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셋-책도셋-생각도셋

참새들이 30여마리 몰려왔다. 잣나무 아래 덤불 사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부리를 쪼아대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있으면 어느 녀석의 추임새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가지로 포로롱 자리를 잡는다. 잠시 뒤 기척이 잠잠해지면 어느 녀석의 깃발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쏜살처럼 덤불사이로 축지법을 쓴 것처럼 머리가 반쯤 파묻히는거다.  이 녀석들은 제법 부푼 햇살로 입가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만 역시 성가시다는 듯 햇살 두모금 먹고 넉넉한 날개짓으로 포로롱 포로롱 꽁지를 뺀다.

1.

함박눈을 한웅큼 먹은 12월 31일은 마르고 시원한 공기와 하늘이다.  모임의 성찬일까? 모임의 별빛일까? 어제 몹시 곱던 초승달과 별만큼이나 모임의 향기를 안고 한해를 갈무리해본다.[날림]의 청순함과 [신박]의 중후함, 그리고 그 공간을 늘 따스함으로 부풀리는 추임새와 더늠의 공간은 뭉클했다. 책소개의 따스한 시선들도 어찌 마음을 짜고서는 낼 수 없을 정도로 색깔이 녹녹치 않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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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마을이야기 한 점. 촛불도 강행군으로 지칠 무렵, 더 이상 열정이 몸을 담보하지 못할 무렵. 마을에서 만난 사람. 엊그제 송년모임을 했고 아픔과 상처, 다시는 보지 않으려했다는 말. 그리고 나를 돌아본다. 기다려주지 않고 보여주지 않는 서늘한 판단이 얼마나 그를 상처입게 했는지 말이다. 나란 인간이 다짐하던 말과 온기가 얼마나 비수처럼 되돌아갈 수 있는지. 애타는 마음들을 나의 잣대로 외면했던 일이 그와 나의 접점에서 얼마나 일그러질 것인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를 매만지고 매우는 일. 더디지만 그렇게 표시를 내는 것. 아직도 만날 수 있고 시간이 열려있다는 점이 고마울 뿐이다. 서늘한 스스로 경계와 버릇에 대해서도 곰곰 짚어 보련다. 그렇게 쉽게 관계를 매우는 버릇이 주위에 얼정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보지 못하고 있던 것이겠지~.  하나 더 넣는다.

3.

가족송년회. 처가 처동생들이 모든 상차림을 준비하고, 송년케익까지 준비하였다. 기특함을 넘어서 설겆이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며 늘 대접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식구들과 접점도 마음도 일상을 섞여내고 있지 못한 부재를 발견한다. 애쓰고 나누고 싶어하는 것들에 다가서지 못하고, 스스로 시선으로만 경계를 쳐서 몸의 다가섬 금지령을 내린 듯 멀리했던 것은 아닌지하고 말이다. 아이들은 청년으로, 애기들은 수다쟁이로 벌써 다르게 줄달음질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달리 접점은 없다.  엉거주춤 문턱을 들어서는 자세가 말이 아니다. 생각질만 한가마니다.

4.

올해의 책세권. [나와너]-[서로주체성의 이념]-[동무론]. 세번 숨이 막히다. 하나를 더 보태면 [분자혁명]일텐데 이 책은 묶음이라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서문이 정리가 잘되어 있다) 나만 이야기하는 서양사나 학문은 늘 미심쩍었다. 아닌가 싶은데 아닌 것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 빨려들어가다보면 그래서 그 완결적인 구조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라는 물음이 묻어 나왔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여 외도를 하며 찾은 책들이거나 다가선 책들이다. 쭉쭉 이어가다보니 나르시즘의 대한 의도하며, 이어지는 흐름이 너무도 유사하여 놀랐다.  

 



5.

