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자들은 서양의 중세를 암흑 시대로 보았다. 이런 중세관의 근저에는 고전 문화에 대한 동경의 감정이 있었고, 자신들의 시대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근대 특유의 세계관이 있었다. 이런 부정적인 중세관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와 19세기, 심지어는 20세기 전반부까지 이어졌다......최근 몇십 년 동안 중세사 연구자들이 거둔 중요한 연구성과가 서양 중세의 역동성 이다. 상식적인 역사가라면 중세 사히를 야만과 무지가 지배하고 기술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말하지 않는다. 늦어도 9세기부터 생산 방법상의 수많은 기술이 혁신되었고, 이는 고전 고대에 비해 커다란 진보를 뜻하는 것이었다. "몇 세기 동안의 비밀스런 혁명"이란 표현을 쓰면서 강조한 중세의 전반적인 발전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서양 중세 사회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중세사회의 역동성의 핵심을 이루는 기술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알아야 한다.

 
   

 

   
 

 셰익스피어는 독특하게도 근대인, 고대인, 기독교인의 교차점에 서 있다. 그는 또한 종종 이교도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을 뒤섞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판적이지 않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쉽게 저지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다양하면서도 통합된, 인간 본성 그 자체의 재현을 보여주는 주제표현 방식이다. 셰익스피어의 입지는 그리스인의 호메로스의 입지, 로마인들엑 베르길리우스의 입지, 이탈리아인에게 단테의 입지, 에스파냐인들에게 세르반테스의 입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의 시적 상상이라는 거울을 모든 자연과 역사에 비춘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우리를 초대한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그는 '실재한 인생'의 이야기, 즉 역사적 인간으 생애가 신화적 이야기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천재성은 인물묘사에 일차적으로 표현되는데 900명이나 되지만 각각 다른 인물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이며, 각자 자신의 삶을 가지고 있다. 45-46 

베르길리우스(로마, BC70-19년)의 서사시 [아이네이스]는 호메로스의 모방물인 동시에 그것과 매우 다른 시도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시의 여인 무사가 노래하지만, [아이네이스]는 전쟁과 영웅을 내가 노래한다는 행으로 시작한다. "내"가 노래를 부른다. 아이네이스의 운명은 호메로스의 영웅들의 운명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모든 유럽의 고전'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방식으로 전통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문학을 개인과 사회의 투쟁으로 삼은 것은 이것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40 

근대인들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신에게 내쫓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이라 주장한다. ..'자연상태'에서 가지고 있던 '자연권'이 시민사회에서도 보장된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뻔한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혁명적인 개념이다. 83

 
   

  

   
 

 한국인들은 현대 사회에 이르면서 자기의 마음 속에 여러 가치들을 공존시키고 있다. 때로는 샤머니즘적, 때로는 불교적, 때로는 기독교적 가치를 그리고 때로는 전통적 가치를, 혹은 현대 서양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 것들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정제되어 나름대로의 통합된 자아를 형성치 못하고 낱개로 흩어져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최근 20-30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급작한 변화 속에서 더욱 확연하게 표출되고 있다. 상가를 가면 때로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그 뒤에 바로 스님이 와 염불을 하며 대개의 조문객은 유교식의 예를 올린다. 모든 가치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편리에 따라 이 가치 저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의 갈등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치의 공존은 자아를 괴롭힌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 사회의 특징은 조각난 자아의 고통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동시 다중적 자아'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동시성적 자아는 역사적 현실에 영향받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혼란기는 대세의 편에 자기의 생각을 맞추도록 작동하면서, 자신은 애매하면서도 타인에게 분명한 것을 요구하는 흑백논리를 부추겼다. 

이러한 동시성적인 자아는 사회적 논쟁이나 갈등에 있어서 논리적 일관성을 파괴하고 상황에 따라 자기편에 유리한 방향으로의 변명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런 무의식은 목적 강조를 위한 과정의 무시, 그리고 감성 위주의 비논리성과 함께 상승효과를 내면서 퇴행적 양태로 변모되기 쉽다. 한국사회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도 이러한 퇴행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74-77 요약

 
   

 

뱀발.  

1. 마지막 책은 58쪽 이후 한국인의 집단무의식-병리원인 장이 읽을 만하며, 다른 장은 너무 보수-진보를 정신분석적의미로 해석을 하여 착 달라붙는 맛이 없다.  

