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태호의 만화 [미생]에서 오 상식, 장 그래와 안영이는 세상과 사회가 짜놓은 그물에 퍼덕이다가 그만 자리잡지 못합니다. 사회는 상식과 안녕이 자리잡지 못하는 곳이죠. 그래그래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상식을 지키고 안영을 구하지만, 세상은 집요하게도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좀더 야멸차게 굽니다. 오상식도 그자리에 남지 못하죠. 장그래도 정규직의 반열로 들어서지 못하게 됩니다.


석사만 밟아도 교수를 하던 시절, 대학만 나오면 취직이 되던 시절....은 계약직으로 인턴으로 이중삼중의 문을 두어 안녕에 출입증을 발급하게 되는 것이죠.  안녕이란 자리는 높은 첨탑위에 몇개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안녕만을 탐하라고, 너의 안녕만을 구하라고 주문합니다. 남의 안녕을 구하다가는 너마저 안녕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는 사이 안녕한 자리는 모두 금방석으로 두툼해져 있습니다.


만약 안녕이라는 것이 독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안녕을 나눠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떨까요. 십일조는 아니더라도 아주 약간만 나눌 수 있다면 안녕한 자리는, 안녕한 삶들은 더 늘어날 수 있을까요.

 

안녕은 어디에 있는가요. 돈을 대신 굴려주고, 대신 물건을 날라주고,  패스트푸드처럼 빨리빨리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달콤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건가요. 대리운전처럼 조금 취하거나 흐트러질 때 맡길 수 있는 것이라면 좋을텐데요. 사회는 점점 안녕을 지키지 못해 위험은 점점 커져갑니다.  아이들의 삶을 대신 쫓아가주는 학부모들이 늘어납니다. 아이와 부모의 삶도 안녕 못합니다. 너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아왔는데라는 후회막급과 부모님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푸념처럼 안녕은 오간데 없고 불편만 덩그러니 남는게 삶의 조각들입니다.

 

안녕에는 약간의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가 싶네요. 아니면 좀더 멀리보고 두는 수가 필요한거겠죠. 돈만쫓아가는 대마를 잡으려면 길목 요소요소를 미리 제대로 지켜내야 합니다. 물러나지 말아야 할 곳에는 물러나지 말아야 하는 거구요. 노후와 집과 병과 교통비와 교육에는 더 큰 목소리를 내야합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나에게, 우리 딸과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고 지켜내야 되는거죠. 빚으로 집사고, 노후가 걱정되어 더 더 달라고하고, 내 자식만은 더 시킬려고 ..어쩌면 나만의 안녕이 점점 더 안녕하지 못한 좁은길만 내놓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당장 나와 내 피붙이만의 안녕에서 안녕에서 한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을까요. 남의 안녕이랑 내 안녕이 겹치기도 하는 것이라고 비교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겠죠. 세금내고 할 만큼 하니까 제발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해 되돌려주시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녕하십니까?의 더 안녕들 하기위해 꼭 두집은 내어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대신 살 수 없듯이 정치도 대신해주는게 아니라는게 지금까지 목도한 사실아닌가요. "안녕들하십니까!"로 아직 한집밖에 나지 않은 안녕이지만 상식과 속마음을 읽어주는 안영들이 서로 기대고 한발 움직여 디딤돌은 만들어놔야겠습니다. 더 안녕들하도록... ... 어린 안녕들이 더 안녕하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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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뒤집어서 말한다. 희극적 반복은 진정한 비극적(드라마적) 변형을 실제로 앞서는 것이라고, 자기 행위가 '너무 벅찬'것을 알게 된 현대의 역사적 행위자는 그를 행위 자체와 동등하게 만들어주는 생성/되기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30


첫째 정치는 창조적이지 않다. 그것은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만이 창조적이다. 둘째, 욕망은 단적으로 말해 철저히 사회적이다. 셋째, 오직 사회적인 것만이 새로운 욕망을 낳고 그 사회에서 가능한 정치들을 창안해낸다. 38


 정 치


'가장 약한 고리'와 '잔여물'이 두가지 중심문제다. 우리는 앞서 이것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에서 문제적이며 해결책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해결책이 부정적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결함이 있는 이념이라는 사실이다. 곧 해결책이라는 게 잠재적 대상(혁명)의 전치에 불과하거나 (영국이나 독일에서 보듯) 역사적으로 결정적 조건들을 동반했는데도 '현행화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249


