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유아기다(ing)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리학 전공과 시인의 거리는 이공계와 인문학의 사이만큼이나 멀다. 이과생을 만나면 숨이 턱턱 막힐때가 있고, 그 단순함이 답답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낳은 거리감으로 인한다. 물밑 소통도 없는 것을 보면, 참* 모임을 하면서도 외로움을 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친한 거간역할을 한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거리감만큼이나 술한잔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촛불로 대*역 광장에서 짧게 만나 기억과 지금의 기억이 제법 낯설다. 나무가 옛날이야기를 하고 책을 모시는 책좋아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상상력의 결핍이라 한다. 책을 보는 인간은 앎을 서열화하는데 익숙해서 아는 것 밖을 가차없이 자르는 권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상상력만이 그런 서열없이 다양하고 격이 없이 만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과학과 사회, 과학기술과 사회, 과학,윤리,사회이야기를 하다가 과속방지턱이야기를 했더니 시인이 덜컥 걸린다. 아래책을 보면(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과속방지턱하나를 결정하기 위해 기술은 물론이고 어린이, 경찰, 법망 등 사회문화적인 뿌리들이 줄줄이 엮여있다는 설명의 본보기로 든다. 그랬더니 나가지 않는 시집, 아픔어린 시집에 간이 콩알만해진다고 한다.  

그러다가 김수영시인이야기를 하다. 몸을 언어로쓰는 예술인? 나무도 있지만 김수영이 아니라 예술가에 대한 시선이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역시 김수영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꽂히면 가는 예술가의 삶은 일상이 뜨거운 시인과 또 다른 버전이다. 그렇게 물을 타다가 조직과 모임을 나누다. 그래도 바꾸는데 조직이 필요하다라는 나무의 이야기에, 조직은 다소 격하며 모임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모임이 모두 상품처럼 비슷하거나 유사하다. 복제품처럼 모임에 색깔이나 다양성이 없다라고 건네자. 축구회처럼 생활체육이란 공동체의 무기력함과 복합적인 모임을 이야기한다. 과잉투사나 공동체.... 70만개의 마을... 하고싶은 이야기들은 많은데 막고서는 매듭들이 있다. 

책을 읽지 않는 나무는 책좀 읽었으면 좋겠다. 상상력의 울타리의 존재조건도 달리보는 앎에서 출발할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서열화하지 말고 또다른 이의 만남으로 말이다. 추천해주고 싶은 책들이 여러권이다. 읽는다면....상상력이 아니라 파상력이란 단어를 쓰던데, 상상력을 넘어서는 그 파상력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같이있는 가치란 농협의 브랜드 로고가 걸린다. 바닥을 치고 타넘고 혼자가 아닌 같이 상상력을 부수는 노력.....이 조금은 근접할 수 있을까?  

 

취기의 속도를 맞추다보니 벌써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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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 그런 면이 있고 간간히 그런 느낌을 느끼는것이 불편하고 싫었던 기억에대한 얘기였음. 하지만 편견..그런걸 가지고 있지는 않고 - 헤헤헤. 그리고 전혀 안 읽지 않음 - 책 - 형 만큼은 절대 못 읽지만^^
그러니 좋은 책 추천바람^^ 똥오줌 가릴줄 알면 됐지 뭐 - 요 생각 버리면 아마도 한달에 두세권 읽을수 있는 시간은 충분 할 듯. 늦게 시작한 기타연주가 그나마도 더 오래걸리는 이유는 기타를 잘 연주하는 것보다 기타라는 기재를 통해 내가 연주되는 행복하고 짜릿한 상상을
꿈꾸어서 인데, 기타라는 악기를 이해한 이후부터는 교재를 덮고서 내 손가락에 독립된 뇌를 가진 날개를 달아달라고 귀신들에게 부탁을 하지. 관심을 가져주는 기적은 아직 안 일어나고 있지만 - 아마도 밥말리 엉아에게 부탁해서 그런듯 - 그 양반은 가수 거든. 지미핸드릭스에게 해야하는데 그 양반한테는 그런 얘기 하기 싫고. 그래서 반응이 없는듯 -헤헤헤 -
 

나르시즘

나란 녀석의 동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리 저리 돌아다닐까. 머무는 점 없이 저리도 나다닐까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뒤에서 아이가 와락 한다. 흠칫놀라며 멈칫한다.  좋은관계만 탐하는 것은 아닐까. 흔한관계는 뒷전으로 하고 바라보는 관계만 쫓는 것은 아닌가. 관계는 늘 있어왔거늘 투명하여 없는 것으로 지나치는 것은 아닐까. 변두리로만 향하는 관계들. 관계들은 이어져 있지 않고 중동나있다. 깨진 거울처럼 나만 부여잡으려해서 멀리비치는 나는 구멍숭숭 뚫려있다. 욕심이 붙어있는 몸의 동선들앞에 점점 강하게 들러붙는 나. 멀리비추이는 나는 관계에 서열을 매기는 내가 중심에 있다. 끊임없이 쫓는 나를 잡을 수 없다. 나에 대한 애착이 너로 가는 길을 잘랐다. 늘 나있던 길을 막았다. 나에 대한 집착을 너에게 가는 길이라 웅변한다. 

