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 걱정했는데 일어나보니 어제 날씨였다. 아니 바람도 없어 고요하며 포근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하루다. 읽다보니 데카르트의 <성찰>이 걸린다. 잘 알고 있다고 더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다른 저자를 통해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싶다. 며칠 전 구입한 중고책이 불쑥 왔다. 



허시먼의 책을 보다나면 책 속의 책들이 즐비하다. 자본주의 발흥이나 그 맥락은 베버와 맑스가 꿰고 있고, 아무런 의문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이 당대의 상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한 것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잡아내고 연구를 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감으로 담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새로운 것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발명이나 발견처럼 어렵게 어렵게 생겨난다고 여기는데, 아닐 수도 있다.고 낡은 것으로부터 자라고 있다고, 이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고, 이성, 정념과 같이 선악으로 구분되는 이분법의 논리와 궤를 같이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스피노자와 비코가 자연스럽게 모두에 나온다. 15-18세기의 지성사를 꿰어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싶다.  정치와 경제가 분화되기전, 중세에서 상업의 발달로 중상주의가 들어설 때, 영주와 귀족의 권위와 힘이 어떻게 줄어들게 되는지, 민주정이나 귀족정이 아니라 전제정을 왜 요구하게 되는지, 그 맥락들을 짚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법칙이나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 개념이 회자되다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 전제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다보니 그렇게 웃자라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자본주의라고 생각하거나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정리된 버전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 이면에 대한 의구심들이, 신나게 욕을 했고 사라지면 좋겠다고 여기는 주장이 어쩌면 자양분이 되어 더 자라나게 하는 이유가 되듯이,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시작하는 것들도 많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서 여기저기 오늘도 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에 유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텍스트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각도로 읽혔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류의 해석들만 남아 우리는 다른 시선들을 포착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옮기는 이들 말 역시 걸러서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또 다른 면들을 발견해낼 수 있기도 하니 말이다.


볕뉘. 퇴근 길 폰을 일터에 두고 온 걸 숙소에 오고나서야 알았다. 다른 것들은 다 챙기고 정작 급하며 중요한 것을 빠뜨린다. 왜 레비나스가 데카르트를 다시 이야기했는지, 왜 허시먼이 학문 경계를 불문하고 다방면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지 다시 느낄 수 있는 날이다. 책들은 늘 다르게 읽어 주는 사람들이 있어 새로워지는 듯 싶다. 풍요로운 독서는 늘 그렇게 지운 뒤에 새싹처럼 올라오는 것들인지도 모르겠다. 완독을 하고 글을 남기고 싶었지만 이렇게 해도 나쁘지 않다 싶다. 에돌아와서 성찰이란 책을 남길 수 있었고 밑줄없는 글을 남기기도 한 것이니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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