'실천적 투쟁은 부정적인 것을 경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와 긍정을 경유한다. 그것은 문제들의 결정과 문제를 그 진리로 복원하는 과정을 경유하며, 마침내 그 문제들이 의존하는 명법에 의거해 진리를 평가함으로써 실천적 투쟁을 이루어간다.'(들뢰즈: 1994) 252


정치학자들의 오랜 전통에 따르면 문제는 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정치철학의 근본 문제는 아직도 정확히 스피노자가 그토록 분명하게 말한(그리고 빌헬름 라이히가 재발견한) 바로 그것, 즉 "왜 인간들은 마치 노예 상태가 구원인 것처럼 완강하게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위해 싸우는가"하는 것이다'(네그리 하트: 2000) 260


사회적 진보, 정치적 진보, 그리고 작업장의 진보는 서로를 조건 짓는다. 그러나 혁명적 변형은 집합적 노동경험에서 태어난 새로운 주체적 의식의 창조과정 속에서 일어난다. 이 계기가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것이다. 모든 내기는 개인들에 의한 주체성의 집합적 창조라는 바로 이 문제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특이성, 자율성, 그리고 자유는 자본주의적 그리고/또는 사회주의적 질서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을 공고하게 통일하는 세 가지 깃발이다. 이제부터 이 연합은 노동의 해방과 해방의 노동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할 것이다.(가타리.네그리 1990) 280


[제국]에 대한 거의 모든 비판자들이 네그리와 하트가 이 책을 정연한 논리에 맞춰 쓴 게 아니고 욕망을 이용하는 기계를 발명하고자 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손에 든 책이 정치적 욕망의 분산된 형식들을 한데 끌어모으는 기계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탓이다. 책으로서 [제국]은 확실히 많은 단점을 갖고 있으며, 그 주요한 분석적 결점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많이 기울이진 않았다. 하지만 기계로서 이 책은 제1세계의 감응되지 않은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학에 있는 세계시민주의적 망명자, 포스트-휴먼과 사이버 유물론자를 포함한 모든 포스트-주체성이 지닌 온갖 종류의 욕망을 연결하는 데 최고의 효과를 낳았다. 286


첫번째 귄리로 인식된 것이 '욕망에 대한 권리'라면, 두번째 근본적 권리는 '삶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발명할 권리'가 될 것이다.(들뢰즈.파르네 1996) 이 두 가지 근본 권리는 인간에 대한 오래된 보편적 권리(삶,자유,소유)를 대신하며 권리에 대한 새로운 언명이나 담론에 속해 있다. 삶, 자유, 소유의 오래된 보편적 권리는 들뢰즈가 지배와 통제의 네가지 원리로 정의한 것에 의해 오랫동안 절충되어 왔고 심지어 배반당하기도 했다. 290


 - (지정학적.사회적,언어학적.성적인 모든 영역에 대해) 영토화를 통해 부과된 제약
 - 신용보증 그리고 / 또는 부채의 확대에 기반을 둔 사회적 유대를 포함해 경제적 '예속'의 새로운 형식과 훈육 메커니즘. 그것은 전지구화의 경제정책 중 치명적 원리다.
- 제도(학교, 대학, 감옥, 군대, 가족 등)의 위기
- 권리의 본성 자체에서 발생하는 변화들이 있는데 그것은 양적이기보다는 질적인 문제를 야기한다.(다수의 민중에게 일정 수준에서 '삶을 유지'하는 것보다 '삶의 질'에 대한 권리를 말할 때 언급할 만한 요소)  291


욕망은 내재적으로 사회적(즉 인위적)이며 사회적 장 전체에 투여되고, 욕망의 행위는 삶을 위해 환경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과 더불어 가능한 만족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의 '발명' 역시 포함한다. 또한 '개체'는(행위에 제약과 제한이 가해지는 추상적 지점인) 법에 의해 규정된 부정적 실체이기 때문에, 욕망이 사회적 장에 투여되고 잠재적으로 그 장을 변형하는 지점과 동일시될 수 없다. 299-1


오늘날 매우 다양한 무대에서, 이따금 서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거대한 저항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계급적 이해를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무의식적 '욕망의 투여'를 따르기 때문이다. '욕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온갖 현기증 나는 집단들을 둘러싼 상황을 검토할 때 집합적 이해관계에 따라 조직화를 분석하려는 전통적 분석방법은 절망을 면할 수 없다. 299-2


