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서 발끝까지
#1.
세번째, 서울-욕망의 도시로 이야기를 나누다.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삶의 기억이라 그리 새로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20대에겐 또 다른 문제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겠다. 재테크나 돈의 축적과정에서부터 어떻게 그렇게 결론으로 욕망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논리가 궁금한 것이다. 그렇게 점점 풍선을 불리다 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만화 속의 캐릭터처럼 욕망의 내적논리의 말로는 어떻게 봐야하는지 말이다. 영화 속의 캐릭터처럼 모두가 부동산지식에 대해 혀를 내두를 정도의 깊이를 가지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하란 말인지. 그 욕망을 충족시키면 누가 이득을 보는지. 안타깝게도 돈은 더 갖을 수 있겠지만, 가진자든 그렇지 못한자든 몫이없는 자든 똑같은 피해자가 되는 현실은 그래도 쳇바퀴처럼 가속페달을 밟는다.
#2.
욕망과 욕구의 차이는 무엇일까. 욕망이라 묘사하는 순간 모든 문제는 개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내것을 위한 배치. 나를 정점으로 한 서열과 사유. 모든 것은 나란 꼭지점으로 행해진다. 욕망의 서울. 욕망의 사십년. 그렇게 살아진 것으로 얻은 것은 아이엠에프의 문턱으로 더욱 자명해진 것일까. 20대는 광고 알바로 철야를 해야 6,7만원의 일당을 받는다.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과 무관하게 삶을 저당잡는다.
욕구나 필요로 하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3.
필요하다. 무엇을 하려면 너의 이런 도움이 필요하다. 필요엔 언제나 너가 있다. 문제를 욕망으로 환원하면 그것또한 너의 문제이며, 너의 해결책이거나 너의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필요의 물꼬를 만들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4.
사회단체도 그럴지 모른다. 내것만 익숙해져, 나의 욕구를 실현시키기 위해, 나의 욕망을 무의식중에 나타내기 위해, 내것만 챙기려 한다. 우린 아직 욕구나 필요의 경험이나 체험이 없으므로 필요가 어떤 결과를 나타내는지, 싸움에서 그렇게 별반 이겨본 기억이 없으므로 형식적인 연대와 양적인 연대만 있을 뿐이다. 욕망의 포로가 된 것은 모임도 단체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모임의 이기에 사로잡힌다.
#5.
필요는 넘어설 수 있게 할까? 도시가 시골의 뿌리를 하나하나씩 잘라 저 홀로 우뚝섰다고는 하지만, 그 욕망은 더 더욱 커짐을 갈구할 뿐이다. 필요는 관계를 붙인다. 하나씩 잘라서 없어져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 없어진 한점 한점이 선명해지고 필요해진다. 뿌리가 자라듯이, 그 뿌리는 점점 땅을 필요로 하고, 시골을 필요로 하고, 숲을 필요로 한다. 욕망의 거대한 뿌리는 도시에 초고층빌딩을 정점으로 삼지만, 필요의 잔뿌리는 마을을 필요로 한다. 조금 조금 작아지고 적어지면서 튼튼해지는 자립을 필요로 한다. 모임도 단체도, 운동도, 활동도 서로 필요하지 않다. 아직 우린 그런 문화가 없다. 물밑 연대란 부차적인 것일뿐이다. 생존이 급선무다. 생존을 위해 처절하다. 그런데 그 생존을 위한 욕망과 방법은 도시를 본뜬다.
#6.
필요의 오솔길은 없는 것인가. 필요는 욕망이 물구나무서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위해 원하지 않는 것을 발라낸 결과가 이렇게 처참한데도,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사고하므로 그것을 닮아야 한다라고 한다면, 20대는 어떠해야 하는가? 욕망이 밟아온 20-30년을 고스란히 더 처참하게 대물림해야 하는 것인가? 필요는 서로를 접붙이며 서로 자라는 것일까? 욕망의 눈에는 필요가 보일 수 없을텐데. 보자마자 욕망은 필요를 귀속시키려 할텐데. 어쩌면 필요는 가슴에 언어인지 모른다. 머리의 언어가 아니라 느낌이 닿는 것이고 느낌이 쌓이는 것이지? 설명과 해석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설명하면 할수록 욕망의 늪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7.
모임과 모임은 살을 섞은 적이 있는가? 살을 탐할뿐, 모임과 모임은 정신을 섞은 적이 있을까? 음, 모임을 혐오한다구요. 그쵸 그럼 다시 욕망을 이야기하죠... ...
뱀발. 1. 휴가가 겹치기도 하고, 조금은 스산하다. 모임도 오붓하게, 단촐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단체의 내밀함과 맥락을 갖는 배타성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적인 자가증식논리 말고 다른 길이나 뿌리는 갖는 다른 논리들이 동시에 자라야 건강해지는 것은 아닌가 늘 개인과 개인의 합이 모임이란 출구를 통하면 합보다 작아지는 경우의 수가 더 많은 것은 아닐까?
2. 가다머로 엮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리쾨르와 퐁티...그 사학?의 그늘... 한편의 연장선상에서 박이문님의 신간을 훑어보다. 수다맨 정윤수의 클래식을느끼다의 앞뒤를 보고 주인장에게 혼날까 반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