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딩딩 눈이 부은 하늘에

몸을 맡긴 소리없는 비명들
한점 한잎 사선 斜線 을 긋다.

 

그으 서슬퍼런 사선 死線 을 밟다.


 

뱀발. 영하로 접어든 날, 출근하는 길 은행나무들은 아직 초록의 여운이 남아있음에도 툭툭 마지막 잎을 떨군다. 허공에 별똥별처럼 궤적만 남긴 채 제몸을 사윈다.그 묵직한 낙엽들을 밟다. 수북히 쌓인 낙엽들을 조심스레 밟다보니, 어제 면도날처럼 베고 간 현대비정규직 소식이며 시는 왜 고운말만 써야되냐고, 영화는 온갖범벅인데 언제나 순수를 가장하는 말들에 놀아나야만하냐는 사위도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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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영원한 번데기요. [너]는 영원한 나비이다.

 

 

 

 

 

 

 

0. 술한잔 사겠다는 핑계로 서경석과 대담집까지 포함하여 김상봉님 책을 빌리다. 가볍게 달림 마실을 다녀오고 읽다. 미리 마음에 있던 책들이긴 하지만 펼쳐 관심 장에 눈길을 주는데, 맴맴 돌던 박동환, 함석헌, 한용운까지 이어진다. 고개도 끄덕여지기도 하고, [나와 너]에 대한 부분, 함석헌의 참나, 참삶 등 스쳐지나간 말들이 상기된다. [나와너]의 부분은 마르틴부버와 같은 것 같은데 아직 그 출처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김상봉님은 나와 너가 만나 임신해야 한다고 한다. 나홀로 자기만족의 나르시즘이 서양철학의 맹점이기때문에 나와너가 만나 임신해고 아이를 나아야한다고 한다.(오해하겠다. 그 나와너가 아니라 먼댓글 나와너임을) 그런면에서 한층 깔끔하기도 하다.

1. 그래도 의문점이 든다. 이점들은 세밀히 읽으면서 더듬기로 한다. 아래 박동환님은 어렵다. 그에 비해 함석헌님은 한결 수월하기도 하다. 우리철학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명사도 동사도 아닌 그 무엇인 것이 더 가능성이 높다. 근대사 책을 읽다가 신채호와 한용운이 섞였는데, 한용운님 시들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마음길들도 마찬가지... ...

2. 부산행이다. 오후 학회...가기 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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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11-2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엔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지만 어떤 담론이 형성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불임의 현장이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온라인이라 그런가? 오프라인이라면 풀릴래나?
오늘 모처럼 시간이 나서 쓸데없는(?!)사유 한 꼭지를 던지고 갑니다.
이 동넨 사흘째 눈입니다.

여울 2008-11-20 12:21   좋아요 0 | URL
침묵인지? 고요인지? 불감인지? 물이 끓고 있는 것인지? 휘발해버린 것인지? 무서워하는 것인지? 두려워하는 것인지? 주저하는 것인지? 회피하는 것인지? 사흘째 내리는 눈처럼 그냥 그런 것인지? 왜 사흘째 내려야 하는 것처럼 이유가 추정되는 것인지? 유추는 되지만 발담그기는 부담스러운 것인지? 불감의 정글이 헤쳐나가기에 너무 강력한 것인지?

온라인이라서? 오프라인도? 오프라인에선? ...뿅망치가 필요한 것인지? 진지모드가 필요한 것인지? 썰렁모드가 필요한 것인지? 섹시함이 필요한 것인지? 섹시함도 필요한 것인지? 정신을 섞기만하면 논쟁으로 비화되는 잘남들 때문인지? 유아독존만 있어 너도독존을 인정하지 않은 연유인지? 겉저리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인지? 묵은지를 꺼내 파 송송넣고 푹푹 끓여야 하는 것인지? 거기에 함박눈발 시식하며 소주 한잔 걸치며 담소를 나눠야하는 것인지? 깊은 속 끄집어내어 철탑 고공 농성을 해야되는 것인지? 총총거리며 너무 빨리 걸어대는 발걸음의 속도때문인지?

한꼭지 물어댕겨 사흘째내리는 눈처럼 횡설횡설 수설수설 해봅니다.

 

 염두. 접힌 부분이 길으니 다 읽으려하지 마세요. 말씀드려도 다 보지 않으시겠지만 서두.