우리는 어떻게 자연상태(즉 무의식)에 대한 개입을 감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들뢰즈는 여러 차례 대답한 바 있다. 그것은 실험을 통해, 그리고 욕망 자체의 본성을 변형하는 사건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스피노자 식으로 읽는다면, 그것은 자연(실체)의 본성을 변형하는 것과 같다. 욕망이 의식의 '뿌리'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무의식과 신체의 상호교차에서 행위의 모델을 찾고 정교한 메커니즘을 확립하는 정치적 스타일을 세울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 물었듯, '우리는 과연 섹슈얼리티가 기원상 엄격한 경제적 질서로부터 비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환상적 원리라고 결론지어야 할까?(들뢰즈 1990) 306


 

 권 력


"권력"이란 어떤 초월적 통일성이 아닌 자신의 장 내에서의 내재성, 일반적 집중화가 아닌 자신의 선 위에서 연속성, 명확한 총체화가 아닌 자신의 다양한 선분의 인접성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즉 "권력"이란 사회적 공간인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권력이란 내재성이며, 연속성이고, 인접성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공간'이며, 오직 그렇게만 기술될 수 있다. 이와같은 기술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회적 공간을 위계나 피라미드로 미리 구조화되지 않는 관계들(내재성,연속성,인접성)의 다양체로 사유하는 것이다. 316


우리가 지켜봐야 할 것은 어떻게 정치권력이 욕망과 이해관계의 유혹과 전략을 '조절'하고 '감시'하기 위해 개입하는가이다. 이를 통해 모든 사회관계(특히 가족과 학교, 권위나 또 다른 권력과의 관계에 놓인)는 '오용'되지 않도록 점차 관리감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 관계에 대한 권력의 무제한적 개입은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진술은 권력의 도착적이고 '전략적'인 본성에 대한 공포의 일반화를 시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권력의 게임이 널리 확산되어 있고, 모든 사회관계에서 진행되며, 전체 사회관계에 대한 정치적 개입은 미시적 차원에서 그 게임을 조절하는데 필수적이란 점을 인식하게 해준다. 우선 권력은 전략과 유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유혹에 대한 공표를 조장한다. 337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이 있으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 어떤 점에서는 몹시 중요하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권력의 텅 빈 응시가 이 미소한 소란에 깊이 의존해 있다는 점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푸코 1994) 339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에서 이끌어낸 초인의 이미지를 통해 삶의 힘이 인간의 형태를 넘어서고, 인간이 '물음으로서의 존재'의 선차성을 더 이상 표상하지 못할 때가 오리라 천명한다. 푸코의 직관에 따르면 이는 주체이론에 대한 급진적 재평가를 수반하는 것이다. '지식은 세계의 진리성에 대한 개방이기보다 오히려 삶의 "오류들"에 기초하기에 주체에 대한 이론 전체는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푸코 1994) (전갈과 개구리의 우화) 363


권력에 관한 마지막 명제는, 권력관계들이 온전히 다이어그램 안에서 유지되는 반면 저항은 필연적으로 다이어그램들이 유래한 외부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저항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사회적 장은 그것의 전략화 정도보다 훨씬 더 놓은 강도로 저항하며 마찬가지로 외부의 사유는 그만큼 저항의 사유가 된다.(들뢰즈 1988) 366-1


외부의 선과의 대결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정열적인 인간은 마치 고래를 쫓다가 죽는 에이허브 선장처럼 죽습니다. 그는 선을 넘어 갑니다. 푸코의 죽음에는 그 같은 무엇인가가 있어요. 지식과 권력너머로, 제3의 면, 체계 내의 제3성분과도 같은.. 궁극적으로 죽음과 자살을 구분 못 하게 만드는 일종의 가속같은 것이지...

 

뱀발.

 

1. 3장 정치만 보려하다가 서문-3장 정치-옮긴이의 말-4장권력을 이어보다. 들뢰즈위주로 가타리는 약간. 제국을 다시해석해내고 마지막장은 푸코에 할애하여 다시 살펴본다. 다소 어려워 머뭇거리게 만들지만 요즘 욕망에 대해 지난 책들을 다시보기도 해서 이어지는 독서다. 주체나 개인,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짚는 푸코에 대한 들뢰즈의 마지막 설명은 충격이 크다.

