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뒤 걸러지는 말들 - 돈 호세, 마리 테레즈, 도라 마르, 8세, 多여행,시인친구들.게로니카,세잔,마티스,아프리카,오묘한감각전달,장곡토,시,희곡,올가,박물관,콜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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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 2006.0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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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초현실주의: 꿈꾸는 여인
1920년대는 아방가르드의 시대다. 그런데 피카소는 앞에서 보듯 옛 그림에 탐닉해갔다. 다다이스트들은 피카소의 ‘반동성’을 지적하며, 공격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내 올가와의 사이도 파국 직전이었다. 피카소가 조금 힘들 때다. 이때 만난 에로스의 상징이 마리 테레즈라는 조각처럼 균형 잡힌 몸매를 가진 금발 모델이다. 처음 만났을 때가 1927년이니, 피카소는 46살이었고, 그녀는 겨우 17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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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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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그러니까 피카소가 50대가 됐을 때, 그의 예술은 절정을 맞이한다. 그는 마리 테레즈를 그리며 자신의 작업에, 또 삶에 활력을 찾아간다. 앙드레 브르통 등이 주도한 초현실주의자들은 한때 정치적으로 구석에 몰린 피카소를 구하기 위해, 사실 미학적으로는 별 공통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초현실주의 그룹전(1925)에 초대했다. 피카소의 정치적 진보성을 공개적으로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별 큰 의미없이 참가했던 그 그룹전이 계기가 되어 피카소의 그림 속에 초현실주의의 ‘꿈의 세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1930년대 들어 피카소의 그림은 확실히 더욱 복잡해졌고 또 다양했다. 자신이 실천했던 거의 모든 미학이 이때 종합적으로 표현됐다. 곧, 입체파 미학에, 친구 마티스의 영향을 받은 원색에, 그리고 고전주의까지 합쳐져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또 신비스러운 그림들이 연이어 발표된다. 이 시절에 그린 그림 중 유독 많은 소재가 ‘잠자는 여자’ 혹은 ‘꿈꾸는 여자’다. 모델은 대부분 마리 테레즈다. 로메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 <붉은 소파 위의 누드>(1929) 등이 대표작이고, 정동에선 <거울 앞의 잠자는 여인>(1932)을 전시하고 있다. ‘거울’이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사실 하나로도 그의 초현실주의에 대한 감염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절, 그는 친구 마티스의 원색에 못지않은 강렬한 색채도 즐겨 다룬다. 청색시대와 비교하면 피카소는 50대 들어 비로소 삶의 기쁨을 발견한 듯하다.
다시 봐도 그때가 피카소 예술의, 그리고 인생의 절정기다. 때 맞춰 조국 스페인에 드디어 공화국정부가 들어서고, 그는 정부의 요청을 받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감독에 오른다. 이때 정부의 요구로 그린 반파시즘 대작이 <게르니카>(1937)이다.
5. 의식화의 동반자: ‘우는 여자’ 도라 마르
그런데 스페인의 공화국정부는 얼마 가지 못하고 프랑코의 파시스트에 패한다. 스페인에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패배는 피카소에겐 큰 상처를 남겼다. 피카소가 루이 아라공, 폴 에두아르 등 프랑스의 코뮤니스트 예술가들과 급격히 친해진 것도 이때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스페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연일 공포와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다시 청년 시절의 ‘청색시대’와 비슷해졌다. 우울하고 슬픈 것이다. 세상의 비극성에 억눌려 있던 화가가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 눈뜨기 시작하고, 고민하기 시작할 때인데, 바로 이때 피카소 옆에 등장한 여자가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이다. 아마 피카소의 여인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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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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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 마르를 만날 때는 그의 곁에 마리 테레즈도 있을 때다. 파카소는 두 여자 사이를 오갔다.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출신으로 금발에, 관능적인 몸매에, 청춘의 매력이 넘치는 여인이다. 반면, 도라 마르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갈색 머리에, 약간 어둡고, 온화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동거할 때, 세상의 비극을 본격적으로 화면에 담기 시작하는데, 그 비극의 첫째 이미지가 바로 ‘우는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모든 그림들이다. 모델은 도라 마르다. 따라서 동시대의 두 여인이 다른 이미지로 표현된 셈이다. 마리 테레즈가 ‘잠자고 꿈꾸는 여인’이라면,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정동에는 많은 ‘우는 여인’ 중 1937년작 <우는 여인>이 걸려 있고, 이 그림 이외에도 도라 마르를 그린 다른 초상화도 볼 수 있다. 한편, 시대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또 다른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게 황소다. 피카소는 원래 투우를 좋아했다. 그런데 전쟁을 겪으며, 소는 죽음의 희생양으로 새로 해석됐다. 물론 정동에서도 여러 장 볼 수 있다.