0. 문자를 받고 오랫만의 빈시간?(사실 그렇지 않았지만). 종강이려니하고 미안한 마음을 무릅쓰고 묵자 시간에 닿으려고 한다. 낮시간 옆의 책 뒷표지에 꽂혀(아래 첫 접힘), 서문을 칙칙한 버스안에서 안경을 벗어가며 읽는다. 가을하늘처럼 선명하기만 한 윤교수님의 다듬고다듬은 글은 늘 간담이 서늘하다. 몇 꼭지 흔적을 남겨둔다. (두번째 접힘)

1. 정신병을 자아-아버지-어머니의 트라이앵글에 가두어 두려는 노력은 허사란다. 라캉에 대해서도 그러하다.(그러니 지젝은 불안하지 않겠는가? 쌓아올린 탑들이. 논의가 확장되거나 다른 쟁점들이 없는 것을 보니 아쉽다.) 아버지의 깊이나 어머니의 깊이나 자아의 확장에 대한 개념없이 환자라는 병실안만 생각하는 프로이트류의 정신분석이나 진단은 별반 쓸모없으리라는 이야기.

시대의 우울과 병리는 안녕한가? 출산율 최저와 자살율 최고, 어린아이어른들 할 것없이 최다우울을 앓고 있는 첨단병리자본주의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니 살아지고 있다. 끊임없이 살아지는 우리의 트라이앵글 속, 일터-그것에 대한 욕망과 소비-자본의 삼각연대 속. 우리는 길들여진 우울증만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출발점을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다. 옆의 가타리도 아래의 [나와 너]란 책도. 그리고 일상혁명을 이야기하는 부류도 그런면에서 마찬가지다.  국가와 가족이란 틀을 넘는다. 생각과 이론이...아니 이미 울타리를 타넘고 저 멀리 도망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지금여기로 가져오지 않으려는 두려움들 때문이겠지만, 이렇게 주춤거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방황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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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리는 감동하지 않는다. 더이상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깔깔거리거나 숙연해지지 않는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선물과 상품에 뭉클할 뿐이다. 끊임없이 그것을 소유해야만 마음이 놓인다. 이미 마음은 사소한 것을 위해 쓰는 능력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누적되어 쌓이거나 때로 숙성도 되고 발효되리란 생각조차 금기이다. 신을 핑계로 이야기한다. [그것]이 천지인 세상에 [그것]을 가지려하지 말고, 마지막 음표처럼 남아있는 낙엽에 온몸이 얼어붙는 그 무엇에 대해 이야기한다.

갇혀진 늘 움직이는 생각의 울타리. 몸의 울타리. 쾌쾌하고쾌퀘하고 퀘퀘한 동선의 테두리. 우울만 양산하는 그 울타리의 경계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살아지고살아지고일백번 살아지고에서 살아가고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새로운 삶'이나 살아가는 것의 치유는 의외로 스스로 벗어난 '너'를 대면함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말이다. 문득 나를 주춤거리게 하는 '너'의 아름다움들이 당신의 가슴을 채울 때 '너'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욕망하게 된다고, 늘 주체할 수 없는 기다림이 우울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눌 것이 없는 시대. 관계를 만들지 않는 시대. [그것]에 걸려넘어져, [그것]의 늪속에 더욱더 힘어주어, [너]를 품거나 숙성하거나 삶의 엇박자에 대해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한 것에 사로잡혀 말하려고 한 맥락은 소거된 채, 말한 것만 상품처럼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세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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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선악혼합설. 마음. 1.2와 달리 나누지 않고 접근하는 방법이나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늘 '너'가 먼저 있던 것은 아닐까? 너 가운데 나. 들척임들이 풍요로운데 눈짓한번 주지 않아 되려 복잡해지는 것은 아닐까?  겹쳐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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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발.

1. 곧 묵자가 출간된다고 한다. 기세춘선생님의 방대한 저작의 출발은  묵자의 삼표론 가운데 관기중국가백성인민지리(국가와 백성의 이익에 맞는지를 살펴야 한다)라는 문구의 백성, 인, 민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그에 대해 개념의 차이를 연구하게 되면서 전반적인 재검토에 들어가 연구에 진전이 있었다고 한다. 문익환목사 15주년기념식에 다녀오시고 내려와 하신 강의 뒤풀이에 하고싶은 말씀들이 많으시다. 당부도, 주문도...기업의생리,자본의 생리에 대해 치밀하고 세밀할 것을 요구하시기도, 스킨십도, 뒤풀이이야기도...4.19뒤 지식인들의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만 문화적인 공백이 있다 싶다. 좁히지 못하는, 깊어지는 방법도 몇개의 천이 있고 건너야 하는 듯 싶다. 돌아와 책들을 더 들척이다 잔다.

