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를 확 섞어버려야..." 



세여자 2권은 1939년 경성부터 해방, 친탁반탁, 한국전쟁, 북한의 남로당파, 소련파, 연안파 숙청까지 조선공산당의 역사를 축으로 정숙이 사망한 1991년의 흔적까지 살펴볼 수 있다. 1990년 한소수교이후에야 많은 자료들이 개방되었고  비비안나 박의 방문으로 주세죽의 유배사실도 밝혀졌다 한다. 주세죽은 2007년에서야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 대신 훈장은 받은 그녀도 6년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


1. 봄 - 저자는 소제목으로 20세기의 봄이라고 적어두었다. 20세기. 그리고 봄이다.라고. 백년전 출발한 청춘들의 삶의 이력이라고 보다는 우리 아픈 역사를 품에 안는 것 같아 더 가슴이 아프다. 어느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다기한 상황과 삶들은 여전히 진행중인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왜 봄이라고 했을까. 


2. 횡단열차 - 타고싶다. 그저 끊임없이 펼쳐지는 평원이나 평화로운 모습들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열차는 느릿느릿 사과나무의 발원지 카자흐스탄. 그 안의 크질오르다를 거쳐 우랄산맥의 역들과 모스크바. 그러다가 다시 우랄산맥을 넘어 끝도 없는 시베리아로 읽고 느낀 사연들을 배고 베이면서 갈 것같다. 온전한 여행은 되지 못할 것이다. 관광은 더 더구나. 



3. 미세 - 먼지. 플라스틱. 균. 20세기는 전쟁의 시대였고, 여전히 21세기도 전쟁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어쩌면 또 다른 전쟁을 치루고 있다. 비만과 우울. 건강과 삶의 질은 원인도 모른 채 더 많은 희생을 치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자력이든 반도체든 가습제든 편리와 편이는 과학의 이름으로 찾아와서 그렇게 만들어진 사물은 여러 형태로 오염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난 뒤에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원인이 찾아지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새롭지 않다는 사실들을 염두에 둘 때만 조금 비껴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볕뉘. 


1. 그랬으면 좋겠다. 좌우라는 것이 허울이고 섞여버렸으면 좋겠다 싶다. 용서가 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좌나 우로 나눌 수 없는 것이 현실일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섞일 수는 없는 것이고, 설령 섞인다면 더욱 다양해지는 것이고 달라져야 하는 것이겠다 싶다. 그리고 달라진다는 것이 서로를 표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의 온도가 올라가게 하는 일이 우선 일 것이다.  


2. 정치란 무엇일까, 권력이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목숨을 경각에 달리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봐야하나, 역사와 사람, 권력을 보는 태도, 시대를 보는 안목들로 서로 벼르지 않는다면, 조직이 만든 목적에 늘 경도될 것이다. 권력을 탐하고 권력의 사생아들만 영웅이란 이름으로 나타나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역시 소모품으로 쓰일 것이며 사물에 대한, 삶에 대한 태도 , 윤리는 어느 구석도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다. 


3. 정치는 어쩌면 한 번도 우리를 목적으로 가진 적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는 그들의 목적만으로 그들의 시간만 가지고 흘러갔고 우리를 늘 수단으로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정치는 홀로 똑똑해질 수 없는 사물이다. 20세기, 21세기. 백년은 지극히 짧은 시간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복기를 한다면 또 다른 가능성과 길은 있을까. 그 많은 갈래길이 새롭게 자라는 뿌리로서 자랄 수 있을까. 우리의 삶들이 아둔한 정치와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지 않으면서... ... 또 다른 이름없는 생명들의 삶을 담보삼지 않는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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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을 맡고 있는 지인께 추천받은 책이다. 읽지 않고 있은 지 몇 주. 년말 식사자리에서 한 후배가 모두가 서울로 향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여기냐는 질문을 건넨다. 한 시인은 우리는 어쩌면 곁의 가까운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했다. 정작 저자도 서울이 아니라 그 인근에서 살며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어제 늦밤에 손에 집혔고 오늘 마무리한다.


