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론>을 본 것 같은데, 주변만 훑은 것 같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와, 딕모리스 <신군주론>,황당한 처세서 <마키아벨리라면 어떻게할까> 로 원작을 왜곡한 버전 5,6,7,8 인 것 같다. 오해를 낳고 유통되는 마키아벨리즘류가 아닐까 싶다.

 1.< 마키아벨리 어록>은 시오노나나미 저자가 국가,인간, 그리고 제일 앞의 3편으로 나누어 원어 직역을 최대한 살려 따로 모아놓았다 한다. 힘과 마음을 담아서 말이다. 정작 논의 되지 않는 전제에 대해서 다시 살려볼 만하고,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는 버전들은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원저자의 생각과 별개로 전혀 다른 버전들이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2.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떻게 살고 있느냐 (이 세상에 없는 이상적인 것을 논하는 것과 이 세상의 현실적인 것을 논하는 것)를 구별해야한다. 희망사항과 현실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보지 않으면 대부분 의도한 선이나 이상이 현실의 다른 것에 의해 묻히거나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정치>에 대한 해석이다. 이것처럼 왜곡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역자는 <정치>란  가지고 있는 힘을 공정하게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기법이라고 한다.

 3. 두가지 관점에서 보게 되면,  현실적인 변화를 위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말할 것도 없으니, 현실에 있어 여러 조건, 역량 같은 것을 허구 속에 잠겨버리는 이상과 구별해내는 작업과, 현실화를 위해 얼마나 세분화하여야 하는 것들이 들어가 있는 셈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개입시키지 않고 현실을 분석하는 일은 방대하다. 종교가 배제되며, 여러 조건에 대한 분석 민중,군중,공화,군주,관료 등등 이어나가는 통찰력에는 가히 놀랄만 하다.

 4. 그러면서 한편으로 인류가 무수한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 또한 국가와 민족의 존망이 그토록 유사함에도 역사로부터 배우려하지 않은 어리석음에 기인한다라고 한다. 500년전 지적에 조금도 자유롭지 않는 지금 현실을 본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5.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무엇인지?  덧셈에 대한 고찰이라고 보면 될까? 아니면 그로 인한 곱셈?  의외로 문제를 뒤섞거나 고민거리를 뒤섞는 바람에 애초의 상태를 잊는 경우가 많다. 운동이나 활동하는 경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논의결과들을 제거해보면, 모둠이 가지고 있는 판단력이나 능력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금과 앞을 교묘히 뒤섞어 어느 하나도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라 할 수 있겠다.

 6. 그러다보면 실타래에 뒤섞여, 처음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뒤섞여 있는지 조차는 사라지고, 여전히 뺄셈부근을 서성이거나, 한참이나 뒤쳐져있는 습속에 또 다시 파묻혀야 한다. 집단이 얼마나 어리석어 왔는지는 이런 지점에서 보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덧셈은 없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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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정보를 투하하(려) 는 사람들을 보며


지식, 앎은 상대에게 터뜨리는 폭탄이 아니라 공감이다. 가르치려하지 말고 지식과 정보가 가는 길을 상대의 입장에서 골고루 꾸며두라. 그 꽃길을 사뿐히 걷도록.

 

가진 것(지식-능력)을 위해서 투하하지 말고, 서서히 골고루 차오르고  스며들어야 한다.

 

투(하)입은 불순하기까지 하다. 공급자와 수요자를 가른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를 형성해 서열을 만든다. 그 힘에 줄을 서게 만든다. 힘바라기가 생긴다. 부수적으로 생긴 제도와 힘을 지식-정보에 덧붙여 써먹으려는 욕심. 그 욕심으로 관계를 맺으려 하고 조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식과 정보란 몸이 운신하기 위해 걸리는 관계에 대한 윤리와 책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여 지식, 앎이라는 것도 가져가는 사람의 몫, 바탕만큼만 자라난다. 받으려고 하는 만큼, 마음에 가져가는 만큼만이다. 그래서 무차별적이어서는 더욱 되지 않는다..

 

지식과 정보를 주는 습속이, 아니 받는 습속과 함께 느끼지 못하는 사이 당신의 무의식을 점령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이런 과정이 몸에 배이게 되면 지식-정보가 자신을 거슬러가는 것도 비껴가는 것도 초조하다. 불안하다. 자신이란 필터를 통해가지 않는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각기 다른 씨앗은 다양하게 열매맺고 크고 풍부해지는 것이 아니라, 배급소란 블랙박스를 거쳐야 하기에 힘들고 곤란해진다. 병목지점이 생긴다. 의지와 상관없이 지식의 화살은 날라다니고 있다. 조직과 지식-정보의 왜곡된 관계로 일그러진다. 조직과 개인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다.