2. 나-너보다 너-나가 낫지 않을는지. 독백이다. 하물며 삶에 까지 개천을 넘는다는 일은 더구나. 그럴까..아닐까...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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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와 나, 그리고 정신의 임신과 출산(作)
    from 木筆 2008-11-14 09:01 
                  0. 술을 핑계로 서경석과 대담집까지 김상봉님 책을 빌리다. 가볍게 달림 마실을 다녀오고 읽다. 미리 마음에 있던 책들이긴 하지만 펼펴 관심 장에 눈길을 주는데, 맴맴 도는 박동환, 함석헌, 한용운까지 이어진다. 고개도 끄덕여지기도 하고, [나와 너]에 대한 부분, 함석헌의 참나, 참삶 등 스쳐지나간 말들이 상기된다. [나와너]의 부분은
 
 
밀밭 2008-11-13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혼의 새' 제가 차용해도 될까요? 글을 읽다가 이거다 싶어서요.

여울 2008-11-14 09:19   좋아요 0 | URL
본문에는 별반 좋겠쓰이지 않았네요. ㅎㅎ. 제 것이 아니라 부버님 것이네요. 아마 맘대로 쓰시라고 하겠죠. .ㅎㅎ

파란여우 2008-11-13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어도 읽을건 읽지요.ㅎㅎㅎ
근데 지금 마루 전구가 흐릿해서 내일 바꿔달고 읽을 겁니다.
어쩌면 아침나절에 읽을터이니 숨기지 마세요.

감동을 모른다는 부분에 찔려서 계속 읽어야겠다는 전의에 불탄.^^

여울 2008-11-14 09:20   좋아요 0 | URL
댓글 달지 않았으면 객적은 소리일 것 같아 숨길지도... ... ㅎㅎ 아닙니다. 전의를 불태웠다니 더 더욱 증보를 해야겠다는 전의가 불끈...ㅎㅎ
 

  한 점 먹으러가는 길.

  하늘은 시선을 빨아들이고,

  가슴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텅 비운다.

  그 한켠에 걸려있는 구름을 음미하다보니,

  아이 볼살 솜털같은 구름향기들에 마음을 놓다.

  뒤돌아서면, 뒤돌아서면 아른거리는 구름향을 잡아내기가 어렵다.



밤. 발자욱을 감싸는 낙엽소리가 어른거려 주로로 나선다.

목련과 졸업한 뒤로 마음은 여기저기 두서가 없어진 것을 그녀석은 느낄까?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가 포근하고

여기저기 마음기웃거리는 것 많아

궁금하기도 배부르기도 한 것을 알까?

가볍게 움직이다보니 목련에게 마음을 들킨 듯. 이내 마음이 박혀 이제 어쩔 수 없다.

따로따로 뭉글뭉글 크는 마음들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가끔 달빛에 너희들을 볼 수 없다면 섭섭할 것 같다. 움직이는 마당 속에 어느 덧

너와 나를 분간할 수 없음이 오로지 너희들 덕인 듯 싶다.

마음이 배부른 것도 몸이 배부른 것도.


 뱀발. 

1. 퇴근 뒤, 유혹을 자제하고 몸을 조금 덥혀준다.  눈길도 주지 않는 녀석들이 마음 속에 불쑥 불쑥 들어와 반주의 취기를 준다. 문득문득 멈춰지는 발걸음을 신호로 해서 어느덧 달리는 여우님들처럼 봉우리 셋의 울타리를 갖게 된 듯 싶다. 속좁은 성냥갑같은 아파트향은 이미 제향을 잃어버려 이렇게 나다닌다. 나다니지 않으면, 바람의 속향을 맡지 못하면 병이 날 듯. 몸은 이내 익숙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녀석들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새초롬 마음 한결, 늘 목련에 올인해있던 마음을 알 것이다. 그 마음들이 뭉글뭉글 자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길이 자라...결국 되돌아올 것도 알았는지 모른다.