진선미가 아니라 슬픔을 이야기하고, 생각이 아니라 상처와 아픔, 고민과 방향성에 대한 생각이 겹쳐있다. 나를 멈추고 그것에서 너로 이은 생각들이 의외로 가지치듯 이어진다. 뜨문뜨문 읽은 책들을 올해가 가기전에 마무리하여야겠다고 했는데, 너와 나, 그 울타리를 넓히고 섞이는 일에 고민이 꿈결을 채어가기도 한다. 그래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여야 하는데, 네가 고민과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한다면, 그 고민에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이 대체 무엇인데라구 되물으면 막히는 것이다.

6.

사실 놀라운 것은, 학습도 선행이 있나? 고민도 선행이 있겠지. 생각결을 다가서다보면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동무론]을 마져보고, 어제도 잔여분량을 강독하다보니, 주섬주섬 스쳐지난 책들과 사상가들을 이리저리 맛깔나고 선명하게 엮은 것에 놀랍다고 느낀다.(물론 개인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이미 나와너가 아니라 서로주체성만이 아니라 저기 저만큼 성큼성큼 두고있다. 인문의 그물망을 이렇게 넓고 촘촘히 엮은 능력에 대해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린다.(오버하는지 모르겠지만)

7.

버릇, 몸을 끄-을-면-서, 고민과 방향의 결, 숙성과 사례, 자본의 나르시즘과 거울을 뚫고 넘어가는 세세함에 대해서는 더욱 풍부한 시선과 삶, 일상, 다름이 더욱 실감나게 하겠지만 역시, 지난 생각흔적을 엮기에는 짜투리처럼 중동날 수밖에 없던 생각조각들을 잇고 보수하기엔 마음을 주고 교재로 삼아볼 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오늘 이곳에서는 송년촛불이 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남는 사람들은 뫔속에서 아끼기로 하고 광고(데마고그가 아니라 진심을 알리는 일이니 낚였다 생각마시고 몸을 던지시면 본전뽑는다. 나-너-너-나의 그물망은 늘 나를 앞선다.) 남기며 한해 꽁지를 뺀다. 포로롱..으능정이촛불에서 고개를 반쯤 담을 것이다. 포로롱~~~ 건강하시고 어려움을 같이 타넘는 내년 한해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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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뒤 걸러지는 말들 - 돈 호세,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8세, 多여행,시인친구들.게로니카,세잔,마티스,아프리카,오묘한감각전달,장곡토,시,희곡,올가,박물관,콜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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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림-신박연대 공연도 있던 송년회 소묘

따뜻하고 포근한 모임, 풀어내는 올해 책들의 시선 한올한올은 마치 짜 맞춘 듯하다. 소외,열외 이땅에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로 향하고, 그 울림을 찾는 책들로 가득하다. 예수를 다시 불러내고, 나르시즘에 빠진 철학을 되묻는 철학자를 맞고...생활에, 삶에 녹힐 것을 이야기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엘지넌에게 꽃을/엄마와나/위험사회/공장이여잘있거라/철학삶을만나다/술취한코끼리 길들이는법/예수없는예수교회/천둥치는밤/무탄트메시지/사찰그속에깃든의미/지금이대로괜찮아/서로주체성의 이념
 

 

  

 

 

  

 

 

 

 

 

 

  

 

 

 

 

[함께라면 우린 지는 법이 없다]란 현수막 가운데 [함께]에 내내 마음이 걸린다.

 

2. 올해 마무리 책읽기

호의와 호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백과 소문도 믿을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연정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나로 되먹임되고 증폭되는 이상, 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상처나 슬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면, 이 상처나 슬픔은 나로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너로 가는 길이므로 나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마음의 최소주의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애초에 거품이 잔뜩 끼거나 안개이거나.


   
  월하정인 "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하는 법.
 
