원국의 모든 돼지에게 의무적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공이나 천장에 매달아놓은 쇠사슬 같은 것)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과거 소련의 죄수들은 ‘에땅’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에땅은 이송이란 뜻인데 강제수용소에서 다른 강제수용소로 옮겨 갈 때 쓰는 말이었다. 에땅은 수용소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일이었고 실제로 새 수용소가 나은 곳일 수 있었는데도 죄수들은 처음 가는 곳을 더 무서워했다고 한다. 삶의 목적을 모두 잃고 이제 살아남는 것밖에 남지 않은 사람에게 익숙했던 환경을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문제의 ‘세상’은 사장이 제대로 된 사료 대신 음식 쓰레기를 개들에게 먹일 수 있게 해줬고 그가 산과 논을 더럽혀도 그대로 내버려뒀고 노동자들을 혹사시켜도 문제 삼지 않았다. 그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법체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계산에는 아직 동물이 겪는 고통은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니 사장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러니 어떡해? 개라도 키워야지. 안 그럼 어쩔 거야? 개장수 천하다고 가족들 굶길 거야? 개 잡는 거 잔인하다고 애들 공부 안 시킬 거야? 만 원이라도 더 벌려면 뭐든지 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그것 말고는 다 드라마고 유행가야.

동물들과 마주하며 지냈던 시간은 나를 약자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무감각해졌다. 지난 몇 년간 내 삶을 관통한 가장 일관된 정서는 분명 ‘무감각함’일 것이다.

사장은 개고기도 고기의 하나일 뿐이라고 했지만 생산 과정을 살펴보면 고기라고도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육식에도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이 있을지 모르고 개고기 업계에도 스스로를 정당화할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날 본 모습 중에 회색 영역에 속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잘못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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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2-27 16: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면 알수록 육식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처음 인용하신 ‘좋게 얘기하면 ~‘부분은 예전 직장상사가 떠오르네요ㅎㅎㅎ

유부만두 2020-12-27 17:54   좋아요 1 | URL
어느 곳이나 갑질하면서 으스대는 것들이 있지요.

이 책은 채식 홍보라기 보다는 ‘제대로 된‘ 일터, 먹거리 생산과 처리, 무엇보다 인간이 먹고 쓰고 버리는 존재라는 걸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28년 경력의 오성급 호텔 조리사. 책을 읽는 것을 즐기는 그가 매달 한 권씩, 음식 주제의 신간을 읽고 엣세이 형식의 리뷰를 썼다. 이 책은 그의 독서와 음식 사랑, 또 그의 인생 철학에 대한 글 모음이다. 하지만 무게 잡고 교훈을 설파하는 아저씨의 글은 아니고 책 좋아 하는 사람이 책을 읽고 글을 써서 책으로 내는 것에 대한 감동과 흥분과 뿌듯함이 가득찬 책이다. 문장과 어휘는 소박하고 성실하다. 그에게 (거의) 모든 책은, 특히 그의 분야, 음식에 대한 책은 열정의 대상이 된다. 그는 직업인으로서,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책을 대하고 그 안의 음식과 다양한 문화를 만난다. 더해서 수줍게, 때로는 흥분해서 독자에게 건넨다. '이 책을 읽어보세요. 맛있습니다.' 


재주를 부리거나, 많이 다듬고 꾸민 글이 아니라 한호흡에 읽기에는 조금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50대 기혼 남성,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했어도 잘난 척 안하고 '라떼'를 설교하지 (아, 물론 아주 없을 수는 없지만) 않는 착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여성 요리인에 대한 이야기와 '엄마 밥', 딸 바보에 대한 부분은 ... 그렇다. 그러하더라. 뭐, 착한 사람이에요. 남북정상 회담 뉴스를 따라가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상태를 염려하며 식단을 궁리하고 역사와 문화 속의 음식도 고민하는 자세도 보인다. 편집에서 응? 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정색하고 싫다고 지적한 어떤 욕설을, 감탄사로 쓰이는 그 단어의 뜻까지 굳이 흉한 의미를 적어 놓었던데 바로 앞 챕터의 시작이 그 욕설이었다;;; 