너르시즘

너란 녀석의 동선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저리 저리 갇혀있을까. 관계의 그늘에 갇혀 늘 다니던길만 점찍는다.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너가 나를 바라본다. 눈은 마주치고 주춤선다. 좋은관계만 탐하는 것은 아닐까. 흔하디흔한관계는 뒷전으로 하고 바라보는 관계만 쫓는 것은 아닌가. 관계는 늘 있어왔거늘 투명하여 너에겐 내가 없다. 깨진 거울 속의 너는 여기저기 날선 빈구석들만 가득이다. 욕심이 붙어있는 몸의 동선들앞에 점점 강하게 다가서는 너. 하지만 너를 채울 수 없다. 끊임없이 갈증나는 목을 축일 수 없다. 찾으려하면 할수록 너를 찾을 수 없다. 너에 대한 애착을 너로 가는 길이라 웅변한다.


널 한번 모신적은 있던가. 원하는 것을 탐할 뿐 너와 나 사이에 있는 관계를 모신적은 있던가. 날 한번 모신적은 있는가. 어떤 것을 잡으려할 뿐 있는 것을 두손으로 모아 흘러내리지 않게 보듬은 적은 있던가 

 

뱀발.   

1. 연못에서 놀다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연못의 물위에 살얼음이 얼고, 얼음은 점점 두꺼워진다. 희미해지는 내 모습 사이로 쩌억 금이 간다. 나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조각조각난 얇은 얼음파편들. 얼음조각은 날이서고 삐둘빼둘이다.  위태롭다. 햇살이 비추고 연못 주위의 조각난 얼음엔 햇살이 모이고 한방울 한방울 눈물을 담아놓는다. 천개의 나, 천개의 너. 내가 만드려는 얼음기둥은 네가 만들려고 하는 얼음기둥은 너의 눈물을 먹고 자라지만 해가 비추고 있으므로 서서히 여기 응달을 파고들어 더는 만들 수 없다. 내 세상도 아니고 네 세상도 아니다. 어쩌면 벌써 우리들 세상이다. 얼음을 얼릴 필요도 없고, 물 한점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늘 언제나 물한점, 눈물한점 모이고 따듯하게 온기를 나누면 그뿐이다.  연못은 툭 터지고 나의 얼굴도 한점 한점 흘러간다. 그리고 저기 터진 샘물의 한점을 만나 또 간다.  

2. 여기저기 묻어 있는 나를 만난다. 그렇게 먼나는 제각각이다. 섬찟한 넘도 있고, 알량한 놈도 있고, 일편향인 놈도 있고, 맘씨 푸근한 년도 있다. 어디를 그렇게 가는 것인지 쫓아가보니 이것저것 흘리는 것도 많다.  

3. 얼굴밖에 볼 수 없었다. 등 뒤를 보려하지 않았고, 밝음만 애써 찾으려 기를 썼다. 어느날 문득 저기 먼곳 등 뒤편의 얼음조각을 통해 뒷모습이 비친다. 아차... ... 나란 인간은 늘 그랬구나.  그 딱지를 뗄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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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엔 약이없다. 술약속을 마다하고  도서관엘 들러 반납겸 마무리 독서다.  동네 쓰리런정원을 한바퀴 달려준다. 등줄기 오싹한 샤워를 하고, 새벽 입추의 빈틈을 타고넘은 가을 바담풍에 몸을 쓸적 맡겨보는 수밖엔 없다.

 7k 37' 

 뱀발. 오가는 길 연두네와 바다를 만나다. 더위엔 장사가 없구나. 다들 몸을 괴롭히러 나온 모양이다. 강명관의 서울풍경은 근대 잡지를 옮겨 놓은 것이다. 깍정이란 말이 서울사람을 욕한 말이라는데 걸인이란 말에서 나왔단다. 믿거나 믿거나. 그리고 위키노믹스는 짬짬이 보고 있는데 위키일터편을 살펴보다. 흐름이란 것은 업종마다 접촉빈도나 고민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일정한 방향을 갖고 있어보인다. 과잉도 거시기하지만 과소도 거시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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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0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0 17: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10-08-10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님, 잘 지내셨나요?
다름이 아니오라, 여우형님 강연 시간과 장소가 어찌되나요?

2010-08-10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볕 더위 진주성 앞에 물끄러미 꽃들을 보다. 어쩌면 꽃들도 한점, 한점, 한올 한올 풀리며 뜨거워지다 활짝 끓는 것은 아닌가 싶다. 끓는 꽃들은  꽃들 목을 넘어 여기저기 활짝 고개를 내미는 것은 아닐까. 끓어넘쳐 불감을 화들짝 데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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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발끝까지

 

 

 

 

 #1. 

