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쟁이, 루쉰
왕시룽 엮음, 김태성 옮김 / 일빛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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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때문에 루쉰의 미술적 재능과 예술론에 대한 책인줄 알았다. 그래서 초반부를 읽는 내내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 책은 그의 대단한 그림 실력이나 대단한 예술론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늦잠을 자느라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의 꾸중을 들으면서 책상에 이를 조早를 칼로 새겨넣는 학생의 머리통이 있었다.  

1920-30년대에는 중국소설을 일본어로 번역해 내는 작업의 조언을 위해 중국의 옛 문 모양, 손오공의 몽둥이, 무인들의 화창을 원고지나 편지글 한켠에 빠른 펜으로 그려 넣어 설명하는 중국 소설의 애호가가 있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연인에게 멍청한 간식이나 건네는 숫기없는 청년이 서 있다.  

유럽의 목판화나 삽화 도안들을 섬세하게 베껴내어 수채화로 색을 입혀 수집하던 그는, 아름다운 책을 '중국인들을 위해서' 만들고자 했다. 새로운 시대에서 군중들을 이끈다는 자의식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그의 자의식이 별나거나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좋은 러시아나 독일의 소설을 꼼꼼히 번역하여 중국의 독자들과 나누길 원했고, 좌익 문인들의 단체에서 활동했지만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없는 죄를 만들어 무고한 이를 법의 테두리에 가둘 리 없다. (234)'고 하면서 자신의 '한가함에 대한 글'을 설명했다.  우리 역사 못지 않게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그는 책을 만들 때면, 값을 낮추더라도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자 했고, 강렬하면서 간단한 표지를 선호했고, 목판화의 소개를 위해 체홉의 소설을 이용할만큼 융통성도 있었다. 그림이나 글 어느 하나가 우월한 위치에 있기 보다는 책으로 묶여 독자를 만날 때면 하나로 녹아 조화를 이루게 했다.  

그의 책들이 금서가 되고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금지된 제목인 '위자유서'는 라틴어로 표기하고 그 아래 '불삼불사서'(不三不四書 - 얼토당토않는 글이라는 비판)라고 써서 책을 묶어내기도한, 그는 대인배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답답한 외침' 과 '한담'들을 미리 알지 못해 겉표지 도안으로만으로 만나면서도 그의 짧은 인생(56세에 병사했다)동안 남은 숱한 글에대해 존경이 샘솟게 된다. 이래서, 책은 표지로도 판단하게 되는가보다. 그의 순한듯, 하지만 뼈있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달이 밝고 바람이 맑으니 이렇게 좋은 밤이 또 어디 있을까?" 좋다. 우아한 풍류의 극치이니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하지만 역시 풍월에 대해 언급하면서 "달은 어두워 사람들의 밤을 죽이고, 바람은 높아 하늘에 불을 지르네"라고 노래한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다? 역시 한 수의 고시라 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풍월을 논하는 것도 결국은 혼란을 얘기하려는 것이지만, 결코 '살인과 방화'를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풍월을 많이 얘기한다'는 것을 '국사를 논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분명한 오해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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