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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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 just killed a man


빨강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18.


  『빨강 머리 여인』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의 재현이다. 익숙한 이 이야기를 에두르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직접적으로 이 책과 이야기를 거론한다. 세상엔 이 신화와 고전만이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을 지배한다. 어느 하나 이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화와 고전 속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말하고, 토론하고, 연극으로 만든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들을 대면해 식상할 법한데도 저자가 만든 이야기 구조에 금방 빨려든다. 익숙함이 주는 힘인가. 어쨌든 어쩌면 뻔하디 뻔한 신화를 따라가는 이야기가 같은 결말로 갈 것인지, 다르게 갈 것인지, 같다면 그 짜임새는 어떻게 만들어 놓는지가 궁금해진다. 수없이 같은 이야기를 함에도 특정 작가의 책에 더 손이 가는 것은 이처럼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풀어내는 힘에 의해 익숙함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터키에서 재현된 이야기는 이스탄불과 왼괴렌을 오간다. 이야기의 중심에 선 젠이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을 파는 일을 하러 떠난 곳, 그곳이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이다. 젠은 기술자 우스타에게 우물파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며 또한 그가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후 사라져 희미해진 아버지라는 존재를 젠은 우스타에게 느낀다. 마침 왼괴렌에서 만난 유랑 극단의 빨강머리 여인, 젠의 어머니만큼이나 나이 많은 그 여인에게 매혹을 느낀 젠. 젠은 사라진 아버지와 아버지같은 우스타가 있다. 젠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이라면 아버지는 누가 될까. 빨강머리 여인이 그것을 알려 주려나.   오이디프스가 부친살해에 관한 이야기이자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는 자녀살해에 관한 이야기다. 젠의 운명은 쉬흐랍일까, 뤼스템일까.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반면,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는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커다란 차이점은 공통점을 더욱더 강조한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쉬흐랍 역시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독자는 만약 쉬흐랍이 자신이 죽이려는 사람이 아버지인 것을 모르면 무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순간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무엇이든.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라 말하기도 하고 ‘운명에 맞선’ 이야기라 하기도 한다. 이 상반된 ‘운명’에 관한 해석이 무엇이든 개개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마치 가벼웁게, 재미삼아 본 점괘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왜 거듭 불온한 것에 대해 끌리는지, 자기암시처럼 계속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까닭이 정말 운명이라서일까. 자기충족적 예언. 예언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 어떤 운명적 힘에 기대고픈 마음의 발현인 걸까.

  새삼 부친살해가 서양에선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형상화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국을 생각하니 예술은 가물가물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부친살해에 관한 기사만 떠오른다. 최근에도 이런 기사는 계속되었다. 부친살해를 성장이라는 상징과 은유로 얘기한 많은 예술작품이 무색하게도 현실에선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성장’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범 아버지라면 모를까.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와 아들을 죽인 뤼스템이 무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관객들은 소포클레스의 연극을 관람할 때 오래전에 마흐무트 우스타가 나에게 말했듯이 오이디푸스의 죄악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위해 정한 운명에서 도망치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뤼스템의 죄악 역시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룻밤의 정사로 아들이 생겼고,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Mama, just killed a man / Put a gun against his head이라는 가사가 부친살해로 인식되어 금지시켰다, 전쟁에 징집된 소년병이 원치 않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이 군사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였다고 인식되어 왔는데 어떤 기사에는 보헤미아가 공산권 국가의 영토이므로 ‘보헤미안은 안돼!’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이유이든 이 노래가 1974년부터 1989년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금지곡이라는 명명 자체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 국가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였는가!


“아버지가 우릴 떠났어!”

“그렇다면 너한테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은 거잖아. 너도 다른 아버지를 찾아. 이 나라에 아버지는 많으니까. 국가라는 아버지, 신이라는 아버지, 장군 아버지, 마피아 아버지……여기서는 아무도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니까…….”


