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주어진 시간 상자에서


위험한 시간 여행, 조이스 캐롤 오츠, 북레시피, 2019.


  다소 예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작가 조이스 캐롤 오츠는 1938년생이다. 작가가 그리는 미래세계, SF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작가가 살아간 그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더불어 전체주의 세계가 가질 수 있는 특성이란 비슷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인데 그보다 이 소설이 작가의 46번째 소설이라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잘 읽힌다. 2039년의 북미연합, 개인을 통제하고 조종하는 사회, 이런 류의 소설에서 감시, 처벌, 반역, 추방, 처형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쉬이 예상된다. 하지만 그 처벌의 결과가 과거사회로의 추방이라는 점은 이 소설이 가지는 특징이다. 아드리안은 졸업식 연설이 국가권위에 대한 도전이란 이유로 반역자로 추방된다. 추방된 곳에선 신분을 바꾸고 살아가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신분이 아니라 주어진 대로의 삶이다. 기억이란 또렷하여 아드리안은 자신이 핸드폰과 컴퓨터를 쓰며 살아가던 시대에 있었음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아드리안이 눈앞에 보는 건 종이책과 타자기를 사용하는 시대다. 마치 시간여행자처럼 아드리안은 메이 엘렌 엔라이트로 1959년 9월 23일, 1959년의 삶을 살아야 한다.

  두 사람의 자아가 내재한 아드리안은 현재의 이 상황을 무사히 넘겨 다시 자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아드리안은 위스콘신 주 웨인스코샤 대학생 메리로서 수업을 듣고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발설하지만 않으면 되는, 그렇기에 오히려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못한 채 추방자의 삶을 잘 버티어간다. 아드리안이 누군가. 울프만 교수를 사랑하기전까지는.

  어쩌면 이 소설이 잘 읽히는 지점은 말랑말랑하게 쓰여졌다는 점일 것이다. 서로 다른 시대, 국가가 통제하는 시스템을 적확하게 비교묘사하기보다 아드리안의 심리를 따라 그려지는 세상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 만큼 아드리안의 불안과 다짐과 사랑의 시선이 어렵게 그려질 리 없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이 소설을 가볍게, 탄탄하다는 느낌이 덜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디스토피아, 전체주의의 공포가 그로 인해 압박되고 죄어오는 느낌도 약하다.

  소설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건 스키너다. 아드리안이 심리학과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만큼 주요하게 『과학과 인간 행동』을 비롯한 스키너 이론에 대한 논의가 많다. 스키너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로서 인간행동은 환경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며,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과 <웰든 투>로 유명하다. 소설에선 이 스키너 이론에 대한 아드리안 자신의 생각들을 채우는데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아드리안 또한 메리는 스키너 이론에 대한 내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한다.


살아 있는 것은 (외부에서 보았을 때) 모두 시계가 돌아가는 기제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나는 항의하고 싶었다. 나는 나야. 나는 독특한 존재이며 그런 식으로 파악하기 힘든 존재라고.


  그러한 비판의식에서 아드리안이 계속 제기하는 것은 ‘나’, ‘자아’이다. 통제된 사회속에서 자신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처럼 아드리안은 메리가 아니라 본래의 아드리안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다.


나는 자각 또는 자기 인식의 결여에 대한 스키너의 언급―자기 인식에 대한 놀라운 사실은 바로 인간에게는 자기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에 충격을 받았는데 이 역시 교과서가 아닌 그의 주요 저작 중에 읽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뭔가 분명 끔찍한 게 있었다. 내가 나에 대해 모른다면 그 어느 것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렌즈가 얼룩덜룩 더러운 상태이면 이 렌즈를 통해 보는 세상이 모두 얼룩져 보일 테니까.


  로맨스로 진행되어가는 지점에서 아드리안은 이런 자각을 더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소설의 분위기는 반전된다. 1959년의 시대도, 시간여행도 의문이 가득한 채 펼쳐진다. 통제된 환경을 빠져나오려는 아드리안과 울프만의 관계에 의해 사회에 대한 시각 또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외롭고 힘든 그 시대에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울프만과의 미래를 꿈꾸는 만큼 아드리안이 갖게 되는 의혹과 불안이 실험상자 속에 갖힌 느낌을 준다. 스키너의 실험은 확장된 전체주의의 통제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인식하는 자아가 환경에 최대 적응된 상태에서의 인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꽤나 슬프고 아픈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시간 안에서 견뎌내는 거야. 어디에서 살건 한 번에 하루씩 견뎌내는 것은 똑같아. 이게 바로 우리 시공간의 축복이란다.