6. 고전주의로의 회귀
피카소가 입체파 미학에 몰입하는 데는 친구인 마티스와의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바로 그가 아프리카의 예술을 피카소에게 소개했다. 피카소는 아프리카의 조각, 가면, 그림들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다른 화가들이 ‘이국정서’의 취미에 탐닉하며, 아프리카의 예술을 ‘순진하고 단순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피카소는 그 예술이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그래서 문명적’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입장의 결과물이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는데, 2차대전 이후 피카소는 다시 ‘아비뇽’의 입체주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색깔은 과거처럼 어둡거나 단색 위주가 아니고, 마티스처럼 불꽃 튀는 야수파의 색깔에 가깝다. 당시 두 번째로 결혼한 여성 프랑수아즈 질로의 초상화들에서 마티스의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줄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형상>(1949) 같은 그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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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 있는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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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대 들어 피카소는 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된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경력의 절정 때부터 창의력은 쇠퇴한다. 엄격히 말해, 이때부터 피카소는 더이상 창조와는 좀 먼 작업을 이어간다. 천재의 창의력도 그 한계가 있는 듯, 피카소는 본격적으로 과거의 그림을 찾아간다. 젊은 시절 ‘고전주의’시대에 잠시 보여줬던 옛 그림에 대한 취미를 이어가는 것이다. 마치 고다르가 <영화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그만의 독특한 영화사를 필름으로 새로 서술하듯,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들로 서양 미술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대가들의 작품이 피카소에 의해 다시 해석된다. 먼저 스페인의 화가들이 주목된다. 매너리스트 엘 그레고의 그림들을 재해석한 것들, 그리고 바로크 시절의 대가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1656)를 재해석한 <라스 메니나스>(1957) 등이 대표적이다. <라스 메니나스>처럼 흑백의 그림이고, 마치 종이로 찢고 붙인 듯한 그림으로는 <앉아 있는 여인>(1962)도 유명하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1863)를 다시 그린 그림들도 여러 장 있다. 정동에는 1961년작 <풀밭 위의 식사>가 전시돼 있는데, 유명세만 따진다면 1960년작 <풀밭 위의 식사>가 더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피카소는 죽는 그 순간까지 정말 많은 ‘미술사’ 관련 작품들을 그렸다. 다비드, 앵그르, 들라크루아, 쿠르베, 반 고흐 등 서양미술사에 빛나는 대가들의 작품은 피카소에 의해 계속 새롭게 해석됐던 것이다.
7. 브뉘엘, 로메르 그리고 피카소의 <어머니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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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만남>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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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르의 <파리에서의 만남>에 등장한 피카소의 <어머니와 아들>은 브뉘엘의 영화 <비리디아나>(1961)에서도 볼 수 있다. 순서로 보자면 브뉘엘의 영화가 먼저다. 그런데 여기선 피카소의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의 복사본을 볼 수 있다. 여주인공 비리디아나가 갱생의 목적으로 데려온 걸인들 중 한명이 그림에 제법 솜씨가 있는데, 그는 배고픔을 해결해준 비리디아나를 마치 마리아처럼, 그리고 자신을 예수처럼 형상화하여 피카소의 <어머니와 아들>을 복사하는 것이다. 브뉘엘은 피카소의 그림에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사랑을 본 것 같다.