  소설에서 이 단락을 보는 순간 나는 철저히 아버지를 죽여야만 성장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빨강머리의 여인이 선택한 빨강머리처럼 의도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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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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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를 쏟았다


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현대문학, 2018.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떠올려지는 이 책은 미소를 머금고 읽어나가게 된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의 러시아를 배경으로 러시아라는 나라가 가지는 상징성에 힘입어 매력적인 등장인물과 서사를 구축한다. 무인도에 표류한 것처럼 메트로폴 호텔에 종신 연금된 로스토프 백작의 삶은 얼핏 생각하면 ‘갇혀 있다’는 것이 맞는가 할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이어가며 이야기를 지속시킨다.

  암울한 시대이며 한 개인이 처한 상황도 마찬가지인데 로스토프 오히려 백작의 삶은 우아하고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 되기도 하면서도 화려함이 가득한 메트로폴 호텔이 주는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백작이 무너져가는 방 한칸에 연금되었다면 이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러시아, 모스크바가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그 특성에 의해서 이야기는 좀더 환상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우습게도 ‘현실성’이 아니라.

  러시아라는 나라를 잘 알 리 없음에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이미지를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모스크바 시가지를 눈에 그리듯 묘사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그러했단 말이다. 작가 소개를 보고 나서야 작가가 러시아인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러시아인이었다면 이런 분위기로의 소설이 나왔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이유 중 모스크바를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크다라는 글을 보면서 내가 읽는 것은 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미국식의 러시아’가 아닐까 생각했다. 모스크바를 느끼지 못한 불만은 다른 데서 채우면 되는 것이고, 그 느낌만 제외한다면 흥미와 생각거리를 주는 소설이다.

  

타국 대신 자기 나라로 추방하면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국 추방은―시베리아로 보내든 ‘6대 도시 금지’형에 처하든 간에―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이 시간의 흐름에 부식되어 흐릿해지거나 시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손이 미치는 곳 바로 너머의 것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이는 종으로 진화해왔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모스크바의 훌륭하고 장려한 것들을 자유로이 즐길 수 있는 그 어떤 모스크바 사람보다도 더 애틋하게 그러한 훌륭한 것들을 그리워할 것이다.


  1922년의 러시아, 혁명에 동조하는 시를 쓰지 않았다면 총살되었을지도 모를 구시대의 상징 로스토프 백작. 백작이라는 작위가 그를 호텔에 종신 연금되게 했지만 호텔에서의 삶은 백작 작위가 여전히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백작 작위를 바탕으로 성장해온 그의 습성과 태도는 어쩌면 호텔에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유지시켜주는 힘으로 보이기도 한다. 교양있는 삶을 살아온 그대로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고급 와인을 즐기는 그의 취향은 소멸되지 않으며, 여배우와의 로맨스, 소녀와의 친분, 호텔 안내인, 재봉사, 주방장, 식당 지배인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기품과 유머 가득한 매력을 발산하며 친분을 쌓는다. 때론 가족과 고향 니즈니노브고로드에 대한 향수로 외로워하지만 특정 공간에서 나갈 수 없을 뿐 그는 그 공간에서 맘껏 사랑하고 살아간다. 그때에 그는 연금된 자가 아니라 호텔을 지배하는 로스토프 백작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그가 그 환경 속에서 ‘지배당하지 않는’ 삶을 선택한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32년의 시간을 호텔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호텔을 묘지와 같은 공간이 아니라 활력의 공간으로 바꾼 것은 로스토프 백작의 성향 때문이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소피아를 딸로 인연맺으며 성장을 지켜보고 키울 수 있었던 것이 그의 성향을, 성품을 유지하도록 이끌었다고 본다. 또한 변화까지도. 그가 학식과 유머로 무장하고 있다 소피아가 그 오랜 세월 그에게 살아갈 이유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신사의 현재의 모습은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파괴적인 성향쯤은 나타나지 않았을까.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수많은 걱정거리―학업, 옷, 예절 등―가 뒤따르지만, 결국 부모의 책임이란 매우 단순한 것이다.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전하게 키움으로써 아이가 목적 있는 삶을, 그리고 신이 허락한다면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백작의 성품처럼 고즈넉하고 낭만적이면서도 스릴을 부여하며 흥미있게 전개되지만 현실성을 부여하는 존재는 백작의 친구 미하일이다. 내겐 수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미하일이 현실을 일깨우는, 이곳이 러시아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인물이다. 그래서 쓸쓸하고 슬프게 다가왔다. 그런 친구의 죽음에 그치지 않은 백작의 울음처럼,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는 유일한 이의 죽음을 느껴 자신을 위해서도 운 백작처럼, 어떤 시대가 소멸되는 느낌이다. 그 시대를 기억해야 하는 몫은 이제 살아있는 이들에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추가 통째로 쏟아진 스튜의 맛은 강하고 길게 남는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는 과학자도 아니고 현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넷이라는 나이를 먹은 그는, 인생이란 것은 성큼성큼 나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현명했다. 인생은 서서히 펼쳐지는 것이다. 주어진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천 번에 걸친 변화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우리의 능력은 흥하다가 이울고, 우리의 경험은 축적되며, 우리의 의견은―빙하가 녹듯 매우 느리지는 않다 해도 적어도 천천히 점진적으로―진화한다. 소량의 후추가 스튜를 변화시키듯,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들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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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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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결말


