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에 불그스름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곧 해가 뜰 것 같았다. 나는 더 걷기가 싫어서 쭈그리고 앉아 파도 소리를 들었다. 

처업, 처업, 처업.

거대한 동물이 뭔가를 천천히 먹어 치우는 소리 같았다. 여기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모래밭에 쏟아 놓은 얘기들이 바다의 배 속으로 끝도 없이 빨려 들어갔다. (곰의 부탁, 30)



나는 지금껏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 몫의 운을 모조리 써 버린 것 같아 더는 배짱부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심장이 혼자 숨죽인 채 뛰고 있었다. 날은 여전히 무덥고 콜은 아직 뜨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헬멧을 눌러썼다. (헬멧, 86)



좀 뜻밖이었다. 나는 내가 그 사건을 얼추 잊은 줄 알았다. 세상에는 다급하고 중요한 일들이 많았고, 기를 쓰고 외운 영어 단어도 이틀만 지나면 기억 속에서 흐물흐물 지워졌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해야지 생각하자마자 그날의 색과 소리와 냄새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누군가 "서프라이즈!" 하면서 눈가리개를 열어 젖힌 것 같았다. (언니네 집, 126)



돈이 없으면 기분이 더러워요.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먹을 때도요. 돈 몇백 원이 뭐라고, 사실 그거 조금 아낀다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도 다 아는데,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꼭 더 싼 걸 집게 되요. 내가 또 싼 음료수를 마시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순간 기분이 안 좋아지고 그러면 또 혼자 막 생각해요. 나는 처음부터 이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고, 절대 돈 아끼려고 그런 게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자꾸 하다 보면요, 제가 처음에 뭘 좋아했는지 점점 헷갈리게 돼요. 꼴랑 음료수 하나 마시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 하죠? 저는요, 돈이 없어서 뭘 못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요, 이런 게 더 미치겠어요. 내가 나를 자꾸 쪼그라들게 하는 거요. (그 뒤에 인터뷰, 177)



세상은 순식간에 나아지지 않아서 여전히 변방으로 밀려나는 아이들을 만나곤 합니다. 경계 위에 서 있는 아이들은 오늘도 불안을 견디며 걸음을 내딛습니다. [...] 어설픈 위로도, 섣부른 희망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나는 숨죽여 소설을 씁니다. 너는 괜찮아? 짧은 인사를 남기기로 합니다. 거기 있음을 아는 것이 나의 시작입니다. (작가의 말,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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