요리사인 나는 고추를 다룰 때마다 계영배를 떠올린다. 계영배는 과유불급,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는 술잔이다. 잔의 3분의 2 정도까지 술을 부었을 때는 술을 온전히 담고 있지만 그 이상 담으면 아주 희한한 현상이 일어난다. 술잔 밑에 뚫린 구멍으로 모조리 새어나가 버리고 빈 잔이 된다. 고추도 그러하다. 고추는 절대 음식에 과하게 쓰면 안된다. 맛의 밸런스를 단숨에 깨버린다. (22-3)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이라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출신의 법관이자 미식평론가인데, 그가 1825년에 쓴 Physiologie du gout(미각의 생리학)은 한마디로 '미식담론의 경전'으로 추앙받는 책이다. 그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다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고 했단다. (31)


요즘도 TV를 켜면 요리 관련 프로그램이 차고 넘친다. 탐식을 강요하는 연예인 먹방, 미식은 커녕 포식을 강요하는 미디어 매체들. '푸드 포르노'라는 기막힌 작명을 십분 이해한다. (172)



이 책의 저자도 강력 추천하는 음식 책은 정소영 작가의 <맛, 그 지적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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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2-26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이 왜 이렇게 끝없이 나오나요!!ㅠㅠ 아참! <맛, 그 지적 유혹> 너무 좋았어요!! 👍

유부만두 2020-12-26 15:27   좋아요 0 | URL
책은 계속 계속 나오고 밀린 책도 쌓여가고 그러네요.

<맛, 그 지적 유혹> 저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어요! ^^

파이버 2020-12-26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리하는 분이 책을 요리한다면 어떤 글이 나올지 궁금하네요ㅎㅎㅎ
유부만두님 프로필 사진 바꾸셨네요~!

유부만두 2020-12-26 15:28   좋아요 1 | URL
베르사이유의 장미, 제 사춘기의 기억이에요. ^^

파이버 2020-12-26 15:40   좋아요 1 | URL
오스칼이군요 멋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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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 다른 책

궁금해 하던 팡팡의 우한일기가 나왔다. 


코로나19의 비극이 처음 터져나온 곳, 그리하여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람들은 세계를 팬데믹으로 몰아갈 이 바이러스를 '차이나 바이러스'나 '우한폐렴'이라 지칭하며 거리를 두었던 곳 - 중국 우한에서 일어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돌연한 창궐과 일파만파의 확산, 은폐와 침묵, 고위직들의 안이한 대응과 평범한 사람들의 절규를 목격하고, 그 실상을 낱낱이 기록한 작가의 일기가 출간되었다. (알라딘 책소개글) 



우한 봉쇄 때 트위터에 뉴욕 타임즈 기자의 현장 리포트가 매일 올라왔었다. Amy Qin (@amyyqin)은 결국 중국 정부에 추방되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리포트 역시 정리되어 기록으로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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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숫자들은 우리를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발언은 이보다는 점성이 강해야 할 듯싶다. 이들이 도깨비풀처럼 작은 가시를 품고 있어 아무에게나 달라붙고, 털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그 가시들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억센 뿌리를 내려 끊임없이 사람들을 불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무언가였으면 좋겠다.

조금씩 전문 용어가 가지고 있는 마법 같은 힘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병아리들을 ‘처리’할 때는 죽인다, 잡는다고 하는 대신 불량품을 도태시킨다고 중얼거린다. 하자가 생긴 물건을 처리하는 거다. 이건 도태다. 도태, 도태, 도태. 어느 순간엔 정말 닭을 죽이는 것이 문서를 파쇄하거나 삼각 김밥을 폐기하는 것처럼 사무적으로 와닿을 때가 있다. 도태 대신 B52나 비활성화라는 말을 썼다면 사무적인 순간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많은 수의 닭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건 소리나 그림자가 아니라 다른 닭이다. 실제 위협을 감지하고 놀란 닭을 본 다른 닭 역시 그 위협을 경험한 것처럼 놀라며 뛰어오른다. 사람 식으로 말하자면 누군가 미친개에게 물릴 뻔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전해, 전해 들은 사람 역시 개와 마주치면 당사자만큼이나 놀라는 것이다. 강한 자극을 주면 주름을 없애기 위해 식탁보를 펄럭일 때처럼 놀란 닭들의 물결이 퍼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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