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2018.


  음주와 심신 미약을 이유로 감형되는 사건이 연일 한국 뉴스를 장식한다면 미국에서는 총기사망사건이 그렇다. 백인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을 사살하는 일 역시 높은 통계치를 기록한다. 그리고 이 책은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아이를 사살하는 순간, 그 후의 일을 이야기한다.

  눈 깜짝할 새라는 말의 의미, 총알이 훅 지나가는 시간이 얼만큼인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몇마디 대화가 오가지도 않은 상황에서 바로, 탕!탕!탕! 총격이 일어난다. 뭐지 할 새도 없이 열여섯 살 아이가 경찰이 쏜 총에 의해 사망한다. 그 바로 옆에 스타가 있었다. 총을 겨눈 경찰에 의해 손을 들어 올려야 하기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친구를 어루만지지 못하고 그저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 채로. 경찰은 칼릴이 무기를 소지했다며 그를 죽인 경찰관이 법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발표한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니 이야기가 매우 간단하지만 이 책은 제법 페이지가 많다. 순식간에 읽혀지는데 내면을 깊숙이 들어가는 심리묘사는 없지만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서술하는 방식은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스타의 가족사는 복잡함에도 그들의 끈끈한 애정이 불안을 이겨내게끔 하는 힘이 되고, 청소년 형제들의 대화가 현실적이라 웃음짓게 한다. 다인종 국가를 정체성으로 하지만 인종차별의 나라인 미국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것인지 스타 가족의 입을 빌려 보여준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심어준 분노가 모두를 망가뜨린다(The Hate U Give Little Infants Fucks Everyone)‘의 앞글자만을 보라고. 터그 라이프 THUG LIFE! 폭력배의 삶이잖아. 우리가 어릴 때 사회가 심어준 사상이 우리가 통제 불능이 되었을 때 오히려 사회를 공격하게 하는 거야.”