1. 치안 - 조선희의 <<세여자 1,2>>는 실화를 바탕으로 이 작품과 많이 겹친다. 그렇게 사실에 집중하기보다는 서사의 완결성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겠다. 세여자를 읽다보면 일제시대에 모든 사회활동을 불법으로 삼은 치안유지법이 시행되는 시기가 있다. 사회운동을 불법으로 몰기위해 법을 개정하고 기소와 수사 독점을 해나가는 양태가 벌어진다. 점점 활동은 어려워져 합법공간마저 제한적이 되자 , 이들의 전쟁의 격랑을 겪으면서 삶이 저편 국경너머까지 펼쳐진다. 그리고 그 이후  이 책과 같이 조선인 숙청까지 벌어지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이 작품은 그 삶의 이력들을 세밀히 살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지바고 -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이 점점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이 작품은 점점 서쪽으로 가고 있다. 지바고는 설경을 배경으로 점점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황량한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도의 아름다움을 배제한 채로 전개된다. 두 작품 역시 이념이나 권력이 효율성을 중시하면서 맞지 않는 이들을 뱉어내는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통하지만 말이다. 


3. 고려인 - <<세여자>>의 주인공 가운데 주세죽의 딸이 국내에 소식이 궁금했고, 소설을 읽는 도중 기사를 챙겨보았다. 가끔씩 다큐도 보았고, 그 세대의 삶들이 우리의 삶에 비껴나서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 당시는. 하지만 몇 세대에 걸친 삶들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고 또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미래에 투사될 것이다. 아직 접점이 적을 뿐인 것은 아닐까.  일년전 이맘때 딸아이가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왔다. 바다가 꽁꽁 어는 곳. 아무르강 하구. 소설에 나오는 어느 곳을 거닐었을 것이다. 지도와 영상으로 하바롭스키의 잊힌 역사들을 보기도 했는데 역시나 그 일부를 마음에 안고 돌아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L의 운동화>>로 저자를 만났다. 그 뒤로 과거를 반추하는 일이 또 다른 신화를 만들어내는 일은 아닐까 하는 마음들이 조심스럽게 스몄다 싶다. 다른 주제를 다루면 어떨까 싶기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 역시 유사한 공제선 속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낼 수 없지만 전과 다른 느낌이다. 세련됨이라는 표현을 적절하지 않을 것 같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가리키는 방향이라기 보다는 아픔을 단단히 뭉치는 큰 무게감 같은 것이 배여나와서 인지도 모르겠다.


볕뉘. 백년남짓된 치안유지법의 자장은 여전히 건재하게 남의 삶들을 짓밟을 수 있다. 견제조차없는 지금의 상황은  기득권의 꽃이시들지 않고 얼마나 퍼지는가  여실히 보여준다. 여전히 반성조차 못하는 채로 말이다. 진보-보수라는 이분법의 울타리는  선악이나 적과 우리편을 가르며 더 더욱 정치라는 벽은 사회적 유아상태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 가운데 삶의 틈사이로 새어나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통곡은 늘 시간의 응어리로 남는다 싶다.


상황과 사건은 늘 벌어지고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 그늘의 무게를 잊거나 잊혀버렸으면 하는 것은 아닐까. 잊으려고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만큼 몇 배 강하게 다가올 앞날은 미지수로 남을 수는 없다. 그들의 마음과 아픔이 구천을 떠돌지 않았으면 싶다. 조금은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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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쭈낙덮밥이 나오자 밥은 반쯤 덜어내고 남은 포만감에도 비벼서 먹는다. 오후가 꽉 차오를 듯 싶다. 


동네책방에 들러 주문한 책을 받고 가벼운 얘기를 주고 받는다. 안부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어라운드잡지를 펼쳐든다.


