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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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 just killed a man


빨강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민음사, 2018.


  『빨강 머리 여인』은 오이디푸스 신화와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의 재현이다. 익숙한 이 이야기를 에두르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은 직접적으로 이 책과 이야기를 거론한다. 세상엔 이 신화와 고전만이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을 지배한다. 어느 하나 이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은 자연스럽게 신화와 고전 속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고, 말하고, 토론하고, 연극으로 만든다. 너무나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들을 대면해 식상할 법한데도 저자가 만든 이야기 구조에 금방 빨려든다. 익숙함이 주는 힘인가. 어쨌든 어쩌면 뻔하디 뻔한 신화를 따라가는 이야기가 같은 결말로 갈 것인지, 다르게 갈 것인지, 같다면 그 짜임새는 어떻게 만들어 놓는지가 궁금해진다. 수없이 같은 이야기를 함에도 특정 작가의 책에 더 손이 가는 것은 이처럼 익숙한 이야기임에도 풀어내는 힘에 의해 익숙함을 다르게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터키에서 재현된 이야기는 이스탄불과 왼괴렌을 오간다. 이야기의 중심에 선 젠이 학비를 벌기 위해 우물을 파는 일을 하러 떠난 곳, 그곳이 이스탄불에서 30마일 떨어진 왼괴렌이다. 젠은 기술자 우스타에게 우물파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며 또한 그가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그를 아버지처럼 따른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후 사라져 희미해진 아버지라는 존재를 젠은 우스타에게 느낀다. 마침 왼괴렌에서 만난 유랑 극단의 빨강머리 여인, 젠의 어머니만큼이나 나이 많은 그 여인에게 매혹을 느낀 젠. 젠은 사라진 아버지와 아버지같은 우스타가 있다. 젠이 오이디푸스의 운명이라면 아버지는 누가 될까. 빨강머리 여인이 그것을 알려 주려나.   오이디프스가 부친살해에 관한 이야기이자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페르시아의 고전 『왕서』는 자녀살해에 관한 이야기다. 젠의 운명은 쉬흐랍일까, 뤼스템일까.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반면,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는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다. 

그러나 이 커다란 차이점은 공통점을 더욱더 강조한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랬듯이 쉬흐랍 역시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독자는 만약 쉬흐랍이 자신이 죽이려는 사람이 아버지인 것을 모르면 무고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죽음의 순간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무엇이든.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이야기라 말하기도 하고 ‘운명에 맞선’ 이야기라 하기도 한다. 이 상반된 ‘운명’에 관한 해석이 무엇이든 개개인에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 마치 가벼웁게, 재미삼아 본 점괘에 맞추어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처럼. 왜 거듭 불온한 것에 대해 끌리는지, 자기암시처럼 계속 그것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까닭이 정말 운명이라서일까. 자기충족적 예언. 예언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 어떤 운명적 힘에 기대고픈 마음의 발현인 걸까.

  새삼 부친살해가 서양에선 다양한 형태의 예술로 형상화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국을 생각하니 예술은 가물가물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부친살해에 관한 기사만 떠오른다. 최근에도 이런 기사는 계속되었다. 부친살해를 성장이라는 상징과 은유로 얘기한 많은 예술작품이 무색하게도 현실에선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성장’할 수는 없다. 가정폭력범 아버지라면 모를까. 


이성을 잃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와 아들을 죽인 뤼스템이 무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 관객들은 소포클레스의 연극을 관람할 때 오래전에 마흐무트 우스타가 나에게 말했듯이 오이디푸스의 죄악은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라 신이 그를 위해 정한 운명에서 도망치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식으로 해석하면 뤼스템의 죄악 역시 아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룻밤의 정사로 아들이 생겼고, 이 아이들에게 아버지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다. Mama, just killed a man / Put a gun against his head이라는 가사가 부친살해로 인식되어 금지시켰다, 전쟁에 징집된 소년병이 원치 않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이 군사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였다고 인식되어 왔는데 어떤 기사에는 보헤미아가 공산권 국가의 영토이므로 ‘보헤미안은 안돼!’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것이 정확한 이유이든 이 노래가 1974년부터 1989년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곡’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금지곡이라는 명명 자체가 주는 강력한 메시지. 국가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된 아버지였는가!


“아버지가 우릴 떠났어!”

“그렇다면 너한테 아버지 노릇을 하지 않은 거잖아. 너도 다른 아버지를 찾아. 이 나라에 아버지는 많으니까. 국가라는 아버지, 신이라는 아버지, 장군 아버지, 마피아 아버지……여기서는 아무도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니까…….”


  소설에서 이 단락을 보는 순간 나는 철저히 아버지를 죽여야만 성장하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떠난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얼핏 했다. 빨강머리의 여인이 선택한 빨강머리처럼 의도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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