 2. 인문학스터디는 인문공부의 필요성을 문학,예술-철학정치에서 긴밀도가 있으나 역사학과 기독교사상은 필요성과 소개의 간극이 너무나 큰 것 같다. 강유원이 서구정치사상 고전읽기에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고전을 읽는 이유, 그 맥락에 대해 요긴한 책들이 없었던 것 같다. 사람이 왜살고 어떻게 살고, 어떤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관계를 형성한 시대의 흐름은 여전히 중요한데, 지금 이곳을 살아내는 사람들은 시선이 고정되고 몸도 고정되어 아예 다른 관점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닐까? 현대인이 일차원의 인간을 제조해내고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삶이라면, 조금만 시선을 달리해도 너무도 다른 시선 관점, 열정, 마음, 손발의 차이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만 맞춘다고 하더라도 지금여기를 위한 자양분은 넘치는 것은 아닐까? 

3. 이념교육이든 커리큘럼이든 르네상스의 배후 중세, 근대인이 소멸시킨 공동체나 공적인 장, 지금의 다른 곳, 나라의 삶에서 얻으려하지 않고, 늘 알량한 조명등으로 늘 재단해버린 것은 아닐까? 

4. 늘 원전보다 어려운 해설서에 답을 구하려했던 것은 아닐까? 인문의 요지가 지금을 어떻게 살 것이라면, 늘 수평면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면 인문의 진보는 없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을 한다면 나름 무장해제를 하고 온몸으로 고대-중세-근대-지금의 맛보고 느끼고 그 차이, 그 숨결에 더 가까워져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말로만 하는 조각난 자아의 나, 너, 나-너를 치열하게 비교 감수할 생각을 하면서...우리의 퇴행을 하나하나 벗겨나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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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 사랑의 변천사(ing)
    from 木筆 2009-04-02 17:28 
    낭만적 사랑의 변천 - 사랑,결혼,섹스(성) 1. 열정. 어떻죠. 위험한가요? 개인이란 존재감이 없는 시대라면, 신에 대한 사랑만이 이해되었다면? 일방을 향한 열정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요? 그것도 주체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아마 이상한 취급을 받았겠죠. 2. 중세에는 어떠했을까요? 기사와 귀부인의 슬픔을 감수하는 로망(마조히즘적 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물론 결혼은 번외였습니다. 결혼과 사랑을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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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위에 목련이 타버렸다. 한결같이 꽃잎의 가장자리가 추위에 얼어 붉게 타버린 채, 그대로 주춤거리며 서있다. 지난주 만개를 하리라 여겼는데, 일주일내내 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결빙되어 있다. 그나마 미처 봄을 타지 않은 음지의 목련이나마 다시 화려한 만개를 준비하고 있을 뿐. 혹시나해서 [붉은구름이머무는 곳]으로 달려가보았지만, 안스러울 정도로 초췌하다. 여섯잎의 목련, 자목련 조금, 그리고 아파트의 찌를 듯한 꽃잎들을 담아본다. 10k  

뱀발. 며칠 쉬고 책들을 살펴보니 사멸했던 기운이 조금 솟아오른다. 그래서 달음박질에 간을 맞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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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봄의 내림길에서
    from 木筆 2010-04-13 17:02 
    원주, 서울을 다녀오다. 정지선을 넘은 색들. 끊임없이 펄펄 끓는다. 돌아와 목련이 궁금하여 자주구름터를 마실다녀온다.  이제는 이름을 붙일만한 녀석들이 반갑다. 밤은 녀석들이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 사진으로 잡아내기 어렵다. 안타까운 실루엣과 애타는 마음만 앗아온다. 한차례 비가 짙으면 이내 나무 연꽃의 애처로움만 볼 수밖에 없다. 가기 전에, 상처입기 전에 보려면 어서 서둘러야 한다. 소문나기 전에... ...
 
 
파란여우 2009-03-29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련길 따라 뜀박질하시는 그림이 그려집니다. 저는 오늘 낮에 복순이를 데리고 약 4km를 걸었습니다. 힘들더군요. 꽃길이 아니라서 그래요!(누가 뭐래?)

여울 2009-03-30 09:01   좋아요 0 | URL






십리길을 걸으셨다구요. 꽃길이면 뜀박질하셨겠습니다. ㅎㅎ.
십리 꽃길은 없나여~. 날아다니고 싶군요. 나비처럼~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03-29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곱다.

여울 2009-03-30 09:00   좋아요 0 | URL





고웁죠. 목련향도 정말 곱답니다. ㅎㅎ

밀밭 2009-03-30 0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바지런을 떨었던 꽃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진 폭격이란...차라리 눈을 감고싶은 심정이었죠. 근데 며칠동안 보다보니 뒤늦게 새하얗게 만개한 꽃보다 못다피고 타들어간 꽃에 시선도 마음도 더 가더이다.