세번째, 서울-욕망의 도시로 이야기를 나누다.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의 기억이라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20대에겐 또 다른 문제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겠다. 재테크나 돈의 축적과정에서부터 어떻게 그렇게 결론으로 욕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논리가 궁금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풍선을 불리다 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화 속의 캐릭터처럼 욕망의 내적논리의 말로는 어떻게 봐야하는지 말이다. 영화 속의 캐릭터처럼 모두가 부동산지식에 대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하란 말인지.  그 욕망을 충족시키면 누가 이득을 보는지. 안타깝게도 돈은 더 갖을 수 있겠지만, 가진자든 그렇지 못한자든 몫이없는 자든 똑같은 피해자가 되는 현실은 그래도 쳇바퀴처럼 가속페달을 밟는다. 

#2. 

욕망과 욕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욕망이라 묘사하는 순간 모든 문제는 개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내것을 위한 배치. 나를 정점으로 한 서열과 사유. 모든 것은 나란 꼭지점으로 행해진다. 욕망의 서울. 욕망의 사십년. 그렇게 살아진 것으로 얻은 것은 아이엠에프의 문턱으로 더욱 자명해진 것일까. 20대는 광고 알바로 철야를 해야 6,7만원의 일당을 받는다.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삶을 저당잡는다.  

욕구나 필요로 하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3. 

필요하다. 무엇을 하려면 너의 이런 도움이 필요하다. 필요엔 언제나 너가 있다. 문제를 욕망으로 환원하면 그것또한 너의 문제이며, 너의 해결책이거나 너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필요의 물꼬를 만들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4. 

사회단체도 그럴지 모른다. 내것만 익숙해져, 나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나의 욕망을 무의식중에 나타내기 위해, 내것만 챙기려 한다. 우린 아직 욕구나 필요의 경험이나 체험이 없으므로 필요가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지, 싸움에서 그렇게 별반 이겨본 기억이 없으므로 형식적인 연대와 양적인 연대만 있을 뿐이다. 욕망의 포로가 된 것은 모임도 단체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모임의 이기에 사로잡힌다. 

#5. 

필요는 넘어설 수 있게 할까? 도시가 시골의 뿌리를 하나하나씩 잘라 저 홀로 우뚝섰다고는 하지만, 그 욕망은 더 더욱 커짐을 갈구할 뿐이다. 필요는 관계를 붙인다. 하나씩 잘라서 없어져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 없어진 한점 한점이 선명해지고 필요해진다. 뿌리가 자라듯이, 그 뿌리는 점점 땅을 필요로 하고, 시골을 필요로 하고, 숲을 필요로 한다. 욕망의 거대한 뿌리는 도시에 초고층빌딩을 정점으로 삼지만, 필요의 잔뿌리는 마을을 필요로 한다. 조금 조금 작아지고 적어지면서 튼튼해지는 자립을 필요로 한다. 모임도 단체도, 운동도, 활동도 서로 필요하지 않다. 아직 우린 그런 문화가 없다. 물밑 연대란 부차적인 것일뿐이다. 생존이 급선무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다. 그런데 그 생존을 위한 욕망과 방법은 도시를 본뜬다.  

#6. 

필요의 오솔길은 없는 것인가. 필요는 욕망이 물구나무서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위해 원하지 않는 것을 발라낸 결과가 이렇게 처참한데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고하므로 그것을 닮아야 한다라고 한다면, 20대는 어떠해야 하는가? 욕망이 밟아온 20-30년을 고스란히 더 처참하게 대물림해야 하는 것인가? 필요는 서로를 접붙이며 서로 자라는 것일까? 욕망의 눈에는 필요가 보일 수 없을텐데. 보자마자 욕망은 필요를 귀속시키려 할텐데. 어쩌면 필요는 가슴에 언어인지 모른다.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느낌이 닿는 것이고 느낌이 쌓이는 것이지? 설명과 해석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설명하면 할수록 욕망의 늪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7. 

모임과 모임은 살을 섞은 적이 있는가? 살을 탐할뿐, 모임과 모임은 정신을 섞은 적이 있을까? 음, 모임을 혐오한다구요. 그쵸 그럼 다시 욕망을 이야기하죠... ... 

뱀발. 1. 휴가가 겹치기도 하고, 조금은 스산하다. 모임도 오붓하게, 단촐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체의 내밀함과 맥락을 갖는 배타성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적인 자가증식논리 말고 다른 길이나 뿌리는 갖는 다른 논리들이 동시에 자라야 건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늘 개인과 개인의 합이 모임이란 출구를 통하면 합보다 작아지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은 것은 아닐까? 

2. 가다머로 엮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리쾨르와 퐁티...그 사학?의 그늘... 한편의 연장선상에서 박이문님의 신간을 훑어보다. 수다맨 정윤수의 클래식을느끼다의 앞뒤를 보고 주인장에게 혼날까 반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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