  이 책을 읽고프게 이끈 건 제목이다. 당신이 남긴 증오. 인종차별과 사회부조리를 노래한 힙합가수 Tupac의 말이라고 한다. 폭력배의 삶으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 스타의 아빠는 총과 마약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청산하려 감옥행을 택하고 자신의 아이들은 빈민가인 가든 하이츠에 있는 학교가 아니라 백인이 다니는 윌리엄슨에서 공부하게끔 한다. 그곳이 제대로 된 교육을 하며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바로 그거야. 마약은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우리 동네를 망가뜨리고 있어.” 아빠가 말했다. “살기 위해선 마약이 필요하다고 하는 브렌다나 살려면 마약을 팔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칼릴을 좀 봐. 브렌다는 약물 중독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일을 못 구할 거고 일을 못 구하면 재활원에 들어갈 돈을 마련하지 못해. 칼릴이 마약을 팔다 붙잡히면 평생을 감옥에서 썩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직업을 못 구해서 다시 마약을 팔아야 할 수도 있어. 그게 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증오란다. 우리에게 맞지 않는 시스템을 만들어 둔 것. 그게 터그 라이프야.”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든 하이츠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스타는 백인 친구들과의 학교에서의 삶과 생활과 생활터전인 가든 하이츠의 친구들과 삶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삶에는 차이가 확연했다. 백인 친구와 백인 남자친구들과는 공유할 수 없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한 단절과 균열을 만들어 간다. 친구 칼릴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쉽게 경찰의 총을 맞게 되는 걸 목격했고 마약상이자 폭력범으로 오인된 채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스타가 느끼는 ‘인종차별’에 대한 생각은 강력한 혼란을 주는 요인이자 자신의 정체성과 정의를 각성하는 요인이 된다.

  소설 속에서 스타의 친구들은, 가든 하이츠의 아이들은 갱단에 소속되기를 원하지도 않고 폭력과 마약상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떡하든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고파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그들을 보살펴야할 엄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삶을 안고 있다. 칼릴의 살해사건의 목격자임을 세상에 드러내려하지 않으려던 스타가 그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조금씩 내딛을 때, 친구들 사이의 관계에서 흔들릴 때 이끌고 붙잡아 준 것은 일차적으로 스타의 부모다.

  스타의 엄마가 다른 오빠인 세븐이 현재의 가정에서의 삶과 스타의 집에서의 삶이 다르듯이 아이들이 가정에서 제대로 보호받고 교육받지 못한다면 가든 하이츠의 아이들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스타의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를 휩쓰는 마약상의 무리들을 보건대 마을공동체가 변하지 않는다면 스타의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가든 하이츠를 떠나 다른 곳에 간다 한들 1-15와 같은 경찰이, 검찰이, 판사가, 언론인이, 헤일리와 같은 친구들이 있다면 스타의 가족이 터전을 옮긴들 무슨 소용이 될까. 한 사회가 사회구성원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행하고 있는지….   

  

그게 문제다. 우리는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게 내버려두고 그 사람은 너무 말을 많이 한 나머지 선을 넘지만 자신이 그런 줄 모르고, 듣는 우리도 그냥 받아들인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이런 상황에서 잠자코 있다면 말을 할 수 있는 게 무슨 소용일까?


  한편으로는 동화같이 여겨지기도 했는데 그건 오로지 스타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환상적인 가족애와 사회의식 때문이었나 보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책의 뒷장에 자리한 경찰에 의해 사망한 이들의 명단이 현실을 다시금 냉철하게 바라보게 한다. 스타는 칼릴을 포기하지 않았고 침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소설의 결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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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8 08: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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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조차


작은 것들의 신, 아룬다티 로이,  문학동네, 2016.


  한증막에서 들어선 것처럼 물기 가득한 계절이, 6월의 비가 떠올려지는 소설이다. 그 짙은 아예메넴의 기후가 잊혀지지 않기에 오늘처럼의 물기없는 추위가 거센 날에 떠올릴 소설이 아닌데 아룬다티 로이의『작은 것들의 신』가 불쑥 스쳐간다. 인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이 비슷하고, 또한 낙살라이트가 등장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이 소설. 작가의 삶이 반영된 자전적 소설 같이 느껴졌던 이 소설에서 왜인지 아예메넴의 기후 묘사가 좋았다. 좋았다기보다는 그 기후로 인해 더 쓸쓸했다는 것이 더 맞겠다. 