반면 로메르의 영화에선 그 그림이 남녀간의 사랑의 모티브로 쓰였다. 어머니에게 기대듯, 의지할 수 있는 여성에게서 사랑을 찾는 셈이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 화가는 금발의 세련된 스웨덴 여성이 아니라, 지중해 냄새가 나는 갈색의 정돈된 여성에게 끌린다. 화가 앞에 나타난 두 여성은 마치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같다. 금발의 스웨덴 여성은 밝고 경쾌한 마리 테레즈이며, 갈색의 두 번째 여성은 도라 마르처럼 생각이 깊다. 화가는 주저하는 갈색 여자를 붙들고 “피카소의 도라 마르 같다”는 등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로메르 영화 특유의 긴 대화가 이어지는데, 화가는 갈색 여성과는 제법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눈다. ‘로메르의 법칙’에 따르면 말이 통하면 사랑은 주로 성사된다. 혹 그것이 순간일지라도. 왠지 정동의 미술관에는 로메르의 영화 같은 장면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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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림-신박연대 공연도 있던 송년회 소묘
따뜻하고 포근한 모임, 풀어내는 올해 책들의 시선 한올한올은 마치 짜 맞춘 듯하다. 소외,열외 이땅에 눈길한번 제대로 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목소리로 향하고, 그 울림을 찾는 책들로 가득하다. 예수를 다시 불러내고, 나르시즘에 빠진 철학을 되묻는 철학자를 맞고...생활에, 삶에 녹힐 것을 이야기한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엘지넌에게 꽃을/엄마와나/위험사회/공장이여잘있거라/철학삶을만나다/술취한코끼리 길들이는법/예수없는예수교회/천둥치는밤/무탄트메시지/사찰그속에깃든의미/지금이대로괜찮아/서로주체성의 이념
[함께라면 우린 지는 법이 없다]란 현수막 가운데 [함께]에 내내 마음이 걸린다.
2. 올해 마무리 책읽기
호의와 호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백과 소문도 믿을 것이 별반 없다고 한다. 연정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나로 되먹임되고 증폭되는 이상, 나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이 상처나 슬픔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면, 이 상처나 슬픔은 나로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너로 가는 길이므로 나 이상의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는 마음의 최소주의를 이야기한다. 사랑은 애초에 거품이 잔뜩 끼거나 안개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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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정인 " 달은 기울어 밤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삼경이든 오경이든, 두 사람의 마음을 두 사람조차 모른다는 사실 속에 사랑의 진실이 맥동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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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과 소문의 사이는 좁아보인다. 그 좁은 틈을 열어 다른 삶의 지평을 불러내는 방식은 삶의 극진함 외에는 없다. 고백보다 깊고 소문보다 빠른 생활의 조직을 재구성하는 '극진함'에서 人紋의 미래는 재가동할 것이다. 254
고진은 고백조차 권력의지의 발현이라고 본다.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약자의 언설양식을 취하는 듯하지만, 그 양식은 이른바 소통행위의 순수성, 진정성, 충일성을 전유하려는 피학대-가학적 권력의지의 도착을 숨긴다.247
나는 이해를 오히려 상처와 결부시킨다. 이해를 감정이입과 추체험, 실존범주, 그리고 은총의 장 속으로 수렴하는 태도에는 각기 그 나름의 일리가 있겠지만, 근년의 내 해석학적 고민은 무엇보다도 '상처'를 둘러싸고 회전한다. 라캉도 이와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상처에 대해 무지한 한, 인식과 이해는 영원히 그 스스로를 놓칠 수밖에 없는 숨바꼭질의 상태에 빠질 것이기 대문이다. 빛에 의해서 감각되는 모습은 그 그림자와 더불어 완결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227
사랑을 현상학적으로 환원시켜 그 순수한 본질을 얻겠다는 발상이란 현실의 수사를 그저 비현실적으로 도착시킨 것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본질이란 그저 매개 이전을 희구하는 유토피아적 박제물일 뿐이다. 인간사의 무수한 열정처럼 사랑은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꼬이고 얽히고 비틀이고 갈라지고 증식하고 불붙어 타고, 혹은 잿뱇의 폐허를 만드는 '환원불가능한'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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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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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상처는 삶을 미로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처받은 자는 주행로/이동로가 아닌 미로의 삶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미로를 걷는 것으로서의 산책은 상처가 덧나는 원천인 의도와의 싸움에 다름 아니다. 산책은 상처입은 미로의 삶이 그 기억, 혹은 의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외출이며, 그 오연한 의도의 체계, 앓을 수밖에 없는 기억의 체계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려는 생활정치다. 329
우리네 일상의 세속이 속절없는 우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역설적 깨달음이다. 그리고 그 우연이 제도와 관습과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이 은폐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우연의 바깥이 없다는 사실이 거꾸로 그 우연을 필연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대한 겸허하고 예리한 배움이다.