여울 2009-03-30 08:59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보는 일이라 당황스럽고 마음쓰이더군요. ㅜ.ㅜ
 



전에 미술관에서 찍어두었던  고독한 여행자의 방을 담은 그림이 찾아보니 없다. 낯선 곳의 방이 점점 익숙해지고 여행가방 하나 둘 있던 방들에 조금씩 채워지다 이제는 옷장이 마지막으로 자리잡아 버렸다. 이것저것 청소하고 옮기고, 편안한 복장으로 기차에서 흔적을 남긴다. 

책욕심에 반납해야될 책무게가 옷무게, 노트북과 겹쳐 무겁다. 횡하니 한주가 지나니 듬성듬성 배어문 책의 기억들이 새롭다 싶다. 그리 쪽수도 많치 않은 책을 이렇게 넘기다니 안스럽고 내 몰골도 그러하다. 늦은 저녁을 먹을 무렵. 조기매운탕에 한숨을 돌리려는데 참* 전화다. 내일 고교생들을 섭외를 많이 하였고 오리엔테이션을 한다구 한참 이것저것을 묻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사무국장의 교수신문 서면질의서까지 챙겨보고 내일 분위기와 나눌 이야기들을 오는 길 확인해둔다. 

내일 하루가 오밀조밀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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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라는 것이
 상황의 산물이 아니라
 상황의 협박으로 다 여러갈래길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나라마다 다른 아픔으로 추하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이
 살고싶은 삶들의 공배수로
 삶의 기획으로 다 여러갈래길이 모여드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라마다 더 나은 즐거움으로 아름답게 될 수 있는 것이라면

 역사라는 것이
 다른 삶과 조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그렇게 되지 못한 탓이 아니라
 그렇게 된 이유에 심취하게되고
 그렇게 될 것에 궁금하게 되고

 궁금증은 뿌리를 내리다내리다가 국경을 없애고 이어질 것이라는 낭만으로 시작해서 저 아프리카에 닿고 저 스위스에 닿고 저 희망봉까지 더 나은 시스템과 삶의 양과 질, 나은 것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하는 고전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가끔 바로크적인 삶의 격동을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왜 세상은 늘 평화와 등진 전쟁과 인권을 멸시하는 핍박과 테러와 권모와 술수만 앞자리에 서야되는 것일까? 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당연한 듯 생각해야되는 것일까?하는 회의주의자도 되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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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 네번째 갈무리



추천 : 0 이름 : 아카데미 작성일 : 2009-03-25 17:51:32 조회수 : 5



내일이 동치미 모임인데 이제야 지난 후기를 쓰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가물가물한 탓에 말 많던 지난 모임이 조금 정리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 모임에서 우리는 <아파트 공화국>을 주 텍스트로 삼아 주거 문화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참가하신 분들이 아파트 경험이 없거나 적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물론 아파트 주거의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아파트 공화국’을 얘기하는 데 있어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것 같네요. <아파트 공화국>의 저자가 프랑스인인 것을 보면요. <아파트 공화국>에서 주로 다루는 수도권의 중산층 아파트 거주자들이 이야기에 함께 참여했다면 좀더 다양한 관점도 생겨 재밌지 않을까 싶지만.


저자는 프랑스 지리학자, 책을 읽고 얘기하는 동치미 구성원은 지방의 타자. 타자에 시선에서 대한민국의 아파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자유로운 얘기방식 덕에 아파트를 걸쳐 놓고 각자의 ‘집’이야기를 비롯한 사적 영역을 넘나들었지만요.






일단 사적 영역부터 시작해서 각자의 ‘집’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초가집에서 단독주택, 빌라, 반지하 자취방, 아파트 등등 각자 어떤 집에서 살아왔는지 얘기를 나눠보고 집에 얽힌 추억이나 집의 의미를 서로 나눠봤죠. 나이가 들면서 집의 의미가 사라졌다는 얘기도 나왔어요. 좀 다른 얘기지만 생각해보면 한국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집은 얼마나 의미 있나 싶네요. 현재 집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최고의 집값, 최고의 의미는 재산으로서의 의미니까요.


아파트는 가보처럼 여겨진 집의 개념을 쿨하게 바꿨나 봅니다. 재산일 뿐 더 이상 가보는 아니죠. 그 이외의 의미는 들어올 틈도 없고, 또 다른 의미는 아파트의 ‘쿨’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요. ‘쿨’이 현대의 덕망이 되었듯 아파트도 주택의 덕망이 되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공간, 나를 말해주는 공간, 꿈을 현실로 이루는 공간으로요.


군사기지 같이 일렬횡대, 종대로 늘어선 아파트에서 그 어디에 꿈이 숨어 있을까요? 프랑스에선 빈민촌의 상징인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꿈의 전당이 되었을까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사는 집의 외관과 주위 환경에 이렇게까지 무관심해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대대로 널찍한 마당을 두고 단독주택을 고수하던 그 많은 사람들이 쭉쭉 늘어선 멋없는 직선에 몇 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했을까요?