2. 늘 이렇게 빈한한 마음씀(씀이)을 이렇게 얻는 가난함이란?...  [나와너]를 짬짬이 읽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이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쯔 같다. 그렇다면 충분히 공감한다. 기독교서적으로 묶여있던 것 같은데, 그점에 , 그가 말하는 너에 대해서도 십분 공감한다. [나-너]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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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11-12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겸재 선생의 진경산수화가 울고 갑니다.ㅎㅎㅎ

여울 2008-11-13 17:37   좋아요 0 | URL
겸재 선생님 왔다가 비웃고 갔습니다. ㅎㅎㅎㅎ
 



사회진화론, 기독교,파시즘,지식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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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책들이 손에 제대로 잡히질 않느다. 금요일 저녁들이 바람숭숭 들어서 그런지? 온전한 주말을 갖지 못해서인지? 들쭉날쭉한 생활패턴도 일정하지 않은 이유일까? 마음들도 제자리를 하지 못하고 들쑥해서 보리밟듯 밟아주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일까? 여하튼 쉽지도 않거니와 출장 오고가는 길도 갈증이 많지 않다 싶다.  지난 금요일 근대사 산책모임도 말미 서울 출장끝머리에 참석하구 밀린 마음들을 나누다보니 금새 밤이 깊다.  주말. 이런 기분처럼 산만하던 책들을 한 곳에 모아 참*로 향해 자원학생을 보내고도 읽히질 않는다. 하루가 또 온전히 지나고 깊은 잠으로 충천이 되고, 계족산의 단풍과 바람, 온몸에 땀을 내고서야 이런저런 느낌들이 평온해진다 싶다.

그렇게 저녁을 마주하고서야 눈길이 간다. 읽다가 중동난 흔적들이 있는 책이다. 허동현-박노자의 갑신정변으로부터, 대원군, 백년에 대한 생각, 양계초-퀑유웨이-모택동과 유교. 사회진화론에 얽히다가 강준만의 요약문으로 접어든다. 친미에 대한 연원도, 기독교에 대한 맹종이 간혹 유교에 대한 반대급부로 요구되기도 하구. 신채호를 비롯하여 20년대 전반까지 환원하여 사고하는 지식인들의 습속. 그리고 일본-유럽-미국의 경험으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사대나 환원이란 가치의 몽매가 드러나고, 급속히 분화하는 지식인들. 기독교에서 불교도, 다변화되는 이념은 급속히 확산된다. 한국의 근대를 읽는 일은 여전히 일본이  和화로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데, 화전양면의 굴곡은 유사한 듯 싶다. 오히려 일찍 한지방에서 번성한 크리스트교에 대한 대단위의 보복이 17세기에 이미 있었던 이유로 잠잠했던 것은 아닐까? 논쟁들 사이로 많이 엇갈린다. 건강한 보수를 자임하는 허동현도, 주제를 두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박노자도, 강준만의 주장하지 않는 요약문들로 인해 아직도 관점이 적어 사실들을 입체적 맥락에서 더 생생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혈을 짜낼대로 짜내고, 극한까지 내몰고 씨앗까지 말리는 역사와 힘의 잔혹함. 어김없이 그 민란과 어려움을 빌미로 가진자들이 거침없이 거세하는 역사의 순환구조는 피비린내가 난다. 가진 것을 더가지려하고 더 배를 불린 뒤에 순환하는 구조. 일본의 현재를 이전의 다이묘가 기업관료로 전화한 것에 불과하고, 부시(무사계급, 사무라이)가 여전히 아무말 하지 않는 일본 기업의 회사원으로 현신했다는 지적이 외려 맞게 들린다.  전쟁의 와중이란 국면이 일직선이 아니라 무한의 굴곡으로 여러 줄기들이 생기지만, 여전히 씨앗까지 말려버리는 거세의 국면이 나타난다. 미국발 경제공황의 여파로 더욱 더 어려워지는 곤궁과 삶은 파시즘의 자양분으로 겹치고, 또 유사한 박자로 구조가 현신한다.

아마추어로, 뿔뿔이 분열된 아마추어 지식인과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이리 저리 끌고다니려고만 하는 누적되지 않은 활동. 사대의 끈질긴 유혹과 끊임없이 남에게서 나를 찾는 집착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끊임없는 기복과 흥건한 핏빛 자욱들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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