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의 과학자에게 당신이 연구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정치와 관련이 있습니까? 사회적인 이해관계와 관련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할까? 제가 하는 연구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되묻는 것은 아닐까? 순수한 연구에 밤낮을 불문하고 몰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황우석이 아니라도 연구원이나 과학기술자들의 행위는 정녕 순수한가? 만약 과속방지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에 관계된 것은 무엇이 있을까? 교통경찰의 역할, 법규, 운전자의 습관, 동네의 담론, 서건, 사업자 선정을 둘러싼 이권 등이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이란 것에 기술이란 것에 사회가 뭍어있을 것이다. 마치 순수한 것인냥 주장을 할 수 있겠지만 연결고리를 물고 들어가면 순수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다른 관계에 무관하다고, 세상과 무관하다는 실험실의 연구원을 저기 태평양 섬의 한 부족이나, 저기 아프리카나 아마존 정글의 부족처럼 정체를 파악하기위해 인류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할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똑같이 접근이 가능하고 그렇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부족처럼 실험실 인간을 연구한다면, 그 근대인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존재인지? 얼마나 허점투성이인지? 얼마나 자신을 맹신하는지에 대한 구멍숭숭뚫린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도, 문학도, 예술도, 정치도, 경제도, 법도, 철학도 제 잘난 맛에 가고 있지만 역으로 시인부족이나 정치인부족이나 법학부족이나 말도 되지 않는 뿌리없는 존재의 맹점을 까발릴 수 있으리라. 우리가 딛고 있는 바닥, 생각이 딛고 있는 바닥, 고정관념이 딛고 있는 바닥들, 그 전제에 대한 고찰로부터 우린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만 돌이켜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씁쓸하게 자본주의를 뱉어낸 인간과 맥락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 바닥들이 얼음처럼 이젠 다 녹아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모두 헤엄쳐야만 할지도 모른다. 서로 손을 내밀어야 겨우...저만큼... ...이미 늦은 일일까?  그게 아니다라고 하는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봐야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치의 절반은 과학과 기술에 의해 구축된 것이다. 자연의 다른 반쪽은 사회에서 구축된 것이다. 이 두 쪽을 다시 이어서 맞추고 나면 정치적 과제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1.

브뤼노 라투르는 프랑스 출신의 과학기술학자이다. 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전공하였고 현대과학기술에 관한 인류학적이고 철학적인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복잡한 행위자-연결망이론으로 이론적 성과가 외화되어 있는 듯하다.   

지금에 대해 아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나누는 분기점으로 시선을 다시 돌릴 것을 제안한다. 대상을 정화시키고 분할하며 분리시킨 뒤, 익숙하게 재가공하는 모든 행위는 대상을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고, 그것을 증식시킨다.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것, 사회로 환원시키는 것. 과학과 기술에 얻은 것을 그대로 정치에 적용하는 것이나 그렇게 따로따로 가져가는 것은 별반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혁명의 기관차는 더욱 더 지칠줄 모르고 달려왔다. 

   
 

"우리가 냉동 배아, 전문가 시스템, 디지털 기기, 센서 기반 로봇, 이종교배 옥수수, 데이터베이스, 향정신성 의약품, 레이더 신호기가 부착된 고래, 유전자 합성기기, 청중 분석 장치 등등에 둘러사이게 된다면, 이 키메라들이 대상이나 주체 그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한다면 분명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

 
   
 
 2.  
 
그런데, 구획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나돌아 다닌다. 자연이라고 할지? 사회로 나눠야 할지?  자연법칙이나 정치적인 문제로 나누는 것이 더 이상 해결책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헌법이라는 것이 더 이상 자연의 편이든 사회의 편이든 그것을 받치고 있던 골간(사물의 법칙과 주체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지탱되지 못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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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환원이나 이분법의 편식은 대상을 편취함에 따라 급속히 사건들을 증폭시킬 가능성을 갖는다. 어쩌면 그것이 혁명적인 학문의 분류나 진전을 가져왔을 수 있다. 그렇게 대상과 주체를 도와 모로 나뉘게 됨에 따라, 이분의 칼날에 배여나간 개,걸,윷의 비참은 목소리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2. 어쩌면 대상이나 앎의 편식의 방법론적 취약함이 결정적인지 모른다. 여기에 보태 직선적인 시간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역사주의는 과거와 미래를 나누게 되고 지난 사실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나선형의 시간관을 갖는 것만으로도 여러 맥락과 사건들, 사실들을 관통하여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수많은 사실들을 지난 시간에서 현재화시킬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오만이 근대인을 근대인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이런 시간관에 벗어나기만 해도 전근대인, 중세인, 고대인을 저기 역사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선으로 인해 보다 더 다름을 이곳으로 채울 수 있기도 하다.

3. 라투르는 인간의 의회, 주체의 의회가 아니라 사물의 의회를 열어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사물이 배태하고 있는, 사물에 딸려있는 여파가 고스란히 인간에 전해지기도 하지만 인간-비인간의 구획도 그렇게 신뢰할 만한 일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스쳐지나가며 버렸던 개-걸-윷의 관심을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복원해내거나,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인간에 귀속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붙어있는 수많은 관계들에 의한 민주주의를 확장해야 되는 것이라 한다. 

4. 탈근대의 커다란 맹점은 근대를 해체시키지만, 정작 방식이나 저변의 그것은 근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이러한 설명들은 몇권의 저작을 기초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사회적 맥락 속의 홉스와 보일로 돌아가 그 분기점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다른 매개들을 설명해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방식이 여러 논의로부터 조금은 덧셈을 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그런 면에서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으며, 세계는 아직 유아기에 불과하다라고 한다. 인간을 비인간과 나누고 인권이란 광폭에 비인간, 자연을 그들로 전락시킨 책임을 고스란히 지고 있는 지금를 사는 사람들은 곱씹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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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813
    from 木筆 2010-08-14 16:20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를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물리학 전공과 시인의 거리는 이공계와 인문학의 사이만큼이나 멀다. 이과생을 만나면 숨이 턱턱 막힐때가 있고, 그 단순함이 답답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낳은 거리감으로 인한다. 물밑 소통도 없는 것을 보면, 참* 모임을 하면서도 외로움을 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친한 거간역할을 한분들이 있었는데, 그런 거리감만큼이나 술한잔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촛불로 대*역 광장에서 짧게 만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