   

 


   
 

고백과 소문의 사이는 좁아보인다. 그 좁은 틈을 열어 다른 삶의 지평을 불러내는 방식은 삶의 극진함 외에는 없다. 고백보다 깊고 소문보다 빠른 생활의 조직을 재구성하는 '극진함'에서 人紋의 미래는 재가동할 것이다. 254

고진은 고백조차 권력의지의 발현이라고 본다.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약자의 언설양식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 양식은 이른바 소통행위의 순수성, 진정성, 충일성을 전유하려는 피학대-가학적 권력의지의 도착을 숨긴다.247

나는 이해를 오히려 상처와 결부시킨다. 이해를 감정이입과 추체험, 실존범주, 그리고 은총의 장 속으로 수렴하는 태도에는 각기 그 나름의 일리가 있겠지만, 근년의 내 해석학적 고민은 무엇보다도 '상처'를 둘러싸고 회전한다. 라캉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상처에 대해 무지한 한, 인식과 이해는 영원히 그 스스로를 놓칠 수밖에 없는 숨바꼭질의 상태에 빠질 것이기 대문이다. 빛에 의해서 감각되는 모습은 그 그림자와 더불어 완결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27

사랑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켜 그 순수한 본질을 얻겠다는 발상이란 현실의 수사를 그저 비현실적으로 도착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본질이란 그저 매개 이전을 희구하는 유토피아적 박제물일 뿐이다. 인간사의 무수한 열정처럼 사랑은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꼬이고 얽히고 비틀이고 갈라지고 증식하고 불붙어 타고, 혹은 잿뱇의 폐허를 만드는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219

 
   


 

 

 

 

 

 

 

동무론

   
 

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329

우리네 일상의 세속이 속절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제도와 관습과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이 은폐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의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 거꾸로 그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하고 예리한 배움이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원, 그리고 기업과 국가는 모두 한갓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실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곧 그 사실은 우리의 체질과 공동체의 공기 속에서 깨끗하게 잊혀진다. 322

공원이든 무엇이든, 어떤 공간 속에 참여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의 삶이 일상의 속력과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자그마한 결절을 맺으며 미래를 재조명할 수 있다면, 公園공원, 혹은 空圓으로서의 그 사회적 가치는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321

정신분석의 지혜가 반복해서 일러두듯이, 필경 삶은 앎이 아니라 견딤의 물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우스트적 욕망이란 단지 앎에의 의지가 아니라 앎을 견딤으로써 개시되는 새로운 삶의 욕망이다. 진선미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삶의 진실에서 가장 멀리 놓인 박제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악의 명상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315 [해바라기 콤플렉스]

그 모든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처럼 삶의 시작은 곧 위반이며 상처다. 해바라기 콤플렉스란 삶을 체계적으로 되-풀이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 오염과 흠결, 위반과 상처를 외면한 채 반 초월론적으로 가꾸는 거울방 속의 광학적 행복을 가르키는 것이다. 314 [해바라기 콤플렉스]

상식적인 얘기지만, 우선 나르시시즘의 생산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내내 응연히 지목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메타적 비판의 층위가 생활양식의 구체성 속에 안착, 유지되어야 한다. 가령(약간 더 따끔한) 아이러니나 (약간 덜 따끔한) 유머는 곧 그러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안이한 비판은 관념론으로 흐른다. 혹은 심하게는 신비주의적 수행도에 빠져 또 다른 형식의 나르시시즘을 반복할 뿐이다.304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 304

이성적 지식은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할 뿐, 타자를 만나는 실천적 매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의 의도 속에 보편을 품은 채 그 자체로 오만한 고독 속에 머문다. 레비나스의 선택은 공간보다는 시간, 남성보다는 여성, 앎보다는 사귐, 그리고 자아보다는 타자로 실그러진다. 그에게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며,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일면 그것은 시간과의 사귐이 지닌 어떤 맥리를 살핀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 자체로 모든 자기정립을 거부하는 시간"은 이로써, 이론적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적, 상징적 일상 속에 구금된 지식인들의 뺨을 때리며 변함없는 실재로서 침범한다. 292 [타자]

타자의 개입이 없는 자아만의 공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겹의 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로써 다만 언어가 발설되고 유통되는 조건과 담론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근거를 물었을 뿐인 블랑쇼처럼, 나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거나 섞이고 해소되는 지점과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앎을 죽이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실천적 노력인 셈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다. 앎은 의심이라는 교차/교통의 마찰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생성적 한계와 조건을 통해 재구성, 재서술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거꾸로 타자를 주제화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동무로서의 연인, 연인으로서의 동무도 이러한 역설적 타자의 지평을 느리게, 몸을 끄-을-면-서, 그리고 이드거니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형된다. 290-1 [타자]