  자아에 대한 생각과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을 전체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는 정확하다. 


삶은 지금 현재이기 때문이다. 삶은 생각이 아니고, 투영되는 것도 아니며, 삶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삶은 현재의 그것이며 TV에 비치는 것처럼 항상 지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가 나를 위한 곳, 지금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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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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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렉스 플라메

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2010.


  요즈음 보고서의 힘을 생각하게 된다. 기록, 증언이 가진 힘과 오랜 시간 동안 비밀유지가 되는 힘이 무엇인지 그런 것들. 거짓이 조작이 공작이 어떻게 형성되어 뻗어나가는지 진실을 감추기 위한 카르텔이 얼마나 공고한지 그런 것들을.

  브로덱의 보고서는 어떤 보고서일까. 예상 가능하기도 하다. 일종의 진술서 같은 것이리라. 소설은 왜 보고서를 써야 하는가에 대한 브로덱 자신의 질문이 있다. 왜 ‘브로덱’이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브로덱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속뜻은 따로 있다. 내용과 더불어 보고서를 쓰는 자, 브로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소설을 통해 또 하나의 단어를 배운다. 안더러. 그리고 에라이그니스. 전쟁이 끝난 마을, 전쟁은 끝났지만 끝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상황일 수 없는 마을에 낯선 이가 나타난다. 낯선 이를 부르는 말은 매우 많은데 ‘안더러’는 그 중 하나다. 타인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은 ‘안더러’를 불편해한다. 이 낯선 자, 이방인은 여인숙에 머물며 그저 그림을 그리고 전시하려 할 뿐이지만 죽는다. 이 형용할 수 없는, 이상야릇하고 안개로 휩싸인 일, ‘에라이그니스’에 대한 일을 밝히고 기록하는 것이 브로덱의 일이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고 그 일과 무관하다.

이 말만큼은 꼭 하고 싶다. 모두들 알아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아니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일’과는 무관한 브로덱의 어조가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브로덱이 전혀 무관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주게 한다. 안더러의 이야기 위에 홀로코스트가 겹친다. 브로덱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이다. 그곳은 “아주 먼 곳, 인간다움이 모두 사라진 곳, 겉모습만 인간이고 의식이 없는 짐승들만 머무는 곳”이었고 브로덱은 그 시기를 암흑으로 가득한, 검은 구렁이라고 칭하며 아직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브로덱이 살아 돌아올 것이라 생각지 않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브로덱은 말 그대로 ‘똥개’가 되었다.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돌아온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안더러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단지 그들이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는 너무도 쉬운 대답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대답일 수도 있겠다. 브로덱은 그곳에서 살아 왔지만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존재가 아니다. 전쟁은 특히 사람을 구분짓기 좋아한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만을, 내 가족만을 생각하고 내 영역을 고집하고 그리고 나머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 세밀하게 타인을 나누어 버리는 일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모든 역사는 보여주었다. 브로덱이 나머지였다. 안더러였다.

  마을이 점령당한 상황에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지 않은 이유로 고발당한 브로덱은 자신을 수용소로 끌려가게 한 마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곳에 그가 사랑하는 이가 있고 그곳이 그가 살아가는 곳이었으니. 수용소에 있는 동안 마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지 그리고 그의 아내가 어떤 고통을 당하게 되는지 알지 못하지만 어떻게든.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이 살아오지 않기를 바랐고… 안더러는 그의 그림이 마을이 가지고 있던 비밀을 보여주고 있어 두렵고 위태로웠다.


죄지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죄가 없다는 것은 무고한 사람들 가운데 유일한 죄인과 결국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엄청난 무게,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이 세상이 이렇게, 나쁜 일들은 벌어지고 진실은 감춰지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왜 마을 사람들은 브로덱에게 여인숙에서 벌어진 사건을 안더러의 일을 기록하도록 했을까는 의문이 생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일을 감추고 싶어한다. 그들의 죄를 아는 이가 있는 것은 그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두려움을 주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브로덱을 지목해 그 글을 쓰라고 하는 것은… 5.11 연구회를 조직해 5.18의 진실을 은폐‧조작‧왜곡해온 전두환 반군부처럼 ‘조작된 진실’을 원하는 것일까. 그리하여 브로덱은 사건의 진실에서 떨어진 글을 쓰는 것일까, 그렇기에 브로덱은 다른 버전의 보고서를 준비하고 이것은 그것일까.


