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절판


세제를 스펀지에 흡수시켜서 바닥의 일부에 대고 동글동글 원을 계속해서 그려댄다. 눌러 붙어 있던 기름 층이 얇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머릿속은 점점 더 새하얘진다. 지겹게 계속되던 시어머니의 싫은 소리가 사라지고 유아원 대기 리스트가 사라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해답이었나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사라져 그냥 뻥 뚫린 공백이 넓어진다. 그 공백은 언제까지고 거기에 있고 싶은, 기분 좋은 것으로 느껴졌다.-62쪽

"난 무서워. 무섭다는 건 대단한 거야. 난, 어른이 되어서 제대로 혼자서 돈도 벌고 있고 영업에도 뛰어들고 훨씬 나이 많은 남자와 싸워서 이길 자신도 있어. 그런데 아이를 낳는 것이 무섭다니, 뭐라고 할까. 좀 한심해. 하지만 자기가 낳은 아이가 성장해서 내가 모르는 일로 절망하거나 상처받을 걸 생각하면 상상만 해도 무서워. 내가 부모님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그런 아이였거든. 나 같은 아이가 나오면 난 정말 싫을 것 같아." -123-124쪽

갑자기 시작된 일하는 엄마들에 대한 비난에도 사요코는 애매하게 맞장구를 치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기시감이라기보다 그것은 기억의 재생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몇 살이나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책상을 붙이고 도시락을 함께 먹던 고등학생 때와 전화 달라진 것이 없다. 가공의 적을 만들어서 한순간 강하게 단결한다. 하지만 그 단결이 놀라울 정도로 무르다는 사실 또한 사요코는 알고 있었다. [...] 무엇을 위해 우리는 나이를 먹는 것일까. 큰 창 밖, 잎을 떨군 은행나무 가로수를 바라보며 사요코는 멍하니 생각했다. -356쪽

그 생각으로 얼굴을 빛내면서 벌써 메뉴를 생각하고 있는 그 부인을 보면서 사요코는 드디어 깨닫게 된 것 같았다. 왜 우리가 나이를 먹는지. 생활 속으로 도망가서 문을 닫아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만남을 선택하기 위해서다. 선택한 장소를 향해서 자신의 발을 내딛기 위해서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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