타인의 고통은 감정이입의 자동성에 의해 삼투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혹은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독아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물론적 마주침의 외상'을 겪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지난한 마찰의 반복을 통해서 조금씩 극복된다. 심리적 동일시의 환상을 벗어나 무한하게 개방된 '현실'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무한으로 열린, 무한이란 부재를 향해 몸을 질질 끄-을-며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 쉼없이 걸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288-90 [타자]

비평이 가능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은 사막이나 바다나 도시처럼 사방이 툭 트인 공간이다. 나와 너의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규칙과 규칙의 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창발적 외상의 효과를 말한다. 비평은 이 사이를 창의적으로 견디는 일이며, 그 사이에서 얻는 효과의 생산성에 체계적으로 기대는 일이다. 결국 비평은 사회성이라는 사이공간을 뚫어 타자의 자리를 얻으려는 일련의 언술적 실천이다. 위기이면서 기회인 사이공간의 교통-생산성을 노리는 사유와 실천. 286-7 [비평]

신뢰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사회적 비약의 이치다. 요컨대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사회적 실천의 새로운 버릇으로써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다. 신뢰는 마음과 함께, 마음을 넘어가려는 실천적 관계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다. 마음을 짐작하거나 유추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어하려는 근기와 슬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뢰는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공대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조금 더 물러나서 말하자면, 그것을 나의 현재와 너의 미래 사이에 놓인 원초적 심연을 근기 있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실천방식이다.  283-4 [신뢰]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연역한 사랑, 혹은 마음에 의해 정당화된 사랑은 나르시시즘일 뿐이며, 프로이트처럼 냉정하게 말하자면 결국 수음의 심리적 상관물이다. 사랑의 발생과 기동이 특별히 마음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은 워낙 실없는 인과와 자기중심적 필연성을 제멋대로 짜맞추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랑이라고 불러줄 만한 움직임이나 흔적이 기동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 내 계교지심의 레이다를 솔개처럼 벗어나는 타자들과의 '관계'다. 당연히 대안적 모색의 지점으로 숙고해야 할 것은 '마음의 최소주의'다. 심리적인 동물인 인간이 남의 마음을 넘보는 일을 마냥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려는 결기이며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버릇이다. 아울러, 연정에 관한 한, 마음은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사이비 사랑밭을 폐기한 채, 그리고 거꾸로, 말과 살을 적실히 아는 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동일시의 어휘를 모르는 체, 삶의 방식과 문화로서의 연정을 이드거니 계발하라는 것이다. 280-281 [연정]

타자로서의 연인이란 무엇보다도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계의 양식이다. 그것은 쉼없는 재서술의 진리가 아닌 일리들로써 생활의 무늬를 조금씩 겹치며 변화해가는 방식이다. 278 [연정]

슬기롭지 못한 호의는 오해와 아집의 늪 속에서 소금뿌린 지렁이처럼 뒹군다. 그리고 타자의 물성에 이르지 못한 '생각'은 따개비의 천국이다. 호감이나 호의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응대하는 실천적 결기를 얻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273 - 인간관계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확립된 그 체질만이 호감과 호의의 풍경을 넘어 그 계보학적 넓이와 무의식적 깊이를 통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272 -호감과 호의는 그 자체로 아직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결국 개인의 나르시스적 구심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중성적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그 심리상태는 아침 안개처럼 허망하게 악감과 악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유동적 나르시시즘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 호의과 신뢰를 구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관계를 건사하기 위해 극히 요긴한 실천적 지혜다. 새로운 버릇을 들이고, 그 버릇을 이드거니 건사할 수 있을 때라야 그 뻔하고 듣기 좋은 말, '일상의 진보'와 '새로운 주체'는 그 내실을 얻는다. 그 누구의 말처럼 '지키는 것은 비록 적으나 얻는 것은 많다. 271 [호감/호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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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올해 [081231]이 나에게 남기는 말
    from 木筆 2008-12-31 11:48 
    참새들이 30여마리 몰려왔다. 잣나무 및 덤불 사이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부리를 쪼아대고 있다. 잠시 후 인기척이 있으면 어느 녀석의 추임새로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무가지로 포로롱 자리를 잡는다. 잠시 뒤 기척이 잠잠해지면 어느 녀석의 깃발때문이지 모르겠지만, 손살처럼 덤불사이로 축지법을 쓴 것처럼 머리가 반쯤 파묻히는거다.  이 녀석들은 제법 부푼 햇살로 입가심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2 o o 8 년에 대한 작은 돌아봄 (3)