사람들은 이상해. 별 생각 없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짓을 저지르지. 그런데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한 기억을 안고서는 계속 살아갈 수가 없는 거야. 내다 버려야 하지. 그럼 나를 만나러 와. 왜냐하면 그들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나한테 다 얘기하지. 나는 하수구야, 브로덱. 나는 신부가 아니라 인간 하수구야. 사람들이 편해지려고, 가벼워지려고 자기들의 온갖 피고름과 쓰레기를 내다 부을 수 있는 뇌를 가진 인간. 그러고 나서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가 버려. 새 사람이 되어서. 깨끗해져서.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서. 그들이 털어놓은 것에 대해 하수구가 입을 다물고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거든.


  어쩌면 브로덱의 보고서가 필요한 절실한 이유는 이 말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이유로 쓰여져 있기만 하면 그 용도가 다하는 보고서는 마을의 시장에 의해 불에 태워진다. 수용소 생활을 거치며 삶과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한 수많은 생각을 거듭할 수 있었던 브로덱에게는 어떤 보고서가 필요할까. 덤덤하게 마음을 아리게 하는 문체로 써 내려간 브로덱의 보고서는 인간에 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생생한 경험담이 된다. 브로덱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그런 일들을 저지른―“괴물이 아니라 농부이고 장인이며 소작농, 산림감독, 하급공무원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또한 괴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들을 묶어 주는 동시에 그들을 초월하는 집단, 비슷비슷하게 생긴 수천의 얼굴들로 이루어진 집단 속에 녹아들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인간이 어떤 짓거리를 하는지 나는 보았다. 모든 잘못은 그들을 끌어들이고 부추기고 그들을 발 없는 도마뱀처럼 춤추도록 지휘봉을 흔든 사람에게 있으며 군중은 스스로의 행동과 미래와 궤적에 대해 의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실은, 군중 그 자체가 괴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안더러의 본명을 모른다. 그들은 마을을 찾아온 자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으니 모두 이방인을 부르는 명칭들은 실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안더러는 명확히 우리와는 달랐다고 했지만 브로덱은 안더러를 ‘나 같다’고 느낀다.  타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명명에서 시작됨을 또한번 생각하게 된다. 괴물같지 않으면서 괴물인 사람들의 일상성이 아주 아리게 느껴진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렉스 플라메와 같다.


렉스 플라메는 다른 종류의 나비들이 그들 중에 끼어드는 것을 묵인합니다. 그런데 침략자가 나타나면 렉스 플라메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서로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숨깁니다. 결국 그들 집안에 끼어든 나비들은 그런 정보를 얻지 못했으므로 새에게 먹히게 되지요. 렉스 플라메가 침략자에게 희생물을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는 셈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고 만사가 순조로울 때는 자기네 집단과 다른 종의 나비가 한 마리 혹은 여러 마리 함께 있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방법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험이 닥치면 본연으로 돌아가 살아남기 위해 자기 집단이 아닌 것들을 아무런 주저없이 희생시킵니다.


  그곳에 끼어든 안더러와 브로덱은 희생당한 나비이지만 각각 그림과 글로써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그림은 찢겨지고 브로덱의 보고서 또한 불에 타버리지만 브로덱의 보고서가 있다는 것을 안다. 집단의 광기에 진실이 묻혀버리지 않을 수 있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럴 수 있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브로덱이 희생자이자 타자인 브로덱이 진실을 담은 보고서를 써갈 수 있는, 그것을 알릴 수 있는 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브로덱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덱의 보고서는 안더러 사건, 마을 사람들이 한 일에 대한 증언이자 브로덱 자신이 한 일, 삶에 대한 회고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이란 글이란 사람이 사람을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브로덱은 소설의 처음과 끝에 같은 말을 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이다’라고. 마지막에 거듭 당부한다. ‘내 이름은 브로덱, 브로덱, 잊지 말아달라고.’ 안더러는 이름 없이 ‘타인’으로 ‘이방인’으로 남아 사라진다. 렉스 플라메의 본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렉스 플라메의 집단적 광기로 살아가지 않는 방법은 개인의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이라는 것을 작가는 기억하라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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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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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기억의 그 이후

오직 두 사람, 김영하, 문학동네, 2017-05-25.


