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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용서 - 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강동혁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8년 6월
평점 :
세상이 분노가 가득한데
분노와 용서-적개심, 아량, 정의, 마사 C. 누스바움, 2018.
어떤 형태로든 너무나 익숙해지고 일상화되어 버린 단어, 분노. 분노와 동행하는 수많은 단어 중 용서가 붙었다. 이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있을까.
분노 옆에 용서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분노’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된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대상을 향해서는 ‘분노하라’ 외치며 분노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분노할 것을 부추긴다. 그런 시절이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맘껏 분노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일이 힘겨운 세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에 분노는 정의와 어울려 다녔다. 정의가 짝꿍이었기에 용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엄정하게 따져야 할 단어였다. 그 시대가 지났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대상이 사라졌다 할 수 있을까. 여전히 분노와 정의는 짝꿍으로 이어져야 할 말이기에, 용서라는 말이 다가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용서라니. 이 시대 대표적 석학으로 불리는 누스바움의 분노는 어떤 것이기에 용서와 짝을 지웠는가. 누스바움에 의해 재정의된 분노와 용서는 분노를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본다. 그리스신화의 복수의 여신과 지혜의 여신을 빗댄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를 결부시켜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수의 여신이 지혜의 여신에 의해 정의로운 분노의 신 에우메니데스로 변화했다는 이야기의 뼈대를 생각하면 누스바움이 바라보는 분노, 그러하기에 용서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볼 때 그것은 해결되어야 하고 발현되지 않아야 할 감정이 된다. 그렇기에 분노를 극복하는 방안이 필요하고 누스바움은 그것을 용서로 본다. 하지만 역시 누스바움이 정의하는 용서에는 제한이 있다. “용서 안에 도사리고 있는 공격성과 통제, 기쁨의 부재 같은 요소”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 영역, 중간 영역, 정치적 영역에서 분노와 용서가 어떻게 발현되는지를 따져본다. 용서가 거래적‧교환적으로 이뤄질 때 필연적으로 가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키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하는데 도움되지 않는 태도임을 지적한다. 참으로 어렵다. 분노도 용서도 누스바움에 따르면 누스바음이 지적하는 모든 것을 피해서 행한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선사시대의 어느 단계예서는 분노가 가치 있을지 모르는 몇 가지 혜택을 제공해주었겠죠. 심지어 오늘날에도 분노의 유용한 역할은 흔적기관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지향적이고 선한 정의의 체제가 세워지자 분노라는 감정은 대단히 불필요한 감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분노의 비합리성과 파괴성을 얼마든지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누스바움은 분노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듯하다. 얼핏 생각할 때 개인적 차원의 분노로 전제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누스바움은 “분노에는 미덕이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사적 영역에서든 공적 영역에서든 규범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법체계나 사회가 정의로운 체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분노가 아니라 용서에 방점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분노에 미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용서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가 아닌가,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이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분노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비-분노’를 강조하는 누스바움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르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이 말들이 공허하게 여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 분노가 차지하는 중심성은 문화적 규범이 만들어낸 구성물이거나 개인적 소양을 함양한, 혹은 함양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분노에 선천적 뿌리가 있다는 믿음에도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하도록 합시다. 하지만 우리가 타고난 것은 분노하는 성향이지, 행동을 통한 불가피한 분노의 표출은 아닙니다. 우리는 근시에서 건망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성향이나 경향을 교정하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한 부문별한 분노가 횡행하고 있는 지금을 보면 이 말에 수긍이 갈 수밖에 없다. 분노하는 성향은 지속하되, 행동으로의 표출이 아니라는 말이 가지는 그 이상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그럼에도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현실의 상황들을 목격하며 알아가게 된다. 분노도 용서도 인간의 본성에 새겨져 있기에 교정해야 한다는 말을 좋은 쪽으로는 넘어가지만 삐딱하게 보게 되면 이 말에 대한 반발도 차오른다. 그 수정과 교정의 방향이 어떻게 가야하는가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또한 정치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누구나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는 개인적 분노 표출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회적인 형태에서의 분노는 특정 세력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다. 불가피하다는 말에서 그 불가피함의 수준은 또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문다. 분노하고 싶은데 분노할 수 없을 때가, 용서하고 싶은데 용서할 수 없을 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 모든 것은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문제가 되고 대안이 되고 방법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