  오래 여운이 남았던 이 소설이 뜬금없이 <조선일보> 사주의 열 살짜리 손녀의 폭언에 의해서 되새겨진다. 전우용 교수의 이 사건에 대한 “어린아이까지도 ‘한국인 고용인’에게 패악을 떠는 고용주 가족 문화는, 일제강점기 악질 일본인 가정에나 있던 것”이라는 논평 때문이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나라에 보탬이 될 리 없는 자들이 이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이 나라는 어찌하여 친일의 청산이 이다지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흘러왔는지, 그런 채로 발전이니 진보니 하며 흘러온 이 나라의 비극에 종결은 있는 것일까. 어떤 문화를 떠올리는 일, 이 글을 보며 식민지, 갑질, 비극, 이런 단어 끝에 무수한 ‘벨리아 파펜’의 모습이 떠올려졌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그 벨리아 파펜이 등장한 건, 바로 이 소설이었다.


벨루타의 아버지 벨리아 파펜은 ‘구시대’의 파라반이었다. ‘뒷걸음질치던 시절’을 보았기에 맘마치와 그 가족이 베풀어준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넓고 깊었다. 돌조각으로 인한 사고가 났을 때, 맘마치가 의안을 알아봐주고 값도 치러줬다. 그는 아직도 그 빚을 갚을 만큼 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는 이도 없었지만 자신은 결코 갚을 능력도 없었기에, 그 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감사함에 미소는 절로 커졌고 허리는 더욱더 굽혀졌다.


  혁명적이며 시대의 변화를 앞서 이끌어 가는 아들 벨루타에게는 버거운 짐이자 방해꾼이었던 벨리아 파펜. 그는 갑질 문화를 반박하지 않는, 순응하며 철저하게 감사하는 인물이다. 벨루타와 그에게는 영원한 아가씨 암무의 관계에 극도로 두려워하며 불가촉천민으로서의 철저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고 감사하며 감사하는 벨리아 파펜들이, 현재 이 나라에도 제법 존재하지 않는가. 때론 시대의 비극은 ‘기꺼이 내어주신 그분’을 영원히 받들어 모시는 불가촉천민이기를 자처하는 이들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 그 작은 것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조용히 밀려오는 슬픔을 느끼게 만든 이 이야기에서 벨리아 파펜으로 인해 분노가, 슬픔이 배가되었던 기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아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을 두고서도 벨리아 파펜의 행동과 말들이 먼저 떠오르는 일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자국민을 식민지 노예 취급하는 자들이 더욱 더 그들을 위하여 만들어내는 경제, 사회, 문화적 형태에서 쉬이 벗어나려 하지 않는 벨리아 파펜같은 인물이 시대의 비극을 더욱 타오르게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갑질 부류들이 등장할 때마다 제법 언론이 시끄러웠건만 이번만큼은 조용하다는 것이 그들 갑에 기생하는 어떤 을들 때문이겠지. 열 살이라는 작은 아이조차도 이 나라의 생태를 너무도 잘 알아가는 모습, 한국식 카스트, 그 아이가 재력과 권력을 쥐고서 형성해갈 문화가 아찔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할머니가 자신의 소녀 시절 카스트제도가 계급에 따라 행동을 달리 해야 하는 모습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한국 언론사 대표의 열 살짜리 딸이 하는 말들과 참 닮아 있다. 인도의 그 유명한 카스트제도에 의해 지주의 딸 암무와 불가촉천민 벨루타의 사랑에 제약이 있다면 암무는 가촉민임에도 여자라는, 거기에 대해 이혼녀라는 이유로 행동의 제약이 더해진다. 그리고 혁명이란, 그 혁명을 위하여 또다른 제약을 가한다. 세상은 온갖 제약을 만들어내는데 중독된 이들이 지배하는데 재미들린 듯하다.