1. 인연 - 첫 인터뷰기사가 수수와 현우라는 젊은 친구들의 소식이었다. 중편에 가까울 만큼 분량이 길다. 그 만큼 어떻게 사는지 헤아릴 수 있었고, 소식이 좀더 궁금해져 [단순한 진심]이라는 유투브 방송을 봤다. 수수님, 아니 안녕늘보씨로 아니 하윤이라는 이름으로 동네책방에서 시모임을 같이 한 적이 있다. 꾸임이 없고 솔직 담백하고, 시를 받아들이고 남기는 모습이  인상 깊던 친구였다. 어쩌면 여리다는 느낌까지 받았던 것 같다. 지진 트라우마에 떠나도 바다가 있는 동네에 살 것이라고 말했다. 일년에 한 두번 있던 소식마저 끊겼다. 




책방 주인장에게 선물을 받았다. 수제노트. 맞다. 안녕늘보씨 작품이었고, 그 소식에 무척 반가웠던 기억. 그 기억을 반추해서 일년남짓 뒤 전시회에 가져다 썼다. 수수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친구. 멋지게 살고 있는 모습에 뭉클하다 싶다.


2. 서예


회소

안진경

조맹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이력을 더듬어 본다. 고문자 뒤 바로 이어진 전서가 공식문서였다. 글을 함부로 다루는 것도 아니였고, 예서는 전서가 위주였다면 그에 부속한 글자였다. 아니 그런 취급을 받은 글자다. 해서가 되어서야 일대 판이 정리된다. 다른 예술도 그렇듯이 다양하게 분기하는 듯하면서도 레트로가 이어진다. 틀에 갖힌 듯하다가도 그 틀을 뚫고나오는 모습들. 그 변곡점들에 많은 힘과 혼이 담겨있다 싶다. 초서는 광체라는게 서체의 한 종류로 있다. 회소가 대표적이다. 조카가 죽어가는 사이 절박함이 묻어나는 안진경 글씨와 모든 체를 섭렵한 조맹부 글 귀가 마음에 남아 새겨둔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든지, 또 자신만의 또 다른 색깔을 갖고 꾸준히 나아가는 양상들이 좋다. 나이와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풀어가고 남기는 습관들이 보기 좋다. 작은 인연들이지만 자기가 하고싶은 것들을 손에서 놓지 않는 모습이 더욱 더 좋다. 언젠가 그들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들로 인해 또 다른 변환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볕뉘

 뇌와 의식 관련해서 혹시나 해서 잡지를 살펴보았는데, 아니다 싶다. 사둔 책들로 저자 별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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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진 예약을 해두었는데, 시간이 두시간 남짓 남는다. 검색을 해보니 다행스럽게 알라딘 우주점이 있다.  


1. 옥편 - 처음에는 예술코너를 보려는데 쉽게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취미 코너가 바로 보이지만 원하는 책들은 없다. 그렇게 산책하기 시작한 뒤 보리출판사 국어사전이나 어린이용 한자 사전을 둘러보았지만 썩 마음에 들진 않는다.  그러다가 외국어 사전류가 있는 곳에 다다랐고, 한자사전을 다 보다가 겨우 마음에 드는 민중사의 활용옥편이 초서를 쉽게 볼 수 있고, 오고가는 길에 부수별로 산책을 하니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나간다 싶다. 늘 처음이 중요하다 싶다.


2. 어깨 - 한의원에 들러 부황을 뜨고 사혈을 했다. 작업을 하다보니 어깨 근육과 손이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듯 싶다.  약식 운동도 해보는데 그렇게 쉽게 낫질 않는 것 같다. 철봉도 한 달정도 쉬었다. 이 책은 그 순환구조를 그려서 왜 반복되는지 알려준다. 늘 답은 가까이 있다. 30분이나 한시간 안밖으로 몸을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말이다. 늘 가까운 것을 하지 않아 문제다 싶다. 늘 습관이 바람직하다.