 


그런이유로 지식-정보의 사회화 과정은 일상에서 눈여겨 봐야한다, 걸린 덫에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 폭력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을 뿌리치기도 쉽지 않다. 지식-정보라는 것이 앎의 과정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 가져가야 하는 습관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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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약 직

                                     -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

김명환

KTX 여승무원이 되고 나서/나는 껌을 씹지 않는다/컵라면도 통조림도 먹지 않는다/봉지 커피도 티백 보리차도/드링크도 탄산음료도 마시지 않는다/물티슈도 네프킨도 종이컵도/나무젓가락도 볼펜도 쓰지 않는다

눈이 하얗게 내리던/크리스마스 이브/아스테이지에 돌돌 말려/빨간 리본을 단/장미 한 송이 받아들고/나는 울었다/내가 불쌍해서/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이/가여워서/눈물이 났다

제복을 입고 스카프를 두르면/어는 삐에로의 천진난만한 웃음보다/따뜻하고 화사하게 웃어야 했지만/웃으면 웃을수록/자꾸 자꾸 눈물이 났다

사는 것이/먹고 사는 것이/힘든 줄은 알았지만/이렇게 구차하고 비굴하고/가슴이 미어질 줄은 몰랐다

KTX 여승무원이 되고서야 나는/이 세상이/한번 쓰고 버려지는 것들의/눈물이라는 걸 알았다/흐르고 넘쳐/자꾸 자꾸 밀려오는/파도란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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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71028 시민독서프로젝트(作)
    from 木筆 2007-10-29 11:17 
      서울을 다녀오다. 지금 막 도착했으니, 열몇시간이 넘는 여정이다. 토론회<김순천,조정환,조한혜정>님이 토론자, 사회 고병권,  <김순천>님은 부서진미래 주저자이다. 사실 이름때문에 남자라고 여겼고, 문체나 표현에서는 시인이라고 느꼈는데 역시나 울림이 남다르고 잔잔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도록 하는 톤이, 책의 행간을 닮았다 싶다. 토론자의 새로운 관점 보태기도 신선하고 재미있었고, 이백여명이 훨씬 더 되는
 
 
 

 

 

 

 

 

 

과학, 의학, 기술을 이야기하지만, 그것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세상은 돈만 이야기하지만, 돈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도, 과학, 의학, 기술을 위해서도 다른 괄호가 필요하다. 사회 안에 살면서도 사회와 그 밖의 것을 나누지 않는다.

그러니 눈에 뭐가 씌인 것이 확실하다. 남들은 콩깍지라고 할 수도 있고, 뭐라고도 할 수 있지만, 판돈이 어른거리고, 본전 생각나는 것, 벗어나면 보이는데, 핏발 선 채로 달려드는 것을 보니 중독인 것이 확실하다. 윤리는 자신을 대상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시작이다.

과학, 기술은 아직도 뭔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신화에 대부분이 중독되어 있다. 그것을 감싸고 있는 나머지가 중심에 들어오지 않고서는 그 신화로 인한 영원한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의학기술이 발전하면 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과학기술에 대한 신화에 가까운 맹신은 유독 우리사회에서 더 맹위를 떨치는 것 같다.

뱀발. 학문간의 화해가 아니라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면 과학과 인문학이 저절로 겹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올바른 것 같다. 인문학의 위기, 이공계의 위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문학만, 이공계만을 이야기하는 어리숙함이 더 가관이지 않는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논의하지 않으면 그것 역시 요란한 자학으로 그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패러다임을 만들고, 그 안에서 허우적 대는 것은 아닐까? 정말 위기를 논한다면 이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이것만으로 되지 않으니, 다른 영역이 이렇게 해결해주면 된다고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지는 않을까?

떼를 써서 지원을 받아냈다고 하자. 하지만 여전히 돈만을 이야기한다면 더 사회적으로 나아진 것은 무엇일까? 이공계도 인문계도 밥벌이만을 외친다면...그렇다면 문화-예술계도 위기가 아닌가? 위기라는 근저에 모둠의 이해만을 밝힌다면, 아무도 그 사회의 문제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둠의 문제를 연결시키지 못한다면,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 커밍아웃하지 않는다면, 위기를 가장한 기회주의자들의 행태는 아닐까?


세간에 논란이 된 민*당의 <어시스트의 비유>로 우주비행사 고산과 누구를 들었다. 이것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우주비행사는 체력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할 일도 미스코리아를 뽑는 문제도 아니다. 진보든 보수든, 더불어 언론의 행태까지 짜고 치는 고스톱을 이렇게 잘 칠 수 있을까 싶다. 고개를 끄덕거렸다면, 이 역시 과학기술=미래를 개척할,밥이 되는 신을 등식에 주입되고 세뇌된 연유다. 의식상의 자정 작용도 없는 것을 보면, 확실이 중독인 것이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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