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에서 말하는 문학에 대한 인식을 찾아볼 수 있다고 앙쿠안 콩파뇽은 단언한다. 그것은 '내적인 책의 번역'으로서의 문학이란 개념으로 우리 마음속에 간직한 책을 각자 자기 고유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곧 문학이라는 견해다. (410)




[프루스트는] 병으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명문 콩도르세 중고등학교를 거쳐 파리 대학에서 법학사와 문학사를 공부했고 아버지의 성화에 도서관 사서로 취직했지만 한 번도 근무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시간을 포부르생제르맹 귀족들의 살롱에서 보냈다. (411)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해체되는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현란하게 교차되는 세계에서, 고정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세계에서 매일매일 사멸하던 자아는 이제 뜻하지 않은 기억의 힘으로 비로소 저 끔찍한 존재의 해체와 죽음이라는 시간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412)




생시몽이 루이 14세 시대 사회상을, 발자크가 왕정복고시대 사회상을 보여 주려 했다면 프루스트는 19세기 말 '벨 에포크' 시대 사회상을 예리한 시선으로 관찰한다. 그러나 19세기 문학이 보여주는 단순한 사회 재현이 아닌 외적 현실이 의식에 투영하는 '반사성'을 통해 재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발자크와 플로베르를 결합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413)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서구 문학사에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는 프랑스적 전통인 라신과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일종의 편집증 환자이자 질투하는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 낭만주으이 전통인 슈베르트와 슈만의 사랑하는 사람이다. 연인들의 행복한 결합이나 상호 이해와 믿음을 바탕으로하는 독일 낭만주의자들과 달리 프랑스적인 사랑은 질투와 부재의 동의어다. (4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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