  어떤 기억은 감각에 의해서도 강화된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 음악이 삽입될 때 장면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느낌 감각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니 전혀 손을 대지 않고도 손에 무언가를 쥐었다가 놓친 듯한 감각을 느끼고 있다. 소설 속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 손을 스르륵 빠져나가는 그 무엇. 어쩌면 책을 덮고 나서 그 감각 때문에 「아이를 찾습니다」의 장면장면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아주 부주의하게 아이가 놓은 카트를 손에서 놓친 부모, 세 살 때 유괴된 성민의 부모가 겪는 일들은 익숙하게 흘러가지만 다시 성민을 찾은 이후의 삶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것이 실제의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가 같다는 이유로 마음이 합일되는 것은 기막힌 환상일 것이라고. 더구나 아이는 어딘가에 나의 친부모가 살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만큼 학대받는 삶이 아니었으니까. 윤석은 마트에서 카트를 놓친 때부터 “행복 그 비슷한 무엇을 잠깐이라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 없다. 하지만 성민을 다시 찾은 이후의 삶 역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저는 생각했어요. 아무와도 대화할 수 없는 언어가 모국어인 사람의 고독에 대해서요. 이제 그만 화해하지 그래, 라고 참견할 사람도 없는 외로움. 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다툼. 만약 제가 사용하는 언어의 사용자가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면 말을 조심해야겠어요. 수십 년 동안 언어의 독방에 갇힐 수도 있을 테니까. 그치만 사소한 언쟁조차 할 수 없는 모국어라니, 그게 웬 사치품이에요? ―「오직 두 사람」


  작가는 아빠와 딸의 관계를 오직 두 사람만 남은 희귀언어사용자로 풀어낸다. 어린 현주에게 아빠는 우상이었고 그런 만큼 보이지 않는 편애가 존재했기에 다른 가족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조종된 삶을 살던 딸이 점차 그 관계의 불편을 느끼며 벗어나려 하지만 결국 혼자 남은, 병든 아버지에게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범죄자와 작가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은밀히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계획이 뻔하면 덜미를 잡힌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속는다는 점도 그렇지. 이 아파트에서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은 정해진 플롯이라고는 없는 중구난방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 사장의 음모는 아주 짜임새 있는,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저급한 추리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그런데도 승자는 사장이라니. 이것은 혹시 잘 짜인 플롯이 결국에는 중구난방 요령부득의 서사를 이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 「옥수수와 나」


  이상문학상 수상작 「옥수수와 나」는 소설가인 주인공을 통해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내고 있다. 김영하 스타일에 맞춤한 작품이란 느낌이다. 위트와 아이러니가 절절하게 넘치는. 「인생의 원점」또한 그것이 가득한 작품이다. 인생의 원점 또는 변곡점에 대한 관념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경험을 제공하게 해준다. 서진이 마침내 느낀 것처럼, 

“인생의 원점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 그런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그게 진짜 중요한 거야.”

  「오직 두 사람」의 현주는 말한다. 이제 유일한 희귀언어사용자가 되었기에 허전하고 쓸쓸할 것 같다고 말이다. 책을 읽은 후에 희귀언어사용자가 마지막 남긴 글을 읽은 듯이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곳곳에 위트와 아이러니를 남기는 스타일임에도 이런 감정이 드는 것, 기억은 스타일이 아니라 메시지를 붙잡고 있나 보다 싶다.

  김영하 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 설정을 더한 글과 더불어 방송을 통해 더욱 더 작가의 ‘브랜드’를 높여가고 있다. 출간하는 책마다, 한마디 말에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책을 읽은 후 이 공허함을 견디는 일은 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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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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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설계자들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2019-01-29.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래도 책을 읽을 생각이냐?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이라 생각했다. 남을 죽이는 것을 직업으로 하고 살아가는 이라면 두려움이란 일을 방해하는 것일 테니. 삶의 자세에 대해 방향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는 일이란 무언가를 정진하게 하는 힘이기도 아니기도 할 테니까.

  책을 읽는 암살자,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적어도 모든 것을 경험과 타인에 의해 배우지 않고도 책을 통해 배울 수는 있는 것이니까. 기술적인 방법이 책으로 전수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다. 어쨌든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암살자는 그 행위 자체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한다. 암살자는 야만이 가득한 세계의 난폭한 인물로 그려지거나 무조건 심각한 고뇌에 잠긴 사람으로 묘사되기 일쑤다. 이 사이에서 래생은 어디쯤일까.

