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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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은 한입에 이삼십 명의 사람들을 집어삼킨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단번에 꿀꺽 삼키는지 목으로 넘어가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1권. 46~47)

삼십여 분간, 갱도는 그런 식으로 채탄부들이 내리는 적치장의 깊이에 따라 달라지는 왕성한 식욕으로 인간 가축들을 집어삼켰다. 결코 달래지지 않는 허기를 드러내며, 세상 사람들 모두를 소화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창자를 끊임없이 꿈틀대면서. 갱도는 인간 가축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졌다. 그곳을 지배하는 어둠 속에서는 어떤 생명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으며, 케이지는 여전히 탐욕스로운 침묵 속에서 허공을 뚫고 또다시 위로 솟구쳤다. (1권, 48)

탐욕스러운 갱은 하루치 식량인 700명에 가까운 광부들을 집어삼켰다. 이 시각, 그들은 거대한 개미집 같은 이곳에서 고목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대지 곳곳에 온통 구멍을 내고 있었다. 겹겹이 쌓인 지층에 짓눌린 무거운 정적 속에서도 바위에 귀를 바짝 붙이노라면, 한창 활동중인 인간 곤충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권, 64~65)

"천장이 조금씩 내려앉고 있어서요." 자샤리가 대답했다. "여기 좀 보세요. 틈이 갈라져 있잖아요." 이러다 진짜로 무너질까봐 겁나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 그럴리가! 무너지다니! 그리고 설사 정말로 무너진다 해도 그런 일을 어디 한두 번 겪었나.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남지 않았는가. 그는 결국 역정을 내면서 아들을 다시 막장으로 돌려보냈다. (1권, 70)

케이지의 작동이 잠시 멈춘 사이 카트린은 그들의 말에게 다가가 마치 친구에게 하듯 말을 건네며 쓰다듬었다. 땅속에서만 십 년을 보낸 하얀색 말은 바타유로 불렸고, 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바타유는 십 년 동안 전혀 빛을 보지 못한 채 지하의 어두운 갱도를 오가며 늘 똑같은 일을 하고 마구간에서도 늘 똑같은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살이 두둑이 찌고 털에 윤기가 흐르며 호인처럼 생긴 바타유는 지상의 불행을 피해 땅속에서 현자 같은 삶을 영위하는 듯 보였다. [...]
이제 나이가 들어, 고양이를 닮은 놈의 눈은 대로 슬픔으로 흐려졌다. 어쩌면 막연한 몽상중에 자신이 태어난 마르시엔 근처의 물방앗간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스카르프 강가에 서 있는 물방앗간은 너른 목초지로 둘러싸여 있었고, 언제나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에서는 무언가가 불타고 있었다. 거대한 램프 같은 것이었는데, 동물의 기억력으로는 그게 뭔지 정확히 기억해내기가 힘들었다. 녀석은 기운이 빠진 다리로 버티고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떨며 태양을 기억해내기 위해 헛되이 애를 쓰곤 했다. (1권, 97~98)

바타유는 광부들의 비아냥에거림에도 아랑곳없이 활기를 띠었다. 아마도 새로운 동반자에게서 바깥에서 실려온 좋은 냄새를 맡은 듯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풀숲에서 밴 햇볕의 내음을. 그리고 느닷없이 경쾌한 음악같은, 연민이 깃든 흐느낌이 느겨지는 낭랑한 울음을 터뜨렸다. 한줄기 바람처럼 실려온 아득한 과거의 추억을 반기는 환영 인사이자, 죽어서야 다시 땅위로 올라갈 수 있는 또하나의 죄수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권, 99~100)

이렇게 비참한 삶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된 노동 끝에 파김치가 된 아직 어린 여자들이 저녁이면 또다시 끝없는 노동과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녀들이 항상 굶주림으로 고통받을 생명들로 자신을 채워간다면 이런 악순환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1권, 201)