 

비가오는 개울을 건너가야 하는데 전갈이 개구리에게 말한다. 개울을 건너가자. 안물꺼야. 안문다고 이해하겠니 개구리야. 물면 나도 죽잖아하고 전갈이 말한다.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간다. 개울의 중간 쯤 도달했는데 급류에 와르르...전갈은 개구리를 덜컥 물었다. 개구리가 말한다. '너 왜그래, 물지 않기로 했잖아' 전갈 왈 "그럴 생각없었는데 원래 그런가봐"

 

2. 삶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류로 가득한 것이라고.. 그대로 직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삶의 오류들을 가정하고 다시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3. 다시 새길 꺼리들은 밑줄로 남겨둔다. 여운을 갖고 다른 책의 마르크스의 영국 망명생활을 읽다보니 졸음이 내려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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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각 계급은 보통 강탈자인 동시에 희생자인데,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바로 그 활동 때문에 이웃 계급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발생시키며, 그렇다고 더 높은 계급으로 상승해 전반적인 하락을 피할 수도 없다. 전문적인 고리대금업자나 변호사에게 영구히 빚은 진 채, 땅에서 쫓겨나는 사태를 끊임없이 두려워하는 농민은 산업 노동자를 부러워한다.

 

 죄수나 다름없는 처지에 기계에 대한 굴종으로 자유의지마저 빼앗긴 채, 그나마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방탕한 유흥에 자신을 내맡길 정도로 타락해버린 공장 노동자는 전문 직종 노동자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직종의 도제는 장인의 소유물이며 직공일 뿐만 아니라 하인이기도 하니, 자기도 부르주아가 되겠다는 열망 때문에 괴로워한다.

 

 한편 부르주아 중에서 제조업자는, 자본주에게 돈을 빌려 스고 항상 과잉생산이라는 암초에 걸려 파산할 위험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마치 악마가 뒤에서 몰아세우기라도 하듯이 종업원들을 몰아세운다. 제조업자는 노동자들을 공장이라는 기계장치의 완벽한 기능을 해치는 유일한 불확실한 요소로 간주해 증오하기에 이른다. 노동자들은 그 분풀이로 십장을 증오한다.

 

뭐라도 공짜로 얻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고객들의 압력을 받는 상인은 겉만 번지르르한 싸구려 상품을 공급해달라고 제조업자를 압박한다. 아마 상인이 가장 비참한 존재일 텐데, 고객들에게 굽실거려야만 하고, 경쟁자들끼리 서로 증오하고, 아무것도 만들어내거나 조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낮은 급여를 받으면서도 체통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공무원은 항상 여기저기 전근을 다니고, 또 장사꾼처럼 예의를 지켜야 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견해 때문에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한계급 부르주아는 나라에서 공공 정신이 가장 희박한 자본가들과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공산주의라는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부르주아들은 이제 인민과 접촉하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자기 계급의 문을 꽉 닫은 채 자기들끼리만 틀어박혀 산다. 꽉 잠가버린 그 문 안에는 공허와 냉기만이 있을 뿐이다. - 미슐레의 [인민]에서

 

 

 

 

 

 

 뱀발.

 

1. 일터 상가와 대기로 옴짝달짝 못하고 있다. 수중에 들어온 책들을 간도 보지 못하고 있다.  맑스주의 향연, 사회주의에서 소개가 겹친 핀란드 역으로가 손에 잡혔다.  중간 쯤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텍스트 정도는 있지 않아야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냐고 하면 엔엘이든 피디이든 그 계파가 충고나 깨트려야 할 그런 것이 아니라 내재화되어 있다는 최근 경험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야기를 해도 계파가 다르기에 어찌 해봐도 안되는 그런 것이란 생각 말이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그런 느낌이 올라왔는데, 최소한의 텍스트,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갖고 판단이나 이야기를 근거를 만드는 것도 좋다는 그런거 말이다.  중간밖에 읽지 못했지만 저자의 8여년간의 각고의 세월은 충분히 그 깊이를 더해준다. 교조적이라는 것이 지금 현실, 내편이란 현실이 내면화되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간다는 측면에서도 시도해봄직 하지 않는가 싶은 느낌이 들었다.