여기저기 생각뿌리를 두다보면 그것들이 한데 엉겨붙지 않는다. 이미 세상은 혼자 어쩌지 못하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사회다. 흐름이 생겨 몰려다니기엔 서로 정보도 많고, 갈 길의 갈래도 많다. 씨앗들이나 마음들이나 고민들이나 고생들이 몸에 붙지 않을 때, 혼자 감당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고민도 연애하듯 종자돈처럼 뭉치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것에 절감한 해이다.

아마 경험이 많치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생각 또한 깊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그런 부분은 경험을 쌓으면서 후에 되돌아볼 나머지를 둔다. 좁은 사고와 행동밖에 할 수 없는 지금에 비춰 돌아볼 뿐이다. 상상력이라는 것도 그것을 별반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동안 마음을 줄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거울면처럼 반사되기 일쑤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마 마음이 전달될 수 있거나 온기처럼 따듯해지는 것이라고 호수 수면의 동심원처럼 퍼져나갈 수 있다는 느낌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늘 겉돌던 마음이나 생각들이 더 늘 수 있다는 가능성때문인지도 모른다. 현실은 늘 가능성보다 작게 되는 것은 알지만, 아마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해 이렇게 추스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머리의 의욕이나 기억이나 지식보다 몸과 가슴이 훨씬 더 적확하다. 하고자 하는 것으로 뭉치면 1년, 2년을 넘기기 힘들고, 가슴만의 연대는 무엇을 할지몰라 불만 태우다가 말 뿐이며, 몸의 연대는 진하고 오래가기는 하지만, 가슴과 머리를 만나지 못하면 외롭기 그지없고 울림없는 삶으로 지칠 수 있는 것 같다.

몸도 가슴도 머리도 서툴다. 몸이 더 서투르고 그래서 늘 마음주는 공부라도 해야할 듯싶다. 마음을 받아 챙기는 것도 서투르다. 지나간 뒤 한참에서야 그 마음들을 눈치채기도 하는 것처럼 느리다. 나란 울타리도 너무 좁게두어 영토확장을 잘하지 못한다.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너를 이야기한다는 것. 나의 울타리를 희미하게 한다는 말은, 지금 나를 넘어서는 일인지도 모른다. 머리에 머무는 것을 선언하고 마는 것일 수 있다. 아마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아니 자신을 알아가는 나이긴 하지만.

일터에도 마음도 몸도, 마음을 섞기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본다. 아마 거울면을 뚫거나 조금은 뜨듯하게 덮혀졌는지 모르겠다. 아주 조금 마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간간이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도보다 점점 커지는 외로움이나 각박함의 속도는 더 크다. 그 각박함보다 그 안의 따듯함에 마음을 섞는다는 일이 훨씬 위험하기 때문에 주저하는지도 모른다. 그 따듯함으로 각박함을 감싸 너머설 수 있다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기에,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스스로 망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따듯한 온기에 한눈파는 순간 저멀리 또 다른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수지타산이 더 익숙해서 일 수도 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작다. 하지만 덜 각박해지거나 최소한 미지근하는데 도움은 주었을지도, 저 넓은 대양에 물한방울 보탰는지도 모르겠다.

그 많은 따듯함의 연대에 몰염치했던 나이기에 아마 보지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터에 녹아있기보다는 외도의 마음들이 비치었기에 다가서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스로 서툰지도 모른다. 그 양쪽 사이에 아마 내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자신을 위로하는 해석이자 소회일 수 있다.