아니, 이렇게 사는 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에 도형수들을 벌주기 위해서나 시켰을 법한 일을 짐승처럼 해내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그러다 죽는 건 예사였다. 그런데도 저녁 식탁에서 고기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삶이라니! 물론 굶어죽지는 않았다. 먹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겨우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을 수 있었다. 게다가 허구헌 날 빚에 짓눌려, 마치 빵을 훔치기라도 한 것처럼 빚쟁이에게 시달리지 않는가 말이다. 일요일이 되면 기진맥진해 잠을 자는 게 고작이었다. 유일한 즐거움이라고는, 술에 진탕 취하거나 마누라한테 아이를 만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맥주는 배를 너무 나오게 하고, 자식새끼는 키워놓으면 부모를 우습게 알았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이렇게 사는 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1권, 260)

뭐라고! 그럼 우리 같은 노동자들은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건가! 이제 머지않아 이 모든 게 달라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는 노동자들이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일하던 시절에는 광부들은 탄광 속에서 마치 짐승처럼, 석탄을 캐내는 기계처럼 살아갔다. 언제나 땅속에 머물면서, 바깥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눈과 귀를 막은 채로. 그래서 그들을 지배하는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광부들을 마음대로 사고팔며 그들의 살을 뜯어먹고 살 수 있었다. 정작 광부들 자신들은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땅속 깊은 곳에서 광부들이 깨어나고 있었다. 곡식의 낟알처럼 땅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어느 날 아침, 들판 한가운데서 그 싹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게 될 터였다. 그렇다, 인간들이 자라나는 것이다. 정의를 바로잡을 한 무리의 인간들이. (1권, 261~262쪽)

"행복해지기 위해 선한 신과 신의 천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여러분 스스로가 이 땅에서 행복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거죠?" (1권, 264)

늙은 말이 자신의 동료 트롱페트가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후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녀석은 갱 안으로 내려오는 트롱페트를 본 그 순간부터 동료에게 엄청난 애정을 느꼈다. 마치 노철학자가 젊은 친구에게 애정 어린 연민을 느끼며, 자신의 체념과 인내심을 나눠줌으로써 친구를 달래주고 싶어하는 듯했다. 갱내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트롱페트는 고개를 숙이고 기계적으로 탄차를 끌었다. 녀석은 어둠 때문에 눈이 멀다시피 한 채 늘 바깥세상의 햇빛을 그리워했다. 바타유는 트롱페트와 마주칠 때마다 머리를 쭉 빼고 흔들며 콧바람을 내면서 위로하듯 동료의 몸을 혀로 어루만져주었다. (1권, 292)

새로운 요리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마치 정복당한 도시의 약탈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에게 하듯 경의를 표했다. 하지만 이처럼 억지스러운 유쾌함 뒤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도로 쪽을 힐끗거리게 하는 은밀한 두려움이 감춰져 있었다. 마치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이 밖에서 그들의 식탁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건 아닌지 두려워하는 듯했다. (1권, 321)

무엇보다 그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느낌,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느낌은 그의 자만심을 끊임없이 부추겼다. 과거에 한낱 기계공이었던 그가, 손이 시커멓고 때묻은 채탄부에 지나지 않은 그가! 이제 한 단계 높은 세상으로 올라선 그는 지적인 만족감과 안락한 삶을 맛봄으로써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부르주아지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1권, 353)

이러한 극단적인 빈곤함은 사냥군에게 쫓겨 토굴 속에서 그대로 죽기로 결심한 짐승들처럼 그들을 더욱 더 고집스레 버티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누가 먼저 포기하자고 얘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동료들과 함께 모두 끝까지 버티기로 맹세한 터였다. 그들은 그렇게 버틸 것이었다. 무너진 바위 아래 누가 깔려 있을 때도 모두 함께 버텨냈던 것처럼.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1권, 403)

갱은 체념을 배우기에는 더없이 좋은 학교였다. 열두 살 때부터 줄곧 불과 물을 삼켜왔던 그들에게 일주일 정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참는 것쯤은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군인 같은 자부심으로 한층 배가되었다. 매일같이 죽음과 맞서 싸우는 가운데 희생정신을 체득한 광부로서의 자부심이었다. (1권, 403)

하지만 광부들은 이제 더이상 예전처럼 어두운 땅속에서 말없이 바위에 갈려 죽어가는 무지한 짐승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깊고 깊은 막장에서도 군대가 자라나고 있었고, 그 싹이 움터 자라난 수많은 시민들이 언젠가 뜨거운 태양이 세상을 환히 비추는 날 대지를 뚫고 세상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권,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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