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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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면 (가능한 한 밤에 읽으시라, 고 작가는 썼다) 끝내기 전에는 덮기 힘들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가 아니다. 주인공인 노시인은 이미 죽어버렸고, 그의 연적이었을 다른 남자도 죽었다. 그리고 한 "처녀"는 요망하게 실쭉거리며 웃는다. 읽는 나를 잡아 끄는 힘, 그 관능은 바로 문장이다. 소설이 담는 이야기 못잖게 매력적인 문장은 끝까지 독자를 놓지 않는다.  

이미 난 독한 일본 소설을 한 권 읽었기에 어떤 설정에도 놀라거나 질리지 않을 준비가 되었고, 원조교제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에도 코웃음을 치면서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들의 별난 사랑 이야기를 읽어 주리라, 그리고 그들이 그 어떤 인간의 근본적인 본능이나 애욕을 꺼내도 내려다 보아 주리라, 마음 먹었다.  

늙은이라 자신을 자책하는 이적요는 이제 일흔이 되었고, 합병증으로 죽음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 내내 풀어 내놓는 것은 젊은 사람의 문장이다. 그 나이의 절반인 서지우는 (소설 후반부 '호텔 캘리포니아'에서 나오는 따블, 따따블을 다시 생각해 본다. 소설에서 가장 화려한 부분.) 그 차이만큼 더 늙어 보인다. 이 두사람이 만드는 애증의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고 은교는 불평했지만, 그건 은교라는 인물이 존재감이 없기 때문이다.  

제목까지 안겨주었지만 (한달반 만에 폭풍같이 만들어 냈다는 이 이야기의 인터넷 연재시 제목은 <살인 당나귀>다) 이적요 시인에게 은교는, 젊은 생명력을 품는 "사랑"의 본질로, 한은교 개인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시인도 은교의 마지막 모습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걸 깨달았는지 "너를 너무 몰랐구나" 하고 독백한다. 그에게 은교는 "처녀",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내 집의 아내 (300)" 였다. 서지우도 그렇다. 처음엔 미지근한 관계였다가, 동침도 하고, 욕심도 부려본다. 그러다 두 남자가 합창으로 "사랑"을 부르짖는다. 그 사이사이, 은교는 무용을 좋아하며, 어려운 집안에서, 일하는 홀어머니 (에게 습관적으로 맞고) 대신 동생들을 거두기도하고, 아는 오빠한테서 가슴에 헤나로 그림도 그리게 하고, 재수도 안하고 대학으로 진학한다. (그리고 왕따인가 보다. 여자 친구가 하나도 없다) 아, 무엇보다 흰살에 매혹적인 가슴선, 허리선을 가졌고, 물론 긴 생머리를 흩날린다. 작가도 이 완벽한 십칠세 소녀가 민망했던지 노래만은 못하는 설정을 안겼다.

사랑인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랑이었다면, 이적요를 향한 서지우의 마음이었을까, 서지우를 거두던 이적요의 배려였을까. 그둘은 진정 애증으로 묶여있었다. 헤어지기에는 서로의 과거가, 그리고 치부가 부끄러웠을 게다. 글쓰기를 둘러싼 그 둘의 이야기가 더 발전되지 않고 은근슬쩍 은교에 대한 감정싸움으로 방향을 튼 것이 못내 아쉽다. 은교를 내세우고 여신으로 치켜올렸으니, 덩달아 젊음도 칭송되어야 했다. 그러니 늙음은 죄요, 추함이라는 대비가 만들어진다. 죽어가는 이적요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다시 한번, 책 읽는 내내 노시인의 나이가 절감되는 순간은 노랑머리가 등장하는 그 한 장면 뿐이다.  아무리 은교가 "할아부지~" 하면서 콧소리로 부르고 큭큭 거려도, 그는 정정한 몸과, 문장으로 내 앞에 있었다. 

박범신 작가의 책은 <고산자>만 읽었다. 지루하게 읽었던 전작에 비해 생생하고 관능적인 이 책은 주제나 문학적 의의는 제껴두고 (이야기 속에도 경직된 문단에 대한 비판도 많다)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폭풍같이 읽어냈지만, 끝내고 나서도 남는 이 찜찜함은....음....내가 열일곱의 따블도 이미 넘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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