가정과 직장과 학교와 사원, 그리고 기업과 국가는 모두 한갓 역사의 우연일 뿐이다. 실은 누구나 알기 때문에 곧 그 사실은 우리의 체질과 공동체의 공기 속에서 깨끗하게 잊혀진다. 322
공원이든 무엇이든, 어떤 공간 속에 참여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고 각자의 삶이 일상의 속력과 방향을 재조정하면서 자그마한 결절을 맺으며 미래를 재조명할 수 있다면, 公園공원, 혹은 空圓으로서의 그 사회적 가치는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321
정신분석의 지혜가 반복해서 일러두듯이, 필경 삶은 앎이 아니라 견딤의 물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파우스트적 욕망이란 단지 앎에의 의지가 아니라 앎을 견딤으로써 개시되는 새로운 삶의 욕망이다. 진선미의 이데올로기야말로 삶의 진실에서 가장 멀리 놓인 박제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악의 명상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315 [해바라기 콤플렉스]
그 모든 신화학자들의 공통된 지적처럼 삶의 시작은 곧 위반이며 상처다. 해바라기 콤플렉스란 삶을 체계적으로 되-풀이하게 만드는 그 원초적 오염과 흠결, 위반과 상처를 외면한 채 반 초월론적으로 가꾸는 거울방 속의 광학적 행복을 가르키는 것이다. 314 [해바라기 콤플렉스]
상식적인 얘기지만, 우선 나르시시즘의 생산성을 긍정하되, 그것을 내내 응연히 지목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메타적 비판의 층위가 생활양식의 구체성 속에 안착, 유지되어야 한다. 가령(약간 더 따끔한) 아이러니나 (약간 덜 따끔한) 유머는 곧 그러한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대한 안이한 비판은 관념론으로 흐른다. 혹은 심하게는 신비주의적 수행도에 빠져 또 다른 형식의 나르시시즘을 반복할 뿐이다.304 [나르시시즘과 함께, 나르시시즘을 넘어가는 새로운 사이길] 304
이성적 지식은 존재자의 고독을 완성할 뿐, 타자를 만나는 실천적 매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성은 스스로의 의도 속에 보편을 품은 채 그 자체로 오만한 고독 속에 머문다. 레비나스의 선택은 공간보다는 시간, 남성보다는 여성, 앎보다는 사귐, 그리고 자아보다는 타자로 실그러진다. 그에게 "사귐이란 앎을 통하지 않고 있음에서 벗어나는 방식"이며,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이다" 그러므로 일면 그것은 시간과의 사귐이 지닌 어떤 맥리를 살핀 것이라고 볼 수 도 있다. "그 자체로 모든 자기정립을 거부하는 시간"은 이로써, 이론적 자기차이화의 변증법적, 상징적 일상 속에 구금된 지식인들의 뺨을 때리며 변함없는 실재로서 침범한다. 292 [타자]
타자의 개입이 없는 자아만의 공간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겹의 진실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로써 다만 언어가 발설되고 유통되는 조건과 담론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근거를 물었을 뿐인 블랑쇼처럼, 나와 타자가 만나고 헤어지거나 섞이고 해소되는 지점과 방식을 물어야 한다. 이것은 생각이 앎을 죽이지 않도록 배려하려는 실천적 노력인 셈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아직 앎이 아니다. 앎은 의심이라는 교차/교통의 마찰에서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립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생성적 한계와 조건을 통해 재구성, 재서술된 것임을 보임으로써 거꾸로 타자를 주제화하는 계기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동무로서의 연인, 연인으로서의 동무도 이러한 역설적 타자의 지평을 느리게, 몸을 끄-을-면-서, 그리고 이드거니 통과하는 과정을 통해서 조형된다. 290-1 [타자]
타인의 고통은 감정이입의 자동성에 의해 삼투되는 것이 아니라 힘겹게 배워야 하는 것이다. 혹은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당면의 문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된다. 독아론에서 벗어나는 길은, "유물론적 마주침의 외상'을 겪는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내 기질과 버릇을 털어내면서, 내 몸을 끄-을-고 너를 향해 끈질기게 나아가는 지난한 마찰의 반복을 통해서 조금씩 극복된다. 심리적 동일시의 환상을 벗어나 무한하게 개방된 '현실'로 나아가려는 태도다. 무한으로 열린, 무한이란 부재를 향해 몸을 질질 끄-을-며 자신의 외부를 향해서 쉼없이 걸어나가려는 태도를 말한다. 288-90 [타자]