대학생 친구 한명만 있으면....청년 전태일의 한마디다. 세상을 뚫고 간다는 일. 혼자 해내야하는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혼자 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을 담은 [몸-가슴-머리]의 연대가 불씨가 되지 않는 이상. 단 한사람의 마음도 녹일 수 없다. 그렇게 마음들이 응겨붙지 않으면, 가슴과 몸의 눈길을 느낄 수 없다면, 모임의 고독감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따듯하지 못한 이유를 여전히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이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상, 따듯해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온기에 목마른 시절, 또 다른 찬바람이 불지 않기 바래본다.

하고싶은 것, 해야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에 잠재되어 있는 혼자의 옆좌석에 같이나 함께를 태우고 이렇게 구분해볼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회자되는 2 o o, q(Q)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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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운영, moim 3.0 그리고 우석훈, 소통 (酌)
    from 木筆 2009-02-16 16:54 
    1. 090214-15   +: 삶과 지금 고민의 연결, 방향성 있는 고민의 숙성. +: 평범한 주부를 대상으로 하며 기획의 결과가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자체 세미나로 삶의 결에 대한 고민, 방향의 결을 모을 수 있는 것일까?(초기 운영단위에서 목적의식은 공유되었는가? 강사와 대상과 이야기한 논제에 대해 공감하였는가? 대상의 의도와 추진주체의 의도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나? 활동가 프로그램으로 접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고민하는 일의 풍요로움

 

 대전 근대사산책이 있던 날, 일요일 늦잠을 자구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통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건네온다. 먼저 기다리던 여학생은 서울 모대를 수시입학하고, 뒤늦게 온 뚱뚱한 편인 친구는 재수를 결심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나누는 이야기들에 엄연한 현실의 존재감은 둘을 가른다. 쌀쌀한 날씨 두둠하게 내의까지 챙긴 차림, 목도리에 비해 갸날픈 여학생의 모습은 너무 추워보인다. 서빙으로 80만원을 벌었다는 현실. 친구와 영화보러가는 길. 버스에 오르자마자 영화를 보기로한 그 여학생친구. 뚱뚱한 편인 친구는 섞이지 못하고 다른 곳에 앉는다. 늘 이 사회가 그렇듯이 친구의 경계는 선명한 듯하다. 

그렇게 기형도의 시집을 넘기며 만*동 중학교 근처에 버스가 지나자 30대의 아가씨 목소리인 듯한데, 뒤에서도 다 들리도록  어디를 가느냐라구 묻는 소리같은데 곧 관심을 벗어난다. 시대의 우울이 배인 시집 이곳저곳을 들춘다. 그런데 상기된 억양과 톤의 목소리를 계속 이어진다. 아마 화답하는 사람도 없는 듯 싶다. 뚜렷한 대화의 흔적은 없는데 일정한 색깔의 목소리는 짙어지고 마주치는 시선은 없다. 곧 화면에 들어온 30대초중반의 아가씨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모자에 분홍색 하이힐을 신고 깔끔한 차림으로 여전히 공중에 대화를 하고 있다. 버스가 서고 차문이 열리고 주공 3단지 앞 주차장에 내리자 마자 버스에 대고 밝은 목소리로 "즐거운 하루"를 외치고 사라진다. 

그녀를 오늘 다시 기억에서 불러내어 [즐거운하루]님으로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 [즐거운하루]님은 약간 들떠있고  "솔"에 약간 못미치는 음을 낸 것 같다. 그 기억은 쌀쌀해진 대전역, 한켠에 모이고 약간 늦은 다른 분을 기다리는 장면과 겹친다. 대합실 전경을 넣으려고 사진을 찍은 일행의 후레쉬에 날카롭거나 아니면 심심하던, 아니면 일과 가운데 하나로 이을 요량인 노숙하는 아저씨의 실갱이로 이어진다.  초상권을 침해하였다는 것인지 그것을 빌미삼아 뭐를 하자는 것인지. 촛불의 심심치 않은 행동대원 아저씨들이 그날도 어김없었다. 