  1969년 인도 케랄라 아예메넴에서 지배했던 규범과 관습들이 23년이라는 시간을 오가며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며 인도와 영국, 힌두교와 시리아 정교도, 불가촉천민과 가촉민, 남자와 여자라는 그 차이가 인간을 어떻게 지배하며 사랑을, 가족을 파괴하는지를. 그럼에도 굳건하게 사랑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번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 미래(그들의 ‘사랑’, 그들의 ‘광기’, 그들의 ‘희망’, 그들의 ‘무하아하 기쁨’)를 거미와 결부시켰다. 매일 밤 (갈수록 커가는 두려움을 안고) 거미가 그날을 견뎌냈는지 살폈다. 자기파괴적으로 보이는 자만심에. 그들은 거미의 다양한 취향을 사랑하게 되었다. 거미의 어기적대는 위엄도.

     그들은 덧없는 것을 믿어야만 함을 알았기에 거미를 선택했다. ‘작음’에 집착해야만 함을. 헤어질 때마다 서로에게 단 하나의 작은 약속을 얻어낼 뿐이었다.

     “내일?”

     “내일.”

     그들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감정을 배가시키는 문체로 쓰여진 소설이지만 단지 사랑에 대한 서사가 아니라 인도가 처한 현실과 문제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도 역시 그 과거의 관습이 말끔히 걷어지지 않은 사회인 탓에 23년 전의 일들이 과거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세상의 그 거대한 규칙에, 혹은 신이 내린 운명이라 말하는 것들에 맞서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그 시간들이 애틋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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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3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아룬다티 로이의 책들을 섭렵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가의 최고 책인 <작은 것들의 신>
은 가장 끝으로 미루어 두었습니다.

모시빛 2018-11-23 18:39   좋아요 0 | URL
곧 줗은 시간을 보내겠네요.
저는 <작은 것들의 신> 읽는 시간이 좋았어요. 책을 덮고 나서는 많이 허했지만요....
 
분노와 용서 - 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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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분노가 가득한데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2018.


  어떤 형태로든 너무나 익숙해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단어, 분노. 분노와 동행하는 수많은 단어 중 용서가 붙었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분노 옆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노’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된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는 ‘분노하라’ 외치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분노할 것을 부추긴다. 그런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맘껏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힘겨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에 분노는 정의와 어울려 다녔다. 정의가 짝꿍이었기에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엄정하게 따져야 할 단어였다. 그 시대가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사라졌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분노와 정의는 짝꿍으로 이어져야 할 말이기에, 용서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니. 이 시대 대표적 석학으로 불리는 누스바움의 분노는 어떤 것이기에 용서와 짝을 지웠는가.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는 분노를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신화의 복수의 여신과 지혜의 여신을 빗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결부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수의 여신이 지혜의 여신에 의해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의 뼈대를 생각하면 누스바움이 바라보는 분노, 그러하기에 용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그것은 해결되어야 하고 발현되지 않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를 극복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누스바움은 그것을 용서로 본다. 하지만 역시 누스바움이 정의하는 용서에는 제한이 있다. “용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격성과 통제, 기쁨의 부재 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 영역,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서 분노와 용서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따져본다. 용서가 거래적‧교환적으로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되지 않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참으로 어렵다. 분노도 용서도 누스바움에 따르면 누스바음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피해서 행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선사시대의 어느 단계예서는 분노가 가치 있을지 모르는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해주었겠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노의 유용한 역할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이고 선한 정의의 체제가 세워지자 분노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분노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얼마든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얼핏 생각할 때 개인적 차원의 분노로 전제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누스바움은 “분노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규범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법체계나 사회가 정의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에 미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비-분노’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부문별한 분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성향은 지속하되, 행동으로의 표출이 아니라는 말이 가지는 그 이상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며 알아가게 된다. 분노도 용서도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교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는 넘어가지만 삐딱하게 보게 되면 이 말에 대한 반발도 차오른다. 그 수정과 교정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누구나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적 분노 표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형태에서의 분노는 특정 세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불가피하다는 말에서 그 불가피함의 수준은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분노하고 싶은데 분노할 수 없을 때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문제가 되고 대안이 되고 방법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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