  이 책은 암살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남을 죽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독립운동가와 조폭의 암살이 다름은 명확하다. 그 행위도 받아들이는 관점도 그렇다. 래생은 직업적 암살자, 그를 움직이는 힘은 돈이다. 돈을 주는 이들에 의한 어떤 지시에 의해서 그 방법을 실현하는 인물이다. 래생이 이 암살자의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은 어릴 적 쓰레기통에 버려져 너구리 영감의 세계로 안착했기 때문이다. 일제 시대 때부터 너구리 영감이 맡아 온 ‘개들의 도서관’은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다. 암살 청부 집단은 시대에 맞게 변화해 간다. ‘한자’가 내서운 기업형 보안 회사가 등장하는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은 채 말이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 이후 설계자의 세계에 대해 래생이 궁금해 하고 설계자 ‘미토’를 추적한다. 

  암살자는 누구를 죽일까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죽일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설계자들에 의해 정확하게 설계되어 있다. 총인지 칼인지 목을 부러뜨릴 것인지 방법을 명시한다. 이렇게 방법까지도 설계된 지침을 따르는 것과 어떻게 죽일까를 계획하는 일, 두 방법 중에서 암살자는 어떤 방법을 선호할까. 그런 궁금증이 인다. 그러니까 설계자가 힘들까 암살자가 힘들까. 그래서 이 책은 암살자와 더불어 설계자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군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역할, 그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이들에 대해서. 결국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한다고 봐야 할까. 딱히 그건 아니다. 설계자들 또한 따지고 보면 암살자처럼  그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다른 설계자가 있을 걱.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 래생이 말했다.

“그 의자에도 분명 누군가가 앉아 있겠지.”

“아무도 없어. 다르게 말하면 그건 그저 의자일 뿐이야.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의자. 그리고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일종의 시스템 같은 거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 철저한 역할 분담이라고나 할까. 설계자들 뒤의 의뢰인은 따로 있다. 그 의뢰인들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들은 정해져 있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설계자들이 하는 말, ‘선거가 있어서, 선거 때문에, 선거가 끝나면’……설계자들이나 암살자들이나 그렇게 놀라운 인물들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최근의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은 눈여겨 볼만하다. 그렇게 시민들을 죽이기 위해 계획된 시나리오, 설계자들이 있고 암살자들이 있고 의뢰인이 있다. 그 의뢰인이 지금까지 공고히 존재하는 것은 제 이익을 위해 분명하게 형성한 카르텔, 그 시스템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이어가려 조직을 총동원하고 있는.

  이 책이 초판 2010년이고 난 분명 이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내용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언젠가 이 소설이 여러 나라에 번역되었다는 기사를 읽었고 그때에도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는데 다시, 읽어보고 그리고 책에 붙은 많은 외국인들의 찬사를 읽어보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 책을 읽고 열광하게 하는가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의 이유는 명확했는데 역시 이 책은 영화화가 확정되어 제작진행 중이라고 한다. 읽자마자 영화관계자들이 매우 좋아하리라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이 책은 잘 읽힌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지만 많은 추리를 요하지도 않아서인지 꽤 속도감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눈을 자근자근 밟는 느낌이다. 암살의 세계인데도 유혈이 낭자하고 욕설이 난무하는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암살자의 삶을 다루고 있기에 그 세계의 인물들이 가지는 전형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않았다. 가령 래생은 암살자의 세계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전형적인 캐릭터를 그대로 따른다. 외모, 어릴 적 결핍, 독서하는 암살자, 그리고 무엇보다 고뇌하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여지없이 암살자들은 그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더라도 한번은 누군가에게, 그것은 늘 젊은 여자로 나타난다는 점, 흔들려야 한다. 뛰어난 암살자 추가 그러하고 또한 래생도. 어쨌든 이 세상에서 뛰어난 암살자라 불리는 이들의 죽고 죽임이 이어진다. 그 죽음, 모든 암살자의 죽음이 허무하다. 기껏해야 암살자들일 뿐인데, 그들은 그들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그것이 암살과정에서 만난 인연에 대한 복수이자 정의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결국 의자가 그대로 있다면 암살자들도 설계자들도 다시 고용될 것인데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깨달음을 삶의 새로움을 얻을 수 있는 듯이 그렇게 허무하게 그들 서로만을 죽이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다 쓴다. 그렇게 이 책은 허무하게, 아쉽게 여겨지는 결말과 눈을 뽀드득뽀드득 밟고 있다는 느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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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5-16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과작하시는 작가신가 봐요.