3. 성찰 - 조심스럽게 발문을 적는다. 너무 조심스러워서 걱정이다. 시대와 개인을 읽어내지 않으면 그 글을 담아낼 수 없다. 데카르트의 번역서도 많이 있지만 이도 고르기가 쉽지 않아 애를 먹었다. 먼저 저가의 통버전을 하나 구입했고, 위의 최근 번역서를 골랐다. 결론은 잘 해냈다 싶다. 라틴어 원본 번역을 했고, 번역사를 짚고 시대 배경을 같이 녹여냈다. 글을 읽는 사이 그 긴장감이 서슬퍼렇게 다가선다. 평생 벼르고 쓸 수 있는 글. 자칫 삐끗하면 목숨이 경각에 달린다. 그래도 써야한다는 강박. 아니 사명감. 위기감이 느껴진다. 아껴서 소화해내야 한다. 


몸을 백여일 챙겨본다. 먹을 것도 가려서 해보고 만나는 모임도 줄여서 해보았다. 육식도 과식도 많이 줄었고 생기도 있었고 활력을 찾는 여러가지 실험도 해 본 셈이다. 이렇게 처음을 다시 만들어 보는 것도, 습관의 바닥을 점검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많은 것들을 소화시켜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시간시간이 많이 궁금해졌다 싶다. 내려오니 무척 포근하다. 곧 주문한 책들을 받으러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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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워 걱정했는데 일어나보니 어제 날씨였다. 아니 바람도 없어 고요하며 포근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하루다. 읽다보니 데카르트의 <성찰>이 걸린다. 잘 알고 있다고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다른 저자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싶다. 며칠 전 구입한 중고책이 불쑥 왔다. 



허시먼의 책을 보다나면 책 속의 책들이 즐비하다. 자본주의 발흥이나 그 맥락은 베버와 맑스가 꿰고 있고, 아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당대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잡아내고 연구를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감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새로운 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발명이나 발견처럼 어렵게 어렵게 생겨난다고 여기는데, 아닐 수도 있다.고 낡은 것으로부터 자라고 있다고,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고, 이성, 정념과 같이 선악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스피노자와 비코가 자연스럽게 모두에 나온다. 15-18세기의 지성사를 꿰어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싶다.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기전, 중세에서 상업의 발달로 중상주의가 들어설 때, 영주와 귀족의 권위와 힘이 어떻게 줄어들게 되는지, 민주정이나 귀족정이 아니라 전제정을 왜 요구하게 되는지, 그 맥락들을 짚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법칙이나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 개념이 회자되다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 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다보니 그렇게 웃자라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리된 버전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 이면에 대한 의구심들이, 신나게 욕을 했고 사라지면 좋겠다고 여기는 주장이 어쩌면 자양분이 되어 더 자라나게 하는 이유가 되듯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는 것들도 많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여기저기 오늘도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텍스트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각도로 읽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류의 해석들만 남아 우리는 다른 시선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옮기는 이들 말 역시 걸러서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또 다른 면들을 발견해낼 수 있기도 하니 말이다.


볕뉘. 퇴근 길 폰을 일터에 두고 온 걸 숙소에 오고나서야 알았다. 다른 것들은 다 챙기고 정작 급하며 중요한 것을 빠뜨린다. 왜 레비나스가 데카르트를 다시 이야기했는지, 왜 허시먼이 학문 경계를 불문하고 다방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지 다시 느낄 수 있는 날이다. 책들은 늘 다르게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새로워지는 듯 싶다. 풍요로운 독서는 늘 그렇게 지운 뒤에 새싹처럼 올라오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완독을 하고 글을 남기고 싶었지만 이렇게 해도 나쁘지 않다 싶다. 에돌아와서 성찰이란 책을 남길 수 있었고 밑줄없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이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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