재벌과 군부정권의 유착, 현대화 서구화의 잘못된 개념, 뉴타운 신도시 등 새로운 것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 중산층을 타깃으로 삼은 점 등등 답이야 <아파트 공화국>에서 나왔다면 나온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가 얘기하면서도 나왔듯 아파트가 이미 하나의 권력이 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아파트에 사는 아이와 일반주택에 사는 아이가 갈리고, 아파트 이외의 지역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 오지 못하도록 아파트 주민들이 시위하는 등 일상생활의 차별이나 불이익도 있죠. 그만큼 아파트 문제는 안다고 싶게 달라질 만한 문제는 아닐 듯싶어요. 이미 일상을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안타까울 뿐입니다.


늦은 얘기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저렇지 않았다면’, ‘이것이 아니었다면’ 식의 가정을 해보게 됩니다. 아파트가 정말 국민 주택으로써 서민들을 위한 정책으로 만들어졌다면, 집이라는 것이 재산의 의미가 아니라면,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아마 우리 사회는 좀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뽑히지는 않았으리라 장담해봅니다.



<아파트 공화국>에서 저자가 한국에서 뉴타운과 신도시라는 개념이 마구 사용되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왜 이렇게까지 ‘뉴’, ‘신’이라는 말이 판을 칠까, 하는 얘기도 나눠봤습니다. 지난 역사를 수치로 생각해 전통까지 배격해버리게 된 배경도 있을 테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문화가 확산되는 과정의 문제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가 여러 방향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위계급이나 중산층이 하면 아래 계층에서 따라하는, 위에서 아래로 확산되어 가는 것이 보편적인 과정이기 때문이죠. 중산층이 시작한 문화를 새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쫒아가지 못하면 시대의 낙오자가 된다는 압박감. 휴대폰에서 시작해서 인터넷까지 IT상품들이 우리나라에서 유래 없이 빨리 확산된 탓은 민주화된 사회가 원인이기 보다 오히려 그 반대급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새롭고 서구적이며 현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아파트도 그런 반대급부의 하나이겠죠. 하지만 서구 선진국 어디에도 고층 건물이 들어선 도시는 유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파트 문화는 분명 편리함과 안락함을 주지만 요즘 어떤 전원주택도 그만한 안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아파트의 곳곳에서는 전통 한옥의 계량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란다를 마당으로 쓰거나 온돌식 난방이거나 좌식 생활이 혼용되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죠. 결국 아파트는 서구적이지도 현대적이지도 않다는 얘기겠죠.



<아파트 공화국>은 프랑스 지리학자의 논문을 수정한 책답게 주택 정책과 아파트에 살아가는 모습을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외국인이니까 상황을 담담하게, 또는 냉철하게 비꼬면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 공간에 있는 사람으로써는 여간 답답하고 암담한 문제지만요. 아파트 문제가 단순히 아파트 문제만이 아니라 전 사회에 퍼져 있는 고름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구성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정부 정책, 물질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만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중산층과 그것을 좋든 싫든 따라가야 하는 서민, 잠자고 먹는 주거 공간까지도 돈으로만 환산하고 생활의 질이나 살아가는 일에 대한 성찰은 전무한 사회. 개발논리와 약육강식이 너무도 쉽게 통용되는 냉정함 등등.


책을 읽으면서 또 대화하면서 효율성과 개발논리가 전부인 정부의 주택 정책에 화가 나고, 전통과 역사를 무조건 부정하고 앞으로 나가야 했던 아픈 과거도 안쓰럽고, 새로운 것에 대한 그 어떤 취향이나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단지 뒤처지지 않으려 애를 쓰는 몰개성과 지성의 부족이 속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것도.



호주에서 온 선배 남자친구에게 한국이 어떠냐고 하자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이상한 점도 좋은 점도 있는데, 특히 허리가 굽은 나이든 할머니가 무거운 시멘트를 대야에 담아 끌고 가는데 그 모습이 충격적이었다고 합니다. 평생 일에 찌들어 산 사람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이죠. 근데 한국에는 그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거죠. 건축에 대해서 물어보니 건축에 대해선 한국 건축가들의 미적 감각을 의심합니다. 물론 아파트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고요. 그가 생각하기에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이 아파보인다고 하네요. 구석구석 아파보인다는 그 말에 제 마음이 다 따끔거렸습니다.



아픈 구석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까긴 했는데 대안은 깜깜하네요. 다음 모임에서 대안을 얘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겼으면 하네요. 다음 모임은 아시다시피 내일 7시 아카데미 책방에서 주거에 대한 각자의 주제 발표로 진행합니다. 발제하실 세 분은 김경량님(생태주택), 김모세님(미정), 서희철님(도심의 발달)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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