9년 만에 새로 재개정판이 나왔는데
신판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드네요.

<뜨거운 피>도 3년 전에 나온 책이네요
흠 흠 흠

모시빛 2019-05-17 13:0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개정판 표지가 훨 마음에 들어요.
개정판에선 내용-결말도 부분 수정했다고 하는군요. 어떻게 바뀌었는지 몰겠지만...
문학동네 소설상 <캐비닛>외엔 읽지 않아서 몰랐는데 김영하 작가처럼 해외에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더라구요. <뜨거운 피>도 그런 작품일까, 궁금해지네요
 
[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어디든, 타국

파친코. 이민진, , 문학사상사, 2018.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이 토해내는 외침은 증오도 원망도 아니다. 어쩐지 이 말은 체념 같기도 하고 그 무엇이든 견디고 이겨내리라는 의지 같기도 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파친코』는 1910년부터 1989년을 배경으로 한다. 순자의 아버지 훈이에서 순자의 아들 노아와 모자수,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까지의 4대의 삶이 펼쳐진다. 1부는 부산 영도 바닷가에 살던 순자가 일본으로 건너가기까지의 이야기로 급박하게 읽힌다. 다른 생각할 겨를 없이 인물이 처한 어렵고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를 응원하며 보게 된다. 2부는 일본생활이 중점적으로 다뤄지는데 다소 더디게 읽힌다. 등장인물이 늘어나는 만큼 고민이 짙게 드리워지는 까닭이다. 인물마다 맞닥뜨린 ‘나’라는 존재의 자각이 내게도 여러 갈래의 생각과 감정을 안긴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순자는 ‘고생’에 대해 생각한다. 그녀의 삶이 고생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게 없는가,라고. 노년의 순자는 그녀의 삶에도 아름다움과 영광이 반짝거리는 순간이 있었노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무엇을, 어느 순간을 그렇게 볼 수 있을까.

  그녀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 말을 하는 여자들 역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어쩐지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 삶에 대한 순응이 느껴진다. 고생이란 기차에서 내려올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 양진과 순자 그리고 경희, 그들은 벗어날 수 없는 그 기차를 탄 ‘여자’이다.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생계책임은 남성, 아버지의 역할로 인식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은 ‘여자’다. 순자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아버지들은 장애를 가졌거나 병자다.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언청이이며 절름발이다. 모자수의 아버지 이삭은 결핵을 앓는다. 노아의 아버지 한수는 아버지라 불리지 못한다. 그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못한 요셉은 무능력해져가며 피폭자로서 오래도록 병상에 있게 된다. 분명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이긴 했지만 일찍 사망하거나 감춰진 존재가 되거나 변해간다.

  이런 상황에서 순자의 어머니 양진과 순자와 요셉의 아내 경희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전면에 선다. 겨우 끼니를 떼우는 정도가 아니라 삶이 안정될 수 있도록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돈을 번다. 이때의 여성들은 전통적인 역할에 갇혀 있지 않다. 어쩌면 아내와 어머니로서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는 강한 일념으로 더욱 더 치열하게 일을 했던 건지도 모른다. 경희는 어머니로서의 삶을 바랬지만 아이를 갖지 못하고 점점 피폐해지는 남편과 순자의 아이들을 돌보며 살아간다. 지식인 여성으로서 하고픈 일과 여성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한 남자의 구애를 밀어낸 경희의 삶은 결국 순자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것이 선택일 수밖에 없었던가 싶은 경희의 삶 또한 고생일 수밖에 없는 여자의 삶, 그 자체이다. 