 

 

2. 안녕남 주*우는 페북친구다. 친구가 아니라 혈연이기도 하다. 최근에야 활동하는 반경이나 고민을 알게 되었고,  그 친구 역시 사촌형의 고민을 비공개 페북으로 알게되었으리라. 부모와 결별하다시피 나와 사는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괜찮아 보이는데, 부모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외삼촌의 통화 첫마디가 조카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는 그렇게 하니 마음이 어떻든?....잠시 멍한 상태였지만 부모마음은?? 글쎄 아직 물음표이다.  아무래도 자식 편이겠지만....차마 그 말은 못하고 이 궁리 저 궁리 숙성하고 있다.

 

 

3. 밤이 깊은데 마음은 이리저리 헤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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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3-12-1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 예전에 서재에 쓴 글을 들춰보면 민망하고 부끄럽지만
그만큼 변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ㅎㅎ

좋은 책들 많이 읽고 계시네요. 강신주쌤 책 포함해 몇 권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 ㅎㅎ

여울 2013-12-17 11:59   좋아요 0 | URL

네^^ 공감!! 쌓아두고 있어요. ㅎㅎ 강샘 글은 인터뷰라 속도감도 있죠. 즐독~~
 

 

날이 차다. 별도 차다. 눈도 차다. 생각도 차다. 꽁꽁 여문 일들도 거리로 내몰려 있다.  찬 겨울 거리로 내몰려진 이들로 북적인다. 차디찬 한기는 옷깃으로 스며들며 살얼음처럼 언다. 관영매체는 더 이상 기사거리를 물지 않는다. 사실을 더 이상 보도하지 않는다. 지우개처럼 사실을 지우기에 혈안이 된 듯 백지투혼 발휘한다. 만 남아있다. '우리 신문에는 더 이상 기사거리가 없습니다.' 나는 조중동애독자다. 매일 1면 톱기사를 헤아린다.(무슨 의도를 갖는 것인지,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얼마나 아무일이 없기를 바라는지 얼마나 아무일이 없도록 지우는지 데스크의 밥비루먹는 일을 보는 것도 신물이 난다. 

 
마음이 차다. 어깨도 시리다. 거리에 나앉은 동료를 생각하니 안쓰럽다. 딸린 자식도 부모형제도 일가친척도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가장들을 무조건 짜르기에 가지치기에 여념이 없다. 집행자들의 마음라인에는 인면수심도 염치라는 것도 깃들어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집단에게 칼자루를 맡긴 것 같다.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  자식의 마음도, 부모의 마음도, 일가친척의 마음도 없는 것들에게 말이다. 

 

사실에 재갈을 물린 자들. 갖고 싶은 것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얻으려는 자들. 몽둥이를 들고 싶다. 들고 도망갈 곳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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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어 - 마음의 물고기, 전각이 하나 걸린다. 파닥! 물고기가 마음에 낚였다. 작가는 말한다. 물고기를 머리와 몸통으로 마음심 전서는 꼬리로 두었다고 한다. 묵지동심전은 8분의 작가가 매년 한번씩 주제전을 한다고 전한다. 이번 주제는 동심이란다. 여산 이성배 작가는 여성분들이 야구나 축구 룰을 제대로 모르면 재미가 없듯이, 서예나 문인화를 볼 때 바탕이 되는 규칙만 알게 되면 더 재미있는 관람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해주신다.  작품이면에 보이지 않는 숨결들이 드러나서 더 좋다. 다소 바랜 주제이긴 하지만 포근함을 잃지 않는, 그래서 마음이 보듬고 세파를 안을 수 있기도 하다면 지천명, 지날수록 더 해맑을 수도 있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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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2-0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자와 그림의 경계를 무너뜨렸군요.
어제로 전시가 끝났네요? 가서 봤더라면 좋았을걸 그랬어요.

여울 2013-12-09 14:21   좋아요 0 | URL
일찍 올려놓을 걸 그랬군요 ㅜㅜ 전시회 일정이 짧아 아쉽더군요. 느릿느릿 바우솔 전시회는 대전갤러리(대전평생학습관)에서 15일까지 있네요. 한번 들러보셔도 좋을 듯 싶어요. hnine님!!

키치 2013-12-15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하네요.
서평뿐만 아니라 이런 멋진 작품들도 올려주시니 참 좋습니다 ^^
종종 들르겠습니다, 여울마당님!

여울 2013-12-15 22:28   좋아요 0 | URL
네, 휴일도 꺽어지는군요. 가끔이에요. ㅎㅎ

즐독하시구요.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