비평이 가능해지는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교통공간은 사막이나 바다나 도시처럼 사방이 툭 트인 공간이다. 나와 너의 사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 규칙과 규칙의 사이, 현재와 미래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창발적 외상의 효과를 말한다. 비평은 이 사이를 창의적으로 견디는 일이며, 그 사이에서 얻는 효과의 생산성에 체계적으로 기대는 일이다. 결국 비평은 사회성이라는 사이공간을 뚫어 타자의 자리를 얻으려는 일련의 언술적 실천이다. 위기이면서 기회인 사이공간의 교통-생산성을 노리는 사유와 실천. 286-7 [비평]
신뢰는 타자를 향해 자신의 몸을 끄-을-며 나아가는 사회적 비약의 이치다. 요컨대 그것은 나와 너 사이의 심연을 사회적 실천의 새로운 버릇으로써 날카롭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건축이다. 신뢰는 마음과 함께, 마음을 넘어가려는 실천적 관계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다. 마음을 짐작하거나 유추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적으로 제어하려는 근기와 슬기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뢰는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을 공대하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조금 더 물러나서 말하자면, 그것을 나의 현재와 너의 미래 사이에 놓인 원초적 심연을 근기 있게 가로지르는 사회성의 실천방식이다. 283-4 [신뢰]
사랑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연역한 사랑, 혹은 마음에 의해 정당화된 사랑은 나르시시즘일 뿐이며, 프로이트처럼 냉정하게 말하자면 결국 수음의 심리적 상관물이다. 사랑의 발생과 기동이 특별히 마음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은 워낙 실없는 인과와 자기중심적 필연성을 제멋대로 짜맞추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랑이라고 불러줄 만한 움직임이나 흔적이 기동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 속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사이', 내 계교지심의 레이다를 솔개처럼 벗어나는 타자들과의 '관계'다. 당연히 대안적 모색의 지점으로 숙고해야 할 것은 '마음의 최소주의'다. 심리적인 동물인 인간이 남의 마음을 넘보는 일을 마냥 피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에서 출발하지 않으려는 결기이며 마음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버릇이다. 아울러, 연정에 관한 한, 마음은 주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것은 마음이라는 사이비 사랑밭을 폐기한 채, 그리고 거꾸로, 말과 살을 적실히 아는 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심리적 동일시의 어휘를 모르는 체, 삶의 방식과 문화로서의 연정을 이드거니 계발하라는 것이다. 280-281 [연정]
타자로서의 연인이란 무엇보다도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관계의 양식이다. 그것은 쉼없는 재서술의 진리가 아닌 일리들로써 생활의 무늬를 조금씩 겹치며 변화해가는 방식이다. 278 [연정]
슬기롭지 못한 호의는 오해와 아집의 늪 속에서 소금뿌린 지렁이처럼 뒹군다. 그리고 타자의 물성에 이르지 못한 '생각'은 따개비의 천국이다. 호감이나 호의가 그 자체로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응대하는 실천적 결기를 얻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273 - 인간관계의 새로운 실천을 통해 확립된 그 체질만이 호감과 호의의 풍경을 넘어 그 계보학적 넓이와 무의식적 깊이를 통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272 -호감과 호의는 그 자체로 아직 사회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결국 개인의 나르시스적 구심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중성적 에너지에 지나지 않는다.(그 심리상태는 아침 안개처럼 허망하게 악감과 악의로 돌변할 수 있는 유동적 나르시시즘의 변형태에 불과하다.) - 호의과 신뢰를 구별하는 것은 현명한 인간관계를 건사하기 위해 극히 요긴한 실천적 지혜다. 새로운 버릇을 들이고, 그 버릇을 이드거니 건사할 수 있을 때라야 그 뻔하고 듣기 좋은 말, '일상의 진보'와 '새로운 주체'는 그 내실을 얻는다. 그 누구의 말처럼 '지키는 것은 비록 적으나 얻는 것은 많다. 271 [호감/호의,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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