  하지만 순자의 아주버님이자 경희의 남편 요셉은 다르다. 전통적인 역할인식에 갇혀 가족의 가장으로서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 자책하고 탄식한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제수가 하는 일에 반대한다. 요셉은 생계는 남성 책임이라는 명분에만 치중한 채로 타인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가장으로 군림하며 가정의 모든 결정권을 쥐려 하며 여자들을 바깥으로 굴리며 일하게 했다는 비난을 감수하지 못한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가부장적 사고는 완고하며 변화하지 못한다. 요셉이 가진 신앙에 기대어도 이러한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당시 서구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인으로 모순되고 잘못된 사회에 대한 변화를 강렬히 열망하며 변화에 대한 의지 또한 실행력으로 보여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조국을 위해서, 위대한 이상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라 생각한다. 살아남아 가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셉은 가족이 함께 겪는 힘겨운 현실에서 자의식만을 붙든 채 사회변화에 무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청이 유전을 두려워하는 이들로 인해 순자의 아버지 훈이는 겨우 돈을 주어 양진과 결혼한다. 같은 이유로 순자 역시도 나이가 들어도 혼인을 청하는 이들이 없다. 이때 순자는 우연히 도움을 준 일본을 오가는 생선 중매상 한수를 만나고 임신한다. 하지만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한수의 첩이 되길 거부한다. 평양에서 부산으로 온 이삭은 순자의 하숙집에 머물다 순자 모녀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결핵을 치유한다. 살아남은 이삭은 순자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없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자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여긴다. 그것은 이삭의 희생이자 임신한 순자에겐 구원이 된다. 그렇게 이삭은 자신의 형 요셉이 살고 있는 일본 오사카로 순자를 이끈다. 

  일본에서 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가 태어난다. 자손들은 모두 기독교식 이름을 갖는다. 노아, 모세, 솔로몬. 그러나 단 한번도 이름이 힘이 된 적이 없다. 종교가 그들 삶에 어떤 위로가 되어 주지 못한다. 요셉은 힘겨운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권위를 내세우는 존재가 되어 갔을지언정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 암울한 시대 종교가 삶을 버텨내는 구원이자 타인에 대한 관용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전혀 이뤄지지 못한다. 기독교가 일본인의 의식을 좌우하는 종교가 아니기에 일본인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들을 기대할 수 없다. 순자의 가족이 기독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이삭이 순자와 결혼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용도로 보일 뿐이다. 일본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 해도 더없는 고통의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삭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죽음도 이것을 보여주는 한 요인으로 보인다.

  모자수는 성경의 모세를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탈출하도록 이끈 모자수. 그는 가족들이 일본에서 차별과 모욕을 당하며 살지 않도록 이끌 수 있을까. 그가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들이 겪는 모든 상황 하나하나에 의도가 있다고 할 지 모른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아버지 이삭은 믿었을지 모르나 살아서, 살아가야만 하는 다른 가족들에겐 전달되지 않았는지도…. 모자수는 “인생은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하는 파친코 게임과 같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아간대도 모자수의 삶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삶,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현재 불행이 잔뜩 굴러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좀처럼 불행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의 아이러니란 삶 자체에 있는 건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어떤 일본인은 “운명이라는 말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의 게으른 변명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조작이 이뤄진 파친코 게임에서 선택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운명이란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의 변명이 아니다. 조작을 일궈놓은 이들이 책임지고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일’일 뿐이다. 사람에게 행해지는 경멸과 차별도 조작의 한 맥락이 되지 않을까. 이유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 자체가 경멸과 차별의 이유가 된다.

  노아와 모자수의 삶이 부모와는 같으면서도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순자와 경희와 요셉이 조선인임을 인식하며 살아온 반면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태어나 살고 있지만 각종 제도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경멸어린 시선과 모욕을 견디어야 하는 삶인데 더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가지는 것도 어렵다. 그나마 재력을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파친코이기에 이곳 사업장으로 조선인이 몰린다. 일본은 1952년 이후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들이 열네 살 생일이면 거주 허가를 받아야 하고 3년마다 등록증을 갱신해야 한다고 정했다. 솔로몬은 이 운명에 속해 있다. 일본인은 질서이자 법이라 하겠지만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이 절차를 적용받아야 하는 조선인에게 그것은 조작된 파친코 게임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삶이 결코 공정하게 이뤄질 리 없는 확증 같기만 하다. 결과적으로 노아도 모자수도 솔로몬도 파친코에서 일한다. 그것은 선택으로 불리지만 선택지가 있을 때에 온전히 선택이라는 이름이 빛을 발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와 모자수가 일본에서 ‘자이니치’로서 겪는 차별과 모멸은 그들 삶의 방식과 태도를 결정하게 만든다. 노아는 열심히 공부하며 누구보다 뛰어난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희망을 꿈꾸고 모자수는 자신에게 조롱을 일삼으면 패주는 등 자신을 대하는 방식 그대로 대응한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자 일찌감치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노아도 모자수도 보통 이상의 노력과 열성으로 공부하고 일을 한다. 두 형제의 선택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선택이다. 하지만 죽어라고 교육을 받아 일본인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져도 부자가 되어도 노아와 모자수를 한 인간으로 보거나 존경하는 일 따위는 없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금융권에 취직한 솔로몬 역시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끝내 부당해고 당한다. 있어서는 안되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일본인에게서 기대할 수 없다. 애당초 그럴 의도는 조선인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인은 사람을 ‘조선인’이라는 존재성만으로 그들 입맞에 맞게 취급할 뿐이다.