정신장애인에 대해 서툴다. 편견도 시각도, 더구나 몸으로 겪은 적이 거의 없기에 더구나 더 그러하다. 그저 활자화된 지식으로 지금의 사회가 받아내지 못하거나 격리되거나 폐쇄병동으로, 가끔씩 선생님들의 협박용으로...너희들 그러다가 저기로 간다거나...영화의 잔상으로 남아있는 정도이다. 먼댓글의 [지금도 이대로도 괜찮아]를 읽다가 생각이 겹쳐들어 흔적을 남긴다. 

기형도는 어릴적 기억을 불러낸다. 부친의 사업실패와 병마, 어려운 생활이 그대로 그의 온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정신장애를 갖는 사람들이 일련의 수세대 수십년에 걸친 악순환의 구조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실이 제조해낼 수도 있다는 징후에 무척 아프다. 성실한 학생, 회사원, 주부를 가리지 않는다. 정신병을 갖고 있는 경우 더욱 더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강박이 더 어렵게 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솔직한 물음을 던지는 것 같다. 아무런 소통방법도 나누는 것이 무엇인지 잘모르겠지만 

자기자신과 화해하지 못하고, 너를 마음에 두지 못하고, 관계에 단절된 모습은 우울한 현실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 반대편을 향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즐거운 하루]님은 안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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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한 사람의 사회, 구름 위에 있으며 번영하고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회, 그런 학교나 기업, 지역은 , 생각하면 그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인간관계밖에 가질 수 없었던 것일까? 둘러보면 어디에나 규칙이나 설명서, 교훈, 지혜 등이 산더미처럼 있는데도, 사람들은 진실에 연결되어 있지 않고, 연결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정신의 황야에 고립되어 있다.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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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신장애'라는 꺼림칙한 병에는 인간 자신에 대한 심오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원래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연스런 생활 방식의 방향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그 생활 방식의 방향이 바로 '계속 내려가는 '방향이고 상승하는 생활 방식에 대한 '하강하는 생활 방식'인 것이다.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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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쩌면 성공이라는 것이 이룰 수 있다고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그 다른 한끝에는 절망이란 것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공이란 것이 신기루에 자신을 맞추어 넣기에 모든 다른 것을 외면하는 것이라면 절망이라는 광맥은 모든 고생과 고민이 이 세상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고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299로 이어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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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발버둥을 쳐도 해결할 수 없는 고생이나 고민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는 고생이라든가 살기 힘든 것을 모두 제거해 가벼워지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그런 결벽증 같은 바람이 질병처럼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떤 환경이든 사람은 분명히 [고민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고민하는 힘이 있기에 병을 고민하고, 병과 함게 살아가는 인생을 고민하고, 살아가는 것의 풍요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고민하는 힘을 되찾고, 고민을 깊고 넓히려는 일이 필요하다. [고민하는 일의 풍요로움]. 문제나 고생, 고민을 없애지 않는다. 177,8,9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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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즐거운 하루님은 안녕할까?
    from 木筆 2008-12-26 00:34 
       대전 근대사산책이 있던 날, 일요일 늦잠을 자구 버스를 기다리는데 도통 오지 않는다. 기다리는 젊은 친구가 건네온다. 먼저 기다리던 여학생은 서울 모대를 수시입학하고, 뒤늦게 온 뚱뚱한 편인 친구는 재수를 결심한 모양이다. 이리저리 나누는 이야기들에 엄연한 현실의 존재감은 둘을 가른다. 쌀쌀한 날씨 두둠하게 내의까지 챙긴 차림, 목도리에 비해 갸날픈 여학생의 모습은 너무 추워보인다. 서빙으로 80만원을 벌었다는 현실. 친구와 영
 
 
파란여우 2008-12-26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졸려요. 날 밝으면 읽을테니 감추지 마세요.

여울 2008-12-31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워요. 님덕분에 좋은 책 보았습니다. 어쩌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지도..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