  ‘자이니치’. 일본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노아와 모자수를 지칭하는 언어다.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일본사회에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인들 구분하여 배제하기 위해 부르는 단어. 차별의 당위성이 마치 단어의 존재에 있는 듯이 ‘자이니치’라는 명명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정신을 파고든다. ‘당신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요?’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익숙해질 때보다 부정당하고 공격당할 때다. 이들을 극단의 상황으로, 하나의 답으로 몰고 가도록 이끈 자이니치라는 단어에는 조선인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인이라 생각하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기에 느끼는 혼란과 억울함이 담겨 있다. 가령 솔로몬은 애인 피비가 일본이 조선인을 국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따질 때, 일본 정부가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화를 낼 때면 일본을 옹호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고 했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를 말하고 사고방식을 익히며 성장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피비에게 일본편에 서서 옹호하더라도 자신이 당하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의하지는 못한다. 오로지 부당함과 이해할 수 없음은 자신의 내부에서만 행해지는 전쟁이 될 뿐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은 단계적 욕구를 가진다고 했다. 각각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충족되어야 하는 것이 생존의 욕구라면 점차 소속과 인정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한다. 자이니치에게는  단계적으로 충족시켜가야 할 인간의 욕구가 박탈된 상태이다. 사회에서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동력을 상실하게 한다.

  노아의 극단적 선택은 소속감과 인정의 욕구를 배제당하고 더 이상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처절함을 보여준다. 노아의 비극적인 선택은 자신의 친부가 한수이며 야쿠자라는 것을 알게 된 충격보다 자신의 정체성으로는 일본에 소속될 수 없다는 좌절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 어떤 재력을 가지고 있다 한들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없는 위치의 조선인 야쿠자의 피가 자신에게 흐른다는 것은 그가 욕망하는 욕구에 대한 완전한 단절로 여겨졌을 것이다. 가족 모두를 외면한 채 잠적한 노아를 십여년의 노력 끝에 순자가 찾아냈을 때, 노아는 자살한다. 제 아내와 아이를 두고 벌인 선택이다. 그것은 가족이 자신을 찾아냈을 때 이미 결심한 것이었다. 일본인으로 살며 가족에게서 철저히 떠난 노아가 가족이 자신을 찾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자신은 일본인이라는 외침이 되는 건가. 노아의 죽음은 충격적이었을지언정 노아에 대한 이해를 더해주진 못했다.

  소설 카테고리를 어디에 놓을지도 약간 고심한다. 소설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계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계 1.5세. 글은 영어로 쓰였고 번역되었다. 번역서이자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니만큼 미국문학이 맞는데 '한국인', 재미교포라는 말은 자꾸 '한국'쪽으로 당기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면 파친코 속 등장인물들처럼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확연히  '한국인'이란 말을 적용하는데 어색함을 느낀다. 이 무슨 편견이고 차별가득한 느낌일까.

   『파친코』를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인에게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재일동포에 대한 인식을 전환할 계기가 없었을 것이다. 강제로 끌려가 되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건만…. 그럼 나는 그들을 재일동포로서 바라보려 한다, 이렇게 말하려니 뭔가 어색하다. 굳이 이런 다짐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내가 뭐라고 그들을 동포로 인정하겠다고 한다는 건지도. 이 생각 자체가 오만이다. 이 나라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행하는 ‘갑질’ 아닌가, 이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노아의 말이 떠오른다. 조선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국적에 신경 쓰지 않고 단지 자기 자신으로 있고 싶다는 그 말이…….

  사상가 성 빅토르 휴는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와 같고 어디든 조국처럼 느끼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세상 어디든 타국처럼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사람이라고 했다. 어쩐지 강한 사람보다도 완성된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노아의 바람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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